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몽골에서 왔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은 칭기즈칸 얘기부터 꺼내며 아는 척하다가는 몽골이 중국의 한 지방이냐 아니면 러시아의 한 연방이냐고 묻는다. 몽골에선 차 대신 말 타고 다니느냐, 물이 없다는데 목욕은 하느냐 하는 질문은 그래도 덜 기분 나쁜 축에 속한다. 내가 중국도 러시아도 아닌 「몽골」에서 왔다고 말할 때는 당연히 몽골이 독립 국가임을 뜻하는 것이다. 몽골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몽골어를 쓰는 몽골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다.
하지만 러시아 다음으로 일찍 공산화된 몽골에서 태어난 나는 러시아 문자를 몽골 문자보다 먼저 배웠고 1980년대 말,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 가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5년 후 귀국했을 때 몽골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북한 대사관은 철수했고, 한국 대사관이 들어와 있었다. 거기서 통역 일을 하다가 이번엔 한국으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채 10년이 못되는 기간 동안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그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몽골이란 나라의 국민인 덕에, 나는 북한과 남한을 오가면서 한반도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 지금의 몽골을 모르듯이 몽골에서도 한국은 낯선 나라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비로소 북한 밑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지만, 우리로선 알 기회조차 차단당한 일개 자본주의 국가일 뿐이었다. 북한 유학생으로 머무는 동안은 그곳 주민들과 똑같이 한국에 대해 배웠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모든 것이 金日成(김일성)이란 이름으로 통해야만 하는 북한의 사회 체제는 답답하기만 했다. 생김새는 나와 똑같았지만 속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의심도 많은 사람들이었다. 주체사상을 형상화한다는 건축학을 공부하며, 나 역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5년 동안 조용히 지내다 돌아왔다. 민주화 혁명이 휩쓸고 간 고국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지만, 고향의 식구들은 나더러 많이 변했다고 하였다.
몽골 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던 1996년, 통역 관계로 2주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자본주의 국가, 한국의 모습은 내 마음을 대번에 사로잡았다.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깜깜한 밤의 나라에서 온 나는 눈부신 야경, 현대적인 건축물, 자동차의 물결 속을 꿈꾸듯 헤매고 다녔다.
1997년 한국이 IMF를 맞이하면서, 파격적으로 값이 내린 한국 상품들이 몽골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동차와 의류, 식품류, 특히 라면이 인기를 끌면서 코리아란 이름이 몽골인들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도로 건설, 건축 분야에서도 한국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나는 꼭 다시 한국에 가고 싶었고, 그동안 자본주의 나라의 사치로만 배웠던 현대 건축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다행히 기회가 주어졌고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주량은 소주 10병, 맥주 한 박스
한참 앞선 한국의 경제적 환경에 적응하기가 좀 힘들었지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적응은 생각보다 쉬웠다.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은 그들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나를 거부감 없이 대해 주었다. 누군가 『몽골 사람이 우리 조상이지요』 하고 말했을 때는 정말 한 핏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명절 때가 되면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다. 몽골의 음력 설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선물을 들고 일가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세배하고 술과 음식을 대접받는 풍습이 있다. 명절 때면 家計(가계)에 큰 구멍이 날 정도로 씀씀이가 크고, 나담축제(칭기즈칸 시대부터 이어져온 민속 축제. 1921년 인민혁명 때부터 7월11일에 열린다) 등 한 번 축제가 열리면 하염없이 놀고 즐기느라 일터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후유증이 오래 간다는 점도 비슷하다.
명절 때 열리는 민속 씨름 대회를 볼 때면 몽골 씨름을 대하듯 반갑다. 다만 기술적인 면이 중요한 한국 씨름에 비해 몽골의 씨름은 특별한 기술은 없고 강한 신체와 힘이 관건이다.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누가 강한지 한판 겨루는 것은 우리 유목 민족의 유구한 전통이다. 레슬링, 권투, 활쏘기에 능한 한국인들의 모습도 우리와 닮아서 반가웠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말과 관련된 문화가 많이 비슷해서 놀랐다. 「가라말」(검은말의 제주방언)과 몽골어 「하르말」, 「조랑말」과 몽골어 「조로말」, 「녹대」(재갈의 제주방언)와 몽골어 「노흐트」 등 유사한 단어들도 많았다.
존대말 익히기가 어렵다
한국어는 몽골어와 語順(어순)이 같고 문법도 비슷한 점이 많아 쉽게 배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배운 말 그대로 남한에서 사용하기에는 단어나 억양 면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과 女學友(여학우)에게 「동무」라고 했다가 난처해진 적도 있었다. 남한과 북한의 격차가 언어에 있어서도 심각하게 벌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어를 배우는 데 제일 어려운 부분은 역시 호칭과 존대말이다. 몽골에서 2인칭은 영어의 「유(you)」와 마찬가지로 「타」 라고 통칭하면 되는데, 이곳에선 누군가를 부르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아서 아예 부르는 것을 포기할 때가 많다. 몽골어는 존대말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어의 복잡한 존대말을 익히느라 머리가 아프다. 한국인들은 약간의 상하 관계에도 너무 격식을 따진다는 생각이 든다. 교수, 학생 간의 의사소통도 너무 어렵고 딱딱한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적응하기 쉬웠던 부분은 飮酒歌舞(음주가무)를 즐기는 문화였다. 신입생 환영회 날은 통과의례로 소주 한 사발을 마셔야 했는데, 내가 단숨에 「원샷」 하자 다들 놀라면서도 아주 반가워했다. 나에게 소주 정도는 음료수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에서도 벌주나 폭탄주(바이락이라는 馬乳酒에 알콜주를 타 마시는 관습이 있음) 문화가 보편적이며, 소주 열 병, 맥주 한 박스 정도의 주량은 고향에선 보통 수준이다.
나는 『언제 술 한번 먹자』 라는 인사를 제일 좋아했고, 캠퍼스에서 소위 「주당」으로 찍혔다. 술 마시면 시끄러워지고 엉겨붙어 싸우고 평소엔 못하던 소리도 나오고 하는 모습은 여기나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술 마시면 절로 노래가 나오는 것까지도 비슷한데, 한국에서는 「노래방」 에서 노래한다는 점이 처음엔 좀 낯설었다. 몽골에선 누구나 잘 아는 곡을 골라서 한데 어우러져 노래를 부르는데, 여기선 남이 듣거나 말거나 혼자 노래하고 또 억지로 시켜놓고는 딴 짓 하는 사람들이 많아 당황스러웠다. 한 번은 노래를 시켜놓고 하나 둘 나가는 바람에 노래방 안에 혼자 남아 노래한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노래를 좋아하는 기질만은 통해서 좋았다.
자존심 세고 권위를 너무 앞세워
그렇게 친해진 듯한 사람들이 아침이 되면 다시 멀게 느껴지곤 했다. 그럴 때면 북한에서 본 사람들의 모습과 영락없이 같았다. 맨 정신으로는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모습, 앞에선 웃으며 친절하게 얘기해도 돌아서면 곁눈질하며 딴 얘기하는 모습들을 보며 2년 동안 많이 외롭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 예민해서 말 한 마디도 조심해야 했다. 말 실수 같은 사소한 문제로 싸우는 것까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술 마시고 한 번 붙어도 다음날 「실수했다」 하고 툭툭 털면 그만인 몽골 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한 번 사이가 틀어지면 오래 가는 한국 사람들이 속좁게 보일 때도 있다. 제일 이해 못할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한국의 정치 문화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지만, 한 번씩 뉴스를 보면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국가적으로 바쁜 시기이고 커다란 할 일들이 많을 텐데, 옷로비니 명예훼손이니 하는 문제들만 가지고 몇달 동안 싸우는 모습, 또 몇달 동안 그 모습만 보여주는 뉴스들도 이해가 안 간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일에 있어서도 너무 조심스럽다. 「사랑의 스튜디오」 같은 TV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 제일 낯설었던 것은 「미팅」 이라는 문화였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신상명세부터 확인하고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금세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몽골에선 미팅이나 선이라는 게 없다. 자신이 속해 있는 직장이나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맘에 들면 데이트를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마음에 들면 직접 가서 마음을 얘기하지, 왜 중간에 낀 사람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조르는지 모르겠다. 남자들이 너무 숫기가 없고 소심하다고 느꼈다.
한국 남자들은 자존심이 너무 세고 권위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게 아닌가 싶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장님, 회장님 아니면 선생님이다. 사장이라고 소개받은 사람이 알고보니 구멍가게 주인인 경우도 있었다. 벼룩시장 같은 신문을 보면 사람 구하는 광고가 넘쳐나는데 지하철 역엔 일자리를 잃고 누워 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게 실업자가 많으면 굳이 외국 노동자들을 데려다 일 시킬 필요도 없을 텐데, 이곳 사람들은 너무 편한 일, 으스대는 일만 하려는 것 같다. 다니는 직장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 탓이라고는 하지만, 하찮은 일이라도 일을 하는 것이 길거리에 눕는 것보다는 자존심이 서는 일이 아닐까. 자존심 세기로는 우리 몽골인도 만만치 않은데, 그런 몽골인들이 1만 명도 넘게 한국으로 건너와 막노동도 마다 않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일을 한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자존심은 쓸 데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들은 자존심이 없는가?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다. 나는 한국의 TV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인데, 한국 여자에 대한 첫인상도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빼어난 미모에 패션감각과 화장도 세련되고 사회적 능력도 갖춘 여자들이 많아 놀랐다. 그런 여자들이 싫다는 남자를 죽도록 따라다니고 구애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물론 실상은 그렇게 다 갖춘 여자도 드물 뿐더러 여자들 대부분은 수동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쨌든 한국 여성들은 자존심이 없는 게 사실인 것 같다. 오직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시간과 돈을 들여 꾸미고,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혼하면 사회 생활도 그만두고, 남편에게 맞아가면서도 혼자 살 능력이 없어 그냥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쩌면 사회주의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몽골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여성이 결혼과 상관없이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은 상식이며, 남자가 여자를 때리며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술 마시고 소리만 큰 남자들보다 오히려 꼼꼼한 여성 인력을 기업에서 더 선호하는 추세다. 몽골의 결혼 문화도 서구적인 편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으면 법적인 절차가 없이도 자연스럽게 함께 살고, 문제가 생기면 한 사람이 집을 나감으로써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과 살기 위해서 따져봐야 할 것, 거쳐야 할 것이 왜 그리도 많고 복잡한지 모르겠다.
이제는 웬만한 한국 음식은 다 좋아하지만, 한국 사람들과 밥을 먹는 일은 아직도 고역이다. 끊임없이 음식을 독촉하고, 혀가 델 만큼 펄펄 끓는 음식을 쫓기듯이 퍼넣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다들 식사를 마쳤는데 혼자 밥 먹기가 미안해, 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식사가 끝나면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 물고 한두 시간 노닥거리기가 일쑤다. 그럴 때면 시간이 아까운 생각에 혼자 슬그머니 빠져나와 연구실로 돌아간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는 경쟁이 치열한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부지런히 일을 해치우는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발전된 한국 사회를 만든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몽골 민족에게는 없는 부지런함과 신속함이 부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다만, 백화점과 다리가 무너지고 수련원과 호프집 화재가 잇따르는 한국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게 있다면, 건축 분야만은 경쟁 사회의 논리에서 예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남한에 와서 배운 현대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해체주의니 하는 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기본에 충실한 사회주의 시절의 건축학보다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머리 좋은 몽골인보다 더 뛰어난 한국인
또한, 한국 도시의 건축물들은 주변 환경과 자연물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無(무)계획적으로 마구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들이 문제라고 본다. 처음엔 눈이 부셨던 고층 건물들과 화려한 야경이 요즘은 좀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고향의 칠흑 같은 밤과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들이 그립기도 하다.
몽골 민족은 자신들을 자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하늘과 땅, 나무, 꽃 하나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일종의 종교적 경건함을 가지고 자연과 交感(교감)한다. 말 안장을 베개로 초원의 가축들 사이에 어우러져 잠들던 유목민 기질이 남아서, 지금도 휴가 때면 시골로 가서 말타고 사냥하며 자연과 하나 되어 지낸다. 집 하나를 지어도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곧 몽골에 돌아가면 설계도 CAD화 작업 등 건축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지만, 현대화라는 것이 지금의 몽골을 뜯어 고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산을 깎고 기존의 건물을 헐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연과 문화 유산을 그대로 놔두고, 거기에 어울리는 건축을 해나갈 생각이다. 나는 백두에서 한라까지 두루 구경하면서, 사계절이 뚜렷하고 百花爛漫(백화난만)한 한국의 자연은 정말 축복이라고 느꼈다. 한국인들도 틈만 나면 자연의 품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느끼는 것은 자연과 겸손하게 어울리는 자세가 아니라 그저 흥청망청 놀면서 자연을 소모하고 자연에 군림하는 모습들이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자연 속에 살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고 진실로 감사할 줄 알게 된다면, 집 하나를 짓는데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인이 소심하고 조급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이 한국인을 말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범하고 여유만만한 몽골 민족이 오늘날, 한국에 비해 얼마나 뒤처져 있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그 옛날 고려를 손쉽게 지배했던 몽골 민족이 오늘날 한국에 와서 막노동을 하고, 불법 체류 문제로 입국 거부까지 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는 몽골인이 어느 민족 못지 않게 머리 좋은 민족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여기 와서는 한국인들의 머리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내용을 하루 이틀 만에 마스터해서 시험을 치르는 건 보통이고, 컴퓨터 게임을 해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외국에서 새 컴퓨터 게임이 出市(출시)되면 한국인이 먼저 적응한다고 들었지만, 나이 어린 학생들이 스타크래프트 같은 쉽지 않은 게임에서 치밀한 전략을 짜고 지휘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지독한 자존심은 공통점
한국인은 민족적 자존심에 있어서도 우리 몽골인 못지 않은 것 같다. 역사적으로 외침과 지배를 많이 받았다는 점이 비슷하고, 따라서 건드리면 안되는 예민한 부분들이 있다는 점도 닮았다. 2백년 넘게 중국으로부터 지배당했던 몽골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한국인의 反日(반일) 감정과 비교될 만하고, 수난의 역사를 극복하고 독립 국가로 태어났다는 긍지도 서로 통한다. 몽골 민족의 지독한 자존심은 강대국 중국을 만만하게 볼 뿐 아니라, 몽골의 국제적 위상이나 1인당 GNP 4백 달러의 경제적 현실까지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선진국 일본을 우습게 보는 태도와도 비슷한 데가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은 그럴 만도 하지만, 몽골은 그럴 입장이 전혀 못된다. 한국에 온 몽골 노동자들이 술 마시면 사고도 많이 치고 태만한 편이라 고용하기 꺼리는 국민 중 하나라고 들었다.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를 벗어난 지 얼마 안된데다, 인구 문제, 지정학적 여건 등이 원인이라고도 하지만, 놀기 좋아하고 잘 뭉치지 못하는 유목민의 습성이야말로 몽골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몽골이 한국이란 나라를 모범적인 지표로 삼아 배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적은 인구, 단합되기 힘든 유목민 기질, 지도자의 리더십 부족 등 한계가 많지만, 몽골인들의 높은 교육열, 상업적 기질,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했던 기마 민족의 호방한 피가 아직 흐르고 있다는 것을 희망으로 삼고 싶다. 거기에 한국인들의 끈기와 성실함, IMF 같은 위기 때마다 일치단합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면, 우리도 한국이 밟아 올라간 길을 따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은 모른다 치더라도 우리는 참 닮은 점이 많은 민족이다. 무엇보다도 그 점이 내 희망의 근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