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리뷰] 《낙랑파라 시대》, 1930년대 경성 예술의 불꽃과 잔향

소설가 김광휘 선생의 신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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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낙랑파라 모습이다. 사진=김광휘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낙랑파라 시대》(해맞이미디어 刊)는 한마디로 “1930년대 경성의 예술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타올랐고, 왜 사라졌는가”를 한 자리에서 보여주는 장편이다. 액자 구조는 1984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김환기 10주기 전시회에서 시작된다. 

 

그 현장을 찾은 방송 구성작가는 백발의 여인 김향안(=변동림)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자신을 “나는 두 천재,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와 살았던 여자”라고 소개하며 오래전 경성의 한 시절이 펼쳐진다. 

 

지금, 1984년의 덕수궁은 기억을 여는 문이며, 그 문을 통과하면 1930년대 경성, 특히 서울시청 맞은편에 잠시 존재했던 문화 살롱 ‘낙랑파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낙랑파라의 탄생 (1931년 여름)


1931년 여름, 소공동 시청 맞은편에 몇 달간 가려져 있던 3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며 ‘낙랑파라’라는 간판을 건다. 이름부터 기묘하다. 조선의 옛 기억을 뜻하는 ‘낙랑’과 서양 응접실을 의미하는 ‘Parlour’가 결합된 이 공간은,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출신 공예가 이순석의 작품이다.

 

그는 “술 대신 음악을 판다”, “낮에는 덕수궁을 스케치하고 밤에는 예술가들이 모이는 응접실로 쓰겠다”는 분명한 구상을 갖고 있었다. 조선호텔, 시청, 조선·동아일보,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경성의 중심에 위치한 이곳은 개업식부터 문단·미술·언론계 인사들이 몰려들었다.


상석에는 이광수가 앉아 “커피 맛이 좋다, 초심을 잃지 마시오”라며 격려하고,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신여성 시인 모윤숙은 ‘술 없는 다방’에 박수를 보낸다. 종로 다방 멕시코에서 외상에 시달리던 김용규는 “외상은 절대 주지 마라”는 농담을 던지고, 조선일보 기자 홍종인은 매주 금요일을 ‘명곡의 날’로 정해 클래식을 들려주자고 제안한다. 이 장면에서 낙랑파라는 이미 ‘경성 예술가들의 거실’이 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후 두 인물이 연달아 등장하며 공간의 성격이 확고해진다. 꼽추 화가 구본웅은 의자 위에 올라 “나를 조선의 로트레크라 부르라”고 외치며 실내의 아르누보 장식과 유럽의 바우하우스를 설명해 이곳을 ‘근대 미술의 실험실’로 선포한다. 이어 등장한 총독부 건축기수 김해경, 곧 시인 이상은 “일본 인부들이 나를 이상이라 부르므로 스스로도 그 이름을 쓴다”고 말하며 능청스럽게 등장하고, 모윤숙이 “이상, 이상 우리의 멋진 이상!”을 외치자 분위기가 고조된다. 그날 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낙랑파라의 첫 밤을 장식하며 “경성에도 이런 곳이 가능하다”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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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인 이상, 소설가 박태원(월북작가), 김소운(일본문학가)

 

예술가들의 교류와 좌절


이순석은 이 공간을 지키며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 사회적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조선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정월)을 만나 다방으로 초대한다. 

 

나혜석은 “나는 버림받은 여자가 됐다”고 말하면서도, 파리에서 본 피카소·마티스·칸딘스키·클레 이야기와 조선 여성이 예술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이유를 술술 풀어낸다. 홍종인이 “올해 화제는 나혜석의 이혼이고, 별은 최승희”라며 농을 던지자, 나혜석은 “나는 불사조 정월이다. 제전에 다시 입선한다”고 받아친다. 그때 흐르던 곡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이었다. 이 장면은 낙랑파라의 정체성을 정확히 보여준다. 예술, 서양 음악, 여성의 자의식, 식민지 경성의 입방아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고 조화를 이루는 자리다.


그러나 낙랑파라가 주목받자마자, 종로의 선배 공간 멕시코는 외상 3,500원에 무너진다. 홍종인이 “멕시코를 구하라”고 신문에 썼지만 소용없었다. 이 몰락은 낙랑파라의 앞날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예술가들이 모여 번쩍이지만, 식민지의 경제 현실과 검열, 그리고 ‘문화는 돈이 안 된다’는 구조가 곧바로 뒤따라온다는 것이다.

 

천재의 등장, 이상

 

이 무렵, 백색 양복에 헝클어진 머리로 비틀거리며 낙랑파라에 들어온 이는 바로 이상이다. 그는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바이젠>을 틀라”고 말하며 탁자에 엎드리는데, 알고 보니 경성제대병원에서 폐결핵 진단을 받고 나온 길이었다. “총독부의 55원 따위는 사양한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실은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 온 사람의 허약함이다. 

 

그 자리에 있던 구본웅과 나혜석은 그를 데리고 중국집으로 가서 밥을 먹이며 달래는데, 이 식사 자리가 곧 1930년대 경성 청년 예술가들의 ‘실시간 예술 수업’이 된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만난 조선의 거물 최린, 거트루드 스타인 같은 후원자, 피카소와 마티스가 어떻게 전통 구상을 부숴버렸는지, 칸딘스키와 클레가 음악과 정신세계로 추상으로 나아갔는지를 생활적인 어조로 들려준다. 이상과 구본웅은 경성의 눅눅한 현실과 파리의 예술 생태계를 동시에 접하며 “우리도 가야 한다, 도쿄를 거쳐 파리로”라는 열망을 키운다. 하지만 이상은 이미 병들어 있었고, 그 병은 그가 예술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동력이자 동시에 죽음으로 향하는 중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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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그린‘이상과 구본웅’. 까치집 머리,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은 구본웅의 기묘한 조화가 곡마단 행차에 비유됐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김환기와 이상의 첫 만남(1935년)


1935년 가을, 일본 동경에서 이과전에 당당히 입선하고 화가가 되어 돌아온 전라도 사람 김환기는 자신의 기사를 신문에 내준 동아일보 기자들을 만나고 자신에게 좋은 평을 써준 선배 화가 김용준을 만난 후 소설가 정인택과 선배 화가 구본웅의 안내로 카페 쓰루에 들렀다. 쓰루는 시인 이상이 운영하던 카페였다. 


그날 밤 그 카페에서 1930년대 조선 땅에서 가장 전위적인 시를 발표하여 돌풍을 일으켰던 이상과 조선 화가 유학생으로서는 최초로 아방가르드 미술을 선도하던 김환기가 만났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런 밤에 손님들을 다 보내고 가게에서 호젓하게 2차를 하고 있던 이상과 권순옥은 하던 대로 기분 좋게 술상을 치우고 몸을 섞을 수가 없었다. 로트레크와 정인택에 이끌려 가게에 찾아왔던 키 큰 화가 김환기가 남기고 간 예술적 열기 때문이었다. 이상이 말했다.

“내가 그동안에는 종로 바닥에서 꽤 큰 키에 속했는데 그 친구는 나보다 5cm는 더 커 보이던데 노쿠샤쿠 180cm는 족히 되겠어.”

 

권순옥이 말했다.

“글쎄 말이에요. 농구 선수 같지요? 목도 길고 손도 길었어요. 키 큰 사람들은 싱겁기 마련인데 그 분은 아주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속도 꽉 찬 것 같던데요.”

이상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노쿠샤쿠한테 반했나? 첫 눈에?”

권순옥은 가볍게 눈을 흘겼다. 

“웬일이세요? 질투를 다 하시고. 당신은 그런 내색 안 하는 사람이었잖아요.”

“당신이 그 노쿠샤쿠의 말을 천황폐하의 옥음(玉音:왕이나 황제의 말씀)처럼 받아 적기까지 하니까 슬그머니 화가 났었지. 그나저나 정인택이 이상하게 풀이 죽어있더군.”

“글쎄 말이에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아까 문을 나서는 뒷모습이 이상하게 섬뜩하더라고요.”

“섬뜩하다니? 무슨 의미야?”

“여자에게는 촉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 이가 오늘밤에는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어요.”

이상도 목소리를 낮추며 맞장구를 쳤다.

“거 이상하네,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권순옥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생각난 김에 그분 하숙으로 찾아가볼까요?”

“정인택의 하숙으로? 난 그 친구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데?”

“여기서 아주 가까워요.”

이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그 친구 하숙집을?”

권순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딴 생각 마세요. 얼마 전에 하숙을 옮겨야 하겠다고 해서 내가 아는 사람 집을 소개해줬다고요. 여기서 아주 가까워요.”

두 사람은 바바리를 걸치고 종로 뒷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내달았다. 두 사람의 예감은 희한하게 적중하였다. YMCA 뒷골목에서 아주 가까운 그의 하숙에 들어가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축 늘어진 채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이상이 정인택의 머리맡에서 뒹구는 약병을 들고 말했다.

“독일제 수면제 아로나르군. 나도 가끔씩 먹는 건데. 얼마나 먹었길래....”

 

그는 권순옥을 다그쳤다.

“인력거를 불러. 인력거를!”

술집과 권번이 많은 종로통에서 대기하고 있던 인력거는 많았다. 권순옥이 하숙집 안집의 전화통을 붙잡은 지 10분이 조금 지나 인력거가 달려왔다. 이상이 정인택을 안고 앞에 타고 뒤에 따라온 인력거에 권순옥이 탔다. 두 대의 인력거가 서둘러 의전부속병원의 응급실로 달려갔다. 당직 의사가 서둘러 위세척을 끝내고 링거를 꽂은 지 3시간이 지나자 정인택은 눈을 떴다. 병실에 새벽 햇살이 비칠 때였다. 그의 첫 마디는 이런 것이었다.

“뭣하러 살려놨어.... 난 희망도 없는 놈인데.”

권순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선생님, 왜 이러세요. 스물여섯 창창한 나이에...”

정인택은 스르륵 눈을 감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젊음이 거추장스럽기만 합니다. 희망 없는 젊음으로 무얼 합니까. 내가 상이처럼 글재주가 뛰어납니까, 노쿠샤쿠처럼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습니까? 구보처럼 문명이 나있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청춘입니다. 허울뿐인 청춘입니다.”

이상이 나섰다.

“자네 왜 이러나?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어?”

그러자 정인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상이, 아니 김해경이지. 야, 김해경. 너 권순옥이 나한테 양보할 수 있어? ...난 권순옥이가 있으면 살아나갈 힘이 생길 것 같은데.”

 이상은 사태의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권순옥과 정인택을 병원에 남긴 채 혼자서 가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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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9일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 재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내부를 둘러보고 있다. 시인 이상이 살던 공간 '이상의집'. 사진=조선DB, 연합뉴스

 

카페 쓰루, 다방  식스나인


그 해 가을, 동소문 밖 돈암동 신흥사(현재의 흥천사)에서는 주지인 대처승의 주례로 결혼식이 열렸다. 그 결혼식의 사회자는 뜻밖에도 이상이었다. 이상은 제가 장가를 가는 것처럼 싱글거리며 신랑 정인택, 신부 권순옥의 결혼식 사회를 보았다. 


축사는 이광수에 이어 문단을 주름잡고 있던 김동인이 해주었다. 구인회의 멤버들이 다 오고 매일신보 기자들과 잡지 <문장>의 기자들도 싱글거리며 참여해주었다. 매일신보가 주선을 해주었던지 잘 나가는 명창 박녹주(1906-1979)가 고수와 함께 나타나 춘향전의 사랑가를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다. 모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계곡을 바라보며 단풍놀이 하듯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작심한 듯 토요일 하루를 그 돈암동 계곡에서 보냈다. 


새침하고 재치 있고 문학적 소양이 있던 권순옥이 떠나고 나자 카페 쓰루는 황폐해지기 시작하였다. 손님들의 발길은 끊어지고 천장의 불빛만 요란해서 결국 1935년 초겨울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상은 미친 사람처럼 허둥대며 광교 못미처에다가 ‘식스나인’이라는 다방을 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6자와 9자를 얽어서 알쏭달쏭한 간판을 내걸었다. 영업 허가를 내준 종로 경찰서의 나까노 형사가 두 달 만에 이상을 불렀다. 이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형사계 사무실로 들어서자 일본인 형사들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어이, 위대한 시인 어서 오시게. 자네 우리들을 가지고 놀았어. 뭐? 식스나인이라고? 여자하고 남자가 그렇게 거꾸로 얽혔다 이거지? 나까노 형사는 그 뜻도 모르고 정중하게 허가를 내줬다 이거야. 허허허.”


콧수염을 기른 나까노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상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따귀부터 후려쳤다.

“빠가야로(바보자식)! 네가 우리 대일본 경찰들을 우롱했어? 빠가야로!”

한 대 더 갈기고 침을 뱉듯 말했다.

“허가 취소야 임마. 당장 간판 떼.”

이렇게 해서 이상의 만용은 좌절되었다. 

 

소설은 여기서 이상이 요양을 떠나 배천 온천에서 기생 금홍을 만나는 장면을 덧붙인다. 금홍은 병든 시인을 연민과 애무로 감싸며 “당신 시 속에서 나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을 남기는데, 이 만남은 훗날 이상이 도쿄에서 집필한 걸작 《봉별기》의 정서적 씨앗으로 제시된다. 즉, 낙랑파라에서 만난 예술가들이 서로의 욕망과 병, 빈곤을 위로하던 열기가 경성 밖 온천에서 만난 한 기생의 온기로 이어져 문학으로 승화되는 구조다. 이는 이상이 늘 현실의 궁핍과 예술의 고양, 그리고 여성에 대한 애착을 동시에 필요로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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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이 1935년 발표한‘친구의 초상’. 이상의 얼굴로 붉은 눈자위 등 병색이 짙은 시인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상과 변동림, 불꽃 같은 사랑 (1936년)


이후 시선은 이상과 변동림의 격정적인 사랑으로 옮겨간다. 1936년 봄, 이상은 아현동 고개에서 이화여전생 변동림을 기다리다 마침내 만나고, 둘은 다방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 <봄>을 들으며 사랑에 빠진다.

 

며칠 뒤 그는 “짐 싸서 나오라”고 말해 ‘도피 결혼’으로 이끈다. 신흥사에서 즉석으로 불교식 혼례를 올리고, 성북동의 허름한 집에서 신혼을 시작한다. 이 시기는 이상에게 잠깐의 전성기였다. 아내와 문학·영화·보들레르·아폴리네르를 이야기하며 병도 잊고 《날개》를 써서 문단의 중심에 들어간다.


하지만 곧 식민지 현실이 들이닥친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경성 전체가 들끓자, 이상도 격앙되지만 변동림은 “당신 일은 글 쓰는 일”이라며 그의 에너지를 다시 책상으로 돌린다. 도항증을 마련해준 것도 동림이었다. 명동의 밤을 쥐고 있던 일본인 마담 나오미에게 “시인 남편이 도쿄로 가야 한다”고 정면으로 청했고, 그 덕에 이상은 내지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 장면은 “아내가 밤의 노동으로 남편의 예술에 날개를 달아준 순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도쿄는 그에게서 체력과 자유, 그리고 시간을 앗아갔다. 1937년 초, 이상은 특고에 연행되어 한 달 넘게 유치장에 갇히고, 폐결핵은 급속히 악화된다. 유학생들이 음식을 가져다줘도 살이 붙지 않았고, 그는 끝내 “동림을 불러달라”고 말한다. 변동림은 경성에서 돈을 빌려 바다를 건너 도쿄 병원으로 달려가 그의 임종을 지킨다. 

 

이상은 마지막까지 “버터 안 바른 코페빵” 같은 사소한 욕망을 말하다가 조용히 눈을 감고, 변동림은 “27년이면 천재가 소멸되기에 충분하다”고 담담히 말한다. 이로써 낙랑파라에서 시작된 한 천재의 궤적은 병든 몸, 예술의 과열, 여성과의 교섭, 식민지의 압박, 도쿄에서의 고독한 죽음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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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팔짱을 끼고 파리 거리를 활보하는 김환기(왼쪽)와 김향안. 사진=(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식민지 경성의 문화적 최전선과 이상, 변동림, 김환기

 

마지막 축은 김향안이 말했던 “또 한 사람의 천재”, 곧 김환기로 이어진다. 도쿄에서 전위미술 인맥과 어울리며 파리를 꿈꾸던 김환기는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서 “먼 데 미만 보지 말고 조선의 백자와 민예에서 비애와 힘을 보라”는 조언을 듣고 경성으로 돌아온다. 

 

그가 다시 찾은 낙랑은 이미 ‘이순석의 순수 살롱’이 아니라 영화배우 김연실이 운영하는 반카페로 변해 있었다. 공간은 쇠퇴했지만 사람들은 남아 있었고, 김환기도 조선의 미와 서양 추상을 잇는 방향으로 자신의 미학을 정립한다. 이 무렵 도쿄와 경성을 오가던 변동림과 사랑을 시작하고, 1944년 결국 결혼해 전쟁기 경성에서 조촐하지만 빛나는 예술혼을 꾸린다.

 

요약하자면, 《낙랑파라 시대》는 한 다방의 개업과 폐업을 따라가며 식민지 경성의 문화적 최전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최전선에 왜 늘 아픈 천재들(이상), 단단한 여성 예술가들(나혜석·변동림), 그리고 그들을 기록한 예술지향적 남성들(구본웅·홍종인·이순석)이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이 왜 짧게 타올랐다가 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상이 배천 온천에서 만난 금홍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훗날 《봉별기》라는 명편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분은, 이 소설이 “그 시절의 사랑과 위로가 결국 한국 근대문학의 한 문장을 만들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낙랑파라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서 교차했던 사랑·병·음악·서양미술의 말들이 문학과 미술로 남아 한국 근대미학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큰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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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광휘 선생

 

소설가 김광휘 선생(1941~)은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카자흐스탄 여자사범대 명예문학박사를 받았다. ROTC 2기로 1965년 베트남전에 참전 무공훈장을 받았다. 방송작가로 MBC 라디오 <홈런출발>, <격동 50년>,  MBC TV <웃으면복이와요>,<제4공화국>,<문학산책> 등을 썼다. 그 후에는 소설쓰기와 평전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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