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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金光雄 -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데이비드 케일리 著

관념과 일상에 대해 던지는 통렬한 비판

글 :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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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光雄
⊙ 70세. 서울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학 석사, 미(美)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
⊙ 前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교수, 한국행정학회 회장, 대통령자문행정개혁위원회 위원,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
  세상의 법과 제도, 정책은 국민을 보호하고 편하게 하기 위해 제정된다. 사람들은 제도만 잘 만들면 모두가 만족하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으로 입법활동을 한다.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의 관료들 모두가 정책만 잘되면 정책 대상 집단이 큰 혜택을 입는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법과 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1951년 정치 망명객이자 신부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푸에르토리코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며 빈민과 함께 사는 삶을 택한다. 이후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푸에르토리코의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지만, 점점 정치적으로 변하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했다. 사제 확대정책에 반대하고, 피임을 지지하는 등의 행동으로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1969년에 파문당했다.
 
 
  5년 동안의 대담 내용을 책으로 펴내
 
  그는 사제직을 떠나고서 <학교 없는 사회> <병원이 병을 만든다>를 비롯해 근대문명에 대한 비판적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독일의 카셀대학과 괴팅겐대학에서 유럽 중세사를 강의하는 등 저술과 강의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교육학, 역사학, 정치학, 언어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고, 11개 언어를 구사했다. 신학·역사학·화학 분야의 학위를 가진 엘리트였지만 항상 빈민과 함께했고 권위에 저항했다. 《르몽드》《가디언》이 꼽은 ‘20세기 최고 지성’인 일리치는 환경운동가와 아나키스트, 해방신학 활동가들에게는 ‘정신적 멘토’였다.
 
  하지만 일리치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동안 소규모 청중을 위한 강연과 소책자 운동만 하던 그는 1988년에 캐나다 CBC의 데이비드 케일리(David Cayley)의 집요한 설득으로 1992년까지 수차례 대담을 갖는다. 5년 동안 이어진 대담의 내용을 정리한 책이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다. 일리치는 책에서 “보살핌은 사랑의 가면”이라면서 “보살핌이야말로 사람을 무력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최근 복지와 원조 등에 대한 논쟁이 한창인 우리에게 현상의 ‘이면(異面)’을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안목을 제공한다.
 
  3부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매트릭스(Matrix)>는 컴퓨터의 동력원으로 사육되는 것을 모르는 채 가상세계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수학의 행렬식이기도 한, 매트릭스는 자기가 좋아서 택한 것이 결국 스스로 옥죄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선의로 시작한 일들이 제도화되면서 결국 악(惡)이 된다”는 일리치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일리치는 “최선의 것이 타락하면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corruptio optimi pessima)”면서 ‘관념 뒤집기’에 몰두한다. 학교, 의료, 노동 등에 대해 그가 던진 비판은 발표될 때마다 파란을 일으켰다. ‘교육은 만들어진 신화다’에서 “학교는 필연적으로 탈락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기 위한 제도”라면서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교육은 사회적 평등을 실현한다’는 신화를 창조하고, 현대사회는 그 신화를 토대로 자신을 구축(構築)해 나간다. 하지만 제도화된 학교교육은 사회계급 구조를 공고히 하고, ‘지식’을 소비할 수 있는 하나의 가치로 변질시킨다. 타율적인 교육은 인간 고유의 학습능력을 잃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불합리를 망각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어서 일리치는 “병원이 있어서 환자가 생긴다”며 “의료시설이 건강에 중대한 위협을 가해 이것이 점차 사회통제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만든 병원이 어느덧 인간을 관리체제 속에 가둔다는 주장이다. 그는 “‘건강’을 일정 정도 이상으로 의료화할 경우 고통을 견뎌낼 능력이 줄어든다”면서 “고통 감내가 고귀한 행위가 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킨다”고 말한다. 엄동설한에 일선 장병에게 전지부착 난방파카를 보내는 캠페인을 보고, 어느 예비역 장군이 “추위를 이겨낼 훈련을 하는 것이 먼저”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에 대해 일리치는 “금욕이나 자기제한을 선택하는 것만이 강화된 감시체제와 고도화된 기술관료주의의 지배에 맞서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단언(斷言)한다. 의료부문이 기업화되고 사치스런 부티크처럼 변질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 보게 하는 주장이다.
 
  또한 이 책은 ‘오만의 마지막 미개척 지대’에서 노동에 대해 언급한다. 제품을 쓸모 있게 만들려면 그만큼의 인간활동을 그 제품에 추가해야 한다. 여기서 일리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의 노동을 대가가 지급되는 ‘임금노동’과 그렇지 않은 ‘그림자노동’으로 분류했다. 예컨대 그림자노동은 가사(家事), 교육, 보육, 통근 등과 같이 ‘임금노동’을 떠받치는 전반적인 활동이다. 상품집약적 사회에서 생산활동에 투입되는 인간의 노동력은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계산될 뿐이다. 측정되지 않는 ‘유용성’으로서의 사용가치는 배제됐고, 그림자노동은 비상품적이라는 이유로 임금노동에 가려져 왔다. 일리치는 “보수가 지급될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쪽은 ‘그림자노동’이라는 모순이 생긴다”면서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중의 게토’에서는 “여권(女權)주의가 소수의 사람이 상승할 새로운 기회와 여건을 만들어 줬다”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기본적 차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꿔 놓지 않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동안 여권신장 운동을 한 끝에 일반적으로 고임금 직업군에 많은 여성이 포진하게 됐지만, 저임금 여성 근로자와의 소득 차이는 남성끼리의 그것만큼 커졌다. 직업에서 차별은 그 직업을 얻는 데 성공한 소수에게는 없어졌지만, 그러지 못한 다수에게는 더 강렬해지고 깊이 느껴지게 됐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성운동의 혜택이 일부 상위 집단에만 돌아가고, 대부분의 여성은 오히려 심화된 차별을 겪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운동가들이 곱씹어야 할 명제다.
 
  타임지가 평한 대로 20세기 가장 진보적인 사상가인 일리치는 옛 시대를 참고해 창조적으로 응용하면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촉구한다. 그의 관심은 12세기를 중심으로 한 과거를 기준 삼아 현대사회를 되돌아보는 일에 기울었다. 일리치는 “현실의 문제를 보기 위해서는 그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과거와 전통으로 돌아가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저자인 케일리는 “주인공이 명제를 찾아내 깃발을 꽂았다”면서도 “그 명제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평판보다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이반 일리치를 회고한다.
 
  우리가 늘 접하는 보편화된 제도들, 이를테면 학교나 병원이나 교회 같은 것에 대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경험과 해석이라는 고정된 틀 속에서 발버둥치는 것이다. 실체의 본질에 좀 더 다가가 진정한 질료를 찾아내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숙제라는 것이 이 책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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