안세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내 맘에 머문 커피향》(이든북)은 일상의 향기 속에 역사와 신앙, 철학적 사유를 함께 녹여낸 작품집이다.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시선은 단순한 서정을 넘어 삶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이 시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역사의식이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알제리의 눈물’은 식민의 기억을 공유한 알제리와 조선을 병치하며 자유에 대한 갈망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어지는 작품들 역시 개인적 감상에 머물지 않고, 시대와 세계를 향한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알제리*
어디쯤 있을까
아프리카 서북단
산에 오르면
바다 건너
저 멀리
별빛에 보일까
천년 세월
자유의 그리움
을미도*
경술도*
바위에 새긴
아픔인데
까뮈의 외침
알제리의 횃불
검으나 환한 얼굴
히잡 던져
자유 맛보네.
-‘알제리의 눈물’ 전문
프란츠 파농. <알제리 혁명 5년> / 을미-1895년 을미사변, 경술- 1910년 경술국치
그중에서도 ‘귀츨라프의 꿈’은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을 형성한다. 프로이센 출신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1803~1851)는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서품된 뒤 아시아 선교에 나선 인물로, 1832년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를 타고 조선 서해안 원산도에 약 20일간 머물렀다. 개신교 서양 선교사 가운데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사례로 기록된다. 그는 이곳에서 주민들과 접촉하며 성경과 감자 등 서양 문물을 전하고, 한글의 가치에도 주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 바라보고
복음을 전하려
조선에 왔노니
조선국 왕에게
하늘 뜻을 전하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를
조선에 와
성경책을 전하고
문물을 전하기 위해
외연도 녹도 불모도
고대도 원산도 간월도
창리에도 오천성에도
보령 섬 모두를 향한
귀츨라프 선교 열정이
보령을 넘어
대한의 땅으로
모든 나라를 향하는
복음 되기를 바라노라.
귀츨라프의 주기도문
서구에 한글을 소개한
한글 소개 논문은
한글의 위대성과
한민족의 우수한
문화 자랑이어라.
푸른 바다 헤치고
제주도를 바라보며
기도하던 귀츨라프
복음의 기지되어
세계 복음을 전하는
중심 되게 하소서.
-‘귀츨라프의 꿈’ 전문
*1816년 9월 3일 바질 홀 선장이 보령 외연도를 탐사하고 허튼섬이라 이름 짓고는 마량진에 가서 성경을 전래하였는데, 그의 항해기를 카를 귀츨라프가 읽고 1832년 7월 21일 조선 외연도에 온 최초의 독일 선교사로 외연도, 녹도, 불모도, 고대도, 원산도, 간월도, 창리, 오천성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안세환 시인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귀츨라프의 선교 여정을 시적 상상력으로 확장한다. 외연도와 녹도, 고대도 등 보령 일대 섬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적 서사는 단순한 종교적 고백을 넘어 지역사와 세계사를 잇는 통로로 기능한다. 시 속에서 귀츨라프는 한 시대를 건너온 인물이 아니라, 오늘의 독자에게 말을 거는 현재적 존재로 다시 살아난다.
봄바람에 꽃피니 북풍의 시샘인가
이 땅에 전쟁이 웬 말이냐
강경의 병촌 땅 순박한 백성들
보이는 대로 끌려가니
울음소리 하늘도 울고 땅도 흔들리고
아녀자가 39명 남정네가 27명이라
66명이 일순간에 한 줌 재가 되어
동족상잔의 아픔 병촌이 막바지라
복음으로 이룬 땅 핏빛으로 물들여
스데반 뒤이은 순교 역사
마음에 새겨 영원히 기억할진저.
강경의 복음 역사
온 세상에 알려질지라
장구 치고 꽹과리 울려라
예수 대장 납시니
모두들 길을 비켜라.
어둠 세력 물러가고
대한의 날 밝았도다.
삼천리 금수강산에
검은 구름 걷혔어라.
복음의 위대함이어!
영원히 빛나리라!
-‘병촌교회 66인 순교자 애도시’ 부분
‘병촌교회 66인 순교자 애도시’는 형식상 종교시의 범주에 놓이지만, 그 결은 단순한 신앙 고백을 넘어선다. 이 작품은 한 지역 교회의 비극을 넘어, 조선 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와 그 속에서 피 흘린 민중의 삶을 함께 끌어안는다. 시의 초반부가 암울한 시대 인식으로 문을 열고, 귀츨라프의 전래와 복음의 유입을 거쳐, 결국 병촌의 비극적 순교로 이어지는 흐름은 한 편의 압축된 역사 서사처럼 읽힌다.
눈에 띄는 것은 ‘빛’과 ‘불’의 이미지다. 달빛, 별빛으로 시작된 희미한 빛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번져 나가고, 마침내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그 불꽃은 단순한 신앙의 은유에 머물지 않는다. 왜곡된 역사와 전쟁, 그리고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짓밟히고 꺼져가는 장면까지 포괄하며, 신앙과 현실의 긴장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시는 종교적 찬가가 아니라, 피로 얼룩진 역사의 기록으로 깊어진다.
또한 병촌교회 66인의 희생을 구체적인 숫자와 장면으로 환기시키는 방식은 독자의 감각을 강하게 자극한다. ‘한 줌 재가 되어’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역사적 참상을 환기시키는 언어다. 이때 시는 애도의 정서를 넘어 기억의 의무를 환기한다. 순교는 신앙의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 땅이 겪어낸 비극의 한 단면으로 자리 잡는다.
그럼에도 이 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불길이 이산 저산으로 옮겨붙듯, 신앙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서사로 나아간다.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생명, 짓밟힌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복음의 이미지가 시 전체를 떠받친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단순한 슬픔을 넘어, 어떤 결단의 감정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마음 한켠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엇인가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이 신앙이든, 역사에 대한 자각이든, 혹은 인간 존엄에 대한 다짐이든 간에, 독자는 더 이상 무심한 자리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치 오래 꺼지지 않는 불씨를 건네받은 듯, 가슴 속 어딘가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앞날이 보이지 않아도
내 앞이 캄캄한 것 같아도
사방으로 나 있는 길
한발만 내 딛으면 길이 되는데
첫발을 떼지 못하는 것은
길이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
이제는 보이지 않는 길을 보아야 한다.
저 건너편에서 오라고 외치는
침묵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자
미래를 걷는 자이리니
-‘미래를 걷는 자’ 전문
이와 함께 ‘미래를 걷는 자’, ‘침묵의 언어’ ‘하나만 알아도’ ‘너른 바다’ 등의 작품에서는 삶을 향한 태도와 방향성에 대한 성찰이 이어진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길을 보아야 한다”는 구절은 다소 직설적이지만,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함축한다. 안세환의 시는 난해한 상징보다 이해 가능한 언어를 통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힌다.
인생길 헤매는 자
얼마나 많은 길이
바다에 있는지
너른 바다 보아야 하리
높은 뜻 품은 자
해야 할 일 얼마나 많은지
직접 보아야 하리
이별의 눈물 흐를 때
내 마음보다도 더 큰
아픔 잠겨 있는 곳
넓은 바다 보아야 하리
마음 울적할 때
얼마나 깊고 넓은지
가서 보아야 하리
자연소리 들으려면
바다에서 나는 소리
너른 바다 보아야 하리
수많은 생물이 사는 곳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바닷속에 들어가야 하리
귀 기울여 들어야 하리
-‘너른 바다’ 전문
‘너른 바다’에서 바다는 위로이자 성찰의 장소로 확장된다. “너른 바다 보아야 하리”라는 반복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좁아진 시야를 넘어 삶을 다시 보라는 요청이다. 이때 자연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내 맘에 커피향이
은은하게 흐른다.
짙은 커피 한 모금
입에 물고 음미하며
커피향에 빠져든다.
그리곤
사유의 나라에서
철부지처럼 뛰논다.
유목의 언덕에서
탈주로 재주 넘는다.
사유의 나라에는
칸트도 헤겔도
니체도 후설도
하이데거와
그의 후학들도
노닐고 있다.
존재를 찾아
헤매는 어둠 속에서
커피향은 언제나
자기 존재를 뽐낸다.
내가 존재하는 동안
언제나 내 곁에서
짙은 인문의 향을
풍기고 있다.
-‘내 맘에 머문 커피향’ 전문
표제작 ‘내 맘에 머문 커피향’은 이 시집의 정서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커피 한 잔을 매개로 칸트와 헤겔, 니체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철학의 세계가 펼쳐진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이 철학적 탐구로 확장되는 지점에서, 시인은 삶과 사유가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매개(도구)가 커피다. 커피는 안 시인에게 도깨비 방망이일지도 모른다.

사진=조선일보DB
전반적으로 이 시집은 메시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는 특징을 지닌다. 일부 작품에서는 교훈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는 시인이 목회자이자 충남문인회 회장, 충남기독교역사문화해설자회 회장 등의 위치를 감안하면 불가피한 일일지 모른다.
결국 《내 맘에 머문 커피 향》은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사유와 기억의 기록이다. 자연과 역사, 신앙과 철학이 어우러진 이 시집은 독자에게 낯선 세계를 제시하기보다, 익숙한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 음미의 끝에서 독자는 조용히 묻게 된다.
지금 나는, 어떤 향기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가,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