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인터뷰

‘한일 막후 괴물’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의 충고

일본과 和하는 것을 잊지 마라(不失和日本, 《징비록》의 신숙주 유언)

  • 글 : 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goms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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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도일(渡日), 30년간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
⊙ 백범 김구,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아…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해야”
⊙ 천황은 2600년 전 도일한 재일교포… 천황 방한하면 한일관계 전기 맞을 것
⊙ 이명박 대통령의 깜짝 독도 방문처럼 일본을 자극하지 말아야
⊙ 위안부 할머니들, 국민 상대로 ‘대국민 선언’ 발표한다면 명예회복에 도움될 것
올해 90세의 고령에도 불구,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외교부 고문 자격으로 지금도 한일 간 현안이 생길 때마다 도쿄와 서울을 수시로 오간다. 최 원장은 아침에 눈을 뜨면 일간신문을 쌓아놓고 ‘가위질’을 시작한다. 1969년부터 5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일상(日常)이다.
 
  최서면 원장은 “지난해 11월 말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불참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70번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임기를 마치는 모습을 보니 서글프다”며 “외교는 국가에 ‘공기’와도 같은 것인데 대한민국만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 한탄스럽다”고 했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최 원장의 본명은 최중하(崔重夏)로, 연희전문 문과에 다니다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출신들이 만든 한독당 산하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시영(李始榮) 선생의 권유로 18세의 나이에 《대동신문(大東新聞)》 기자로 일했으며, 이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후쿠자와 유키치 딸의 도움으로 도쿄에 정착
 
1969년 대장상인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만나 박경원 강원지사의 방일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최서면. 강원도에 의해 강원도 개발 협력공사 회장으로 위촉된 최씨는 강원도 내 공장 건립을 위해 노력했다. 후쿠다는 최서면에게 강원도 개발에 도움이 될 만한 일본 재계 인물들을 많이 소개했다고 한다. 199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수상이 최서면씨 체일 30주년을 기념해 써준 휘호(왼쪽 사진). 일의대수(一衣帶水·한 줄기 띠와 같은 바닷물)와 같이 한일 양국의 친선에 기여해 달라는 뜻으로 써준 글귀다.
  최서면 원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톨릭’과 ‘일본’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필요하다. ‘가톨릭’이 그와 노기남(盧基南) 대주교, 장면(張勉)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면, ‘일본’은 자유당 때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한국학 전문가가 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노기남 주교의 주선으로 천주교 성직자로 변장한 그는 미 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그 후 그는 문부성 장관을 지낸 오타 고조(太田耕造) 아세아대 총장과 재정보증인 브리지트 키오의 경제적 지원으로 ‘특별체류허가’를 얻어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에 돌입한다.
 
  최 원장은 1969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딸의 도움으로 그가 제공한 사저(私邸)에 도쿄한국연구원의 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70년 10월 연세대 박대선(朴大善) 총장과 게이오대 사토사쿠 총장을 연결해 두 대학 간 자매결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일본인보다 한국을 더 모르는 게 부끄러웠다”던 그는 첫 일본 정착 5년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자료 속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최 원장은 당시를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는 흥분의 시간들이었다”며 “지구상에서 나 혼자만 역사의 진실을 접하는 환희를 누렸다”고 회고했다.
 
  1958년 도일, 1969년 도쿄한국연구원을 설립한 그는 1988년까지 30년간 근대 한일관계 자료를 수집, 연구해 왔다. 그는 1988년 귀국해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국제한국연구원을 설립,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안중근평전》과 회고록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1969년에는 일본 야스쿠니(靖國) 신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의 의병 활약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를 발견했다. 탁본된 북관대첩비는 의병장 최배천(崔配天) 장군의 후손인 최옥자(97) 세종대 설립자의 주선으로 2002년 4월 29일 강원도 강릉 최씨 사당인 황산사(篁山祠)에 모셨다.
 
  최서면 원장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좌우를 넘나들며 김구, 장면, 박정희(朴正熙), 김대중(金大中) 등 당대의 거물들과 교분을 가졌다. 일본에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 등과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전 외상 같은 정객들과 깊이 사귀었다.
 
  최서면 원장의 이런 인맥관계를 활용해 박정희 정부는 김대중씨가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7·4남북공동성명을 사전에 알려주지 않아 한일관계가 악화됐을 때 이를 무마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가나야마 마사히데(金山政英) 전 주한 일본 대사는 생전에 한일관계에서 그의 역할을 가리켜 “사케테토오레나이미치(避けて通れない道·돌아서 갈 수 없는 길)”라고 했다. 최 원장을 통하지 않고는 한국과의 일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6·25 전쟁 중 북한 원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인민군에게 납치된 독일 신부들이 1954년 국제적십자사의 중재로 북한에서 풀려나 서울에 왔다. 최서면(오른쪽에서 네 번째)씨가 이들을 장면 당시 천주교 총무원 사무총장에게 소개하고 있다.
  — 1월 8일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항의하는 조치로 주한 일본 대사가 부산 일본 총영사와 함께 지난 1월 9일 일본으로 일시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한·일 통화 스와프 협상, 고위급 경제 협의 중단까지 발표하고 있고요.
 
  “90년을 각각 절반씩 한국과 일본에 살면서 양국의 기쁨과 슬픔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때가 참 곤란합니다. 고사(故史)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이 있지 않아요? 한일관계는 실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임에도 한국 사회는 집단 ‘친일파’ 트라우마에 빠져 있어요.”
 
  — 친일파 트라우마라니요?
 
  “한국 사람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친일파’라는 말이에요. 우리 사회는 친일파라는 용어를 과잉 해석해 모든 한일 간 현안을 파행적으로 처리하고 있어요. 일본에 당연하게 해줘야 할 일을 해주려는 사람에게 야당에서 친일파라고 몰아세우면 움찔한단 말이에요.”
 
  최서면 원장은 연희전문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심부름을 했다고 한다. 백범이 용재(庸齋) 백낙준(白樂濬) 연희전문 학장에게 전하는 편지도 그가 전달했다. 최서면 원장은 “김구 선생이 규정하는 친일파와 친일파 처리 방법을 오늘날 우리가 새겨야 한다”고 했다.
 
  “어느 신문사 사장이 김구 선생에게 ‘선생님께서 빨리 친일파를 처단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혼란하다’고 했답니다. 김구 선생은 ‘일본이 바로 이웃에 사는데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없다면 만들어야지,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말한 것은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라고 한 것이지, 언제 친일파를 처단하라고 했느냐. 내가 중국에서 왔다고 친중파를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친중파도 아편장수 같은 반민족적 친중파는 처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한 방식은 총독과 고급 관리를 일본인 자신들이 직접 맡는, 세계 식민 지배 사상 유례가 없는 직접 통치였다”며 “따라서 일제 협력자라고 모두 처벌해야 하는 대상은 아니다”고 했다. 예컨대 학병에 끌려간 사람은 규탄 대상이 아니라 위무(慰撫)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최서면 원장은 탄허(呑虛) 스님이 작고하기 전, “반민족적 친일파를 가릴 수 있는 철학적 기준은 과연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최 원장의 설명이다.
 
  “탄허 스님은 ‘장자(莊子)의 인생훈(人生訓)을 보고 배워야지’ 하시며 연필을 가지고 오셔서 인생훈 중 ‘불은 바깥에서 끄는 것보다 안에서 끄는 게 더 힘들다’는 말씀을 써주셨어요. 밖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보다 국내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뜻이었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안에서 불을 끈 분’으로 김성수(金性洙) 《동아일보》 사주(社主),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주를 꼽았다.
 
  “고등경찰의 총지휘자인 조선총독부 보안과장 야기 노부오(八木信雄)를 만나 ‘조선 사람 중 진짜 애국지사를 한 명만 골라보라’고 했더니 주저 없이 김성수 선생을 꼽았습니다. 총독의 명령으로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하려고 김성수씨를 찾아가 도장을 찍으라고 하니까 아무 대답이 없더래요. 시간을 너무 끌어 야기 노부오가 ‘빨리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니까, ‘신문사, 방직회사까지 다 내놓았는데 이것을 안 하려면 또 무엇을 내놓아야 하느냐’고 하더랍니다. 방응모 선생도 평양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하다 《조선일보》를 인수해 당시 《동아일보》와 다른 잡지들에 실리지 못하는 반일적 내용, 심지어 사회주의적인 글까지도 수용하며 항일을 했습니다.”
 
 
  상대방을 약 올리지 말아야
 
8·15 광복절을 닷새 앞둔 2012년 8월 10일 오후 경북 울릉군 독도에 도착한 이 대통령이 ‘한국령(韓國領)’이라고 새겨진 암반비석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 한국의 리더십 공백 상태를 틈타 중·일이 각각 경제와 금융을 무기로 ‘사드’ ‘소녀상’ 문제를 자기들 뜻에 맞추라고 강요하고 있고, 거기에다 대선 주자들은 위안부 합의의 무효화·재협상·재검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국민 정서가 우호적이면 국제협약도 무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끼리만 통용되는 논리입니다. 대권에 도전하는 유력 정치인들이 이런 감성에 쉽게 편승해 표를 얻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럴 때일수록 정치인들은 자중해야 합니다.”
 
  — 위안부 합의를 깰 경우, 1차적으로는 한일관계가 다시 냉각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황 변경에 의한 재협상 요구는 ‘한국은 필요하면 골대를 옮기고 재협상을 요구한다’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
 
  “위안부 합의는 일본이 100%를 해줄 수도, 한국이 100%를 받을 수도 없어요. 우여곡절 끝에 위안부 합의를 했으면 정부는 실천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하고, 국민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더라도 정부를 도와야 합니다. 합의 실천도 하기 전에 반대를 한다면 대명천지에 누가 우리를 믿어주나요? 외교만은 여야(與野)가 하나가 돼야지, 외교가 의심을 사면 국격(國格)이 의심을 당하고, 국격이 의심을 당하면 국가적 불행을 초래합니다.”
 
  —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이 한일정보보호협정(GSOMIA)을 체결하려다 ‘친일파’로 공격을 받자 독도(獨島)를 전격 방문했고, 그 방문 이후 한일관계가 회복되는 데 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 재개의 핵심 조건이 위안부 합의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 방문 이후 독도 전문가를 청와대로 불러 독도를 방문한 이유를 설명했어요. 제게 발언 기회가 왔을 때 대통령께 ‘독도가 우리 것이니 100번을 간들 누가 뭐라 할 것은 없으나, 상대방을 약 올리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나카소네 총리 시절, 한일관계의 밀월
 
최서면씨는 안익태에게 부탁해 가톨릭의대 교가를 작곡하도록 했다. 사진은 안익태가 교가 작곡을 허락한 것을 기념해 1955년 4월 28일 노기남 대주교 주교관에서 찍은 것이다. 박양운 신부(가톨릭의대 의학부장), 노기남 대주교, 안익태, 최서면, 최씨의 중학 동창인 김윤근 당시 대검 검사(오른쪽부터).
  최서면 원장은 오래전 일본 강연 도중 한일관계를 걱정하는 한 일본인으로부터 “다케시마(竹島)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최 원장은 “다케시마는 일본 것 아니냐”고 했다. 예상외의 답변에 놀란 그 일본인은 “그럼, 왜 한국은 일본 영토라는 데 동의를 안 하냐”고 물었다.
 
  최 원장은 “우린 독도를 우리 것이라고 했지, 언제 다케시마를 우리 것이라고 했느냐. 자기 마누라를 남에게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았느냐”고 이야기해 주었다고 했다. “당신들이 다케시마라고 하는 한 절대로 너희 것이 될 수 없다. 독도를 인정하고 한국과 싸워야지, 다케시마는 너희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 역사 문제와 관련, 한일 양국이 사사건건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근본적 이유는 뭡니까.
 
  “1999년 일본 정부 초청 강연에서 일본 측이 ‘다시는 사과 문제가 나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길래 이렇게 답했어요.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들에게 사과한 횟수를 외고 있고, 한국인들은 사과를 부정당한 것을 외고 있다. 사람은 사과한 것은 잊기 쉬우나, 사과를 취소당한 것은 잊지 못한다. 일본 사람은 도대체 사과를 몇 번이나 해야 새로운 출발점에 설 수 있느냐고 항변하지만, 한국인들은 일본 천황이나 총리가 사과를 한 직후 대신(大臣)들이 망언을 한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천황이나 총리대신이 사과를 하면 밑에 있는 장관들은 일절 입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단번에 과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요.”
 
1956년 7월 2일,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마친 김대중(왼쪽)씨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가운데가 세례를 베푼 김철규 신부다. 김대중씨는 최서면씨에게 사진 뒤편에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세례명을 적어 보냈다.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서울에서 과거사 사과 발언을 한 직후인 9월 9일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문부상이 “한일합방은 양국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책임이 있다”라고 발언해 한국민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당시 나카소네는 후지오를 파면시켰다.
 
  이듬해인 1984년 9월 6일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나카소네 총리의 방한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찬 석상에서 해방 후 첫 식민 과오 사과 발언을 했다. 최 원장은 “이때가 한일관계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라고 했다.
 
  — 시민단체는 일본의 성의 없는 사과에 항의해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했다지만, 국제사회는 ‘상대국 공관의 안녕과 품위를 지킬 책무’를 규정한 빈 조약 22조와 상치되는 이 같은 조형물 설치에 비판적입니다. 굳이 일본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소녀상을 대사관이나 총영사관 앞에 설치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한국 정부도 일본 공관 앞의 소녀상 추가 설치를 방치해 일본의 여론을 자극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선포한 ‘다케시마의 날(2월 22일)’에 주일 한국대사관 근처의 아자부주반(麻布十番) 숙소에서 시위대가 지나는 것을 보고 한국대사관에 가보았습니다. 한국 주일대사관 앞과 어떻게 다른가 보려고요. 일본 경찰이 한국대사관 앞 접근도로를 모두 막고 시위대를 차단하더군요. 서울의 주일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하고 대사관 집무실 코앞에서 시위해 업무를 방해해도 방치하는 우리와는 대조적이었어요.”
 
 
  천황의 사과는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야
 
1975년 국제한국연구기관협의회 때 세계 각국의 한국학 학자를 청와대로 초청한 박정희 대통령이 다과회를 베풀면서 모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가운데가 최서면씨.
  —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35년간 식민지 통치의 아픔을 겪었고, 일본은 패전에 대한 마음의 상처가 있겠군요.
 
  “1900년대부터 일본은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한 무가 정권(도쿠가와 막부)이 탄생해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까지 일본은 260년간 평화를 구가한 ‘팍스도쿠가와나’ 시대였습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매년 400여 명에 이르는 조선통신사를 초청해 ‘문화융성’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러일전쟁, 만주사변,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동안 일본 국민들은 엄청난 희생을 당하면서 강렬한 전쟁혐오증이 생겼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제국주의는 아시아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고요.”
 
  —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 일본 정치인들이 10억 엔을 일본 공관 앞 위안부 소녀상 철거·이전의 대가처럼 얘기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한국민들은 일본의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과연 일본은 우리에게 사과를 한 겁니까.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예로 들게요. 하나님께 고해성사를 할 때 통회(痛悔)→개전(改悛)→보속(補贖)의 단계를 거칩니다. 히로히토 천황이 사죄를 하면서 일본의 사과는 보속을 빼놓고는 완결된 셈이죠. 그러나 상징적 인물인 천황은 물질적 보상이 포함된 보속을 할 수 없어요. 보속은 행정을 담당하는 일본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최서면 원장은 “보속 문제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해서 한국민들이 히로히토, 아키히토(明仁) 두 천황의 사과를 모두 거짓이고 진정성이 없다고 몰아가는 것은 맞지 않다”며 “일본 국민의 상징인 천황이 통회와 개전을 표시한 것만은 받아들일 줄 아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아키히토 천황은 1989년 즉위 이후 동남아 국가 방문을 시작했다. 1991년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것을 시초로, 1992년에는 중국을 방문했고 2005년에는 사이판, 2006년에는 싱가포르, 태국을 방문했다. 2009년에는 하와이, 2015년에는 팔라우를 방문했다.
 
  최서면 원장은 “아키히토 천황은 과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은 완전한 일본의 과오이며, 그에 대한 보상이야말로 천황으로서의 사명이라는 신념하에 지병과 고령(84세)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분”이라며 “아키히토 천황이 중국을 다녀감으로써 중·일 간 외교가 한 단계 올라선 것처럼 천황의 한국 방문도 조속히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인 위령비에 헌화한 아키히토 천황
 
2008년 4월 21일 일본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일본 황거(皇居)를 방문, 아키히토 천황 부부와 만났다.
사진=조선일보
  — 아키히토 천황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과 2013년 나라현 국제회의에서 “제50대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참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천황은 초대부터 오늘날 127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대륙, 즉 조선에서 건너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역대 천황들은 ‘조선에 한번 가봤으면’ 하는 것이 당연한 꿈이었을 것입니다. 방일한 김대중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을 요청한 것처럼 한국민들도 ‘아! 선조(先祖)가 가서 고생하시더니 임금이 됐습니까. 백제의 할아버지 산소도 참배하고, 신라도 보고 가십시오. 고구려 평양도 가봐야 하지만 통일되면 오십시오’라는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예공의 후손인 심수관(沈壽官)이 오면 박수치고, 천황은 못 오게 하고, 이건 모순입니다. 심수관은 500년 전 재일교포이고 천황은 2600년 전 원주민을 복속하고 정착한 성공한 재일교포입니다.”
 
  최 원장은 “궁내청 관계자들은 천황이 고종의 손자인 이구(李玖·1931~2005)씨와 유년시절 가까웠고, 평소 한국에 대한 친근감과 미안함을 표현했다고 말했다”면서 “아키히토 천황이 2005년 사이판 방문 때 ‘만세의 절벽’을 다녀오다 갑자기 차를 세우고 예정에도 없던 한국인 위령비(태평양한국인평화탑)에 헌화하며, ‘유럽도 가고 미국도 가는데 한국에는 못 간다’며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또 “아키히토 천황이 꼭 퇴위 전에 한국을 다녀가는 것은 개인의 소망을 떠나 한일 양국 관계 발전을 획기적으로 변화·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 얼마 전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서 아키히토 천황의 가쿠슈인(學習院) 동기로 70년 죽마고우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 전 교토통신 기자가 출연해 “천황은 황태자 시절인 1980년대 나카소네 정부, 한국의 전두환 정권 때 방한 준비를 끝내고 있었는데 돌연 중단된 일이 있다”면서 개인적으로 방한 가능성을 비쳤습니다만.
 
  “천황의 해외 방문은 ‘국사행위’라 하여 정부가 최종 결정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취임 직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키히토 천황을 만나 초청 의사를 밝혔어요. 이때 천황은 ‘마음은 감사히 받겠으나 결국엔 정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천황의 정치행위는 정부가 결정해 천황의 재가를 받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정부 간 협의만 남은 셈인데, 아직 양국 정부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최 원장은 “우익 세력이 반대하겠지만 옛날만큼 목소리가 크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방한 도중 천황에게 달걀 하나만 날아와도 정부로선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후쿠다 총리, 갓을 쓰면 영락없는 ‘경상도 시골면장’
 
  —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의 대(對)한국관은요.
 
  “한일관계를 이야기할 때 일본 사람들이 한반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어요. 일본 사람은 한반도를 어머니의 젖꼭지로 보는 대한국관, 꼭 비수(匕首)를 목에 들이대는 모습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처음 한반도는 일본에 젖꼭지의 존재, 즉 뭐든지 주는 고마운 존재였단 말이에요. 비수로 볼 때는 일본이 한반도에 쳐들어가고 싶을 때입니다. 일본은 봉건사회가 붕괴하면서 하급무사들의 혁명인 ‘아시가루(足輕) 혁명’으로 군사적으로 대외 탈출구를 만들었고, 불행히도 힘이 약한 한반도가 대륙 침략의 먹이가 됐던 겁니다.”
 
  —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등 일본 내 명문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자각이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기시 수상에게는 직접 들었어요. 가까운 선조가 조선과 무역을 하는 사무관을 했는데 조선에서 통신사가 오면 그렇게 집안이 감격을 했답니다. 후쿠다 다케오에게는 제가 직접 ‘당신은 지금 일본 수상이지만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 갓을 쓰면 영락없는 경상도 시골 면장(面長)이다’라고 했어요. 후쿠다도 ‘내가 한국 사람의 얼굴인 것은 틀림없다’고 하더군요. 8세기경 후쿠다의 출신지인 군마현(群馬縣)에 한국에서 도래인(渡來人)들이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최서면 원장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할 때와 패전 직후 두 차례 일본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1882~1950)의 선조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도예공”이라며 “그는 다섯 살 때까지 박무덕(朴茂德)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복역하다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1950년 사망했다”고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국민 선언’
 
  — 일본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하는 바람에 2015년 위안부 합의에서 ‘배상금’이라는 명확한 단어를 사용하지 못해 사달이 나고 있습니다. 일본은 합의 직후부터 국내 정치권·언론 등에 “10억 엔은 법적 배상이 아니다”고 주장했고, 10억 엔 지급이 소녀상 철거·이전과 연계된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우리 국민들과 세계 국민들을 향해 ‘대국민 선언’을 했으면 좋겠어요. ‘첫째, 절대로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둘째, 절대로 전쟁은 안 된다. 셋째, 절대로 금전적 도움은 필요 없다’는 내용이 포함된 선언 말입니다. 그 선언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마지막 남은 명예를 살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최서면 원장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 첫머리에 나온 신숙주(申叔舟·1417~1475)의 유언을 2011년 5월 당시 주일대사로 부임하는 신각수(申珏秀) 현 국립외교원 소장에게 써주었다고 했다. 유언은 이렇다. 죽음을 앞둔 신숙주에게 성종이 “경은 무슨 남길 말이 없소”라 묻자, 신숙주는 “아무쪼록 앞으로 일본과 화(和)를 잃지 마시옵소서(不失和日本)”라 했다.
 
  최서면 원장은 “당시 한·중·일 3국은 너도나도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며 이웃 나라와 화친할 수 없었다”며 “조선보다 못한 일본국에 대해서도 성종 때 신숙주가 ‘일본과 화평을 잃지 마소서’라고 한 말을 유성룡이 책의 첫머리에 넣어가며 ‘예방적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곱씹어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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