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향(妻鄕)을 따라 들어온 삼판서고택… 경북 영주의 명족으로 자리 잡아
⊙ 이현보·이황·조목·이언적 등의 집안과 혼맥으로 연결
⊙ 삼판서고택에서 살았던 첫 판서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정신”
⊙ 집현전 학자 문절공, 그 후손들이 600년 이어오며 종가 명성 이어와
⊙ 조선이 안동의 시대라면, 고려는 영주의 시대… 무섬마을에 종택 마련해
⊙ 종부의 삶, “힘은 들었어도 후회는 없어. 받아들여야 할 운명”
[편집자 註]
‘영남의 종가를 가다’ 두 번째 여정은 예안(선성)김씨 종가로 향합니다. 기자는 영주를 찾아 문중 인사들을 만나 종통(宗統)이 이어져 온 과정과 오늘의 현실을 들었습니다.
삼판서고택의 내력과 문절공 김담으로 이어지는 종가의 흐름을 짚는 한편, 종부를 만나 종가의 일상이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그리고 종손 부재 이후 양자를 통해 종통을 잇고자 하는 고민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한 집안의 역사를 넘어,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책임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 이현보·이황·조목·이언적 등의 집안과 혼맥으로 연결
⊙ 삼판서고택에서 살았던 첫 판서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
⊙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은 혈연이 아니라 정신”
⊙ 집현전 학자 문절공, 그 후손들이 600년 이어오며 종가 명성 이어와
⊙ 조선이 안동의 시대라면, 고려는 영주의 시대… 무섬마을에 종택 마련해
⊙ 종부의 삶, “힘은 들었어도 후회는 없어. 받아들여야 할 운명”
[편집자 註]
‘영남의 종가를 가다’ 두 번째 여정은 예안(선성)김씨 종가로 향합니다. 기자는 영주를 찾아 문중 인사들을 만나 종통(宗統)이 이어져 온 과정과 오늘의 현실을 들었습니다.
삼판서고택의 내력과 문절공 김담으로 이어지는 종가의 흐름을 짚는 한편, 종부를 만나 종가의 일상이 어떻게 유지되어 왔는지, 그리고 종손 부재 이후 양자를 통해 종통을 잇고자 하는 고민을 함께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한 집안의 역사를 넘어,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책임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 영주 구학공원에 위치한 삼판서고택.
겹겹이 포개진 지붕은 물결처럼 굽이치고, 낮게 퍼진 처마는 땅을 향해 몸을 낮춘다. 서천(西川)이 내려다보이는 이 자리에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 서 있다. 한때 영주시 영주동 431번지에 있던 이 집은 1961년 대홍수로 기울어졌고 결국 철거됐다. 지금의 모습은 2008년 구학공원 안에 복원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마주하는 건 복원된 한옥이 아니라 사라졌다가 다시 불려 나온 시간이다.
고택 앞 안내문은 이 집의 내력을 담담하게 설명한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년)의 아버지인 고려 말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1305~1366년)이 살던 집을 사위 공조판서(工曹判書) 황유정(黃有定·1343~?)에게 물려주고, 다시 사위인 평안남도 영유(永柔)현령 김소량(金小良·1384~1449년)에게 물려주었는데, 그 아들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1416~1464년)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사람들은 ‘삼판서댁’으로 불렀다. 역사에서 수많은 인물의 문호가 생겼다가 사라졌지만 삼판서고택이란 별칭은 지금까지 존재한다. 멸실된 고적을 모두가 힘을 모아 복원까지 하는 것은 문절공 후손들이 600년을 이어오며 종가(宗家)로서의 품위와 명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시호 받은 불천위 두 분 모셔
3성(姓)이 삼판서고택을 이어오면서 3명의 판서를 배출한 것은 그 선례가 없다. 예안김씨(禮安金氏) 혹은 선성(宣城)김씨 문절공 종택(宗宅)으로서 수백 년 종통(宗統)을 지켜온 자리이기도 했다. 이곳에 서면 안다. 명가를 만드는 것은 집이 아니라, 그 집에 오래 깃든 사람과 시간의 품격임을.
이 고택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 뿌리로 시선이 옮겨간다. 안동 도산(陶山)이다. 낙동강이 굽이치며 숨을 고르는 그곳, 예안(禮安)이라 불리던 땅. 그곳에서 예안(선성)김씨는 이미 15세기 문절공 김담, 16세기 민절공(敏節公) 김륵(金玏·1540~1616년)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영남 사림(士林)의 여론이 형성되던 그 공간에서, 이 집안은 학문과 혼맥의 중심에 있었다.
예안(선성)김씨는 영남 유림에서 수행한 역할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희성에 속한다. 그러나 예안(선성)김씨는 과환(科宦)이 귀한 영남 남인에서 시호를 받은 불천위(不遷位) 조상 두 분을 받들고 있다. 불천위는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 신주(神主)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문절공 김담과 민절공 김륵이 그러하다.
그 이름이 지금도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영주로 내려갔다. 기자는 예안(선성)김씨 영남종친회 김인한(金仁漢·83) 회장, 김형묵(金亨默·79) 부회장, 김제선(金濟善·70) 사무국장, 그리고 천운정(天雲亭) 종택 주손(胄孫) 김태곤(金兌坤·70)씨를 만났다.
처향을 따라 들어온 삼판서고택
삼판서고택(원 안)의 110년 전 모습. 1914년 일제 때 촬영했다. 1780년에 중수하여 1961년까지 구산 아래 있었다.예안(선성)김씨 후손은 전국에 약 1만5000명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성씨다. 후손들은 주로 경북 영주를 중심으로 봉화·예천에 많이 살고 있다. 안동에는 오히려 많지 않다고 한다. 일부는 문경, 예천, 의성, 충북 제천과 청주, 충남 천안·공주, 강원 양구 등에 세거하고 있다.
삼판서고택의 확대한 모습.이야기의 출발은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안김씨 8세 김로(金輅·1351~?)의 장남 김소량은 평해황씨(平海黃氏) 공조판서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이거(移居)했다. 문절공 김담이 1416년 영주에서 태어났으니, 입향(入鄕) 시점은 대체로 1400년에서 1410년 사이로 추정된다.
처가살이는 당시로선 예외적인 풍속이 아니었다. 종법(宗法) 체계가 확립되기 전이었고,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고르게 나누어주는 균분상속(均分相續)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경북 북부의 적지 않은 가문이 처향(妻鄕)에서 번성했고, 오늘날 집성촌의 기원 상당수가 바로 그 혼인과 이거의 흔적이다.
그렇다고 김소량의 이거를 단순한 처가살이로 볼 수는 없다. 처가인 평해황씨의 기반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황유정의 5대조 황유중(黃裕中)과 그 아들 황서(黃瑞) 부자가 양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황유정의 장인은 형부상서 정운경, 처남은 조선 개국의 설계자인 정도전, 외조부는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 안축(安軸·1287~1348년)이었다. 고려 시대 영주 일대 재지사족(在地士族) 네트워크의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행보였다.
“예안은 뿌리, 영주는 몸통”
당시 영주는 순흥대도호부(順興大都護府), 풍기군(豊基郡), 영천현(榮川縣)으로 나뉘어 있었고, 순흥에는 고려 시대에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1243~1306년)의 순흥안씨(順興安氏), 풍기에는 풍기진씨(豊基秦氏)와 평해황씨, 영주에는 봉화정씨(奉化鄭氏), 단양우씨(丹陽禹氏), 감천문씨(甘泉文氏) 등이 세거하며 고려 조정에 진출했다. 조선이 안동의 시대였다면, 고려는 영주의 시대였다. 김소량의 영주 입향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한 집안이 더 넓은 정치·혼맥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편입이었다.
김인한 회장은 그 의미를 담담하게 정리했다.
“예안은 뿌리였고 영주는 몸통이었습니다. 김소량 선조께서 처향을 따라 영주에 들어오신 것이 결과적으로 문절공의 발복(發福)이 됐습니다. 슬하에 증(潧·1413~1456년)과 담(문절공), 홍(洪) 삼형제를 두셨는데 증과 담이 크게 발신(發身)하여 영남 명족(名族)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 형제가 1435년 같은 날 함께 문과(文科)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해 모두 집현전으로 채용되셨으니까요.”
영주 사족 사회의 상징
예안(선성)김씨의 대표적 조상인 문절공 김담.혼맥의 확장도 놀라웠다. 김소량의 자녀 3남 1녀의 내·외손은 영양김씨(英陽金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봉화금씨(奉化琴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진성이씨(眞城李氏), 광산김씨(光山金氏) 등 도산 일대 유력 가문과 촘촘히 연결됐다. 이현보(李賢輔), 이황(李滉), 조목(趙穆), 이언적(李彦迪), 박승임(朴承任) 등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하나의 혼맥 안에 속해 있었다.
이 혼맥의 중심에 삼판서고택이 있었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인 공조판서 황유정에게 물려주었고, 다시 황유정의 외손자인 문절공 김담이 이 집에서 태어나면서 삼판서댁이 완성됐다. 판서가 판서 사위에게 집을 물려주고, 그 외손자가 또 판서가 된 것이다. 이 삼판서댁은 세월 속에 삼판서고택으로 불리게 되었고, 한때 사라졌다가 복원되었지만, 이 가문의 이름만큼은 세월을 넘어 이어졌다. 그냥 오래된 한옥이 아니라 영주 사족(士族) 사회의 상징이었다.
김형묵 부회장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삼판서고택은 문절공 종가가 수백 년 동안 그곳에서 종통을 지키고 가풍(家風)을 이어온 역사 자체가 그 위상을 만든 것입니다. 집이 있다고 명가(名家)가 되는 게 아닙니다.”
천문학자 김담
세종 시절 《칠정산내편》 편찬 참여
문절공 김담은 단순한 고관(高官)이 아니었다. 졸기(卒記)를 보면 용모가 단아하고 사심이 없으며, 계산이 치밀하면서도 사익(私益)을 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나라는 그에게 문절(文節)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시호는 위패(位牌)가 땅에 묻히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태곤 주손은 문절공 김담의 업적을 설명하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김담 할배는 집현전 학자 이순지(李純之·?~1465년) 선생과 함께 《칠정산내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같은 천문역서를 편찬한 분입니다. 세종대왕 때 추진된 천문역법(天文曆法)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힘으로 자주적인 천문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해 서른여섯에 사헌부 장령이 되기까지 16년 동안은 거의 천문학자로 나라에 봉사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순지 선생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두 분이 짝을 이뤄 우리 역법을 정리하고 많은 천문서를 남겼습니다.”
문절공 김담이 학문뿐 아니라 실무 능력도 뛰어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산학(算學)이 아주 뛰어나셔서, 제방 공사나 치수 계산 같은 것도 늘 할배 몫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국가 역법을 책임지는 위치였는데, 부친상을 당해 고향 영주로 내려오셨는데, 역법이 국가 중대사라 상중임에도 다시 올라오라는 어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던 거지요.”
김태곤 주손은 《조선왕조실록》 기록도 언급했다.
“실록을 보면, 이순지와 김담 같은 인재가 없으면 일식·월식 예측에 차질이 생긴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만큼 두 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문절공 김담은 단순히 벼슬한 분이 아니라, 조선의 하늘을 정리한 학자였습니다.”
문절공 가문의 위상은 학술적으로도 재조명됐다. 2016년 문절공 탄생 6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고등과학원(KIAS) 주관으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세종·김담 조선의 하늘을 열다’라는 주제로 과천과학관에서 열린 발표회에는 해외 학자들도 참여했다.
“김담 할배는 집현전 학자 이순지(李純之·?~1465년) 선생과 함께 《칠정산내편》 《태양통궤》 《태음통궤》 같은 천문역서를 편찬한 분입니다. 세종대왕 때 추진된 천문역법(天文曆法) 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 힘으로 자주적인 천문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스무 살에 과거에 급제해 서른여섯에 사헌부 장령이 되기까지 16년 동안은 거의 천문학자로 나라에 봉사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순지 선생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두 분이 짝을 이뤄 우리 역법을 정리하고 많은 천문서를 남겼습니다.”
문절공 김담이 학문뿐 아니라 실무 능력도 뛰어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산학(算學)이 아주 뛰어나셔서, 제방 공사나 치수 계산 같은 것도 늘 할배 몫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국가 역법을 책임지는 위치였는데, 부친상을 당해 고향 영주로 내려오셨는데, 역법이 국가 중대사라 상중임에도 다시 올라오라는 어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만큼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던 거지요.”
김태곤 주손은 《조선왕조실록》 기록도 언급했다.
“실록을 보면, 이순지와 김담 같은 인재가 없으면 일식·월식 예측에 차질이 생긴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만큼 두 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문절공 김담은 단순히 벼슬한 분이 아니라, 조선의 하늘을 정리한 학자였습니다.”
문절공 가문의 위상은 학술적으로도 재조명됐다. 2016년 문절공 탄생 6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회가 결성됐고, 고등과학원(KIAS) 주관으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세종·김담 조선의 하늘을 열다’라는 주제로 과천과학관에서 열린 발표회에는 해외 학자들도 참여했다.
종손과 주손
영주 예안(선성)김씨 영남종친회관은 2007년 종원들의 십시일반으로 마련됐다. 오른쪽부터 김인한 종친회장, 김형묵 부회장, 김태곤 주손, 김제선 사무국장.문중의 어른들이 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종손(宗孫)과 주손의 구분이다. 김인한 회장은 단호했다.
“종손은 시호를 받은 선조의 종가 적통(嫡統)을 잇는 장손(長孫)입니다. 주손은 대수(代數)는 오래됐어도 그 계통이 종가 적통은 아닌 경우를 가리킵니다. 오래됐다고 해서 모두 종손은 아닙니다. 시호를 받은 선조의 종통이 이어졌느냐가 중요합니다.”
김제선 사무국장은 현실적인 우려를 표현했다.
“요즘은 일상에서 이 구분이 많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기록과 기사에서는 정확히 써야 합니다. 이름이 흐려지면 역사도 흐려집니다.”
김형묵 부회장은 종가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다.
“종가는 건물이 아닙니다. 위패와 사당, 봉사(奉祀)의 질서가 이어지는 곳이 곧 종가입니다. 문절공 종가의 경우 원래 종택이 소실된 이후 다른 공간에 사당을 새로 마련해 종가 기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종가는 제향(祭享)과 종통의 연속성입니다.”
삼판서고택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1960~1970년대를 지나며 크게 허물어졌고,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결국 무너졌다. 수백 년 종통의 공간이 사라지는 데는 불과 몇십 년이면 충분했다. 김태곤 주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단순히 낡은 집 한 채가 허물어진 것이 아닙니다. 종가의 생활과 종통의 공간이 끊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영주 시민들과 지역 원로들, 문중 인사들이 뜻을 모아 복설추진위원회(復設推進委員會)를 꾸리고 국가·영주시 예산으로 복원이 추진됐다. 김인한 회장은 “개인 집안의 유산이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가 보존할 역사 자산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무섬마을
삼판서고택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지금 무섬일지 모른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水島里). 한자로 물 수(水)에 섬 도(島)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乃城川)이 마을의 삼면을 감싸 흐르는 이 물돌이 마을은, 보기에는 영락없는 섬이다. 태백산 끝자락이 뒤를 받치고 앞으로는 강물이 유유히 돈다.
앞산에 올라 내려다보면 산과 물이 태극(太極) 모양으로 돌아 나간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물 위에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땅이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전해진다. 안동에 하회(河回)가 있다면 영주에는 무섬이 있다. 하회가 풍산류씨(豊山柳氏)의 명촌(名村)이라면, 무섬은 예안(선성)김씨와 반남박씨(潘南朴氏)의 명촌이다. 경주 양동에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강이씨(驪江李氏)가 나란히 뿌리를 내렸듯 무섬도 두 가문이 함께 만들어온 마을이다.
— 무섬마을은 어떤 곳입니까.
김인한 회장의 회고다.
“물이 270도로 돌아 나가는 ‘물돌이 마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대표적인 곳이죠. 검색하면 ‘외나무다리’로 바로 무섬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콘크리트 다리가 없었으니까 외나무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장 보러 가고 학교 가고 다 그 외나무다리를 통해 건넜습니다.”
— 생활이 많이 불편했겠습니다.
“장마 때는 다리가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물이 높으면 소꼬리를 잡고 강을 건너기도 했어요. 책은 소 등에 올리고요. 그런 게 다 일상이었습니다.”
반남박씨·예안김씨의 집성촌
영주 무섬마을에 위치한 무송헌 종택.무섬마을의 공식 소개에 따르면, 이 마을에 사람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 입향조 박수(朴檖·1642~1729년)가 1666년 이곳으로 들어와 터전을 잡으면서다. 그리고 그의 증손서(曾孫壻)인 예안(선성)김씨 김대(金臺·1732~1809년)가 1757년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무섬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자리 잡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무섬이 새롭게 형성된 마을이면서도, 예안김씨 역사 안에서는 낯선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섬은 문절공 가문의 현재와 만나는 자리다. 문절공 종택이 무섬에 있고, 19대 김광호(金光昊·1947~ 2023년) 종손 내외가 최근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김광호 종손의 처가가 바로 반남박씨 영주 현조(顯祖)인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년)의 종택이라는 점이다. 소고는 동방급제한 풍기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년)과 더불어 “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 불릴 정도로 영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김담과 더불어 불천위에 옹립된 인물이다.
무섬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면 한 고택 앞에서 발이 멈춘다. 돌에 새긴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무송헌 종택(撫松軒 宗宅). 예안(선성)김씨 문절공의 종택이다. 무송헌은 김담의 아호. 세월의 결이 고스란히 밴 기둥과 아직 생생한 글씨의 온도 차이가 묘하다. 처마 아래 반듯하게 쌓인 장작더미 위로 봄 햇살이 내려앉는다. 낡은 것이 버텨온 자리에 새로운 삶이 조용히 얹혀 있다. 사라진 삼판서고택의 빈자리를 온전히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시대의 종가 공간으로서 분명한 상징성을 갖고 있다.
김제선 사무국장은 예안(선성)김씨 문중의 종훈(宗訓)을 꺼냈다.
“숭조돈목(崇祖敦睦), 세수인경(世守仁敬), 박학수기(博學修己)입니다. ‘조상을 숭모하고 일가끼리 화목하게 지내며, 세대가 바뀌어도 어질고 공경하는 마음을 지키고, 널리 배우고 스스로를 닦는다’는 뜻입니다. 이 종훈이 후대에까지 살아 있으면 종가 문화도 살아남습니다.”
김 부회장이 말을 받았다.
“지금도 문중회관에 어른들이 모여 붓글씨를 쓰고 책을 읽고 종사(宗事)를 논합니다. 일상의 실천이 쌓여 종가 문화를 이루고 공동체적 공간이 됩니다.”
김인한 회장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제사의 방식도, 가족의 형태도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조상을 잊지 않고 가풍(家風)을 이어가려는 정신만은 지켜야 합니다.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근본입니다.”
김태곤 주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문절공 선조께서는 단아하고 치밀하면서도 사욕(私慾)이 없으셨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것은 혈연(血緣)이 아니라 그 정신입니다.”
영남종친회와 선강회, 백운회, 선미회
종가를 지킨다는 것은 건물을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종통을 이어가는 일이다. 예안(선성)김씨 문절공 후손이 보여주는 종가 문화의 현재는 이 점에서 상징적이다. 넉넉지 않은 재정과 인구 감소라는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보종(保宗)’이라는 이름으로 전통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예안김씨 영남종친회관은 그 상징이다. 영주시 원당로 94에 자리한 이 회관은 2007년 종원들의 십시일반으로 마련됐다. 독지가도, 넉넉한 종중 재산도 없는 상황에서 각자가 형편에 맞게 성금을 보태 이뤄낸 공간이다. 김형묵 부회장의 말이다.
“2006년에 건물을 구입하고 2007년에 개관했습니다. 큰돈을 낸 사람이 있어서 된 게 아닙니다. 종원들이 십시일반으로 10만원, 20만원, 많게는 100만원씩 모아서 만든 겁니다.
이게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더 의미가 큽니다. 이 과정 자체가 문중 결속이 됐습니다.”
문중 운영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나뉘어 있다. 영남종친회는 김소량 후손들을 중심으로 구성, 문절공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영주를 중심으로 종사를 논의한다.
실무는 ‘선강회(宣綱會)’가 맡는다. 본래 60세 이하 청년 조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현재는 70세 이하까지 포함하는 조직이 됐다. 문중 행사 때마다 제수 준비부터 현장 정리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그 위에는 ‘백운회(白雲會)’가 있다. 70세 이상 어른들로 구성돼 선강회를 자문하고 문중의 큰일을 협의한다. 여성 조직인 ‘선미회(宣美會)’도 중요한 축이다. 출가한 딸들을 중심으로 구성돼 친목을 다지고 행사 때는 봉사를 맡는다.
제향은 ‘삼소(三所) 운영위원회’가 담당한다. 문절공의 부친 김소량, 문절공 김담, 장자 김만칭(金萬稱) 등 3대의 시제(時祭)를 모시는 조직이다. 위토와 재정이 넉넉하지 않지만 종원들의 참여로 그 뜻이 유지되고 있다.
문절공 불천위 제사는 지금도 이어진다. 음력 7월 9일 문절공 기일, 12월 7일 배위 기일에 제사가 열린다. 최근에는 선강회와 백운회가 중심이 돼 종친회관에서 제수를 마련한 뒤 무섬 종택으로 이동해 제향을 올린다.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합사하자는 논의도 있지만 아직은 두 위패를 모두 모시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시제는 “젊은 세대 참여가 가장 큰 고민”이지만 영주의 어느 문중보다 더 왕성하게 종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전통의 최전선에는 고(故) 김광호 종손이 있었다. 영주시청 공무원과 설계사무소 근무를 거쳐 은퇴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섬에 종택이 마련된 이후 종택에 기거하며 영종회 간사로 종사를 도맡았다. 김 종손은 대(代)를 이을 아들 없이 딸 셋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종손 계승이라는 종가의 핵심 구조에서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문중 내부에서는 향후 종통 계승 문제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종부 이야기
기자는 대구에 거주하는 종부(宗婦) 박찬윤(朴贊潤·76) 여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반남박씨 소고 박승임 종가의 종녀인 그는 두 명문가의 전통을 함께 이어가야 할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박찬윤 종부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반세기 가까운 종가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박 종부는 1975년 문절공 종가로 시집왔다. “남편 얼굴도 못 보고 결혼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집안 어른들이 혼사를 정했고, 종손인 친정아버지조차 종가의 고단한 삶을 알았기에 처음엔 결혼을 반대했단다. 혼인 날짜를 받아놓고 시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예식장 혼인도 아닌 이른바 ‘작수성례(酌水成禮)’ 형식으로 시집에 들어와 상주 노릇부터 해야 했다. 종부의 삶은 결혼식보다 먼저 책임으로 시작됐다.
박 종부는 자신을 특별히 비범한 사람으로 말하지 않았다. 다만 “종갓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생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고생은 진짜 징하게 했다”고 고백한다. 다만 익숙해서, 혹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로 여겼기에 그것을 큰소리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가서 다 차려야 해요”
그가 시집왔을 무렵 문절공 종가는 지금처럼 무섬에 있지 않았다. 옛 삼판서고택은 이미 멸실됐고, 종가의 상징 공간은 사라진 상태였다.
문절공 불천위 제사는 영주 문수면 적동리(옛 황조골) 쪽에 마련된 재사(齋舍)와 종손의 집에서 모셔왔다. 박 종부는 한 해에 두 차례, 문절공과 배위 제사를 위해 그곳을 오가며 직접 제수 준비를 해왔다. 대구에 살던 시절에도 영주로 올라와 제사 준비를 했다.
“가서 다 차려야 해요. 이게 고생이죠.”
담담하고 짧은 한마디였지만, 종부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는 이 말로 충분했다.
남편 김광호 종손은 영주시청에서 근무하다가 대구의 한 설계사무소로 옮겼고, 부부는 한동안 대구에서 살았다. 이후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무섬마을의 무송헌 종택으로 들어왔다. 무섬에 정착한 시기는 2007년 무렵이다. 일본에 사는 문중 후손 한 분이 무섬 고택을 희사했고 문중에서는 별묘(別廟)를 건립해 비로소 문절공 종가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됐다.
박 종부는 “무섬에 와서는 좀 편해졌다”고 회상했다. 문중의 도움으로 종택이 마련된 후 비로소 종부 역할을 할 공간이 생겼다. 접빈객을 맞이할 공간이 마련됐다는 게 가장 즐거웠다. 영주 유림과 영남의 인사들이 모두 드나들고 회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종부의 일상은 결국 제사
종부의 일상은 결국 제사로 집약된다. 박 종부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지내던 제사가 모두 13번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자정이 넘어 제사를 지냈고,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는 손님들이 집에서 자고 가는 일도 흔했다. 제사 한 번을 치르려면 며칠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준비는 길고, 끝나면 몸살이 따라왔다. 그는 가장 힘든 점으로 “일하는 과정”을 들었다. 그러나 끝내 제사를 마치고 나면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종부의 삶이란 결국 그 두 감정, 고단함과 뿌듯함이 겹쳐지는 자리인지 모른다.
제사 방식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원래는 불천위 제사 역시 엄격히 자시(子時)를 넘겨 지냈지만, 다른 집안들도 차츰 초저녁으로 옮기자 이 종가도 10시쯤으로 당겨 지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차림만큼은 쉽게 줄일 수 없었다.
“간소하게 하라 하기는 하는데, 정해놓은 게 있잖아요. 제가 줄이고 없애고 이런 건 못 하겠더라고요.”
제사상에는 조기, 상어, 문어 같은 것이 올랐고, 생선은 대체로 익히지 않은 채 올렸다. 국과 나물에는 양념을 하지 않았다. 안동·영주권 제사의 전형적인 특징이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다만 그는 “전통 음식을 어른들에게서 충분히 배우지는 못했다”고 했다. 시어른들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은 역시 종손 부재 문제였다. 박 종부와 김광호 종손 사이에는 세 명의 딸밖에 없다. 장녀 1975년생, 차녀 1977년생, 삼녀 1979년생이다.
아들이 없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종가의 고민이었다. 종손이 2023년 무렵 세상을 떠나자 빈자리는 더 크게 다가왔다. 지금 박 종부는 몸이 불편해 제사를 직접 지내지 못하고, 문절공 불천위 제사만 문중의 도움으로 이어가고 있다. 종손이 떠난 뒤 종부 혼자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문중에서는 양자 문제를 논의 중이다. 박 종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못 한 일을 문중에서 그렇게 해주니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법적 호적 이전과는 별개로, 족보상 후사(後嗣)를 세우는 방식으로 종통을 잇는 방안이 논의 중이다.
“뿌리를 내리면 좋죠”라는 그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종손 부재 문제를 마주한 종부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딸들과 사위들에게는 아직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상의하지 못했다.
종가 문화의 미래에 대해 묻자 질문으로 답을 대신했다.
“앞으로는 좀 달라지지 않겠어요?”
젊은 세대가 과연 이 전통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지 걱정이 앞선다는 뜻이었다.
종가와 종교
문절공 종부 박찬윤 여사. “종부의 삶은 운명”이라고 했다.“힘은 들었어도 후회는 없어요. 물론 (종부의 삶을) 젊은 세대에게 적극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어요.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합니다.”
종교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태도는 의외로 단호했다. 박 종부 자신은 천주교 신자지만, 제사를 이유로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면 애초에 종교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천주교를 권해도 다니지 않았다. 그는 “종가의 삶은 종교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서도, 현실에서는 신앙과 제사가 충돌하는 경우를 인정했다. 종가와 종교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오늘날 종가 문화가 맞닥뜨린 현실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터뷰 말미에 박 종부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짧게 정리했다.
“고생은 했지만, 해놓고 보면 또 뿌듯한 점도 있거든요.”
이 한마디는 종가를 지탱해 온 수많은 무명의 종부들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록처럼 들린다. 종손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종가는 완전히 비어 있지 않다. 그 자리를 지키며 제사를 기억하고, 문중의 결정을 기다리고, 후대가 이 전통을 어떻게 이어갈지 묵묵히 바라보는 종부가 있기 때문이다.
구학정과 천운정에서
영주 번계들에서 바라본 천운정(오른쪽)과 본체인 양진재.삼판서고택의 내력을 더듬던 기자의 발걸음은 무섬을 거쳐 자연스럽게 구학정(龜鶴亭)과 천운정(天雲亭)으로 이어졌다.
구학정은 민절공 김륵의 종가다. 천운정은 김륵이 만년에 별서(別墅)로 마련했다가 둘째 아들(樊溪 金止善·1573~1622년)에게 물려준 곳이다. 김륵은 임진왜란 당시 안집사로 영남 좌도 의병을 결집하여 국난을 수습했으며 이조참판을 지낸 명신이다.
경치 좋은 곳에 송림이 우거진 뒷산을 등지고 있는 정자인 천운정과 본체인 양진재(養眞齋), 그리고 넓은 번계들(김지선이 마을 앞 내성천을 밀어내고 농토를 마련해 번계들이라 이름 지었다)을 바라보니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함이 밀려왔다. 예안(선성)김씨가 영주에서 발복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문중이 이곳 영주에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었던 까닭이, 어쩌면 이 풍광 깃든 삶의 질서에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