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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대한민국에서 공연을 가장 많이 본 사람’ 이종덕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나는 무대의 ‘뒷광대’일 뿐”

글 : 박지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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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돌림’으로 소심했던 아이, 무대 호령하는 ‘공연계의 代父’로
⊙ 55년간 문화예술계 요직 지킨 비결, “정권에 아첨하지 않는 正義”
⊙ 官職 짐 벗고 2막… “대학서 後學 길잡이로 소임 다할 것”
⊙ 아내와 영화 보는 게 일상의 樂, 예술인 위한 봉사활동은 평생의 業

李鍾德
1935년 일본 오사카 출생. 경복중·고등학교, 연세대 사학과 졸업 / 1963년 문화공보부, 1983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이사, 1989년 88서울예술단 단장, 1994년 서울예술단 이사장, 1995년 예술의전당 사장, 1999년 세종문화회관 사장, 2004년 성남아트센터 사장, 2011년 충무아트홀 사장. 現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
사진=조현호
  공연이 좋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 다섯 살 무렵. 아버지 손을 잡고 극장에 간 게 시작이었다. 이후부터는 혼자 공연장을 찾았다. 1940년대. 당시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면서 남몰래 키운 꿈이 있었다. 무대 위에 서는 꿈? 아니다. 무대 ‘뒤’에 서기로 했다. 그래야 공연을 계속 볼 수 있으니까.
 
  이종덕(李鍾德·85)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장은 그렇게 ‘무대 뒤’ 인생을 시작했다. 장장 55년간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 예술가들에게 비추고, 자신은 무대 뒤에서 조명을 설치했다. 스피커를 확인했다. 경륜이 좀 쌓이자, 무대 밑그림을 그렸고, 공연을 기획했다. 예술인들의 처우를 개선했고, 굴지의 해외 공연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예술행정의 달인, 문화예술계의 마에스트로, 공연계의 대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때마다 “나는 뒷광대일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그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있었다. 지난 1월 14일 열린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은 것. 이 원장은 이 자리에서 “평생 무대 뒤에서 살았는데, 오늘 이렇게 무대에 섰다. 앞으로 회고록을 쓸 일이 있다면 ‘내 인생은 무대 위에서도 이뤄졌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뜨거운 환호성이 쏟아졌다. 객석에는 손자뻘인 뮤지컬 배우들이 가득했다. 80대 백발 원로와 20대 스타들의 모습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거대한 성장수(成長樹)가 연상됐다. 이종덕이라는 뿌리와 매달린 열매들.
 
  지난 2016년 현장에서 물러난 그는 대학원에 둥지를 틀었다.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새싹’을 틔워볼 셈이다. 개강을 앞둔 2월의 어느 날, 죽전의 캠퍼스를 찾았다. 오전 10시. 원장실 문틈 사이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조성진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여기가 맞나보다.
 
  ― 평소 늘 은퇴 후엔 현장과 학계를 잇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허허. 모든 게 뜻대로 되고 있어요.”
 
  ― 그런데 아직 ‘은퇴’는 아니죠.
 
  “그런가요. 하긴 아직 일을 하니까요. 지난 2010년 성남아트센터를 나올 때도 ‘완전히 은퇴’라는 생각이었는데, 충무아트홀에서 부르더군요. 그땐 수서에 사무실까지 얻어 ‘이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야지’ 싶었는데….”
 
2016년 1월 충무아트홀 사장직 퇴임식. 직원의 送辭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사진=조선DB
  그때 그의 나이 76세였다. 충무아트홀 사장직 제안이 왔을 당시, 이젠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한다며 몇 번 고사의 뜻을 밝혔다. 한데 중구청장까지 나서 삼고초려 했다. 거절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왕지사 열심히 하자 싶었다. 3년 임기를 채우고도, 1년씩 두 번을 연임했다. 그렇게 81세가 되던 지난 2016년 완전히 퇴임했다. 그러고도 1년만 더 맡아달라는 얘기가 나왔다. “팔십 넘도록 국민 세금으로 먹고살았으면 은퇴해야지, 나도 양심이 있다”며 잘라 말했다. 그의 퇴임식은 오랫동안 회자됐다. 직원들이 눈물까지 흘렸다. 20대 막내 사원의 송사(送辭)를 들으며 그도 울었다.
 
  ―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소임을 갖고 계신가요.
 
  “현장에서 느끼고 깨달았던 지혜를 나누고, 멘토링하고, 좀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후원하며 길잡이가 돼 주는 거예요. 또한 학계와 현장을 잇는 네트워킹, 코디네이션 역할도 하는 거지요. 내 도움으로 그 사람이 잘되는 걸 보는 게 좋더군요. 언젠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그랬죠. 상대방이 행복한 걸 보며 행복을 느낀다고요. 내 마음이 꼭 그래요.”
 
  ― 아직 방학인데 일찍부터 나오셨습니다.
 
  “아침 7시30분이면 나와요. 출근해서 전자결재부터 하고, 이메일 확인하고요. 그 밖의 대부분은 나만의 시간을 보내죠.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다가 원장실이라는 독방에 있으니까 고독하기도 해요. 나이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일찍 나오는 거예요. 오전에 일 처리하고 11시 되면 나가려고요. 서울에 점심 약속도 있고, 일주일에 세 번은 헬스클럽도 갑니다. 현장에 있을 때는 매일 새벽 6시에 무조건 운동을 하고 출근을 했었는데 그렇게는 못 하고요.”
 
  ― 학교에 있어 보니 어떠십니까. 학생들에게 거꾸로 배우는 것도 있지요.
 
  “그럼요.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니까요. 1년에 한두 번 300명 모두를 모아놓고 자유 주제로 강의를 하거든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젊어지는 것 같아요. 날마다 새로운 요즘 세대의 용어를 배우기도 바쁘고요. 그럴 때면 내가 교수 맞나 싶기도 해요. 학생들보다 더 알아야 하는데 오히려 배우고 있으니까요. 컴퓨터나 카카오톡 같은 것도 학생들한테 많이 물어봅니다. 그럴 땐 조금 부끄럽긴 한데, 부끄러워하면 그만큼 또 늦어지니까요.”
 
 
  “호랭이 왕왕!” 응어리진 유년 시절
 
지난 2002년 세종문화회관 사장 당시에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있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국내 초연을 성사시켰다. 사진=조선DB
  살짝 웃음이 새 나왔다. 문화예술계의 거목(巨木)인 그가 새파란 문화예술학과 학생들에게 카카오톡에서 이모티콘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쯤에서 그의 업적을 짚어본다.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민정 이양으로 1963년 공보부 문화과에 들어가며 예술계에 발을 들였다. 이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서울예술단,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까지 국내 주요 문화예술기관장 자리를 역임했다. ‘예술경영’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절. 공연문화의 문턱을 낮추고, 예술인들을 지원하며 대중문화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무기였다. 1989년, 서울예술단 부임 때의 일이다. 상급 기관인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예술단이 성격이 다른 ‘공보처’ 소속이 된 적이 있다. 이러면 예술단이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소속을 바꾸려면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의 허락이 필요했다. 여러 차례의 면담 요청에도 답이 없자, 이 원장은 국회에 참석한 이 장관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예술단 현황을 브리핑했다. 이후 문화부로 소속을 바꾸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열악한 예술단 연습실을 예술의전당 지하실로 옮기는 성과까지 거뒀다.
 
  협상가 기질도 크게 한몫했다. 1996년, 예술의전당 취임 이후 이 원장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빠져 있던 조직문화를 쇄신하기로 했다. 우선 저명인사에게 맞춰졌던 안내틀을 고객 눈높이로 규격화했다. 서초동 주민들을 위한 무료 영화 상영도 기획했다. 하지만 이처럼 빠른 개혁은 노조원들의 반발을 샀다. 이 원장은 콘서트홀 앞에서 꽹과리를 치며 시위 중인 노조원들에게 ‘문화예술을 향한 진심’을 호소했다. 이후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금 현장 투표를 해서, ‘사퇴찬성’하는 표가 더 많다면, 당장 물러나겠다”고 했다. 투표 결과는 반대 47대 찬성 11. 그렇게 예술의전당 설립 이래 3년 임기를 처음으로 채운 인물이 됐다.
 
  문화예술적 안목과 기획력은 덤이다. 몸담는 곳마다 ‘국내 초연, 국내 단독, 자체 제작’이라는 3대 전략을 고수했다. 관객들은 ‘이 극장에서 이번엔 뭘 할까’ 하며 기대했다. 티켓 매진은 수순이었다. 성남아트센터 재직 시에는 성남시의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 ‘김훈’의 〈남한산성〉을 제작했는가 하면, 충무아트홀에서는 자체 제작한 〈프랑켄슈타인〉으로 115억원이라는 수입을 올렸다. 당시 공연 흥행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2002년,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이 있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국내 초연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이는 세종문화회관 발레 공연 사상 최초로 흑자 기록으로 남았다. 강수진은 “훗날 자서전을 쓰게 되면, 한 페이지는 이종덕 사장의 얘기로 채울 것”이라고 했다.
 
  ― 김동호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은 이종덕만큼 공연을 많이 본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첫 공연은 뭐였습니까.
 
  “5세 때예요. 일본에 있을 때죠. 아버지와 영화관에서 〈마레이노 하리마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말레이시아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이었어요. 주제곡이 굉장히 좋았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그는 잠시 ‘하리마오~ 하리마오~’ 하며 주제곡을 불렀다. 이 원장의 뒤쪽 벽에는 양친(兩親)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오른쪽에 선대인, 왼쪽엔 대부인. 그리고 정확히 중간 지점에 이 원장이 앉아 있었다.
 
  ― 그 시절에 영화관이라. 집안 내력입니까.
 
  “그건 아니에요. 그저 한 번 데리고 갔던 거죠. 아버지는 일제 때 징용으로 일본에 가서 인쇄소를 운영했어요. 번듯한 건 아니고 영세한.”
 
  ― 오사카에서 태어나셨죠. 일본에선 언제까지 사셨나요.
 
  “나카모토(中本)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가 1945년도에 해방이 되면서 한국으로 왔어요. 3녀 1남 중 막내인데, 아버지에 이어 2대 독자입니다. 시모노세키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올 때 구명조끼를 입혀주시던 모습이 아직 선연해요. 부산에 내려 기차 타고 서울로 올라왔고 지금의 광명시인 시흥군 서면으로 가, 서면초등학교에 다녔어요.”
 
  ― 초등학생 때 설움이 많았겠습니다.
 
  “일본에서부터 왕따였으니까요. 조센징, 닌니쿠 쿠사이(마늘 냄새) 소리를 들으면서요. 어렸지만, 고국이 그리웠죠. 근데 한국에 왔더니 ‘쪽발이’라고 놀려요. 서면초등학교 다닐 때 학예회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한국말을 못 하니까 호랑이 역을 줬어요. 대사는 ‘왕왕!’ 이거 하나였어요. 서러워서 공부를 악착같이 해서 경복중학교에 입학을 했죠. 그땐 경기, 경복, 서울이 3대 중학교였거든요. 학교에 현수막이 붙었어요. ‘호랭이가 경복중학교에 합격했다’ 이렇게요.”
 
  ― 짠합니다.
 
  “인생에서 아주 작은 에피소드 중의 하나예요.”
 
  ―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부모님 속도 많이 상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너는 오리 이원익 정승의 14대손’이라며 청백리(淸白吏) 정신을 강조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도 수심에 잠겨 있으면, ‘그럴 때일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라’고 했어요. 어린 마음에 ‘이렇게 놀림을 당하는데 더 낮추면 어떻게 사느냐’고 했더니 ‘지금은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낮출수록 큰사람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커서는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는데, 어릴 때는 그 뜻을 몰랐어요. 그래서 옆길로 샐 뻔도 했죠.”
 
  ― 탈선 말씀입니까.
 
  “중학교는 물론 대학교 다닐 때까지도 일본서 났다는 얘기는 안 했어요. 왜 말이 어눌하냐고 물어도 끝까지 안 밝혔어요. 쪽발이 소리가 너무 싫어서요. 그래서 중학교 때 유도를 시작했어요. 괄시하고 괴롭히면 그냥 주먹으로 쳐버리려고, 허허. 그때부터 성격이 조금 바뀌었어요. 와일드해졌지. 내가 A형인데, 사람들은 O형으로 많이 봐요. 아주 친해지면 ‘A형 맞구나’ 그래요. 사실은 아주 소심하고 내성적이에요. 얼굴도 잘 빨개져요. 특히 여성들하고는 어려워서 말도 잘 못 하고요. 그렇게 아주 쫀쫀한 인간이었는데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고, 주먹도 가끔 쓰고 그러다 보니까 많이 바뀌었죠.”
 
  ― ‘주먹도 가끔 썼다’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십니다.(웃음)
 
  “중학교 때 유도 하고, 이후엔 레슬링도 했어요. 자연스럽게 힘 좀 쓰는 친구들이 옆에 붙었고, 연세대학교 다닐 때는 ‘광화문 패거리’라고 깡패들하고도 잠깐 어울렸어요. 힘없는 사람들 괴롭히는 그런 깡패가 아니라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그런 종류였어요. 어린 생각으로는 그게 정의의 사도처럼 보이기도 했었죠. 그때 우리가 종로에 있는 커피숍 ‘황정유’에 자주 갔어요. 폴 앵카(Paul Anka)의 ‘유 어 마이 데스티니(You are My Destiny)’라는 노래가 유행할 땐데, 황정유가 선곡이 아주 좋았거든. 그러다가 깡패들과 인연을 딱 끊은 게 1957년도에 학보병으로 있다가 잠깐 나왔을 때예요. 패거리가 불러서 장충공원에 가봤더니 조병옥, 김두한, 전진환 등 야당 정치인들이 정견 발표를 하는데 그 정치집회를 방해하려고 화염병을 던지라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 학생이 정치집회 방해공작에까지 동원된다는 게 못마땅하더라고요. 불의를 참지 말자는 거지, 정치깡패 노릇은 할 수 없다 싶어서 이제 그만 하자, 그때 딱 끊었어요.”
 
 
  대통령과의 인연을 잘 활용하다
 
문공부 사무관 시절, 월남 공연을 떠나기 앞서 연예협회 관계자와.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가수 고설남, 이종덕, 고운봉, 신세영. 사진=조선DB
  ― 그런데 사학과를 나와서 어떻게 문화예술계에 발 디딘 겁니까.
 
  “사학과를 나오면 보통은 선생이나 교수가 됐어요. 그 무렵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한 집의 가장으로서 공부를 고집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죠. 그즈음 우연히 공무원 공고를 봤어요. 군사정권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원을 뽑는다고요. 1기였죠. 공부에 소질이 좀 있어서 바로 붙었어요. 2년 정도 다녔을 때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됐어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해체되고 민정 이양이 되면서 공보부로 간 거예요. 거기서 영화과를 지망하려고 했는데, 당시 공보부 차관이던 고종사촌 매형이 문화과를 추천했어요. 영화과는 유혹이 많은 곳이라면서요. 매형이 혜안이 있었죠. 문공부를 시작으로 무탈하게 50년 이상 무대예술 업무를 봤으니까요.”
 
  ―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그 뒤로도 이어졌죠.
 
  “문공부 사무관 시절이었어요. 1972년 4월 7일. 한국민속예술단(현 국립무용단)이 경남 진해 해군부대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청와대 행사는 저희가 다 맡았어요. 박 대통령 내외가 참석했고, 안보외교 관련 장차관까지 한 200명이 온 자리였어요. 귀빈이 많이 온 자리라 긴장을 잔뜩 하고 있는데, 경호처장이 오더니 대통령이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뭐가 잘못됐나 싶어 겁을 먹고 갔는데 박 대통령이 ‘요새는 어디서 일하나?’ 그래요. 10년 전 함께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죠. 국가재건최고회의 때 그는 수장이었고 저는 신입 공무원에 불과했는데, 어쩌다 구내 이발소에서 함께 이발하고, 아침 청소를 마치고 같은 해장국 집에서 국밥을 먹은 적이 있었어요.”
 
  ― 시선집중 됐겠는데요.
 
  “저 사람은 뭔데 사무관 주제에 대통령 옆에 앉아 있나 했을 거예요. 공연은 안 보고 다 저만 보는 것 같았어요. 그때 박정희 대통령 옆에는 장관도 잘 못 앉았어요. 굉장히 강하고, 카리스마가 있어서 눈 맞추기도 어려웠거든요.”
 
  ―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어요. 아는 척 한마디 하더니 아무 말도 없었거든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다가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어요. ‘우리 과에서 지금 보시는 무용단을 데리고 8월에 뮌헨올림픽에 참석한다’고요. 그때 육영수 여사가 상체를 내밀며 저를 보더니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도록 신경 써 달라’고 했죠. 박 대통령도 ‘장관한테 내가 지시할 테니 그리하라’고 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난리가 난 거예요. 어떻게 대통령을 아냐면서. 그때부터 ‘문공부에서는 이종덕이가 장관보다 세다’고 소문이 났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아첨하는 건 똑같다니까요. 허허.”
 
  ― 조직에서는 시기도 많이 샀겠습니다.
 
  “안 그랬다면 거짓말이죠. 이럴 때일수록 우쭐하면 안 된다, 더 겸손해야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이랑 찍은 사진은 간직하고 싶잖아요. 사무실 책상 유리 밑에 가만히 끼워놨거든요. 과장이 그걸 보고 국장한테 보고한 거예요. 국장이 부르더니 ‘사무관 주제에 건방지게 뭐야! 그거 불경죄니까 함부로 붙여놓지 마’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에 갖다 놨어요.”
 
  ― 그 사진 지금도 있나요.
 
  “지금은 없어요. 그 이후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TV에 나왔는데, 어머니께서 ‘이 사람이 대통령 꿈을 꾸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정권 바뀌면 미움받을 거라면서 제가 그 당시 찍었던 사진을 다 없애버리셨어요.”
 
  ― 아, 어머니 입장에선 아무래도.
 
  “그래도 문득문득 아쉬워요.”
 
  당시 대통령과의 친분(?)으로 혜택을 본 건 전혀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귀여움’ 좀 받는 게 전부였다. 이 원장은 “인사에 눈독 들이고 정치적으로 나갔다면 오늘날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청백리 DNA’를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살짝 요령은 부렸다.
 
  “대통령이 저를 귀여워하는 걸 알고 그걸 어떻게 이용했냐면, 예술인들의 처우 개선을 꾀했습니다. 그때는 예술인들을 외국에 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달러 한 푼이 아쉬울 때였으니까요. 해외 콩쿠르에도 나가고, 국제적 무대에 서면서 감각도 키워야 성장하는데 말이에요.”
 
  그 당시 예술인들이 출국을 하려면 절차가 굉장히 복잡했다. 우선 치안본부에서 단순 신원 조회를 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사상 검증과 사촌의 신원까지 파악했다.
 
  “보름 뒤가 콩쿠르 날짜인데, 신원 조회하는 데만 두 달이 걸리다니요. 빨리 대회에 참가해서 상을 타야 하는데요. 그 절차를 간소화시켜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그게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지요.”
 
  ― 반대로 한국에 들어온 해외 예술가의 사상 검증도 이뤄졌죠.
 
  “외국인 공연허가를 당시 문공부에서 했습니다. 그땐 연극 대본 심사도 했어요. 사상 검증 차원에서요. 물론 필요한 경우도 있었지만, 말도 안 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한 날은 사무실에 어떤 민원인이 한참을 서 있어요. 지금으로 치면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는 사장인데, 가게에서 노래하는 필리핀 밴드를 허가해 달라는 서류를 들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가수가 사상이랄 게 뭐 있어요? 도장만 찍어주면 5분이면 끝날 것을, 그걸 아무도 안 해주고 있었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면서 계속 세워둬요. 알고 보니 ‘급행비(빠른 처리를 위한 돈)’ 달라는 속뜻이었어요. 저도 공무원이었지만, 참 썩었다 싶었습니다. 그런 절차의 부조리도 다 뜯어고쳤습니다.”
 
  그때 서류를 들고 있던 사람이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이다. 그가 사업 번창 전, 70년대 ‘초원의집’이라는 업소를 운영할 때 이야기다. 안 전 회장과 이 원장은 그때의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 일선에서 조금 떨어져 계신 지금, 문화예술계 현장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현장에 있을 때도 했던 말이지만, 예술단체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술계가 좌경화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예술가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충실하려면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류의 고귀한 창조물인 예술은 인간의 삶을 고양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상관없이 보장돼야 할 유산이지요. 정권과 밀착해 문화예술계를 왜곡시키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코드인사로 물들이고 자신과 관련된 일부 단체와 예술가를 위한 지원, 독식은 건강한 문화예술계를 무참히 깨뜨리는 행위죠. 그런데 이번 정권 들어서는 참 아쉽습니다. 요소요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잖습니까.”
 
  ― 그러고 보면 55년 동안 정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항상 요직을 지키셨습니다.
 
  “언론 통폐합 시절 보도과장을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전국 언론인들 기록 카드가 제 방에 있었죠. 그중엔 블랙리스트도 있었어요. 주사파같이 사상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장한테 대드는 사람들도 전부 블랙리스트에 올라와 있더군요. 억울한 사람들인 거죠.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데, 대서특필할 일이었어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잖아요. 이상재 보안사 언론검열단장에게 어느 날 저녁을 먹자고 해서 이런 사정이 있으니까 억울한 사람들은 빼주자고 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흘러, DJ 정권이 됐죠. 그땐 그 사람들이 이미 다 복직을 한 상태였는데, 정권이 바뀌어서 제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그 언론인들이 나서서 ‘이종덕만은 살리자’고 해줬습니다. 그때가 예술의전당 사장 할 때인데, 무리 없이 세종문화회관으로 스카우트까지 됐고 노무현 정부 때도 굳건했습니다. 이제 와 얘기지만, 사실 저도 ‘이 정권에서 왜 나를…’이란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긴 무대
 

  그를 수식하는 말은 또 있다. 문화계마당발. 일궈 놓은 친목모임들이 이를 증명한다. 낭만파클럽, 광화문포럼, 예장로터리, 한강포럼, 각종 예우회…. 모두 문화예술계 활성화를 위한 모임이다. 한땐 20개에 달했다. 성남아트센터 재직시절에는 성남 주민을 대상으로 ‘탄천 문화포럼’을 만들었다. 지난 1996년에는 연합회도 발족했다. 전국문예회관연합회(현 한국문예회관연합회)다.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할 때 지방공연을 다니면서 지역 문예회관이 얼마나 낙후돼 있는지를 보게 됐습니다. 당시 연간 공연 예산이 한 푼도 없는 지역 문예회관도 있었어요. 당시 정부에서 회의적이었지만 지방과 도시의 문화 격차를 없애고 지방문화 융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립 20여 년 이후, 한문연(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은 현재 연간 예산이 270억원에 달할 만큼 활성화됐다. 한편 봉사모임도 있다. 1974년 ‘그대 있음에’라는 자선공연의 연으로 시작한 나환자 정착촌인 ‘성 라자로 마을’ 돕기 활동을 지금까지 한다.
 
  ― 저 사람 보면 꼭 젊었을 때 나 같다, 하는 후배가 있습니까.
 
  “남을 배려하면서 적극적인 분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유희성 서울예술단 이사장 같은 분도 그중 하나죠. 내가 예술단에서 데리고 있던 친구예요. 항상 노력을 많이 하고 꾸준히 공부를 합니다. 밑에 있던 직원들이 이제는 대부분 수장 위치에 있어요. ‘예우회’라고 해서 한 12명 정도가 함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만나요. 수장들이 모여서 군림하고 목에 힘주는 모임이 아니라 후배들에게 어떻게 베풀지 고심하는 모임이에요.”
 
  ― 마당발 남편을 두면 부인이 마음고생이 심한 법인데요. 그런 모임들에 내는 회비도 만만찮겠고요.
 
  “그래서 와이프한테 항상 미안해요. 집에는 쓸 돈도 없을 텐데. 미안함 속에서도 행복한 것은, 남들이 나로 인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에요.”
 
  ― 초창기 예술인들은 그야말로 ‘광대’ 취급을 받았었죠.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봐와서인지 베풂에 한이 맺히신 듯합니다.
 
  “말로 다 못 합니다. 안타까운 일을 많이 봐 왔어요. 저 불우한 예술가를 어떡하나…. 예술을 하고 싶은데, 너무나 뛰어난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못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많이 울기도 했어요. 지금도 많지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굳은살처럼 박여 있습니다.”
 
  ― 여가 시간에 주로 뭘 하십니까. 일상의 작은 낙(樂)이 있다면요.
 
  “워낙 영화광이에요. 아내하고 일요일에 성당 마치고 영화 보는 거예요. 그때가 마음이 가장 편해요. 아내와 함께 영화 보는 그 순간과 공간이 내 안식처예요.”
 
  ― 최근 본 영화 중에 추천할 만한 거 있습니까.
 
  “요새는 봐도 자꾸 잊어버려서…. 아주 최근은 아닌데 〈아무르〉라는 영화가 있어요. 예수 작품인데, 피아니스트 여성이 나오는데 남편도 있고요. 나중에 여자가 치매에 걸리는데 남편이 부인을 죽여요. 그 장면이 너무 가슴 아프면서 치매라는 게 부부간에도 그렇게 힘들구나 싶었어요. 요새는 자꾸 잊어버려서, 아주 확실히는 말 못 하겠어요.”
 
  ― 두 분이 문화예술 감성이 잘 맞나봅니다.
 
  “그럼요. 연초에 신년음악회부터 시작해서 열심히 보러 다녀요.”
 
  ― 부인을 혹시 무대에서 만나셨습니까.
 
  “대학교 때 잠깐 누님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조카가 돈암초등학교에 다녔었어요. 가정방문으로 조카 담임이 집에 왔어요. 한눈에 반해버렸지. 조카한테 물어보니 이름이 ‘김영주’라 하더라고. 그때부터 돈암초 근처를 배회하면서 마주치길 기다렸지. 그렇게 만나가지고 연애할 때 음악다방도 같이 가고 그랬어요.”
 
  ― 와! 조카의 담임과…. 연애시절 돌아보면 번뜩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영화 스틸컷처럼.
 
  “연대 다닐 때 내가 좀 흔들렸다고 했잖아요. 깡패들하고 길게 어울릴 뻔했다고. 그걸 아내 집에서 안 거야. 만나지 말라고 반대를 한 거지요. 그랬더니 와이프가 집을 나와버렸어요. 이 일을 어째. 방을 하나 얻어서 둘이 같이 있자, 했어요. 그때 수제비를 끓여준다기에 보니까 완전 풀떼기처럼 돼 있는 거야. 물이 끓기 전에 반죽을 넣어버린 거죠. 아주 부끄러워하면서 사실 처음 끓여본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그냥 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었는데, 아주 맛있었어요. 연애시절뿐만 아니라, 그게 내 인생 전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에요. 절대로 잊을 수 없지….”
 
  ― 그 시절, 그것도 교사 신분에 가출이라니요. 모든 걸 건 셈인데, 원장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요.
 
  “그래봤자 사흘 정도밖에 안 돼요. 3일인가 지났는데, 엄마한테 미안하다면서 펑펑 울더라고요.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었다고 했잖아요. 성격을 후천적으로 고쳐야겠다, 계속 의식했거든요. 얼굴이 어둡고 굳어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 보고 고치려고 해서 지금은 좀 덜한 거예요. 옛날에 나한테 얘기를 하려다가, 내 표정을 살피고 그냥 쓱 지나갔던 친구가 있어요. 그런 걸 느낄 정도로 내가 상당히 섬세하다고요. 사람들 만나서 조금만 얘기해 보면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요. 어떡하면 저 사람에게 부담을 안 줄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해요.(그런 면을 좋아한 거 아닌가 싶어요)”
 
  그는 슬하에 4녀를 뒀다. 선애, 상온, 정온, 은경씨다. 넷 모두 서울 주요 대학교에서 각각 경영학, 무용, 성악, 불문학을 전공했다. 모두 결혼 후 미국과 중국에서 흩어져 살다, 막내딸 은경씨는 얼마 전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 원장은 “비행기를 안 타면 손주들을 만날 수 없으니 허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대견한 마음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사진 하나를 보여줬다. 흑백사진이었다. 이 원장 부부가 요람 속 사내아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고, 저 뒤편에서 네 명의 딸이 이를 지켜보는 모습이다. 그에겐 사실 막내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준호. 1981년 8월 31일. 9세이던 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살아 있으면 47세가 됐겠다. 누구랑 결혼을 했을까, 아이는 몇이나 봤을까, 내 손주에게 너는 어떤 이름을 지어줬을까, 이런 생각 가끔 해본다”면서 애써 덤덤하게 말했다.
 
  ― 인터뷰 속에 희로애락이 촘촘히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85년 인생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씀 한마디 해주시죠.
 
  “인간관계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일순간 사라지기도 하고, 끝난 것 같아도 돌고 돌아 언젠가 이어지기도 해요. 그러니까 관계에서 결코 찜찜함을 남기면 안 됩니다. 언제 만나도 떳떳해야 하고, 고마움은 어떻게든 표현해야 해요. 그렇다고 기대를 갖는 건 결코 안 됩니다. 예전에는 정말 내 일처럼 도와줬던 사람들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회의를 느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인데 어떡해요. 그렇게 여겨야 해요. 인생이라는 게 참 짧지만, 사는 동안은 길다고요.”
 
  ‘낭만파클럽’의 한 멤버는 이렇게 말했다. “이종덕은 희대의 낭만파다. 멋을 알고,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한다.”
 
  이 원장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한 번도 무대 위에 설 생각은 안 했느냐’고. 결국 묻지 않았다. 그의 인생 자체가 연극이고, 노래라는 걸 알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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