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7년 10월 20일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이른바 '숙의민주주의' 방식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건설재개 결정을 내렸다.
원전 신고리 5‧6호기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주장으로 구성된, 이른바 시민들로 구성된 공론화위원회였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시민의 해법으로 사회갈등 출구… 숙의민주주의 큰걸음”(한겨레), “ ‘숙의민주주의’ 가능성 확인한 공론조사 실험”(한국일보)이라며 환영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국민은 ‘숙의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낯설다.
‘숙의민주주의(熟議民主主義)’란 ‘deliberative democracy’의 번역어이다. ‘토의민주주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심의민주주의’ 또는 ‘협의민주주의’라고도 하는데 이는 ‘discursive democracy’를 번역한 말이다. 제임스 피시킨, 위르겐 하버마스, 존 롤스, 조슈아 코헨, 버나드 마넹, 존 앨스터 등이 주장해 왔다.
숙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인 제임스 피시킨이다. 그는 1991년에 출간한 《민주주의와 토의(Democracy and Deliberation)》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주장했다.
<임의의 방식을 사용하여 한 국가 혹은 한 지역사회에서 한 그룹의 사람들을 뽑고, 이 그룹에 든 사람들은 하나의 의제에 대해 토론과 변론을 반복한다. 이 그룹의 사람들은 통계적 의미에서 해당 국가 혹은 해당 지역사회의 전체 인구를 완벽하게 대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토론과 변론은 바로 전국 혹은 전체 지역사회 사람의 토론과 변론과 같고,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익, 필요, 요구, 의견 등은 모두 대표를 얻을 수 있다. 일정한 시간 동안의 토론과 변론을 거친 다음 이 그룹의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정책인들에 대한 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왕샤오광, 《민주사강(民主四講)》 중에서)
피시킨 등은 숙의민주주의가 폭넓게 공유된 합의가 출현할 수 있는 더 큰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유대를 증진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비판자들은 오히려 숙의민주주의가 너무 자유주의적이며, 수사(修辭)에 능숙한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국가와 사회 간의 갈등을 조장한다고 비판한다. ‘숙의민주주의’라는 말을 우리는 생소해 하지만, 이를 주장하는 이들은 고대 그리스나 스튜어트 밀이나 알렉시스 드 토크빌 같은 초기 민주주의 사상가들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숙의민주주의는 영국, 호주, 캐나다, 인도 등의 일부 지역에서 실험해 왔다. 이들 나라들이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이 눈에 띤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서도 이 숙의민주주의에 관심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민주사강》의 저자인 중국의 왕샤오광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중국 내에서 ‘신좌파(新左派) 민족주의’ 성향의 대표적 학자로 꼽히는 그는 《민주사강》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른바 ‘민주주의’는 모두 간판만 민주주의다. 즉, 그것들은 변질된 민주주의이고, 거세된 민주주의이며, 또 소독된 민주주의이고, 기능을 제거한 민주주의이다. ‘자유’ ‘헌정’ ‘대의’ ‘선거’ ‘다원’ 등을 거치면서 하나하나 거세하고 나니 민주주의는 이미 제어하기 어려운 야생마에서 온순한 작은 양으로 바뀌었고, 빈민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가장 실현하고 싶어 하던 목표를 실현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자신들이 가장 실현하고 싶은 이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왕샤오강은 이런 식으로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후, 그에 대한 대안 중 하나로 ‘숙의민주주의’를 열심히 소개한다. ‘숙의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의 ‘보완재(補完財)’가 아니라 ‘대체재(代替財)’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판웨이 베이징대 교수의 주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선거는 없지만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시민의 요구에 부응하며, 법의 구속을 받는 정부에 의해 정책이 만들어지는 체제를 주장한다. 그는 이를 ‘첨단기술의 뒷받침을 받는 협의형 독재’라고 표현한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팡닝은 좀 더 노골적으로 공산당 일당독재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숙의민주주의’를 내세운다.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를 “고객이 요리사는 선택할 수 있으나 메뉴는 이미 지정된 레스토랑”에 비유하면서 “중국의 민주주의는 항상 공산당이라는 요리사만 있지만, 고객이 메뉴판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책’요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팡닝은 “경쟁선거는 권력구조의 일부가 아닌 농촌까지로 제한되어야 한다”면서도 “국민이 참여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보듯 판웨이나 왕샤오강, 팡닝 등의 관심은 ‘선거보다는 법치와 시민참여에 기반한 모델’이다. 이들에게 이르러 ‘숙의민주주의’는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의 ‘대체재’로 둔갑하고 있다. 중국 정치학자 허바오강은 이렇게 말한다.
“숙의민주주의 모델은 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경쟁이나 서구에서 행해지는 대의민주주의의 전통적 대의기구가 없어도 어떻게 정부가 민주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 모델을 통해 정치적 평등과 심의라는 두 가지 근본적 가치가 동시에 실현된다.”
중국에서는 실제로 저장성 원링시 쩌궈진에서 ‘공론형 여론조사’에 기초한 숙의민주주의를 실험해 본 적이 있다.
대한민국은 단 한번도 자유선거를 실시해 본 적이 없는 중국과는 다른 나라다. 지난 70년간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고, 총선이나 지방선거를 통해 집권여당을 혼내주며, 대통령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체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나라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 평가에서 프랑스나 일본보다도 민주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나라다.
공교롭게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 중에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고, 중국이나 좌파이념에 대해 친화적인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혹시 앞에서 소개한 중국학자들처럼, ‘숙의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선거에 의한 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해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숙의민주주의’에서는? 잘못된 결정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참여’라는 알량한 만족감을 충족시키는 대신, 사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일까?
새삼 ‘숙의민주주의’라는 생소한 제도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