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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연구

‘꽃중년’이 된 X세대의 핵, 1975년생 토끼띠 이야기

그들은 스스로를 ‘마루타 인생’으로 불렀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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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공 포스터 그리고(초등학생), ‘뉴키즈온더블록’에 열광하며(중학생), 교복 입고 첫 수능 치르고(고등학생), IMF로 생활고 겪었다(대학생)”
⊙ ‘버스 출발합니다. 오라이~’를 본 마지막 세대, ‘국민교육헌장’ 달달 외우고 쪽지시험
⊙ 美日 문화에 익숙… X재팬·슬램덩크·북두신권·드래곤볼·소피 마르소와 피비 케이츠
⊙ 교복 부활… 스포츠머리(男), 귀밑 3cm(女)로 고교 3년
⊙ 수능 두 번·본고사·수시모집·가나다군 복수 지원 첫해
⊙ 졸업연도(1998년)에 구직 실패… 50대의 부모는 회사에서 잘리며 생활고
부산 해운대구 송정해수욕장으로 MT를 나온 대학교 신입생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상관없음.
  캐나다 작가인 더글러스 커플랜드는 1991년 《Generation-X: X세대》라는 소설을 냈다. 여기서 말하는 ‘X세대’란 197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들이 이전의 세대들과 분명히 다른 성향을 갖고 있지만 한마디로 이들을 정의하기는 어렵다는 뜻에서 ‘X’라고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에 아모레화장품이 이들 20대를 겨냥한 ‘트윈엑스’라는 광고를 TV방송으로 전파하면서 ‘X세대’는 신세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다. 기성세대들로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통통 튀며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평을 받았던 X세대가 어느새 대한민국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40대 ‘꽃중년’이 됐다.
 
  X세대 중에서도 1975년에 태어난 토끼띠들은 그해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유별난 경험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기존의 학력고사형 모의고사를 치르다가 한순간에 대학입시 시험 출제 유형이 바뀌는 바람에 첫 번째로 수학능력(수능) 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들이 대학입학 시험을 치른 1993년은 수능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해에 두 번 시험이 치러졌다. 갑자기 대학입시 시험이 바뀐 탓에 생긴 혼돈을 줄여주겠다며 정부는, 이해에만 수능시험을 두 번(7월, 11월) 치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1월 시험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된 탓에 대부분의 학생은 ‘7월 수능 성적표’를 들고 대학 문을 두드려야 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는 13년 만에 ‘본고사 부활’을 선언했다. 결국 1975년생 중 일부는 두 번의 수능, 한 번의 본고사를 치르며 어렵게 대학에 진학했다. 13년 만에 부활한 본고사는 불과 2년 만에 논술 시험만을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학을 가나다군(郡)으로 나눠 여러 대학에 교차 지원할 수 있도록 했던 탓에 대입 눈치 경쟁이 치열했다. 3대 이상의 독자(獨子), 아버지가 사망한 독자, 4급 병역 판정을 받은 이들에게 주어졌던 ‘6개월간 방위 근무’ 역시 1975년 남학생들을 비켜 갔다. 군대를 1~2년 늦게 간 이들은 군 생활 말년에 발발한 연평해전(1999년 6월)으로 인해 군 제대가 미뤄졌다. 군복무 의무가 없는 여학생들이 졸업하던 1998년에는 IMF 여파로 인해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기 어려웠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진 독특한 경험으로 인해 1975년생들은 스스로를 ‘마루타 인생’이라고 부른다.
 
 
  연탄 집과 영동AID 아파트의 기억
 
2013년 인기리에 방영된 〈응답하라 1994〉. tvN 화면에서 캡처
  어느 세대든 자신들이 지나온 삶이 녹록지 않았다고 말한다. ‘X세대’라며 세상의 별종 취급을 받았던 1975년생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기억 속에는 연탄불로 안방을 데웠던 기억, 형·누나들 때문에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맡았던 메케한 최루탄의 냄새, 한창 예민한 사춘기에 접한 미국·일본의 음악과 만화, ‘마루타’였던 입시 지옥을 거쳐 IMF의 기억이 고스란하다. 이들은 이제 기업에서는 부장, 대학에서는 정교수, 법조계에서는 중견 판검사 등을 맡아 우리 사회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다.
 
  “X세대가 어떻게 연탄집을 알아?”
 
  외국계 기업의 임원을 지낸 A씨는 선배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체 X세대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기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에서 자란 그의 기억 속에는 연탄 쌓인 광이 남아 있다.
 
  “개인 주택에 살았는데 한쪽에 연탄 광이 있었습니다. 연탄불이 꺼질세라 가족들이 연탄을 번갈아 갈았습니다. 안방은 연탄불이 들어와 따뜻한 곳이 있었고 찬 곳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방의 온기를 지켰습니다. 이른 저녁 식사를 끝내고 출출할 즈음에 ‘재첩~ 재첩~’ 소리가 들리면 반가웠습니다. 어머니가 사주신 재첩국을 후딱 먹고 따뜻한 이불 속에 파고들어 눈을 반쯤 가리고 〈전설의 고향〉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부산의 중산층 가정에서는 연탄을 많이 땠습니다. 가끔은 연탄가스를 너무 들이마셔서 아침에 머리가 띵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 시내에도 연탄 아파트는 1987년까지 존재했다.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서울시의 주택에 대한 재정비가 이뤄졌기에 1975년 X세대 중에는, 연탄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많다. 또 어린 시절에 큰 집에서 호화롭게 큰 이들은 흔치 않다. 치과 의사인 B씨는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영동 AID 아파트에서 살았다. 오늘날 잊힌 ‘AID 아파트’는 정부가 미국의 대외원조기관인 국제개발처(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로부터 받은 차관으로 건설한 아파트다. 건설부는 1974년을 ‘무주택 서민을 위한 해’로 정하고 21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오늘날 최고 부촌 중 하나인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힐스테이트 단지는 당시 영동 AID 차관 아파트였다. B씨는 “AID 아파트가 중앙 난방식이어서 연탄을 때지 않았다. 하지만 아파트 면적이 15평(49m2) 정도로 굉장히 협소해 5인 가족이 살을 비비며 잠을 잤었다”고 말했다.
 
 
  ‘무찌르자 공산당, 몇천만이냐(삼천만)’ 노래 흥얼거린 ‘X세대’
 
출퇴근 시간대의 ‘만원버스’. 문을 닫지 못할 정도로 꽉찬 손님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여자 차장이 막아선 채 출발하고 있다(사진 왼쪽). 1968년 12월 5일 서울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고 있다. 1975년생들이 사용했던 교과서 앞 페이지에는 ‘국민교육헌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983년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국립·사립 초등학교를 가거나 주소지로 배정된 공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요즘처럼 유치원 교육이 필수가 아니었기에, 유치원이나 동네 학원, 보습학원에서 7세 때 교육을 받은 이도 있었고, 단체 생활이 처음인 이도 있었다. 한 반에 동급생은 60~70명으로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 같은 좁은 공간에서 첫 정규 교육을 받았다. 모 디자인 회사의 부장으로 근무하는 C씨에게 초등학교의 기억은 이렇다.
 
  “시내버스로 다섯 정거장을 가는 곳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엄마가 교통비로 500원을 주셨어요. 그때 버스비가 150원쯤 했던 것 같습니다. 시내버스가 오면 학생, 아저씨들이 모두 달려들어 앞뒷문으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안내양 누나가 사람들을 등 뒤에서 꾹꾹 밀어넣고 손으로 버스를 탕탕 치면서 ‘출발합니다. 오라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저는 아저씨들의 허리 정도로 키가 작아서 버스 타는 것이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 학교생활은 어땠나요.
 
  “국어, 산수, 도덕, 과학을 배웠습니다. 교과서에는 맨 앞 페이지에 ‘국민교육헌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글귀를 달달 외웠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종종 쪽지시험을 봤거든요.
 
  1년에 두세 번씩 반공 포스터, 불조심 포스터를 그렸습니다. 내용은 천편일륜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서 38선에 줄을 긋고 위쪽(북한)은 빨갛게 아래쪽(우리나라)은 파랗게 색칠을 했습니다.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는 노래를 불렀죠. 김일성이라는 이름도 많이 들었는데 그냥 북한에 사는 굉장히 나쁜 사람이라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불조심 포스터를 그릴 때에는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문구 말고 참신한 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무심코 버린 성냥, 큰 화가 된다’는 식(式)으로 다양하게 썼던 기억이 납니다.
 
  1년에 네 번쯤 폐지모으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신문지, 잡지 같은 것을 잔뜩 싸 들고 학교에 가면 담임 선생님이 큰 자루에 모았습니다. 가장 무겁게 자루를 채운 반은 표창을 받았습니다. 책상을 끌 때 소리가 나면 남들에게 방해가 된다고 해서 테니스공을 열십자로 잘라서 책걸상 네 다리에 끼우곤 했습니다.”
 
1975년생 X세대에게 이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는 굉장히 익숙한 문구다.
  ‘X세대’가 무슨 반공 교육을 받았을까 묻는 이들이 있지만, 1983~85년에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낸 이들에게는 ‘무찌르자 공산당, 몇천만이냐(삼천만), 대한 넘어 가는 길 저기로구나’는 등의 노래가 굉장히 익숙하다.
 
  당시 서울의 중심은 강북이었고, 일부 학생은 부모를 따라 강남에서 학교를 다녔다. 강남의 가장 남쪽인 개포동, 양재동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들은 집 주변에 있던 논밭을 직접 눈으로 봤다. 개포동의 한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의 기억이다.
 
  “오늘날 분당으로 가는 구룡터널 앞에 집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동네가 서울의 가장 끝에 있는 땅끝마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불과 10분 정도 걸어가면 논밭(오늘날 포이동)이 즐비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위 분들에게 ‘저 땅이 지금 평당(3.3m2) 500원인데 무조건 사둬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밭 일구기도 나쁜 땅인데 평당 500원도 비싸다고 하셨습니다. 조금 떨어진 중학교 앞에는 공터가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물을 붓고 얼려서 간이 스케이트장으로 활용했습니다.”
 
 
  최루탄 가스 맡아 울면서 하교
 
1989년 6월 30일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모의평양축전 행사를 하던 학생들이, 경찰이 다연발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하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고 있다. 당시 75년생은 초등학생이었다.
  ‘X세대’들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시절은 우리나라의 또 다른 혼돈기였다. 5공화국이 끝나가면서 1985년에 미문화원 점거사건(5월), 민정당사 점거농성사건(11월)이 있었다. 1987년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1월), 이한열 군 사망사건(6월)도 연이어 일어났다. 불안한 시대적 상황과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사건들은 그 의미를 몰랐던 어린이들의 기억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중견 대학교수인 D씨는 대학 안에 있는 국립초등학교를 다녔다.
 
  “5학년 때였습니다. 하루는 학교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세상이 희뿌옇게 변해 있었고 매운 냄새가 눈과 코로 파고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인데 계속 기침만 콜록거렸습니다.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린 학생들은 빨리 집에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시내버스가 한 대도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온 버스는 정거장에 서지 않고 지나쳤습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최루탄 가스 냄새에 울면서 30분 넘게 걸어 집에 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하교 때가 되면 어제 맡았던 그 냄새가 또 날까 싶어서 걱정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대학이 밀집한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에 살았던 이의 기억은 더욱 선명하다. 그는 “엄마는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내달려 오라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하교 때 집이 가까운 어린이들을 삼삼오오 짝지어 주면서 우리끼리 손을 꼭 잡고 집까지 뛰어가라고 했다”며 “거리마다 사람이 가득했고 화가 난 것 같았지만 선생님이 시키신 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최루탄 가스) 속을 뛰었다”고 말했다.
 
  1975년생이 6학년이 됐을 때 ‘6·29선언’이 있었다. 몇몇은 “점심때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했다. 앞으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다며 선생님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만세를 외쳤다”고 말했다.
 
 
  청소년기에 미국·일본 문화를 직접 접하며 자유분방함 갖춰
 
중학생이 된 75년생 토끼띠들의 우상이었던 가수 故 신해철, 가수 이상은,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 소피 마르소가 2009년 2월 방한했을 때의 모습.
  1975년생에게 민주화는 메케한 최루탄 냄새에 머물러 있지만, 이들은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 풍요로운 시대를 누렸다. 중학생이 되어 예민했던 이들에게 미국·일본의 음악과 만화는 신선한 충격이자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였다. 여중생들은 미국의 5인조 보이 그룹인 ‘뉴키즈온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과 일본의 5인조 그룹인 ‘엑스재팬’에 열광했다. 뉴키즈온더블록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동했던 미국의 원조 아이돌이고, 엑스재팬은 1982년에 결성된 일본의 록밴드다. 이들 그룹은 전 세계 소녀 팬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는데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중생들은 이들의 사진을 끼운 책받침을 쓰고 해외 출장 가는 아버지를 졸라 그들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다. 남중생들은 이에 질세라 프랑스 여배우인 소피 마르소, 미국 여배우인 피비 케이츠의 얼굴 사진을 책받침에 끼워 우상으로 삼았다. 국내 음악을 즐겨 듣던 이들은 신해철의 ‘그대에게’(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 이상은의 ‘담다디’(1989년 MBC강변가요제 대상)를 흥얼거리며 젊음을 발산했다.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다른 분파는 로맨스 소설과 만화책에 빠져들었다. 여중생들은 교과서보다 훨씬 작았던 하이틴로맨스 소설을 책 안에 끼워 넣고 수업 시간에 읽곤 했다. 책을 서로 돌려보느라 1반에서 8반까지 뛰어다녔던 일은 이제 희미하게 남은 추억거리다. 남중생들은 일본 만화인 〈슬램덩크〉 〈북두신권〉 〈드래곤볼〉에 심취했다. 공부보다 또래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여린 중학생들의 마음을 흔든 영화도 때마침 개봉했다. 〈성적은 행복 순이 아니잖아요〉(1989년작), 〈죽은 시인의 사회〉(1990년작)를 보지 않은 1975년생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담임 선생님들이 하얀 분필로 칠판에 글을 쓰면 그것을 받아적고, 쉬는 시간이면 지우개를 탈탈 털어내며 까르르 웃었던 이들이 바로 1975년생, 토끼띠들이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 교사의 체벌이 당연하던 시절
 
  하지만 앞세대와 달리 미국·일본 문물에 익숙했던 이들의 자유로움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이 시기는 국내 고등학교에 큰 변화의 물결이 넘실거리던 때였다.
 
  정부는 1974년 ‘고교 평준화’를 도입하고 일류고 선호 현상의 폐단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서울에는 5대 공립(경기고·경복고·서울고·용산고·경동고)과 5대 사립(휘문고·중앙고·양정고·배재고·보성고) 학교 정도를 명문 고등학교로 꼽았다. 정부는 1970년대 후반에 강북에 둥지를 틀었던 18개 고등학교를 한강 이남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강남 개발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명문 학교들을 이리로 보내서 지역 균형을 맞춘다는 계획이었다. 첫 번째 주자는 명문 남고인 경기고등학교로 1976년 2월에 종로구 화동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했다. 휘문고, 정신여고가 각각 강남구 대치동과 송파구 잠실동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이들 학교들의 본격적 ‘강남 러시’는 1980년대 후반이었다. 세종고(1987년), 경기여고와 양정고(1988년), 창덕여고·보성고·진명여고(1989년)가 강남으로 학교 부지를 옮겼다. 1975년생들이 고등학교 배정을 받을 때는 대부분의 명문 고교가 강남으로 이사를 온 지 2~5년 차에 이르렀을 때였다. 물론 주소지에 따라 고등학교가 배정되는 ‘뺑뺑이 세대’였지만, 고교 평준화 시대 이전의 기억을 가진 부모들에게 자식의 고교 배정은 큰일이었다.
 
  더구나 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1991년, 1980년대에 자율화됐던 ‘교복 문화’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남고생들은 일명 ‘빡빡머리’를 위해 머리를 짧게 밀어야 했고, 여고생들은 ‘귀밑 3cm’ 규정 때문에 머리를 쇼트커트, 짧은 단발로 잘라야 했다.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는 교복 및 두발에 제한을 뒀다가 1982년에 두발 자유화, 1983년에 교복 자율화를 선언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의 탈선과 가계 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당시 문교부는 1986년 2학기부터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교복을 착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1975년생 토끼띠들이 고교에 진학하던 1991년에는 전체 학교의 60%가 교복 채택을 결정했을 때였다. 강남의 한 여고를 다닌 E씨의 얘기다.
 
  “등굣길의 학교 정문은 살얼음판이었습니다. 학생 주임과 두어 명의 교사들은 학생들의 명찰 패용 여부, 머리 길이, 치마 길이를 일일이 살폈습니다. 머리가 길거나 파마를 한 것으로 보이면 바로 선생님이 호출을 했습니다. 머리 길이가 귀밑 몇 cm인지 재고는 반, 성명을 적고 내일까지 머리를 자르고 와서 검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이 머리가 짧아 보이려고 일부러 고개를 길게 빼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교문을 신속히 빠져나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요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치마를 걷어 올려서 짧게 입고, 옅은 화장을 하고 머리를 염색한 것을 보면 우리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 때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집합을 했다. 어쩌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길어지기라도 할 때면 학생들은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다리를 배배 꼬기 일쑤였다. 이들은 체벌에도 익숙했다. 남자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는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일단 맞는 것으로 여겼다. 대답을 못 하면 주먹이 날아왔고 출석부로 머리를 내리치는 경우가 허다했다”며 “단체 기합 문화가 있어서 한 명이 잘못하면 같은 반 학생이 전부 야구 방망이로 맞았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이들은 대학 입시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다고 볼 수 있는 수능 첫해 응시자가 됐다. 지난 2월 10일 한자리에 모인 한 강남 지역 고등학교 동창생 모임에서는 ‘수능의 기억’에 대한 대화가 한창이었다. 마흔다섯의 중년 아주머니이자, 10대 자녀를 둔 이들에게 수능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꽤 공부를 잘한 축에 드는 이들이었지만, 대학 입시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이화여대 94학번, 국문·사학·수학 등 14개 科 미달
 
75년생들은 수능시험 첫해의 입시생으로, 한 해에 수능시험을 두 번 치렀다.
  1975년생들의 입시 지옥을 생생히 소개하고자 그들의 대화를 지면으로 옮긴다. 연세대 문과 졸업생(A씨), 연세대 이과 졸업생(B씨), 이화여대 사대 졸업생(C씨), 성신여대 어문계열 졸업생(D씨), 성균관대 사회과학대 졸업생(E씨)의 얘기다.
 
  A : 요즘 애들 공부하는 거 불쌍하지. 학교며 학원이며 잠시도 쉴 틈이 없잖아. 그래도 나는 우리 애한테 당당하게 말한다. ‘엄마도 너희 못지않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입시 치렀다’고.
 
  C : 75년생들은 싸우려야 싸울 수가 없는 것 같아. 서로 이견을 보이다가도 ‘우리가 입시 때문에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라고 하면 대동단결하잖아.
 
  A : 예전에 B, 너 엄청 부러워했다. 우리 연대 본고사 반에서 같이 준비하다가 하루는 학원을 빠진 거야. 무슨 일 있나 싶어서 너희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가 ‘B가 연대 수시로 붙었다. 학교 선배들이 불러서 나갔다’고 하시더라고. 어제까지는 너나 나나 같이 수험생이었는데 너는 벌써 대학에 붙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부럽던지.
 
  B : 그때 휴대폰이 없었잖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나도 수시 생각은 전혀 못 했어. 우리 때 수시가 처음 생겼잖아. 수능 180점(당시 200점 만점)은 넘어야 수시 된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덜컥 붙어버린 거야.
 
  A : 아무튼 본고사 안 치르기를 잘했어. 대학 붙기는 했지만 본고사 준비하다가 죽는 줄 알았다. 우리 앞에 12년 동안 본고사를 치른 사람이 없잖아. 기출문제도 없고, 시험 가이드라인도 없고, 학교 선생님도 답을 못 하는 거지. 논술, 영어에 제2 외국어까지 본고사 준비하느라고 너무 힘들었어. C는 이대 미달 학과 아니었지?
 
  C : 나는 사대여서 나름 경쟁률 있었어. 약학·신문방송·국문·중문·사학, 뭐 이런 과들이 미달이었을걸? 이대 역사상 14개 과가 미달된 것이 처음이라 했던 것도 같고. 수능 첫해인데다가 다들 하향 지원하는 추세였으니까. 7월 시험보다 11월 시험이 더 어려웠으니까 다들 목표보다 훨씬 낮춰서 지원한 거지.
 
  D : 7월 수능 볼 때 담임 선생 얘기 기억나? ‘어차피 11월을 본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7월 시험 보라’고 했잖아.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지. 11월 수능 보고 나서 우리 반 애들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당장 재수학원 등록한다는 애들이 수두룩했지.
 
  E : 수능 난이도도 문제지만 가나다군이 대체 뭐니? 받은 점수 가지고 세 군데 대학에 지원하라고 했잖아. 난 완전히 막판에 등록했어.
 
  D : 그때 처음에 붙은 거 아니었어?
 
  E : 세 학교가 전부 대기였어. 기다리다 보니까 모 대학에서 자리가 났다고 하기에 얼른 입학한다고 하고 그 길로 대학에 가서 등록을 했어. 그런데 다음 날 또다시 대기였던 다른 대학에서 연락이 온 거야. 등록한다고 말하고는 어제 등록금 낸 학교에 가서 다시 돈 찾아서 그 학교에 새로 갔잖아. 그러다가 막판에 우리 학교에서 다시 티오가 생겼다면서 등록을 하겠냐고 해서, 똑같은 일을 또 했잖아. 그때 대학 입학처는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등록하는 사람, 등록금 환불받는 사람이 뒤엉켜서. 등록 포기해도 이유도 안 물었다니까. 당연히 ‘더 좋은 학교에 자리 생겨서 옮기겠지’ 하고.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
 
X세대의 아이콘인 ‘서태지와 아이들’. X세대가 자유분방함과 발랄함의 상징이 된 데에는 기존과 다른 음악 세계를 추구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이 있었다.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뒤바뀐 입시 제도 속에서 이들에게 돌파구가 되어준 것 중 하나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들이 첫 번째 수능 모의고사를 치르기 직전인 1992년 4월에 ‘난 알아요’라는 노래를 발표하며 가요계를 뒤흔들었다.
 
  지난 2013년에 방영된 〈응답하라 1994〉(tvN)는 1994년을 배경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연세대 하숙생들의 성장 드라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윤진은 서태지의 열혈 팬이다. 낯가림이 심한 여자 하숙생인 그의 머릿속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서태지다. 서태지의 음악을 듣거나 연희동에 있는 서태지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그의 일과다. 드라마에서는 그가 서태지를 쫓아다니다가 우연히 연습실에서 서태지로부터 과자를 한 움큼 받은 뒤, 그 과자를 손에 들고 신줏단지 모시듯 하숙집까지 걸어오는 모습이 나온다. 윤진의 이런 행동의 바탕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로 추정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야말로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국내 가요계는 정확히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 4월을 기점으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발라드와 트로트 음악이 주류였던 대중 음악계에 랩, 댄스로 음악의 영역이 확대됐다. 각종 음원 차트를 석권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데뷔 5년 차인 1996년 1월에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해 팬들에게 충격을 줬다. 4년의 짧은 활동, 그리고 그 기간이 마침 1975년생이 고등학교 2학년에서 대학교 2학년을 보내던 시기였던지라 그들에게 서태지와 아이들은 영원한 우상으로 자리 잡았다.
 
 
  의대 인기가 별로였던 시절
 
87, 88학번과 함께 대학을 다닌 이들은 소위 말하는 운동권의 ‘끝물’ 세대였고, 대학 내 붙은 대자보에 익숙한 세대였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없음.
  우여곡절 끝에 입시를 치른 1975년생, 재수를 하지 않았다면 94학번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문과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과는 법학과와 경영학과였다. 이과에서는 전전제(전기·전자·제어), 컴퓨터공학, 건축학과였다. 이때에는 요즘과 같은 ‘의대 쏠림 현상’은 없었다. 연세대 공과대학에 합격한 한 학생이 중앙대 의대를 최종 선택해서 진학을 했다. 당시 주위에서는 “연대에 안 가고 중대 의대를 가는 건 꽤 소신이 있는 모양”이라고들 했다고 한다.
 
  75년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 신입생 사이 대학가는 대략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사회적으로 ‘오렌지족(1990년대 초 강남에 거주하는 부자 부모를 두고 화려한 소비생활을 하는 20대 청년을 가리킴)’이라는 비판을 받던 소위 ‘날라리’ 학생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배들로부터 운동권의 계보를 이어야 한다고 ‘낙점’을 받은 학생들이었다. 94학번들은 군대를 다녀온 88학번, 89학번들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운동권의 ‘끝물’이었던 이들은 대학에 갓 입학한 이들을 붙잡고 토론을 벌였다.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의 말이다.
 
  “대학에 갔더니 ‘과방’이라는 곳이 있더군요. 중간에 시간이 비면 그곳에서 놀다가 선배들을 만났습니다. ‘대학생이 됐으니 이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며 책을 줬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습니다. 집에 가져가서 읽다가 부모님께 들켜서 혼이 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과서와 자습서만 팠으니 이런 유의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부모님이 너무 과민 반응을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 운동권 계보로 일찌감치 찜을 당한 모양이군요.
 
  “운동권이란 말은 일절 없었습니다.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라는 말이 오갔지만 정확히 어떤 뜻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와닿았던 것은 ‘이제 20대가 되었으니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지성인’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고, 사람들과 토론을 많이 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서 선배들을 무던히 따라다녔습니다. 허름한 식당에서 짬뽕 국물 하나로 소주 몇 병을 마시기도 하고,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노래도 참 많이 불렀습니다. 전태일, 이한열에 대해서도 많이 토론했습니다. 외제 차 타고 돈을 펑펑 쓰는 동창들에 비하면 저는 뭔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사회적 이슈에 발을 담갔다는 자부심에 선배들을 한창 따라다녔습니다.”
 
 
  단기사병과 공익근무의 혜택이 없었던 유일한 해
 
  남자들에게 군대란 영원한 술안주이자 온갖 허풍이 난무하는 얘깃거리지만, 1975년생 남자들은 참 할 말도 많다. 이때 방위가 폐지되고 상근 예비역 제도가 처음 적용됐다. 대기업 부장으로 지내고 있는 K씨의 기억이다.
 
  “75년생은 단기사병(세칭 ‘방위’) 제도 대신 상근 예비역 제도가 생겼습니다. 1년 동안 현역 군인들과 똑같이 생활을 하고 나머지를 고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단기사병이 되더라도 1년은 꼬박 현역으로 지낸 거죠.”
 
  ― 상근 예비역 첫해였던 모양이군요.
 
  “첫해였으면 덜 억울했죠. 우리 다음 해에 공익근무요원(현 사회복무요원)이 생기더라고요. 집에서 동사무소로 출퇴근하는 것을 군복무로 대체해 준다고 했습니다. 단기사병과 공익근무가 둘 다 없었던 유일했던 해가 75년생들이 신검을 받아 군대에 가던 때였습니다. 딱 한 해에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동갑내기들끼리 앉으면 같은 얘기를 할 수밖에요. 군대에 빨리 갔던 친구들은 제대를 할 때 IMF가 터져서 집안이 폭삭 망하는 모습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재수해서 한두 해 늦게 간 친구 중에는 연평해전 때문에 군 제대가 늦어진 친구도 있습니다. 말년 병장 휴가를 다녀왔는데 연평해전(1999년 6월)이 터지더래요. 그때 군에서 전원 제대가 보류됐었습니다. 우리끼리 많이들 그럽니다. 대학을 갈 때나 군대를 갈 때나 대학을 졸업할 때나 운이 참 없다고 말입니다.”
 
 
  IMF로 20대 넘어 생활고 뼈저리게 느껴
 
국민운동협의회가 1998년 2월 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IMF실직자를 위한 사랑의 봉급나누기운동’에 국민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IMF는 풍요로웠던 75년생의 삶을 경제적 어려움으로 뒤바꿔 놨다.
  IMF(경제 외환위기)는 우리나라의 현대 역사에서 가장 쓰라린 명칭이 됐다. 철없는 유치원생들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는 IMF라는 단어, 이 단어는 75년생 토끼띠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했던 L씨의 아버지는 IMF의 여파가 몰아치던 초창기에 사업을 접었다. “사업을 더 유지했다가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L씨의 얘기다.
 
  “강남에서 관악구의 한 동네로 이사를 가던 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그래도 빚잔치를 하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낫다. 식구들 누워 잘 수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는 남기지 않았느냐’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맞는 말씀인데 강남의 큰 아파트에서 살다가 낯선 동네로 간다는데 기분 좋을 사람이 있습니까. 돈을 아껴 써야 한다는 교육은 받았지만 정말 이제는 먹고살 일이 빠듯하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원래 갖고 있던 짐을 많이 버리고 가야 한다고 해서 어머니가 짐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이삿짐센터가 없던 시절로 일일이 노끈으로 짐을 묶고 박스에 넣어서 옮기던 때였거든요. 어머니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그릇들을 한동안 닦고 또 닦았습니다. 둘 곳이 없어서 친척에게 준다면서 굵은 눈물방울을 쏟아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대학 시절까지 ‘오렌지족’ 중에서도 제일 잘 노는 축에 속했다는 H씨는 보험 판매를 하고 있다. IMF 때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 이쪽 업계에 발을 디뎌 벌써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한때 승마를 하는 것이 취미였을 정도로 유복하게 자랐지만 IMF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H씨가 말없이 보험 서류를 건넬 때마다 그의 동창들은 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고 한다.
 
  94학번들이 한 번도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졸업 시기는 1998년 2월이다. 여대생들은 취업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이의 얘기다.
 
  “우리 때까지만 해도 좋은 대학을 나오면 취업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토익·토플 점수 등을 요구했지만 요즘처럼 화려한 스펙을 요구한 곳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IMF가 터지니까 은행, 대기업, 방송국 등 어디서도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지 않는 겁니다. 구직 활동을 반 년쯤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나왔습니다. 저도 공부에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취업을 하지 못해서 석사를 갖게 된 경우고요. 그런데 75년생들은 이마저도 운이 없지요. 이들이 석사 학위를 받고 외국 회사의 문을 두드려볼까 싶을 때 미(美) 9·11테러(2011년 9월)가 터졌습니다. 우리나라가 힘드니까 해외로 눈을 돌리려다가 이번에는 해외에서 일이 생겨서, 그때 우리끼리 그랬습니다. 뭐를 해도 안 되는 해에 태어났다고요.”
 
 
  ‘3포 세대’보다는 기존의 기성세대 성향이 많아
 
  시련이 영원하리라는 없는 법처럼 세월은 흘렀고, ‘저주받은’ 75년생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서른을 전후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하나둘 낳아 지내고 있다. 그 당시에는 ‘X세대’라며 마음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세대라고 치부됐지만, 이들은 이른바 ‘3포 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 ‘헬조선 세대’(대한민국이 먹고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음을 말하는 것), ‘흙수저’(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통통 튀며 자유분방했던 개인주의적인 성향은 지난 25년의 세월 앞에 그들을 폄하했던 선배 세대들과 묘하게 닮아가고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재직 중인 75년생 토끼띠의 말이다.
 
  “밀레니엄 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로, 1980년 초반 이후에 태어난 세대) 데리고 일하기 정말 힘듭니다. 맨날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성과가 나면 연말에 인센티브가 나온다고 하면 ‘워라밸’(일과 라이프의 밸런스를 줄인 말)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생길는지 모르는 희망보다는 오늘의 편안함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맛있는 거 사주면서 속을 터놓고 얘기 해 볼까 했는데 ‘맛없는 음식을 차라리 혼자 마음 편히 먹겠다’며 퇴근합니다. 말을 걸기도 조심스럽고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락없는 ‘꼰대’를 바라보듯이 쳐다볼 때면 답답하기도 하고요.”
 
  올해 마흔다섯, 어느새 후배들로부터 ‘꼰대’ 취급을 받는다는 그가 바로 25년 그 윗세대들이 말했던 ‘말도 안 통하는 X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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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욱    (2019-05-25) 찬성 : 0   반대 : 0
틀린 내용이 너무 많네요 82년에 초등학교 입학했고 89년에는 중학교2학년이었습니다.
수능도 8월과 11월이었고요!!

20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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