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읽는 시집] 박상봉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간절함으로 버텨온 삶, 그 낮고 단단한 서정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박상봉 시인(67)의 네 번째 시집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몰개)는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간절함'의 기록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가난과 병, 상실과 침묵 같은 생의 조건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끝까지 견디는 몸의 자세로 시를 세운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삶의 체온이다.


연대보증 섰다가 명퇴금 다 날리고 

남은 개똥받이 한 뙈기 팔아 재래시장에서 채소 장사 시작한 아버지 


그마저 실패하고 마지막 밑천으로

낡은 집 자전거 끌고 밤늦도록

이 동네 저 동네 생선 팔러 다녔어


새벽부터 싣고 다닌 마른 명태 꾸러미

잠깐 오줌 누고 온 사이 누군가 몽땅 들고 달아나버렸다는데 


아버지는 소리 내어 맘껏 울지도 못하고 남몰래 흔들리며

등 굽은 어깨 너머 노을처럼 저물었다


바람이 숭숭 들락거리는 단칸방에서

혼자 식은밥 떠먹다가 

덜거덕 덜거덕 텅 빈 짐 자전거

문간에 들어서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


달빛 뚝뚝 떨어져 내리는 골목길 내다보면 


시린 발 동동거리는 퀭한 북어 눈이 되었다

-시 ‘짐 자전거’ 전문


1981시문학추천으로 등단한 이후 박기영·안도현·장정일 등과 동인지 국시활동을 함께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생의 밑바닥을 관통하는 절실한 서정을 보여준다. 1985년부터 5년간 '시인다방'을 운영하며 문화기획자로 활동했고, '산 아래서 누리기'를 비롯해 '시인과 독자의 만남'200회 이상 기획·진행하며 서울·대구·구미 등지에서 문학활동과 문화운동을 펼쳐온 시인의 40여 년 시력(詩歷)이 이 시집에 응축돼 있다.

 

짐 자전거는 연대보증으로 명퇴금을 날리고 재래시장 채소 장사마저 실패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낡은 짐 자전거로 생선 장사를 하던 아버지는 마른 명태 꾸러미마저 도둑맞고 "소리 내어 맘껏 울지도 못하고 남몰래 흔들리며" 노을처럼 저문다. 시인은 단칸방에서 식은밥을 먹다가 빈 짐 자전거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는다. "시린 발 동동거리는 퀭한 북어 눈"이 된 채로. 아버지는 끝내 말라버린 북어 눈으로 남고, 시인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꼭두새벽에 콩나물 국밥 사러 간다

 

아내가 또 아프다

약 먹어야 하는데 속이 쓰려 밥도 약도 못 먹겠단다

 

아랫동네 24시 콩나물 국밥 한 그릇 사다 줄 수 있냐고 보채

산책 삼아 길 나섰다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 표정

핼쑥하게 자라난 콩나물 같다

 

아내 얼굴은 콩나물 대가리보다 더 노랗다

항암 치료로 나무꼬챙이 따로 없다

벌써 가을이 문밖에 와 있다

푸르고 싱싱하던 것들 긴 잠들고

나뭇잎 떨어지는 다른 세상이 깨어 있다

 

아프게 비 맞으며

콩나물 국밥 한 봉다리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검은 먹구름 잔뜩 낀 해 없는 날

물만 먹어도 잘 자라는 콩나물

희미한 빛 한줄기 발끝을 세운다

-시 '콩나물 국밥' 전문

 

콩나물 국밥에서는 항암 치료 중인 아내를 위해 꼭두새벽 국밥을 사러 나서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콩나물 대가리보다 더 노란" 아내의 얼굴, "나무꼬챙이 따로 없는" 몸을 떠올리며 "검은 먹구름 잔뜩 낀 해 없는 날"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물만 먹어도 잘 자라는 콩나물 / 희미한 빛 한줄기 발끝을 세운다"는 마지막 행에서 생의 아이러니가 포착된다. 이 시집에서 사랑은 숭고한 언어가 아니라 따스한 간절함의 손길로 아름답게 드러난다.

 

"문장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 불 꺼진 자리 곁에 머무는 법

 

표제시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는 이 시집의 미학을 집약한다. "어떤 밤은 불 켜지 않아도 데워진다 / 어떤 문장은 읽지 않아도 종소리 울린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말하지 못한 사랑의 뒷면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어떤 밤은 불 켜지 않아도 데워진다 

어떤 문장은 읽지 않아도 종소리 울린다 


말하지 않은 고백의 뒷면 같은 

문장은 늘 타이밍을 잃고 도착한다 

그래서 말이 늦었을 뿐 

사랑이 아니었던 건 아니다 


어떤 마음은 말이 되는 걸 거부한다 

손을 덥히는 잔 속의 김처럼 

공중으로 조금씩 사라진다 


너를 위해 쓰는 줄 알았던 문장은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한 문장이었어 


어쩌면 우리는 

같은 문장을 서로 다른 시간에 읽는 사이일지 모른다 

말을 잃고 나면 다른 문장이 끓는다 

문장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여전히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 있다

-시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서’ 전문

 

시인은 늦은 사랑을 용서하고, 말이 되지 못한 마음까지 사랑으로 인정한다. "말을 잃고 나면 다른 문장이 끓는다 / 문장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 나는 여전히 / 불 꺼진 너의 단어 곁에 있다"는 고백에서 시인의 태도가 분명해진다. 사랑이 실패한 뒤에도, 말이 닿지 않아도, 불 꺼진 자리 곁에 오래 머무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다.

 

저녁의 점자에서 시인은 "조금씩 늦게 사랑하고 있다"고 쓴다. "편지보다 오래 걸리고 / 사라진 것들을 불러내는 저녁의 방식은 / 언제나 너무 조용해"라는 구절에서 시인 특유의 섬세한 감각이 드러난다. 박상봉의 시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불 꺼진 자리 곁에 오래 머무는 법을 보여준다.

 

읽는 자로서의 시인, 필사하는 자로서의 간절함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붓꽃은 이러한 시 세계를 집약한다. "시인은 붓꽃 앞에서 읽는 자일 뿐 / 파도는 행서, 나뭇잎은 초서, / 붓꽃은 정갈한 해서체다." 시인은 자신을 쓰는 자가 아니라 읽는 자로 위치시킨다. 대지는 이미 문장을 써 두었고, 시인은 그것을 한 자루 필생의 붓으로 필사할 뿐이다.

 

붓꽃은 대지가 쥔 붓


바람이 지나가면 획이 그어지고 

햇빛이 스며들면 잉크가 번진다 


강가에 늘어선 붓꽃 군락은 

거대한 원고지의 푸른 줄 

보랏빛 꽃잎은 쉼표나 마침표다 


떨어진 꽃잎은 여백이 되고 

씨앗은 또 다른 문장의 서두가 된다 


시인은 붓꽃 앞에서 읽는 자일 뿐 

파도는 행서, 나뭇잎은 초서, 

붓꽃은 정갈한 해서체다 


적벽을 묵묵히 필사한다 

너른 대지에 먼저 써둔 문장을 

겨우 흉내 낼 뿐이라도 


한자루 필생의 붓으로 베껴 쓴 시 

압화(押花)처럼 어느 책갈피에서 

되살아날 것을 믿는다 


그것을 간절이라 부르련다 


간절곶 아래 붓꽃 한 송이 파랗다

-시 ‘붓꽃’ 전문


간절함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이며, 절망 속에서도 삶을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이다. 자연이 먼저 쓴 문장을 "겨우 흉내 낼 뿐"이라도 베껴 쓰는 것, 시인은 그것을 '간절'이라 부른다.

 

'낮은 음역의 그윽함'이 지닌 힘

 

시인 이하석은 박상봉의 시 세계를 "간절함으로 쌓은 사랑의 탑"이라 평한다. "그의 시에는 매우 지성스럽고 절실한 것이 담겨 있다. 그는 자연이든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소통과 교감에는 간절함이 절실하게 작용해야 함을 믿는다." 사물이든 풍경이든 결국 인간의 모습으로 귀결되는 그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소통의 구조'를 꿈꾼다. 그 과정에서 시의 언어는 점점 낮아지되, 민감성은 오히려 고조된다.

 

시인 엄원태는 박상봉의 시가 지닌 힘을 '낮은 음역의 그윽함'으로 설명한다. "시인은 '아이의 아이로 태어나' 한 생을 살아왔고 또 여실하게 '아이'로 살아가다가 죽을 것이다. 이 게송 같은 진술은, 시인 특유의 도저한 낭만성을 넘어 그것보다는 한층 더 구체적인 실존의 체험과 체득을 통해 ''을 관통하는 본성적인 삶의 원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그 음역이 낮지만 그윽하고 힘이 세다."

  • 스크랩
URL이 성공적으로 복사되었습니다.
많이 본 뉴스
  • 세계속 코이카'
  • 배진영의 '어제 오늘 내일'
  • 김태완 'Stand Up Daddy'
  • 권세진 ‘별별이슈’
  • 정혜연 ‘세상 속으로’
  • 박희석 ‘시시비비’
  • 이정현 ‘블루오션을 찾아서’
  • 박지현 ‘포켓 저널리즘’
  • 하주희 ‘블루칩’
  • 이경훈 현장으로’
  • 김광주의 뒤끝
  • 백재호의 레이더
  • 고기정의 特別靑春
  • 슬기로운 지방생활
  • 이상곤의 흐름
  • 서봉대의 되짚기
  • 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 취재본부는 지금’
  • 조갑제 기자의 최신정보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