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슬의 ‘건강의 지평선’ 〈17〉 석유가 치료하는 환자들

해열제에서 CT·MRI까지, 석유 없으면 마비되는 현대 보건의료

  • 글 : 박한슬 의료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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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약의 뼈대는 석유화학
⊙ 원료의약품 자급률 31.4%에 불과(2024년)… 보건안보 위험
⊙ 호르무즈해협, 에너지 동맥일 뿐 아니라 비료 수출의 약 30%가 경유하는 ‘농업의 동맥’
⊙ 마취제·항암제·진단 시약, 일회용 주사기·수술용 장갑, 수술실 바닥재·벽면 코팅재 등도 석유화학의 산물
⊙ 연소용 석유 수요 줄이는 에너지 전환 성공할수록 나프타 등 ‘재료로서의 석유’는 더 귀해져

박한슬
1991년생. 차의과학대 약학과 졸업, 연세대 통계·데이터사이언스 석사 / 《중앙일보》 《주간조선》 칼럼니스트, 서울시 청년정책자문단 / 저서 《노후를 위한 병원은 없다》 《숫자 한국》 외 다수
일회용 수술 장갑, 수술복, 마취제, 주사기, 병원 바닥재·벽면 코팅제, 각종 기기를 가동하는 전력 등이 모두 석유의 산물들이다. 사진=조선DB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사려면 마트 두세 곳을 돌아야 하는 요즈음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전국 기초지방정부의 종량제 봉투 완제품 재고는 평균 3개월분 이상이고, 6개월분을 보유한 곳도 123개소, 전체의 54%에 달한다. 실제로 쓰레기 봉투가 부족한 게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도 마트 진열대가 텅 비는 이유는 사재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원료 수급 불안 뉴스가 퍼지자 가정 단위의 선제 구매가 겹치면서 ‘쓰봉(쓰레기 봉투) 대란’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일부 소매점에선 쓰레기 봉투를 다른 상품과 묶어 파는 이른바 ‘인질 판매’가 보도될 정도다.
 
  발단(發端)은 중동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 해상 원유 수송량의 35%가 지나가는 호르무즈해협은 사실상 봉쇄됐다. 하루 2000만 배럴의 원유가 통과하던 산업 동맥이 끊긴 셈이다. 그러니 석유를 재료로 삼는 쓰레기 봉투에도 위기감이 번진 셈이다. 그런데 이 여파가 과연 쓰레기 봉투에만 미칠까.
 
 
  ‘농업=석유를 먹거리로 바꾸는 산업’
 
화학비료 생산의 길을 연 프린츠 하버(왼쪽)와 카를 보슈.

  같은 시기, 약국에선 자동 조제기 포장지가 품절됐다. 핵심 원료인 저밀도 폴리에틸렌(LDPE)의 국제 수급(需給)이 흔들린 탓이다. 호환 제품마저 가격이 두 배로 뛰었다. 소아 환자에게 약을 담아주는 플라스틱 물약통에도 수량 제한이 걸렸다. 한국백신은 일회용 주사기와 주삿바늘 전 품목 가격을 15~20% 올렸다. 약도 마찬가지다. 일부 글로벌 원료 기업은 부형제(賦形劑)와 일부 원료 의약품의 가격을 최대 2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의료 현장에선 벌써 염려가 커지는 상태다. 이 자체로도 큰일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화학비료다. 석유 공급이 끊기면 비료 공급도 끊기고, 결과적으로 비료에 강하게 의존하는 현대 농업조차 멈춰버리기 때문이다.
 
  현대 농업은 본질적으로 ‘석유를 먹거리로 바꾸는 산업’이다. 과장이 아니다. 옥수수 1톤을 생산하는 데 석유 약 70리터가 소모된다. 여기엔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농기계를 굴리고, 관개(灌漑) 시설을 가동하고, 수확물을 냉장 운송하는 데 쓰이는 연료가 포함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농업의 근간을 이루는 합성비료 자체가 화석연료에서 비롯된다. 농약도, 제초제도, 수확한 곡물을 보관하는 플라스틱 저장 용기도 석유화학 공정을 거쳐야 만들어진다. 밭에서 식탁까지, 석유가 개입하지 않는 단계가 거의 없다.
 
  인류가 지금의 82억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된 결정적 전환점이 있다. 20세기 초 독일의 프리츠 하버(Fritz Haber)와 카를 보슈(Carl Bosch)가 개발한 하버-보슈법이다. 공기 중 질소를 암모니아로 전환해 화학비료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한 기술 덕분에 인류는 이른바 맬서스 트랩(Malthus Trap)이라 불리는 인구 대비 식량 부족 현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대 문명의 네 기둥
 
  캐나다 출신의 에너지 과학자 바츨라프 스밀(Vaclav Smil)은 2022년 저서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에서 합성 암모니아를 현대 문명의 ‘네 기둥’ 중 첫 번째로 꼽으며, 이 기술이 없었다면 현재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0억 명은 태어나지도 못했거나 먹을 것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기술적 진보”라는 게 그의 평가다.
 
  문제는 하버-보슈법의 핵심 원료가 천연가스란 점이다. 질소를 고정(固定)하려면 대량의 수소가 필요한데, 산업 현장에서 공급되는 수소는 대부분 천연가스의 가공을 통해 얻는다. 천연가스는 원유와 함께 채굴되는 화석연료의 일종이니, 비료의 뿌리는 결국 석유에 닿아 있는 셈이다. 현대 농업이 ‘석유를 먹거리로 바꾸는 산업’이라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화학비료가 바꾼 것은 식량 생산량만이 아니다. 기생충 역학자 정준호는 《구충록》(2023년)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지적한다. 국내에 화학비료 공급이 확대되면서 인분(人糞) 비료의 경제적 유인이 소멸했고, 이것이 기생충 전파 경로를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비의도적(非意圖的) 공중보건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석유화학은 82억 명을 먹이는 데 그치지 않고, 먹이는 방식 자체를 바꿈으로써 질병까지 몰아낸 셈이다. 비료만이 아니다. 농약의 주요 성분도, 식품을 감싸는 포장재도, 작물을 보존하는 방부제(防腐劑)도 석유화학 공정의 산물이다.
 
 
  한국 수입 요소의 38%가 호르무즈해협 통과
 
  이번 이란 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이 모든 연결고리가 현실의 위기로 바뀌었다. 호르무즈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20%가 통과하는 에너지 동맥인 동시에, 비료 수출의 약 30%가 경유하는 농업의 동맥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비료인 요소의 약 50%와 상당량의 칼륨 비료가 걸프 지역에서 생산돼 호르무즈해협을 통해 세계로 나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료 핵심 원료인 요소 수입의 38%가 호르무즈를 지난다. 농림축산식품부 자체 점검에 따르면, 호르무즈가 완전 봉쇄될 경우 밀 가격은 약 4%, 과일과 채소는 5% 이상 오를 수 있다. 이미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의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올 만큼, 상황은 녹록지 않다.
 
  이런 경우 자주 대안(代案)으로 언급되는 중국의 사정도 녹록지 않다. 중국은 비료 원료인 유황(硫黃) 공급의 47%를 수입에 의존하고, 그 절반 이상이 중동 6개국에서 온다. 올해 1~2월 중국의 유황 수입량은 전년 대비 35% 급감했고, 이란산 유황은 4개월째 수입이 전무하다. 중국 정부는 결국 식량안보 차원에서 비료 비축분을 조기 방출하는 비상조치에 나섰다. 세계 최대의 비료 생산국마저 비축분에 손을 대야 할 만큼 사태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비료를 만들 원료도 수입하고, 비료로 키운 농산물마저 상당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우리로선 심각한 이중고(二重苦)다. 비료 공급이 흔들리면 국내 농산물 가격이 오르고, 동시에 국제 곡물 가격까지 뛰면서 수입 식량 가격도 함께 치솟는다. 밥상 물가가 양쪽에서 협공(挾攻)을 당하는 구조인 셈이다.
 
  더 불편한 사실도 있다. 우리나라는 2022년을 기점으로 육류 소비량이 쌀 소비량을 추월했다. 그런데 현대 목축업에선 고기 1kg을 생산하려면 곡물 사료 7~10kg 정도가 필요하다. 곡물을 이용해 육류를 생산하는 구조다. 육류 소비가 늘수록 곡물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곡물을 키우는 비료의 중요성은 더 커지며, 비료의 원료가 되는 석유의 수요도 늘어나는 구조다.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인해 석유 공급 중단이 장기화되면 긴 공급망 연쇄를 거쳐 육류의 공급이 치명타를 입는다. 이밥에 고깃국을 바라는 게 북녘 주민들만이 아닐 수도 있게 된단 얘기다. 스밀이 암모니아 공정을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으로 꼽은 이유다.
 
 
  제약의 뼈대는 석유화학
 
이란 전쟁으로 나프타 수급 차질이 빚어지면서 LG화학 여수공장 등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생산 시설들이 잇달아 가동을 중단했다. 사진=뉴스1

  석유가 닿아 있는 곳은 농업만이 아니다. 제약 산업은 본질적으로 석유화학 산업의 전방산업(前方産業)이다. 전 세계 원유 생산량 중 제약 부문에 직접 쓰이는 비중은 고작 1%에 불과하지만, 의약품의 기초 원료와 화학 공정에 사용되는 용매(溶媒)의 99%는 원유에서 뽑아낸 부산물이다. 비중은 작되 대체 불가능성은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해열제 성분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아세트아미노펜을 예로 들어보자. 이 물질의 기초 골격은 페놀(phenol)이다. 페놀은 벤젠에서 합성되고, 벤젠은 나프타(naphtha)에서 분리되며, 나프타는 원유를 증류해야 얻을 수 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의 고사를 원용하자면 해열제는 유정(油井)에서 출발한 셈이다. 광범위 항생제나 치과에서 쓰는 국소 마취제, 심지어 항암제의 합성 경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약은 첨단 기술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뼈대는 석유화학이 제공한다. 전통적 화학공업 국가들이 제약업에서 두각을 보이는 이유다.
 
  나프타에서 파생되는 석유화학 제품의 범위는 의약품에 그치지 않는다. 진단 시약의 기반 물질도, 수술실 바닥재와 벽면 코팅제도, 환자복의 합성섬유도 석유에서 나온다. 병원을 구성하는 물질 중 석유화학과 무관한 것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병원을 24시간 가동하는 전력(電力)도 따져봐야 한다. CT 장비 하나가 24시간 돌아가는 데 소비하는 전력은 일반 가정의 수십 배에 달하고, MRI는 이보다 더 높다. 국내 전력 생산에서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0%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병원의 전기까지 책임지고 있는 구조인 셈이다.
 
  특히 병원에서 매일 소비되는 수혈용 백, 일회용 주사기, 수술용 장갑, 정맥 주사용 관(管)은 감염 방지를 위해 일회성(一回性)이 필수적인 품목들이다. 일회성을 유지하는 핵심 소재가 플라스틱이고, 플라스틱의 원료는 석유다. 식물 유래 생분해성 플라스틱이 대안으로 거론되곤 하지만, 의료 등급의 내구성과 멸균(滅菌) 안정성을 충족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감염 관리의 기본 원칙상 다회용(多回用)으로 전환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혈백 하나, 주사기 하나를 재사용하는 순간 병원 감염의 위험이 급격히 높아진다. 고릿적 ‘불주사’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수혈백·주사기가 사라지면…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원료의약품 자급 역량은 어느 수준일까. 2024년 기준 자급률 31.4%에 불과하다. 나머지 약 70%를 해외에서 사 오는데, 수입 의존도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중국이 37.7%, 인도가 12.5%를 차지한다. 두 나라를 합하면 50%가 넘는다.
 
  문제는 두 나라의 의약품 원료 생산 역시 중동산 원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페놀의 주된 생산국이 중국과 인도이고, 이들이 나프타를 조달하는 주된 경로가 바로 호르무즈해협이라서다. 오죽하면 인도에 대한 원유 공급이 차질을 빚자, 미국이 인도에 한해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허가하는 예외 조치까지 내렸겠는가. 해협이 막히면 이들 국가의 공장 가동이 흔들리고, 그 충격은 고스란히 세계로 전달된다.
 
  작년 국정감사에선 원료의약품 자급률 문제가 보건안보의 취약점으로 지적된 바 있다. 수입 품목 1만2586개 중 특정 국가 의존도가 80%를 넘는 품목이 3941개(31.3%)에 달한다는 데이터도 함께 제시됐다.
 
  그때의 경고가 채 반년도 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난 셈이다. 2021년 요소수(尿素水) 대란 때도, 사태가 진정된 뒤 중국산 요소 수입 비중은 잠시 66%로 낮아졌다가 2023년 상반기에 89%로 되레 치솟았다. 위기가 지나면 잊는다. 이번에도 같은 패턴이 반복될까. 쓰레기야 봉투가 없으면 태우기라도 한다지만, 수혈백과 주사기가 사라지는 건 생명을 위협한다.
 
 
  ‘석유 용도의 전환’
 
  여기서 스밀이 말한 ‘문명의 네 기둥’을 다시 한 번 소환할 필요가 있다. 암모니아, 시멘트, 강철, 플라스틱. 네 가지 모두 화석연료 없이는 현재 규모로 생산이 불가능한 물질들이다. 세계는 매년 시멘트 45억 톤, 강철 18억 톤, 플라스틱 약 4억 톤, 암모니아 1억8000만 톤을 쏟아내고 있다. 하나라도 빠지면 건물을 세울 수 없고, 비료를 만들 수 없으며,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 문명의 물질적 토대(土臺) 그 자체다. 스밀은 이런 네 기둥이 사라지면 현대 사회가 한 세기 전으로 퇴행(退行)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과장처럼 들리지만, 당장 비료부터 의료용 주사기까지 공급이 흔들리는 현실을 보라. 게다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최근 분석은 이 사실에 무게를 더해준다.
 
  IEA에 따르면 2026년부터 전 세계 석유 수요 증가분의 60% 이상이 석유화학, 즉 비연소(非燃燒) 용도에서 발생했다. 수송과 발전 부문의 석유 수요는 이미 정점을 지나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석유화학 원료로서의 수요는 오히려 증가 중이다. 석유 6배럴 중 1배럴이 이미 폴리머와 합성섬유 생산에 투입되고 있으며, 이 비중은 2030년까지 더 커질 전망이다. ‘석유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석유 용도의 전환’이 진행 중인 거다. 2024년 한 해만 봐도, 전 세계 석유 소비가 2019년 대비 회복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석유화학 원료 수요 증가(5년간 12% 이상 증가) 덕분이었다. 수송용 연료 수요는 정체 상태였다.
 
 
  저탄소 에너지 전환의 역설
 
제주 서귀포시에 있는 가시리 국산화 풍력 발전단지. 풍력·태양광 발전 등은 에너지 투자 수익률이 낮고, 정유 산업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사진=조선DB

  여기서 에너지 전환 정책의 구조적 딜레마가 드러난다. 석유 정제(精製)는 결합 생산 구조다. 원유를 증류탑에 넣으면 휘발유, 경유, 등유, 나프타가 동시에 산출된다. 나프타만 골라 뽑을 수는 없다.
 
  이런 구조에서 에너지 전환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져보자.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고 재생에너지가 화력발전을 대체하면서 휘발유와 경유의 수요가 줄어든다. 이러면 정유사는 원유 처리량 자체를 축소한다. 원유 처리량이 줄면 나프타 생산량도 자연스레 준다. 연소용 석유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비연소용 석유화학 원료의 공급도 함께 위축되는 구조인 셈이다.
 
  에너지 투자 수익률, 이른바 EROI (Energy Return on Investment)의 관점을 더해 보면 구도가 한층 선명해진다. 화석연료의 EROI는 약 30이다. 에너지 1 단위를 투입하면 30 단위를 회수한다는 뜻이다. 식당으로 비유하자면 원가가 1, 매출이 30이란 얘기다. 원자력은 EROI 값이 약 75에 달한다. 반면 태양광이나 풍력은 에너지 저장장치(ESS)를 포함해도 4 수준에 불과하다. 고도화된 산업 문명을 유지하려면 최소 EROI 10~15가 필요하다는 게 에너지 과학계의 대체적인 합의(合意)인데, 화석연료의 높은 EROI가 석유 시추와 정제를 경제적으로 성립시키고, 나프타를 비롯한 석유화학 원료의 저렴한 대량 공급을 뒷받침해 온 거다.
 

  연소용 석유의 수요가 줄어 정유 산업의 규모 자체가 축소되면 어떻게 될까. 나프타의 단위당 생산비용은 오히려 상승한다. 태울 석유를 줄이면 만들 석유도 비싸진다. 에너지 전환이 성공할수록 ‘재료로서의 석유’는 더 귀해지는 역설(逆說)이다.
 
  우리나라의 나프타 수입 의존도는 약 45%고, 이 중 77%가 중동산이다. 호르무즈 봉쇄로 이미 국내 석유화학 업계의 나프타 재고는 2주분까지 줄었다. 정부는 3월 27일부로 나프타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국내 생산·수입·재고를 일별(日別)로 점검하는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나프타가 바닥을 드러내는 데는 에너지 전환 정책의 의도치 않은 여파도 분명 존재하는 셈이다.
 
 
  쓰레기가 석유를 대체하는 날
 
‘플라스틱 열분해 파일럿(시범) 공장’. 폐플라스틱을 고온의 열로 가열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을 거쳐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기름(열분해유)을 생산한다. 사진=SK지오센트릭

  이런 상황에 대한 현실적 출구가 있을까. 주목할 만한 흐름이 하나 있다. 폐플라스틱 열분해유(熱分解油)다. 폐비닐과 폐플라스틱을 산소가 차단된 고온 환경에서 분해하면 원유와 유사한 합성유를 얻을 수 있고, 이를 정제하면 나프타를 대체할 수 있는 석유화학 원료가 된다. 쓰레기 처리 기술에 ‘도시 유전(油田)’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석유를 원료로 만들었던 플라스틱을 다시 석유로 되돌리는 셈이니, 일종의 물질 순환(循環)이다. 매립지에 묻히거나 소각로에서 태워지던 폐기물이 석유화학 원료로 부활하는 것이다.
 
  업계 분석에 따르면, 국내에서 발생하는 폐플라스틱을 열분해에 전량 투입할 경우 일일 약 7만5000배럴 규모의 대체 원유 생산이 가능하다. 실제로 주요 기업들이 움직이고 있다. GS칼텍스는 열분해유를 기존 정유 공정에 직접 투입하는 기술을 검증 중이고, LG화학은 외부에서 확보한 열분해유로 재생 나프타를 생산한 뒤 이를 다시 에틸렌으로 전환하는 순환형 공정을 구축하고 있다. 환경부도 기존에 소각 시설로 분류하던 열분해 시설을 재활용 시설로 재정의하고, 열분해유 회수 기준(투입 폐플라스틱 중량의 50% 이상)을 마련하는 등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공공 열분해 시설은 2026년까지 10개소(연간 4만 톤 처리)로 확대할 계획이다.
 
  그렇지만 현실과 가능성 사이의 간극은 아직 멀다. 현재 국내 폐플라스틱 열분해율은 0.9%에 불과하다. 정부 목표치가 10%인데, 달성 시기조차 불투명하다. 열분해유에는 왁스와 염소 등 불순물이 포함돼 그대로 나프타를 대체하기 어렵다는 기술적 한계도 남아 있다. 정제 기술이 고도화되지 않으면 ‘도시 유전’도 구호에 머무를 뿐이다. 한국화학연구원에 따르면, 열분해유를 석유화학 원료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기존 나프타 수준의 순도까지 끌어올리는 정제 공정이 필수적이며, 이 분야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최소 3~5년이 더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석유는 단순히 연료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나프타 대란은 이 기술의 정책적 위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동안 폐플라스틱 재자원화(再資源化)는 친환경 정책의 하위 분과(分科)쯤으로 취급돼 왔다. 탄소 배출 감축이란 명분 아래 관심을 두는 부처는 기후에너지환경부뿐이었고, 산업통상부 같은 굵직한 부처가 해당 기술을 본인 부처의 소관 문제로 인식한 적은 거의 없었다.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바꾸자는 논의에 쏟았던 정책적 에너지의 10분의 1이라도 열분해유 정제 기술 고도화에 투입했다면, 지금의 나프타 위기에 대한 완충재가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석유를 ‘연료’로만 바라보는 정책적 상상력은 얼마나 협소한가. 석유가 사라지면 쓰레기 봉투가 사라지고, 비료가 끊기고, 주사기 값이 뛴다. 기름이 나지 않는 국토를 탓하는 건 의미가 없다. 조금이라도 관련 충격을 줄일 수 있도록, 산업 정책 관점에서 폐자원 재활용화를 고민해 보는 계기로 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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