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루살렘 성묘성당에서 열린 성화(聖火, Holy Fire) 의식에서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예수의 부활을 기리는 모습. 수천 명이 운집해 불빛을 나누는 장면이 특징이다. 이 사진은 과거에 촬영된 자료사진으로, 올해는 전쟁 여파로 대규모 참여가 제한된 채 의식이 진행됐다. 사진=UA.news 캡처
이스라엘과 이란 간 무력 충돌의 파장이 예루살렘 구시가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기독교 최대 성지(聖地)인 성묘성당이 장기간 봉쇄(封鎖)된 채, 인류 신앙사의 상징적 시간인 부활절(復活節)을 맞았다. 문은 열렸으되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이른바 ‘열린 봉쇄’ 상태다.
이스라엘 당국은 지난 2월 말 이후 안보를 이유로 성묘성당을 포함한 구시가지 일대를 전면 통제(統制)해 왔다. 미사일 위협이 고조되면서 유대교·이슬람교 성지들 역시 동일한 규제선 안에 묶였다. 종교의 공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공간을 채워야 할 사람들은 배제됐다.
성묘성당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고 묻혔다가 부활한 장소로 전해지는 곳이다. 17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쟁과 분쟁 속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이 성지가, 현대의 군사적 긴장 속에서 사실상 폐쇄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현지 교계에서는 “총성이 성가(聖歌)를 밀어낸 순간”이라는 표현까지 나온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비극
균열은 성주간(聖週間) 초입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스라엘 경찰은 가톨릭 최고위 성직자의 성묘성당 출입마저 제지했다. 수 세기 이어져 온 전례(典禮)의 흐름이 군화(軍靴)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다.
이 조치는 곧바로 국제적 반발을 불러왔다. 유럽 각국과 교계 인사들은 종교 자유 훼손을 강하게 문제 삼았고, 외교적 압박이 뒤따랐다. 결국 이스라엘 정부는 하루 만에 일부 완화(緩和)로 돌아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배의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정이었을 뿐, 실질적 개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올해 성묘성당의 부활절은 사실상 ‘비공개 의식’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성직자 중심의 극소수 인원만 성당 내부에 들어갈 수 있고, 수천 명에 달하는 순례객과 신자들은 성지 밖에 머물도록 통제되고 있다.
부활절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성화(聖火) 의식 역시 축소된 형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본래라면 인파로 가득 차야 할 성당 내부는 정적에 가까운 분위기 속에서 의식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례는 유지되지만 공동체의 참여는 크게 제한되는 양상이다.
이는 코로나19 시기에도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감염병의 위협이 아닌 군사적 긴장이 신앙의 집합을 가로막았다는 점에서, 이번 상황은 또 다른 차원의 단절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바티칸의 경고… “폭력은 평화를 낳지 않는다”
로마 교황청 역시 침묵하지 않았다. 레오 14세 교황은 2026년 부활절을 앞두고 전쟁 중단과 평화를 촉구하는 강도 높은 메시지를 잇따라 내놓았다. 외신에 따르면 교황은 성주간 전례와 강론을 통해 현재 진행 중인 중동 전쟁을 직접 겨냥하며, “피로 물든 손을 가진 이들의 기도를 하느님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서 종교를 전쟁의 명분으로 사용하는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 특히 어린이와 민간인의 고통을 언급하며 “죽음과 파괴 위에 세워진 어떤 질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를 넘어 국제 정치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으로 해석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강론에서도 유사한 메시지가 반복됐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행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평화의 왕은 칼이 아니라 희생으로 세상을 구했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실상 국제사회 전체를 향한 도덕적 경고에 가까웠다.
정순택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부활절 메시지…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생명을 선택하라”
2026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겸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가 부활의 의미를 ‘생명을 살리는 선택’으로 규정하며, 전쟁과 갈등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정 대주교는 부활 메시지에서 “전쟁과 긴장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기억하며, 불안 속에 살아가는 이들, 그리고 양심에 따라 살아가려는 모든 이에게도 주님의 위로와 희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정 대주교는 복음 말씀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를 인용하며 “빈 무덤은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희망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며 “이 생명은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을 향하며, 우리는 그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고 밝혔다.
이어 “가난한 이들의 상처 입은 얼굴과 무고한 이들의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통을 보게 된다”는 교황 레오 14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고통받는 모든 이를 기억하며 기도하고 연대해야 하며, 특별히 전쟁과 폭력 속에서 생명의 위협을 겪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울러 정 대주교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인간 존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모든 기술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고 생명을 살리는 데 봉사해야 한다”며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자리에서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길을 선택할 때, 부활하신 주님과 더욱 깊이 함께하게 된다”고 역설했다.
정 대주교는 메시지의 핵심인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를 언급하며, ‘거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자리임을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이 자리에서 각자의 양심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택으로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도록 초대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한다”면서 “다가오는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는 우리에게 이 부활의 기쁨을 새롭게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정 대주교는 끝으로 “2026년 부활 시기를 맞아, 참된 생명의 희망을 마음에 새기고 일상 안에서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빈다”며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자”고 초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