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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즐거운 사라》의 마광수 교수 사망...다시 보는 '마광수 구속 사건'

창작표현의 자유도, 검사의 수사권도 존중되어야

심재륜  전 고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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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가 자택에서 사망했다. 자살로 추정된다. 마 교수는 1990년 전후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즐거운 사라》를 출간했으나 당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된 후 '외설'과 '예술' 논란을 벌였으나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사건 최종 지휘라인에 있었던 심재륜 전 고검장은 《월간조선》 2012년 6월호에서 "작품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이나 사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처리하려했다"면서 "창작표현의 자유도 인정해야 하지만 검사의 수사권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은 심재륜 고검장의 기고문 전문이다.
2015년 9월 15일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저서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고(故) 마광수 연세대 교수. 정년을 한 학기 앞두고 있었던 그는“앞으로도 우리 사회 이중성에 대한 창조적 불복종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사진=조선DB

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淫亂書生 退出記

―《즐거운 사라》 마광수 교수 구속 사건

 
 
⊙ 《즐거운 사라》는 문자화한 한 편의 음란비디오
⊙ 《즐거운 사라》 단죄에 뜬금없는 정치적 배경설까지
⊙ 구속적부심 기각에 1심-2심-대법원까지 有罪, 검찰보다 사법부가 더 강경
⊙ 창작표현의 자유도, 검사의 수사권도 존중되어야
 
 
<…《즐거운 사라》는 주인공인 미대 여학생 ‘사라’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갖는 즉흥적 동침, 여자친구와 벌이는 동성연애, 적나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자위행위, 스승과 벌이는 부도덕하고 음란한 성행위 등을 묘사하고 있는 퇴폐적인 성애 소설로서 1991년 7월 30일 서울문화사에서 발행됐다. 이에 우리 위원회는 문제의 소설이 사회의 건전한 도덕성을 파괴하고 미풍양속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가치판단의 능력뿐만 아니라 건전한 비판력 등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채 갖추지 못한 청소년층에게 성적 충동의 자극을 일으켜 성범죄 등을 유발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 ‘제재’ 결정을 내렸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당시 이원홍 위원장)가 1991년 9월 1일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에 대해 내놓은 심의 결과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국내 유통되는 출판물의 유해성 여부 등을 심의하는 사단법인체다. 이 같은 결정이 있기 두 달 전 《즐거운 사라》를 출판하고 유통시켜 온 서울문화사 측은 위원회의 이런 결정을 존중해 즉각 책의 출판을 중단하고 앞서 시중 서점에 배포됐던 책들도 회수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1년이 지난 뒤 어찌된 일인지 간행물윤리위는 또다시 《즐거운 사라》에 대한 제재 결정을 내놓았다. 달라진 것은 거의 없고 ‘1991년’에서 ‘1992년’으로, 연도(year)만 바뀐 모양새였다.
 
 
  간행물윤리委의 잇단 제재
 
  < …서울문화사 측의 자진 수거로 인해 시중에서 사라졌던 《즐거운 사라》는 도서출판 청하(발행인 장석주)에서 1992년 8월 20일 재간행되었는데, 이 재간본에서는 문제되었던 음란 표현을 삭제·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음란한 내용을 추가하는 등 퇴폐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가필·보완하여 출간했다. 이에 우리 위원회는 위 도서를 재차 심의하였는바 초간본과 마찬가지로 ‘제재’ 결정(1992.9.1)을 내리고 문화부와 서울지방검찰청에 관련 내용을 통보했다.>
 
  대학 시절 이래 그럭저럭 문학 쪽으로 분류되는 책들을 좀 읽어보았다고, 언필칭 그렇게 자부해 왔어도 사실 나는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또 이른바 세상에서 ‘예술이냐 외설이냐’ 운운하는 사건 쪽으로는 수사도 해보지 않았다. 검사로서 다양한 사건들을 많이 다루었지만 치고 박고 때리고 속이고 죽이고 하는, 직접적이고 뚜렷한 범죄행위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문외한이다. 그러나 예의 《즐거운 사라》, 그보다 마광수 교수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그전부터 어느 정도는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마 교수는 일찍부터 예술과 외설 사이의 담장을 걸으며 우리 사회에 툭툭 화제를 불러일으켜 온 터였다. 1989년 5월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내고 이어 다섯 달 만에 수필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소설 《광마일기》 등을 써내 단시간에 인기작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1990년 7월 《광마일기》가 음란성을 이유로 간행물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즐거운 사라》를 써서 거듭 그의 색깔과 존재감을 세상에 부각시켰다. 특히 《즐거운 사라》는 발간된 지 한 달여 만에 8만 부 가까이 판매되며 화제가 됐다. 그가 다분히 호불호가 교차하는 ‘광마(狂馬)’라는 대중적 별칭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일들의 결과다. 나뿐만 아니라 허다한 일반인들이 앞의 책들을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그 제목만은 어디서 보았거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즐거운 사라》를 읽다
 
  그처럼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긴 했어도 《즐거운 사라》의 내용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결정대로라면 아마도 꽤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뭐, 그러니까 제재를 받았겠지…. 1991년 《즐거운 사라》에 대한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첫 심의결과가 처음 신문에 보도됐을 때 나는 이처럼 가볍게 기사를 흘려 보았다. 그런데 좀 지나니까 그게 아니었다. 제재받은 《즐거운 사라》가 다시 출간돼 화제가 되더니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이를 되풀이 제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허, 이것 좀 보게…, 싸움이 붙었네.
 
  눈길을 확 잡아끄는 일련의 자극적인 제목의 책들, 게다가 작가는 유수 대학의 교수인데 그가 쓴 작품들이 잇달아 ‘문제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점 등이 겹치면서 마 교수와 그 주변의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이렇게들 난리인고…? 1992년 10월 초 나는 내 방(서초동 서울지검 3차장검사실) 앞을 지켜 앉은 여직원에게 서점에 가서 《즐거운 사라》를 한 권 사오라 했다.
 
  그러고는 그날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여 찬찬히 읽었다. ‘내 이놈의 책을 반드시, 혹은 이 작가를 당장’하는 식의 선입견이나 사감(私感)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제야 말이지만, 사실 나는 그것이 문학작품이든 영상작품이든 그 내용의 외설성이나 도덕성 같은 막연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중 혹은 시장에서 응당 알아서 걸러내리라, 생각해 왔다. 예술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그저 장삿속만 챙기려는 작품 같지 않은 작품 따위는 세상이 다 알아서 도태시킬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 만큼 《즐거운 사라》에 대해서도 어떠한 예단(豫斷)을 갖지 않았다.
 
  그저 여느 소설책을 읽듯 편안한 마음으로 그날 저녁내 찬찬히 책을 읽어내렸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 그 내용에 대한 내 생각은 책을 읽기 전의 그것과 확 달라졌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이라도 그때의 솔직한 ‘독후감’을 곧이곧대로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굳이 이제 와서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고, 다만 그때 나를 아주 불쾌하게 했던 두 가지 느낌만 말하고 싶다.
 
 
  ‘이런 것도 문학인가’ 싶어
 
  하나는 ‘정말 이런 것을 문학이라 해야 하는가. 정말 예술이란 게 이렇게까지 변태와 엽기로 치달아야 그럴 듯한 것이 되는가’였다. 다른 하나는 (이는 솔직히 나의 편견이랄 수도 있다) ‘이런 글을 써대는 사람이 과연 국내 명문대 교수로서 남을 가르치고 지도해도 괜찮은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즐거운 사라》의 내용이 머릿속 괘념이 되어 틀어박혔다. 그러면서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과 ‘내가 너무 보수적인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줄곧 부딪쳤다. 이런 것까지도 과연 우리 사회가 예술 혹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인지, 다른 이들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책의 퇴폐성과 외설성에 공식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었다. 그 책과 저자를 사건의 대상으로 삼아 정식으로 수사하고 싶었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도 예술가는 예술가의 눈으로, 대중은 대중의 눈으로 그것을 보고 평가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나는? 검사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일선 검사들에 대한 직접 지휘권을 가진 차장검사라 해도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곰곰이 궁리하던 끝에 10월 중순께 (3차장) 휘하의 특별수사 1, 2, 3부 세 부장을 내 방으로 불렀다.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내 방 한가운데 회의탁자를 둘러앉은 세 부장에게 나는 별다른 말없이 불쑥 《즐거운 사라》를 디밀었다.
 
  “이 책 다들 알죠?”
 
  “네. 제목은 알고 있습니다.”
 
  “요새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서 내가 요전에 사다 한 번 읽어봤는데….”
 
  척 하면 삼천리. 거기까지만 얘기해도 내가 어떤 속내로 그 책을 꺼내들어 화제로 삼는지 그들이 모를 리 없을 터였다. ‘제가 보니까 그게 이렇더라 저렇더라’하고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자칫 빛도 안 나고 골치만 아플 일을 떠맡게 되리라는 것을 지레짐작했는지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多讀家 김진태 검사
 
김진태 검사.
  그래서 내가 먼저 “이 내용을 우리 부장들도 다 한 번씩은 읽어보기는 해야 될 것 같은데”라고 운을 떼고는 “좌우지간 어느 부서에서든 좀 맡아서 내용을 검토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하고 에두르지 않고 말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대답을 꺼낸 사람은 조용국 특수2부장이었다. “저희 쪽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저희 부서에 마침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검사가 있습니다”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부장들이 돌아가고 나서 이튿날 아침 한 검사가 내 방으로 찾아왔다. 특수2부의 김진태 검사(현 대전고검장)였다. 그는 평소 인문학 쪽으로 3000여 권의 책을 독파한 다독가(多讀家)로 검사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 특히 문학과 종교 분야에 조예가 깊어 ‘김 박사’라는 별칭을 얻고 있을 정도였다. 말할 것도 없이 김 검사는 어떤 일로 내가 그를 불렀는지, 이미 조 부장으로부터 언질은 받았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도 《즐거운 사라》를 꺼내 보이면서 “이 내용이 문학이라고 하기엔 좀 심한 것 같은데 한 번 검토해 보겠느냐” 물었다.
 
  그런 내 말의 속뜻을 김 검사 역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김 검사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내 “제가 못 할 것 같습니다”라고 못 박듯 말했다. 아마도 내 방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대답을 작정해 두었던 모양이다. 문학을 잘 아는 검사로 정평이 나 있던 만큼, 김 검사는 《즐거운 사라》가 수사 대상이 될 경우 벌어질 일들을 이미 훤히 내다보는 듯했다. 한마디로 검찰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문학작품의 외설성을 문제 삼아봐야 본전도 못 건질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선례들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음란물 시비의 역사
 
음란물 논란을 빚었던 소설 《영점하의 새끼들》과 《반노》.
  우리나라에서 문학작품의 외설성이 시빗거리가 되어 작가가 사법처리까지 당한 최초 사례는 1969년 출판된 소설 《영점하의 새끼들》이었다. 당시 건국대 박승훈 교수가 《서울의 밤》, 《영점하의 새끼들》, 《O년 구멍과 뱀의 대화》 등의 작품을 잇달아 내놓았는데 이 가운데 《영점하의 새끼들》이 문제가 됐다. 박 교수가 이로 인해 같은 해 7월 형법상 음란물 죄로 구속된 것이다. 또 1973년에는 작가 염재만씨의 소설 《반노(叛奴)》가 문제가 됐다. 검찰은 이 작품이 음란물에 해당한다며 염씨를 기소했고 1심 법원은 이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검찰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이 두 사건에서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일이 진행되던 초기에는 작가가 구속되거나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두 작가와 작품은 대법원까지 가는 오랜 다툼 끝에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던 검찰로서는 오히려 해당 작품들에 유명세를 더하고 나아가 그것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엉뚱한 결과만 빚고 말았다.
 
  이런 전례들이 있었던 데다 1990년대 이후 이미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 특히 각종 디지털 매체의 발전과 더불어 점점 더 ‘열린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도덕이며 윤리를 강조하는 보수적인 사회통념보다는 갈수록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더더욱 힘을 얻어가는 분위기였다. 이런 흐름을 거슬러 ‘검사가 감히(?) 문학작품의 음란성, 위법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웠다.
 
  나 역시 그런 현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검사로서 대선배요 직장상사라 해도 김 검사에게 《즐거운 사라》가 사건이 될지 안 될지 검토해 보라고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설득한다는 것도 무망했다. 상대방이 일을 피해가려는 눈치가 역력한데 그것을 설득한다고, 제대로 일(수사)이 진척될 리 없었다. 그래서 나는 김 검사에게 한마디만 했다.
 
  “이걸 꼭 사건으로 만들어서 수사해야겠다, 그런 부담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갖지 말고 그냥 이 책을 가져가서 한 번 읽어나 보시게.”
 
  묵묵히, 김 검사는 돌아갔다.
 
 
  마광수, “권위주의의 결과”
 
  그런데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김 검사가 불쑥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언가 아주 진지한 생각이라도 하는 양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그는 여직원이 커피를 내 오기도 전에 거두절미, 단도직입으로 나에게 말했다.
 
  “어제 책을 다 읽어봤는데요. 이 정도라면 우리(검찰)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즐거운 사라》는 검찰의 공식 수사 사건이 되었다. 나중에 마 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을 보니 마 교수는 당시 검찰이 《즐거운 사라》를 수사한 것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 …(저에 대한) 본때 보이기라는 게 맞고, 권위주의의 결과죠. 《문화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때 현승종 총리가 지시한 것이고, 이건개 서울지검장이 지휘를 해서 김진태 검사한테 시켜서 한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걸 보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상명하복 식으로 이루어진 수사죠. …그때 구속적부심 청구도 했는데 기각되고, 보석 청구했는데도 기각되고, 이게 국가적 사건이기 때문에 기각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지승호가 만난 사람 : 마광수 교수 인터뷰)>
 
  도대체 어느 누가 마 교수에게 “(구속적부심이든 보석이든) 국가적 사건이기 때문에 기각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분명한 사실은, 1992년 당시 《즐거운 사라》의 사법처리는 오롯이 나로부터 시작됐고 김 검사에 의해 진행됐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도 음모도 악의도 없었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명백하게 밝혀둔다.
 
  어쨌든 이전의 다른 범죄 수사와 달리 나는 마 교수 사건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뒷짐지고 바라보기만 했다. 수사의 큰 방향이든 세부적인 내용이든 김 검사가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일절 간여하지 않고 결과를 기다렸다. 김 검사의 의욕과 열정을 믿었다.
 
  이윽고 10월 28일, 그러니까 간행물윤리위에서 《즐거운 사라》에 대한 두 번째 제재 결정을 내리고 나서 얼추 두 달이 지났을 때 우리 김 검사 측에서 마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에 들어오라고 통보했다. 물론 형사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그것은 곧 김 검사가 마 교수를 사법처리할 충분한 사전 검토와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마 교수는 검찰의 소환에 순순히 응해 10월 29일 아침 서초동 서울지검으로 들어왔다.
 
  출판물 등 예술작품의 음란성 여부를 가리는 사건은 일반 형사사건처럼 범행동기나 물증, 피의자의 자백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실제로 마 교수는 소환될 때 검찰청사 앞에 포진한 기자들 앞에서도 “이번 일은 우리 사법체계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력하게 심리적 저항감을 나타냈다. 그런 그가 검사 앞에서 순순히 자기 작품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할 리 만무했다.
 
  《즐거운 사라》의 실정법 위반 여부(형법 제243, 244조 - 음란물의 제작 및 배포)는 어차피 법정에서 따져야 할 사안이었다. 딱 떨어지는 물증도, 작가의 자백도 기대할 수 없었지만 김 검사가 마 교수를 소환해서 조사를 마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 교수 또한 검사와 다퉈봐야 자신에게 별 도움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검찰에서 조사가 진행되던 동안에도 김 검사와 별다른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 교수에 대한 조사를 마친 뒤 김 검사가 법원에 제출할 구속영장 청구서를 들고 내 방으로 올라왔다.
 
  서류를 받아본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내용이 더 추가된 것을 보고는 좀 놀랐다. 김 검사가 마 교수뿐 아니라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도 구속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앞서 있었던 음란 출판물에 관한 사건에서도 그런 사례는 없었다. 작가들만 사법처리됐고 출판사 대표들은 책의 판매금지나 회수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제재만 감수했을 뿐이었다. 전례도 그렇거니와, 나 또한 불법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엄하게 단죄를 해도 어떻게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개인적인 원칙 같은 것을 지녀온 터였다.
 
 
  최종심까지 3년 걸려
 
  그렇지만 사건 수사를 맡은 주임검사가 의욕적으로 일을 진행해 온 터에 거기다 대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김 검사에게 슬쩍 지나치듯 “출판사 쪽도 문제가 되는 모양이지?”라고만 말을 건넸다. 그러자 김 검사는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한 차례 제재결정을 내린 책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출판을 강행한 만큼 작가와 함께 사법처리를 해야 마땅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제는 애초 《즐거운 사라》를 문제 삼은 나보다 김 검사가 더 강경한 입장이 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서류를 결재했다. 그리고 검찰에 소환된 그날 저녁, 마 교수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내가 《즐거운 사라》를 처음 읽고 나서 마 교수가 구속, 수감될 때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언뜻 일사천리로 진행된, 대단히 순조로운 사건 수사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법정 논쟁은 마 교수를 검찰에 소환해 사법처리하면서 시작됐다. 보다 정밀하게 말하면 논쟁이 벌어진 공간은 법정이었지만 그 성격은 문학 및 예술에 있어서의 음란, 외설 문제에 대한 학술논쟁 혹은 이론논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마 교수가 구속되고 일주일 뒤 열린 구속적부심 재판(1992년 11월 7일)부터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1995년 6월 16일) 검찰과 마 교수의 불꽃 튀는 논쟁은 계속됐다. 마 교수는 자신의 작품이 성적욕구에 대한 ‘대리만족’이니 ‘카타르시스’니 반론을 폈지만 법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 검찰을 비롯한 맞은편에서는 “카타르시스(=淨化)의 어원을 따져 올라가면 그 본뜻이 정신적, 심리적 정화를 말하는 것이지 육체적,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일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법원은 1심-2심-3심에 걸쳐 《즐거운 사라》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1992년 12월의 1심에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1994년 7월의 항소심에서는 항소기각, 1995년 6월의 상고심에서는 “작품이 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문학의 예술적 한계를 벗어났다”고 결론지으며 상고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여론의 비난을 뚫고
 
  그 3년 동안 검찰은 법정다툼에 대한 부담과 함께 법정 바깥에서 들끓던 여론의 중압감도 견뎌내야 했다. 검사도 사람인 까닭에 ‘남의 이목’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특히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에서 여론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은 상당하다.
 
  항용 그렇듯이, 검찰의 조치에 찬성하고 박수를 보내는 쪽에서는 ‘마음속에서만 응원’을 보내기 십상이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맞은편, 곧 문학-출판-학술-예술의 자유를 옹호하고 외치는 쪽의 목소리와 액션은 눈에 확 띌 만큼 크다. 자연스럽게 언론은 ‘소리와 액션이 큰 쪽’의 사정을 보도하게 마련이다. 당장 마 교수가 검찰에 처음 소환된 그날부터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온 이후까지 줄기차게, 주로 검찰을 성토하는 여론의 화살이 빗발쳤다. 출판문학계는 물론 교수와 학생들의 다양한 시위와 성명서 발표, 각종 퍼포먼스와 행사 등이 이어지면서 검찰을 압박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이 최종 유죄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앞서 《영점하의 새끼들》, 《반노》 사건 때처럼 대법원까지 가서 결국 무죄판결이 내려지는 것은 아닌가…, 저렇게 바깥에서는 연일 검찰을 성토하는데 실제로 법정에서도 유죄 입증을 못 하고 마는 게 아닌가…. 검찰로서는 조바심이 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법원에서 《즐거운 사라》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나는 -이미 서울지검을 떠나 광주지검장일 때- 비로소 안도했다.
 
 
  음란물은 예술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음란물까지도 디지털화된 이른바 ‘야동(야한 동영상)’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 《즐거운 사라》류의 작품 혹은 그로 인한 필화사건은 아예 화제조차 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어디까지 굴러가든 변치 말아야 할 것은 변치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예술 영역에 대한 법의 역할이다. 예술 영역이라고 해서, 창작과 표현의 영역이라고 해서 사법적 판단에서 비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예술작품, 어떤 예술활동이라 할지라도 거기서 실정법을 위반한 혐의를 포착하면 검사는 문제가 되는 부분을 법의 심판대에 올려야 할 것이다. 그게 법의 잣대다.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길이 있고 검사는 검사로서의 길이 있다. “(예술작품이라 해도) 정상적인 정서와 선량한 사회풍속을 침해하고 타락시키는 정도의 음란물까지 허용될 수는 없으며 그 한계는 분명하게 그어져야 한다”고 판시한 1995년 6월 16일 《즐거운 사라》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문도 검찰 측의 믿음과 같은 취지일 것이다.
 
  이와 함께, 나는 문학출판인 나아가 예술인들로부터 답을 듣고 싶다. 앞에서도 또박또박 밝힌 것처럼 문학과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예술 혹은 예술작품에 관한 평가는 그쪽 내부에서 맡아야 한다는 데도 백 번 찬성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동안 스스로를 다잡는 어떤 논의와 노력이 진행되어 왔는지, 또 진행되고 있는지, 되돌아보아 주기를 바란다. 엽기, 괴기, 변태, 기상천외한 내용의 디지털 음란물이 판치는 세상이 될수록 예술계 자체의 정화 노력은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풍요롭고 성숙한 세상을 위해서는 예술인의 창작표현의 자유도 존중되어야 하고 수사권과 사법부의 판단도 존중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글=심재륜 (월간조선 2012년 6월호)

입력 :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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