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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목숨 걸고 돌아온 李完九 전 총리

“(성완종에게)그때 위로의 말 건넸더라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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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1심 징역 8개월, 2심 무죄, 대법원 무죄 확정
⊙ “재판… 고통스러워요. 참 고통스러워요.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 “2만3000쪽 재판기록 정리해 모든 법조인과 로스쿨 재학생에게 보내겠다”… 검찰총장 등 수사검사 전원에게 민·형사 소송제기
⊙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세상, 이념의 경직성에 빠져선 안 돼”
⊙ “독일 메르켈 총리더러 누가 ‘올드 걸’이라고 하나요?”

李完九
1950년 출생. 성균관대 법대 행정학과 졸업, 단국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 제15회 행정고시 합격 / 충북지방경찰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제15·16·19대 국회의원, 충남지사,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 새누리당 원내대표, 국무총리 역임
사진=조현호
  이완구(李完九·68), 그가 다시 돌아왔다. 성완종 회장(전 경남그룹 회장)의 죽음으로 70일 만에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던 그였다. 성 회장이 2015년 4월 9일 오후 3시32분께 북한산 형제봉 인근서 숨진 채 발견된 이후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까지 그는 긴 시간을 은둔하며 보내야 했다.
 
  진실과 거짓이 함께 펄펄 끓어 넘치는 시간이었다. 넘쳐흘러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유무죄를 떠나 그 절절한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른다. 알지 못하는 힘에 끌려 파멸의 길로 들어섰던 것은 타고난 운명일지 모른다.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은 인생이 공평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완구는 긴 시간을 거쳐 죽었다가 살아났다. 현실 정치인으로 돌아와 새로운 운명과 맞닥뜨려야 한다. 진실은 오직 신(神)만이 알겠지만 법적 무죄를 사람들이 양심의 진실로 믿어줄까. 김종필·반기문·안희정도 없는 충청대망론의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릴 수 있을까.
 
  어쩌면 《월간조선》과의 인터뷰가 재점화의 첫 시동일지 모른다. 이 전 총리나 기자 역시 매우 조심스러웠다.
 
  이틀에 걸쳐 10여 시간을 만났다. 7월 6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의 한 회의실에서 만나 헤어진 시각이 밤 10시를 넘겼다. 그는 장장 8시간 동안 화장실 한 번 가지 않았다. 강한 목소리 톤이 일정했다. 기자에게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다.
 
  7월 9일 오후 3시 서울 도곡동 그의 자택에서 다시 만났다. 현관문을 나설 때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넘었다.
 
  이 전 총리는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했고, 자신에게 결벽증이 있다고 했다.
 
  정의나 도덕은 자기 이익을 억제하면서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때 모두가 이익을 똑같이 공유하는 윤리 체계이다. 그의 결벽 주장이, 그의 무죄 판결이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을 줄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무력감을 심어줄지 모르겠다. 이 기사는 신만이 아는 그의 결백과 한 배를 타게 됐다.
 
 
  “돈 받은 증거 나오면 목숨 내놓겠다”
 
지난 6월 24일 오전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이완구 전 총리는 성완종 전 회장에게 30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하며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충남도지사 시절인 2009년 12월에는 “세종시 원안 추진은 충청의 영혼과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며 멀쩡한 도지사직을 그만두었다.
 
  2003년 한나라당 ‘행정수도건설 특별법’ 추진위원장을 하면서는 “이 법이 통과 안 되면 국회의원을 그만두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내에서는 특별법 통과가 안 될 분위기였으나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국회의원직은 살아났다.
 
  ― 자신을 너무 학대하는 것 아닙니까. 쟁취하기 위해 무얼 걸어야 합니까.
 
  “목숨이란 표현을 쓴 것은 확신 때문이죠. 확신이 없으면 그런 얘기 못합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거는(그것은) 나의 성격, 캐릭터인데 지사도 던져버렸잖아요.”
 
  ― 유죄판결이 설령 났어도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왜냐면 진짜로 안 받았는데 왜 죽어요? 대법원 판결이 유죄로 났으면 어땠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음… 글쎄… 답변하기가…. 지금도 사람들의 1/3은 내 말을 믿을지라도 2/3은 받았겠지, 라고 하는 정서도 있었다는 걸 계산하고 있어요, 솔직히…. 그걸 어떻게 입증할까요. 누가 나보고 목숨을 걸라고 했나요? 걸라고 한 게 아니잖아.”
 
  갑자기 부인 이백연 여사를 부르더니 약을 가져오라고 했다. 지난(持難)한 재판 과정에서 복용했던 약이었다. 이 대목만은 비(非)보도를 부탁했다.
 
  “김 기자에게 이걸 보여주려고 약을 준비했겠어요? 고통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여러 번 했어요.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주니까….”
 
  이 전 총리는 그의 집 한쪽에 쌓아둔 2만3000쪽 분량의 재판기록을 보여주었다.
 
  “기록을 안 없애려고 해요. 보통 정치인은 무죄가 나오면 잊히길 바라지만 저는 들추려고 해요.”
 
  이 전 총리는 성완종 전 회장으로부터 3000만원을 ‘비타 500 박스’로 받았다고 첫 보도한 《경향신문》 이모 사회부장과 박모 편집국장, 당시 수사를 맡았던 문무일 검찰총장과 수사팀 검사 전원, 검사의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언을 한 검찰 측 증인까지 모두 19명을 민·형사 고소했거나 소송에 착수했다.
 
  그는 “전직 총리가 이런 정도로 고통을 겪었는데 이 나라 사법정의가 살아 있는가”라고 했다.
 
  “재판기록을 모든 법조인(판사, 검사, 변호사)과 로스쿨 재학생에게까지 보낼 생각입니다. 내가 승소할지 모르겠으나 만약 승소한다면, 소송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그게(환원한다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후세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재판… 고통스러워요. 참 고통스러워요.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검찰을 이길 수가 없어. 어떻게 검찰을 이겨. 아, 힘들어. 내가 아무리 현직 국회의원, 전직 총리여도 이길 수가 없어요. 특히 문무일 검찰총장은 당시 수사팀장으로 본인이 과학수사를 위해 포렌식 기법을 검찰수사에 도입한 장본인임에도 증거파일을 조작하기까지 했어요. 물론 문 총장이 당시 수사팀장으로 이러한 보고를 받았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 2만3000쪽이나 되는 자료를 어떻게 다 보내요. 한풀이하시려는 것 아닌가요.
 
  “(보낸들) 2만3000쪽을 누가 다 보겠어요. 다 볼 수도 없어요. 3심 동안 몇만 페이지의 기록이 왔다 갔다 한 것 아닙니까. 압축한 게 대법원 상고심 서류예요. 우리 쪽은 대략 5차례 걸쳐서 제출했고 검찰은 상고이유서를 3차례에 걸쳐 냈어요. 법조계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으로 봐요. 자료도 통상 30쪽이 안 넘는데 검찰이 총 3회에 걸쳐 약 290여 쪽을, 우리는 5회에 걸쳐 약 800여 쪽 분량의 의견서를 냈습니다.
 
  이 쌍방의 자료를 보면 사건 전모를 압축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조인들도 스스로 판단을 해보라는 의미예요. 자료를 PDF 파일로 만들어 발송할 생각이에요.
 
  한마디로 검찰이 페어(공정·fair)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고통스럽게 매몰돼 ‘이놈들!’이라고 할 만큼 속 좁은 사람은 아니에요.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는 겁니다.”
 
 
  ‘비타 500 박스’는 가짜 뉴스
 
작년 12월 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 뒤 이완구 전 총리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2016년 1월 15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같은 해 9월 27일 2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대법원 판결은 작년 12월 22일 내려졌다.
 
  검찰과 변호인 측 공방은 어느 재판보다 치열했다고 한다.
 
  “한 나라 총리를 지낸 이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법정의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어떤 정치인이 현직 검찰총장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합니까. 우리나라 진보 언론과 힘겨운 싸움을 하려고 할까요. 왜 내가 다시 법정 투쟁을 또 합니까. 그것은 굉장한 용기예요. 용기….
 
  나는 (현실 정치에서) 은퇴한 사람이 아닙니다. 현실 정치인이 이걸 만지작거려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나요. 그러나 명분상 사법정의, 개인적으로 (내 안에) 맺힌 것이 없진 않겠지….”
 
  기자는 오랜 시간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진실 공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당분간 여백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법정 공방에서 드러난 팩트와 진실은 나중 다시 만나 취재하기로 약속했다. 기한을 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성완종 전 회장이 3000만원을 ‘비타 500 박스’에 담아 전달했다는 의혹만은 소개한다. 워낙 ‘비타 500 박스’ 보도가 강렬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2015년 4월 15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전 새누리당 의원)이 2013년 4·24 재선거를 앞두고 서울에서 승용차에 3000만원이 든 ‘비타 500 박스’를 싣고 이완구 총리의 부여 선거사무소를 방문해 전달한 정황이 구체적으로 제기됐다’고 단독 보도했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재판 과정에서 ‘비타 500 박스’가 거짓말로 드러났다”고 했다.
 
  “성 전 회장 비서실장이던 이용기씨는 검찰의 진술조서에서 ‘어느 기자에게도 (비타 500을) 이야기한 적 없다’고 했고, 재판(2015년 10월 27일 공판 증인진술) 때도 ‘성 회장의 비서들(금기웅·임진형)이 비타 500 박스를 직접 언급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진술했어요. 운전비서 여흥수씨는 ‘(비타 500을) 먹으려고 차에 가지고 있는 것을 한 번 얘기한 적은 있지만 비타 500에 대해 먼저 얘기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총리직 사퇴에 결정적 계기가 된 ‘비타 500 박스’에 대해 성완종 비서진은 언론이 오보를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재판 과정에서 이런 진술이 나왔어요. 참고하세요.”
 
  성 전 회장의 비서실장인 이용기씨의 재판 진술 내용이다.
 
  〈…편집국장이 ‘그러면 작은 박스라고(라는) 그런 것은(말을) 수행비서한테 들었으니 음료박스 정도로 가겠다’라고 주장을 해 ‘그것도 안 된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기사를 안 쓰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편집국장이 ‘그러면 판갈이를 해보겠다’ 하면서 기사를 수정해서 직접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보니 ‘비타 500 박스’ 이야기 기사가 뜬 것이다.…〉(이용기의 2015년 10월 27일 1심 법정진술)
 
  《경향신문》 보도 후 당시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타 500 병’에다 이 전 총리의 얼굴을 넣은 합성 사진이 퍼져나갔다. ‘비타 500의 새로운 광고 모델이 기용됐다’는 식의 설명까지 붙은 채. 그는 도덕적으로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전 총리의 말이다.
 
  “지금도 언론은 ‘비타 500 박스’가 가짜 뉴스였다는 걸 안 씁니다. 내 재판에 항상 10명 정도의 기자가 왔었어요. 한 줄도 안 나왔어요. 이것은 아니야, 언론이 다 죽었습니다. 이 나라 언론은 죽은 거예요.”
 
  ― 어쨌든 지옥문까지 갔다 오셨습니다. 외람된 표현입니다만 갔다 오시니 인생을 좀 아시겠던가요.
 
  “그러니까 성완종 전 회장이 2015년 4월 9일 숨진 채 발견됐는데 그해 3월 22일 전화 통화를 했어요. 저는 ‘억울한 일이 있으면 수사기관에 잘 얘기하면 될 것 아니냐’고 했어요. 드라이하게. 좀 전화를 냉랭하게 받았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때 좀 더 따뜻한 말로, 위로의 말을 건넸더라면 아마 이런 일이 안 벌어졌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이런 얘기 부질없어요. 지금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지만 그 죽음을 덮을 만큼 어떤 뭐랄까… 연민의 정이 들어 마음이 몹시 아파요.”
 
 
  “김 기자, 나 알고 보면 골치 아픈 사람이에요”
 
2015년 4월 27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이임식을 마친 이완구 당시 총리가 차에 타기 전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완구 전 총리는 자신의 결벽증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했다. 매우 흥미 있는 얘기였다. 아쉽다면 그의 육성이 아닌 제3자의 입에서 들었다면 더 대단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결벽증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정치판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키아벨리즘이 통용되는 공간이다. 분명한 사실은 일찌감치 그는 ‘큰 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찍부터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왔다. 다만, 자신은 예외적이고 남보다 ‘평균 이상’의 도덕적 우월감이 있음을 내비쳤다.
 
  “…아니야. 대단한 결벽증이야. 내 아들이 둘 있잖아요. 한 놈은 미국 교수, 한 놈은 김&장 변호사예요. 결혼한다길래 첫마디가 뭐였겠어요? ‘그 여자 사랑하나?’ ‘이혼 안 할 자신 있나?’였어.
 
  저는 며느리가 어디 사람인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장인이 누군지 묻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충남도지사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2006년 큰아이 장가를 보낼 때 내 수행비서가 몰랐어요. 수행비서 김현철.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수행비서에게 ‘다녀올게. 기다리고 있어’ 그랬어요. 김 기자, 나 알고 보면 골치 아픈 사람이에요.
 
  (충남도지사 시절) 장인, 장모가 돌아가셨어요. 신문에 부고란이 있잖아요. 큰처남에게 ‘내 이름 빼라’고 했어요. 나보다 7세 위인 손위처남에게.
 
  처가에서 지금도 ‘사람 새끼’라고 생각 안 하죠. 날 사람이라 생각하겠어요? 사위가 제 이름 빼라는데. 내가 공직에 있으면서 조심하며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륜에 반한 짓이지. 제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요. 지금도 (처가에선) 섭섭한 마음이 조금 있어요. 이해는 하시면서도….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내가 (도지사 때) 외자유치를 하러 많이 돌아다녔어요. 그때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생전 아버지는 저를 엄하게 키웠습니다.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거 귀국을 했고, 조의금을 일절 받지 않았어요. 내 이야기만 듣지 말고 당시 《한겨레》 신문에 났으니 보세요.
 
  또 (재임 중) 충남개발공사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당시 광역단체가 공사(公社)를 만들어 자체 사업을 많이 할 때예요. 친이모의 아들이 응모를 했는데 신원조회에서 단순 음주운전이 걸렸어요. ‘빼!’”
 
  ― 공사 사장에 응모했나요.
 
  “사장이라뇨. 말단 신입으로 공무원으로 치면 9급 정도 되겠지. 12년 동안 이모랑 말을 안 해요. 우리 이모, 얼마나 섭섭하셨겠어요. 이모가 나를 안 만납니다.
 
  일제 강점기 때인 1934년 전에 증조부가 사셨던 땅, 우리 아버지가 상속받았는지 몰랐던 땅이 나왔어요.
 
  충남도청 이전 예정지에 편입된 토지 221m2입니다. 토지 보상금 2371만원을 국고에 귀속시켰어요. 제가 보상금을 받았다면 언론에서 ‘이완구, 보상금 얼마 받아’ 이렇게 쓸 겁니다.”
 
  ― 그렇게 써도 시비는 안 걸 것 같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 땅으로 도시 계획선 그었구먼…’ 하지 않겠어요?”
 
  ― 그럴 수 있겠네요.
 
  “100% 언론에선 그렇게 씁니다.
 
  나의 경험칙에선, 언론에서 1934년 전 증조부가 사셨던 땅이라고 친절하게 안 써요. 솔직히 두려웠어요. 나는 돈이 안 아까워요? 내가 왜 조상 땅을 포기합니까.
 
  저 결벽증이 있어요. 스스로에게 ‘내가 그렇게 깨끗해’ 하고 묻습니다. ‘깨끗하게 살았어? 진짜 돈 안 먹었어?’ 하고요.
 
  기본적으로 나는 남의 돈을 안 먹었어요. 남의 돈을 훔치고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느냐. 우리 집이 조금은 여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른에 홍성 경찰서장을 했어요. 우리 아버님이 생활비를 다 대 주셨어요. 1978년 결혼을 했는데 반포에 35평 아파트를 내 돈으로 사가지고 신혼살림을 한 것은 고시(考試) 출신자 중에는 나 정도였을 거야. 나는 지금도 돈을 안 만져요.”
 
 
 
“나는 지금도 돈을 안 만져요”

 
2014년 6월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사랑재에서 여야 원내대표 회동 당시의 모습.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록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수석부대표, 박영선 원내대표,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재원 원내수석부대표.
  ― 지갑도 없나요.
 
  “요즘은 갖고 다닙니다. 비서가 없기 때문에….
 
  공직에 있을 때는 지갑을 안 갖고 다녔어요. 돈에 대해선 몰라요. 서른부터 서장을 했는데 비서실에서 하지, 내가 (돈 계산을) 합니까. 원래 돈을 안 만지려고 하고요. 요즘도 우리 마누라가 계산합니다.”
 
  ― 오늘은 가지고 오셨나요.
 
  “갖고 왔어요. 특별한 경우 외에는 돈 안 만집니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장단점이야. 지나친 결벽증 측면에서 인간답지를 못해. 강점이 아니에요. 인간다운 맛이 없지요. ‘네가 쏴라’ 하는 데서 정리(情理)가 생기고 정신적 유대감이 생기는데 너무 그러니까 맛이 안 나는 거야. 몸에 밴 것이라 참 힘들어요.
 
  내가 도지사 사퇴한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지만, 그 연기군청 하급 공무원과의 대화 한마디, ‘어떻게 헐(할) 거예요?, (세종시 건설) 안 지켜지면’ 하길래 ‘내가 지사직 사퇴할게’라고 한 그 말,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지사직을 내놓은 거예요. 안 그러면 하등 지사직 내놓을 이유가 없었어요. 누가 나보고 나가라 그래요? 책임 묻겠다는 사람도 없었어요. 나가지 말라고 3000여 명이 데모하고,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네가 왜 사퇴하냐’ 그 난리를 쳤어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나만 생각한 거예요.
 
  결과적으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탄생을 내가 도와줬다고 우리 당(자유한국당) 지지자가 얘기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만인지, 자신감인지… 나는 정말로 웃기는 사람이에요.”
 
  생각해 보면, 이완구 충남도지사는 유별났다. 2006년 충남도지사에 당선되자 전임 도지사의 비서진이 모두 짐을 쌌다. 전임 심대평(沈大平) 지사는 충남도지사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했다. 이완구 신임 지사는 전임 지사 비서진 전부를 그대로 남게 했다. “비서실까지 바뀌면 충남 공무원과 신임 지사 간 소통할 연결고리가 없어진다”는 이유였다.
 
  “지방선거는 지방선거일 뿐이다, 시행착오가 두려워서라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뿐이 아닙니다. 도지사가 되자마자 법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누구든 도지사의 법률특보 특별보좌역’으로 보내 달라고 했어요. 지금도 법무부 직제에 그 자리가 있어요. 확인해 보세요. 차장 검사급으로 왔을 거야. 부지사급으로 대우하면서 모든 도정 업무에 관여토록 했어요. 참모회의에 참석하고 운전기사, 여비서, 사무실까지 주고. 그냥 대충 근무하는 게 아니에요. 충남에서 일어난 모든 법적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해서였어요.
 
  누가 미치지 않고선, 검찰을 도청 참모회의에 앉게 해요? 기절허(하)지…. 이런 얘기 처음 듣지요?”
 
  ― 네, 깜짝 놀라겠네요.
 
  “제가 인간적 매력은 없지만 공인으로 뭘 지키도록 노력했다,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이 전 총리는 이 대목에서 도지사 시절, ‘실·국장 책임제’를 도입해 충남도 인사 모두를 실·국장에게 맡겼다는 얘기를 길게 했으나 이 정도에서 줄인다. 그는 성공 경험만큼이나 나름 자기관리를 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는 2014년 성완종 사건이 터지기 전, 그러니까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모인 후원금 6400만원을 반환했다. 그의 측근에게 물어보니 “쪼개기 의심이 있는 후원금이나 자신의 지역구 군의원, 도의원이 낸 후원금을 모두 아무 이유 없이 되돌려줬다”는 것이다. 이 전 총리의 말이다.
 
  “당시 3억원까지 후원금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해(2014년) 연말에 보좌진에게 지시하기를 ‘이상한 돈은 다 돌려줘라’고 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6400만원이야. 문제가 생겨서 되돌려준 게 아닙니다. 부적절하다고 내가 판단한 거야. 정확히는 이 사람들(보좌진)이 판단한 거지. (반환대상은) 내가 선정한 게 아니라 내 후원회에서….”
 
 
  ‘JP 키즈’
 
이완구 충남도지사가 2009년 12월 3일 국회에서 지사직 사퇴를 선언한 후 충남도청으로 들어서자 지지자들이 사퇴 철회를 요구하며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
  이완구 하면 충청의 맹주 김종필(金鍾泌·1926~2018) 전 총리가 떠오른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영문 이니셜 ‘JP’라고 하고, 이 전 총리를 ‘JP 키즈’라고 부른다.
 
  “DJ와 YS는 자기를 추종하는 정치 세력들이 사후에든 생전에든 있었지만 JP사람, JP인맥은 없었어요. 그것이 3김(金) 중 유일하게 대통령을 지내지 못한 이유일지도 몰라요. 그분은 전형적인 충청도 정치인이셨죠. 모자라지 않고 과하지도 않고 부족함이 없고, 좋고 싫은 것도 나타내지 않는, 내가 아는 JP는 정이 많은 분이셨고 풍류를 즐길 줄 알고 위트와 유머가 넘쳤어요.
 
  심지어 정적(政敵)에 대해서도 미움이나 악의를 품지 않았어요. JP에게는 충청도 양반의 점잖음이 있으면서 관용이 넘쳤어요. JP가 집권했다면 아마도 정치가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고 대화와 양보, 타협의 문화로 조금은 훈훈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전 총리는 지난 6월 10일 송아영 자유한국당 세종시장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가진 간담회에서 “JP를 비롯해 이인제, 안희정 지사 등 좋은 분들이 번번이 좌절했다. 충청인 전체가 얼마나 맘이 아프겠냐”며 “충청대망론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충청대망론, 아직도 유효한 거죠.
 
  “왜 전들 대권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동안 일관된 답변은 ‘난 그 근처에 가지도 않았어~’라고 하는, 충청도 특위의 겸양으로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걸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야.(웃음)”
 
  ― 세상이 미쳐 날뛰는데 겸양이 됩니까.
 
  “충청대망론은 충청도 사람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닌, 상처받고 좌절한 충청도 사람에게 용기를 주자고 하는 말입니다.”
 
  ― 영호남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충청도는 기본적으로 어떤 선거든 특정 정치세력 또는 후보에게 60% 이상의 몰표를 잘 안 줍니다. 그렇다고 충청 민심을 간단히 봐선 안 돼요. 충청도 사람들은 참을 때까지 참다 안 되면 터져요. 한번 꼬부라지면 펴지지 않습니다.
 
  내가 ‘JP 키즈’라는 말과 결부시켜 충청대망론을 꺼낸 것은 좌절하고 실망한 충청인을 어루만져 주고….”
 
  7월 6일 낮 12시 이 전 총리는 충청향우회 중앙회 오찬에 참석했다. 그러니까 기자와 만나기 2시간 전 충청인들과 만난 것이다.
 
  ― 충청향우회에 가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나요.
 
  “이런 말을 했어요. ‘이 자리엔 민주당, 한국당, 정의당 지지자들도 계시다. 정치색 있는 자리가 아니다. 정치적 얘기는 하지 맙시다. 충청인의 친목단체로 갑시다’고요. 내가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색깔을 드러내면 향우회가 깨집니다.”
 
  이 전 총리의 측근은 기자에게 “당시 일부 참석자 중 몇 분이 ‘이완구 대통령’을 외쳤다”고 귀띔했다.
 
  이 전 총리는 “더 오래 있어야 되는데 김 기자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1시30분에 나왔다”고 했다.
 
 
 
“불변의 이념이란 없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이완구 국회의원은 평양을 다녀왔다. 만찬장에서 김정일이 인삼주를 이 의원에게 따르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6월 11일 여의도 당사를 떠나 11년 만에 서울 영등포 당사로 이전했다. 과거 ‘염창동 당사’가 오버랩되긴 하지만 당 쇄신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김성태 당 대표 권한대행은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이룬 보수 정당의 여의도 당사 시대를 이제 마무리한다”며 “처절한 진정성으로 더 낮은 곳에서 쇄신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리는 “중앙당 해체나 당명 교체, 당사 이전, 비대위 구성 등이 본질적 해법이 아니다”며 “보수가 지금까지 부지불식간에 믿어왔던 보수가 걸어온 길, (보수가) 나아가야 할 길을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그는 “순서가 바뀌었다”는 말을 기자에게 자주 했다.
 
  “JP 얘기를 하자면, 흔히 JP를 보수주의자라고 하지만 과거 5·16이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릴 때의 시각에서 보면 친일파, 부정선거, 이승만 독재 등 기득권 세력에 대한 거사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오늘의 진보가 내일의 보수가 되는 세상입니다. 세상 이치가 그러니 우리도 지나치게 이념적인 틀의 경직성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불변의 이념이란 없다고 봐요.
 
  유승민, 안철수 등 보수와 관련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보수의 노선, 개념, 가치 등을 놓고 치열한 원탁회의를 거쳐 보수를 담을 담론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이 작업은 대단히 지난할 것이고 1년 이내 안 될 수도 있어요.
 
  왜 국민이 우리를 외면했는지, 왜 보수 지지층조차 외면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정신은 무엇인지 역사라는 관점에서 고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다 까놓고 재검토하는 단계를 먼저 거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결국 국민적 공감 얻기 어려울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보수의 노선, 개념, 가치… 등을 재정립해야 다음 총선과 대선을 치를 수 있어요. 안 되면 백전백패니까. 민주당이 ‘똥 볼’을 차서 그 덕에 어부지리로 이기는 생각을 해선 안 돼!”
 
  이 전 총리는 “보수의 가치를 공정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며 “경직된 이념의 틀에서 탈피해 국민의 의식 변화를 한국당이 느껴야 되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즘 공정이나 정의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급증하잖아요. 갑(甲)질을 두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도마에 오르죠. 재벌 손보기를 훨씬 뛰어넘는…, 국민의식의 변화를 한국당이 느껴야 되고 깨달아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 보수의 가치를 공정의 문제에 맞는 정책으로 개발해야 해요. 신보수니, 따뜻한 보수, 합리적 보수, 무슨무슨 보수를 만들어 냈지만 국민이 보기에 말장난하지 마! 내 눈에 그게 그거 같은데! 지금 한국당을 바라보는 눈은 굳이 보수라고 안 해도 보수인 것을 다 아는데 굳이? 국민이 놀랄 정도로 변화를 선행하지 않으면 동력을 받을 수 없어요. 그러니 치열한 논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대사회는 너무 복잡합니다. 어느 한 이념, 어느 한 가치의 노선으로 풀기가 복잡해요. 영역구별의 의미가 없어요. 1974년 내가 첫 직장인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근무할 때 국장이 강경식(훗날 부총리), 부국장이 아웅산에서 돌아가신 김재익(훗날 청와대 경제수석), 과장이 진념(훗날 부총리)·강봉균(훗날 재정경제부 장관), 고참이 이기호(훗날 노동부 장관)·한덕수(훗날 국무총리)·권오규(훗날 부총리)였어요. 그런 쟁쟁한 경제관료들과 함께 (내가)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했는데 이제는 과거와 같은 관(官) 주도로 (국민 동력을) 끌고 가기가 힘들어졌어요. 역(逆)진보, 역보수와 영역을 넘나들며 보완적 관계가 안 되면 20~30년 전 영국·미국이 추구했던 변화의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왜 한국당만 ‘올드 보이’ 정당인가요?”
 
2009년 7월 23일 도청신도시 조성과 그간 투자유치 실적 등에 대해 설명하는 이완구 충남도지사.
  최근 6・13지방선거 ‘참패’ 이후 대국민 사과에 나선 자유한국당에 ‘전원 총선 불출마’ 요구가 거세지자 이 전 총리는 “이 사람들 물러나면 누가 정치를 하겠냐”며 “일본의 경우는 나카소네 전 수상 아들이 국회의원이고, 손자가 국회의원이고 고이즈미 총리 아들이 총리를 준비한다. 일본의 경우는 정치를 장인화(匠人化)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를 두고 “북한 세습도 장인화로 봐야 하느냐”는 비난이 나왔다.
 
  이 전 총리는 “미국과 일본 등의 경우 지방선거에서 50~70%의 후보자들이 정당공천 없이 출마한다. 지방정치의 전문화를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이지 세습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6・13지방선거는 민주당 압승으로 끝나 버렸어요. 정치권 색깔을 지워야 합니다. 살림꾼을 뽑는 선거잖아요. 예행연습 한다고 1~2년 그냥 보내면 실패합니다. 미국과 일본은 순수한 지방선거로 갑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중앙정치 논리가 접목이 돼 있어요. 물론 일본도 공천을 법으로 허용하지만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의 90%가 무소속입니다. 정당에 줄 서는 ‘바보 후보’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도 다선(多選)이 나오는 것은 지역 실정을 잘 알고 중앙정치의 개입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죠. 그 얘기를 한 것인데….”
 
  ― 당 비대위원장을 누구로 정하느냐를 두고 설왕설래입니다.
 
  “제가 초선(국회의원) 시절, 여의도 국회에서 동서남북 구분도 못했어요. ‘아, 내가 동쪽으로 걷고 있구나’하는 것을 알 때까지 2년 반이 걸렸습니다. 또 국회 관련 법안이 수백 개야.
 
  모세혈관처럼 국회가 돌아가는 것을 다 알아야 국회 개혁할 수 있어요. 이것 모르는 사람이 와서 무슨 국회를 개혁해.
 
  두 번째, 국회의원을 10분 이내에 대화로 설복시켜야 해. 100여 명의 소속 국회의원을 설복시킬 수 없으면 그만둬야 해요. 국회를 싹 바꿔? 외부인사로?
 
  독일 메르켈 총리더러 누가 ‘올드 걸’이라고 하나요? 트럼프나 아베, 메이 수상을 ‘올드 보이’ 또는 ‘올드 걸’로 안 부르잖아요. 왜 한국당만 ‘올드 보이’ 정당인가요? 이것은 페어(공정)하지 못한 거예요.”
 
  ― 요즘 민주당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고언(苦言)을 드리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것,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순간을 생각해 볼 것, 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직자든 누구든 재임 중에 일부러 나라를 망치려는… 의도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해(害)를 입히려는 공직자가 누가 있겠나. 그때 논리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지 않겠습니까. 역지사지해 봐야 합니다. 오늘의 이 상황을, 적폐로 규정하는 이 상황에 대한 문제를 지혜롭게 리뷰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떠나는 순간을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겁니다.
 
  적폐? 민주당이 열심히 벽돌을 쌓고 있잖아요. 근데 곧 허물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지…. 몇 년 후에. 거꾸로 본인들이 인적 청산 대상이 될지도 모르잖아.
 
  제가 (새누리당) 원내대표 할 때 야당 원내대표실에서 살았습니다.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참으로 사심 없고 영민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총리 후보자로 발표되자 박 의원이 ‘총리로서 지금보다 존재감을 굉장히 드러낼 것’이라고 평가해 줬습니다.
 
  특히 우윤근 대표는 총리 취임 이후 취임인사 차 야당대표실을 방문했을 때, 청문회 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울먹이기도 했어요. 우 대표는 이 일로 당내에서 곤란한 입장이 되기도 했답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정말 안 받으신 거죠.
 
  “답변할게요. 받았으면 저렇게 재판기록 쌓아놓고 수십 명에게 민·형사 책임 묻고 고달픈 싸움을 다시 하겠어요? 그것도 언론과 검찰을 상대로? 내가, 내가 현실 정치인인데 그 사람들이 (소송을 하면) 가만히 있겠어요?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공격 들어온다는 걸 아는데….”
 
  ― 다시 묻습니다. 안 받으신 거죠.
 
  “안 받았죠.”⊙
 
아들에게 신문구독 권하는 이유는?
 
  “5개 신문을 꼭 봐야 돼”
 
  이완구 전 총리는 차남에게 “5개 신문을 보라고 권유했다”고 했다. 장남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어 신문구독을 권할 수 없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조·중·동을 꼭 봐. 플러스해서 《한겨레》 《경향》도 봐. 너의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되니까. 5개 신문 봐야 돼’라고 했어요. 내 아들이 편견을 가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에요. 새는 양쪽 날개로 납니다. 한쪽 날개론 날 수가 없어요. …참 아비 노릇 하기 힘듭니다.
 
  지난주 며느리에게까지 부탁했는데 아직 구독신청은 안 했대요. 다음주부터는 반드시 구독할 겁니다. 저는 무슨 신문 보냐고요? 조·중·동을 읽습니다. 《한겨레》 《경향》은 인터넷으로 보고 있어요. 저는 인터넷으로 보지만 자식은 다 구독해서 보라고 했어요.”
 
  ― 왜요? 아들 정치 입문 시키시려고요.
 
  “아뇨. 그럴 일 없습니다. (정치에) 학을 떼는 애니까….
 
  측우기를 비롯해 해시계, 물시계, 각종 천문 관측기구들을 만든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가끔 생각해요. 당대 장영실만큼 실생활에 도움을 준 이가 없는데… 세종 어가(御駕)를 잘못 만든 실수로 곤장 80대를 맞고 사라졌다는 글을 읽고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에 제 이름이 나오는데 가족들이 결사반대해요. ‘이 풍토에서 당신 고뇌를 알아줘?’라며 아내가 속상해합니다. ‘이렇게 살아온 것 누가 인정해 줘? 두 아들 다 비밀장가 보냈잖아. 누가 알아줬어?’라고요. 마음이 아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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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quoia    (2018-08-13) 찬성 : 28   반대 : 8
이완구 총리님, 어지러운 이 사회를 바로세우는 데 일역을 담당해주십시오. 특히 한국당의 어수선함을 참빗으로 빗어내듯 깔끔하게 정리하여 좌파들에 의해 다죽어가는 이 위대한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아름다운 나라로 세계에 우뚝서는 국가로 바로 세우는데 총력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나라는 문 믿다가 2019년도 못넘기고 樹는 베어지고 水는 메마르고온국민의 壽는 위태하고 輸는 갈수로 어렵고 秀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獸만도 못한 인간들이 이나라를 銹하게 만들어 羞하기 짝이 없습니다.
  y8176    (2018-08-08) 찬성 : 26   반대 : 5
여론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여,야를 아우르는 협치의 정치를 하고자 함이 뭇 정치인에게는 그렇게도 부담이 되었나.
충청을 넘어 전국적인 정치인이였는데...힘내시고 건강 지키시며 호시우행 하시기 바랍니다
  징검    (2018-08-07) 찬성 : 19   반대 : 7
진정한 리더가 필요한 때 입니다
  420eer    (2018-08-07) 찬성 : 19   반대 : 1
보수의 리더가 부재인 지금, 우리는 보수를 이끌고 진보와 맞장 한 판 떠줄 리더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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