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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년 1월호

趙重勳과 한진

하늘길과 바닷길을 개척해 輸出立國의 기틀을 다지다

글 : 黃昌學 전 (주)한진 부회장  
정리 : 金成東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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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부탁에 선선히 응해 주는 일부 (생산)업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조중훈 회장)

黃昌學
⊙ 1932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 대한항공 상무·전무·부사장, 한국항공 사장, 한진 사장, 한진·대한종합운수 부회장,
    한국공항 부회장등 역임.
만일 조중훈 회장이 1970년대 초 한진해운을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수출입국의 꿈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화물선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
  필자는 1959년에 한진상사에 입사했다. 그 후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趙重勳) 회장이 20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이상을 지근거리에 있었다. 어쩌면 40여 년간 ‘그분을 모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한진그룹에서 일하며 필자는 단 한 번의 지방근무도, 해외 파견 근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면 젊은 시절 조중훈 회장이 오직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일념으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불철주야 노력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시작하는 방대한 독서량으로 직원들을 쩔쩔매게 했던 그분은 “기업은 곧 인간의 집합체이므로 인화가 중요하다”고 말씀하곤 했다.
 
  그분은 “기업은 종합예술이다”라는 말도 자주 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기업도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해·공(陸海空) 종합 수송망 구축에 한평생을 바치면서 그분이 자랑과 보람으로 여겼던 것은 그 모든 것을 국내 자본이 아닌 외화벌이를 통해 이룩했다는 점이었다.
 
  그분은 달러가 귀했던 시절, 전쟁터의 한가운데서 달러를 벌어들였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는 대한민국 수출입국의 초석이 된 해상운송 체계와 항공운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쓰였다.
 
  오늘 나는 수송보국의 마음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디딤돌을 놓은 그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짧은 지면에 그분이 수십 년간 쌓은 업적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면이 허락하는 데까지 말하려고 한다.
 
 
  베트남 진출
 
미 국방성 수송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월남에서 한진이 물자 수송 중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대항하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광복 이후 한국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전환점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베트남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중동 붐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두 차례의 기회를 정확히 포착해 한진그룹을 세계적인 글로벌 물류 전문그룹으로 키워내는 한편 경제 개발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 한진그룹이 벌어들인 엄청난 외화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수송보국의 일념으로 일궈낸 전(全) 세계 육·해·공 루트는 우리나라가 수출을 통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혈관이 됐다.
 
  베트남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던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던 조 회장은 정부에서 구성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방문길에 올랐다. 마지막 방문지는 베트남 퀴논이었다.
 
  조 회장은 기내(機內)에서 곧 퀴논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창문 덮개를 올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퀴논항 외항에 정박하고 있는, 군수품을 가득 실은 30여 척의 화물선이었다. 하역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소형 어선들이 주로 접안했던 퀴논항의 하역시설이 대형 수송선을 처리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했던 것이다. 조 회장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한진상사가 국내에서 군수품 수송으로 쌓은 경험과 노하우라면 퀴논항의 적체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요동쳤다고 한다. 경제시찰단으로 함께 간 기업인들도 있었지만 군수품 수송 경험이 있는 조 회장의 눈에만 그런 장면이 사업과 연결돼 보였던 것이다.
 
  조 회장은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사업 준비에 착수했다. 한진상사는 당시 수송에는 상당한 경험을 쌓았지만 하역은 다소 생소한 분야였다. 조 회장은 인천과 부산의 하역장에서 화물의 처리과정을 파악하고,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하역작업의 기준이 되는 하역표를 구했다. 또 미국 브루클린을 비롯한 주요 국제항구의 하역비에 대한 자료도 수집했다.
 
  퀴논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예상했던 대로 군수품 하역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협상은 쉽지 않았다. 조 회장은 수의계약을 원했지만 미군은 공개입찰의 원칙을 내세웠다.
 
  조 회장은 미군 측에 “한진에 수의계약으로 하역작업을 맡겨주면 100일 이내에 작업을 시작해 3일에 한 척씩 처리할 수 있다”며, “기간 내에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대신 하역비로 국제 기준 가격의 3배를 요구했다. 미군 측은 터무니없어 했으나 조 회장은 전쟁 중이고 철야와 폭풍우의 악조건에서 작업하는 데 그 정도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치공장 설립
 
  힘겨운 협상 끝에 1966년 3월 10일 한진그룹은 주월미군사령부 측과 하역작업 계약을 맺었다. 미군들도 베트남 현지인에게 하역작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고, 달리 방도가 없는 상태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계약금이 790만 달러였다. 한진그룹이 그 10년 전 한국에서 미군과 맺은 첫 번째 계약금의 100배가 넘는 규모였다.
 
  계약을 맺었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일간지 기자는 한진 직원들의 작업 현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미군 군수물자를 부두의 크레인에서 트럭으로 옮기는 기술자들의 동작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기민하고 정력적이었고, 도로를 포효하듯 질주하는 트럭의 행렬은 인디언의 기습에 쫓기는 포장마차의 서부 영화를 연상시켰다… 월맹군의 기습을 의식한 공포감, 보급물자를 약속시간 내에 운반해야 한다는 강박감, 달러를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는 개인들의 욕망이 어우러진 숨막히는 드라마였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미군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일은 매 순간이 바로 사선(死線)이었다. 수송 작업이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퀴논항에서 하역을 마치고 목적지로 이동하던 중 베트콩 부대의 기습 공격이 발생했다. 인근 군부대에서 지원병이 급파됐지만 수송단 중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현장 인부들은 운전을 하지 않겠다고 몸을 사렸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조 회장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작업복을 입고 현장감독으로 나섰다. 겁먹은 직원들을 독려하며 맨 앞 트럭에 선탑해 총탄을 뚫고 수송단을 진두지휘했다.
 
  조 회장이 직접 죽을 각오로 몸을 던지고 나오자 겁에 질려 있던 직원들이 하나 둘 그 뒤를 따라나섰다. 당시 한진 수송단의 활약상은 수송 도중 베트공의 기습을 받자 대항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미 국방성 군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베트콩의 공격이 줄어들자 일부에서는 우리 한진이 베트콩에 뇌물을 준 게 아니냐, 하는 우스갯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베트콩의 공격이 줄어든 것은 조 회장을 중심으로 우리 수송단들이 죽을 각오로 그들의 공격에 맞선 결과였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수송작전이었지만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한번은 베트남으로 가는 배편에 북어를 가득 실으라고 했는데 이는 인부들이 아침에 잠을 깨면 입이 칼칼해서 북엇국 생각이 간절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또 ‘오대호’라는 선박을 구입해서 우리 쌀을 직접 수송해 공급하기도 했다.
 
  베트남 현지에 한진 직원들을 위한 김치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조 회장은 “한국 사람이 김치를 못 먹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다”면서 베트남 고산지대에서 배추를 특별 수송해 김치를 담가 직원들에게 제공했다. 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을 때는 김치공장 직원만도 70~80명에 달할 정도였다. 김치공장은 한진 직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웃해 있는 맹호부대 장병들도 김치 생각이 나면 한번에 70~100명씩 찾아와 식사를 하고 가곤 했다. 물론 무료였다.
 
 
  외환관리법으로 해외 진출
 
1969년 3월 월남의 퀴논항을 신상철(申尙澈) 당시 주월대사와 시찰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

  조 회장은 또 베트남 현지인들에게도 각별하게 인정을 베풀었다. 미군 용역사업을 하러 베트남에 와 있긴 했지만 현지인들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분의 판단이었다. 우선, 안전 및 교통사고 처리를 위해 언어가 통하는 베트남 현지인을 고용했고 김치공장에도 베트남 여성들을 취업시켰다. 1968년 당시 한진 베트남지사 직원수는 4000여 명에 달했는데, 4분의 1에 해당하는 1000명이 베트남 현지인이었다.
 
  위와 같은 불굴의 사업의지와 현지인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널리 알려져 정부 또한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진이 베트남에 진출하던 1966년 5월 당시, 한국 기업 중에는 경제협력 차원에서 해외에 진출해 본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관련 법규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한진이 베트남에 지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시작하려면 ‘해외투자법’이라는 법안 자체를 새로 제정해야 할 형편이었다. 다행히 정부는 궁여지책으로 외국환 관리법 시행령을 찾아냈다. 급한 김에 가장 비슷한 법령으로 해외지사 설립허가를 내준 것이다.
 
  조 회장의 리더십과 적극적인 현지인 유화정책,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그리고 한진 베트남지사 직원들의 밤낮없는 노력으로 1967년 5월 한진이 미군과 맺은 2차 계약 규모는 1차 계약의 5배에 달하는 3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한진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 달러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화 60달러 안팎이었으니,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부는 외화획득 우수업체로 한진을 선정, 매년 수출의 날마다 대통령표창, 금탑산업훈장, 은탑산업훈장, 대통령우승기 등을 포상했고 한진은 당시 기업체 중에서 최고상 최다 수상의 기록을 세웠다.
 
 
  부실 공기업 대한항공을 떠안다
 
  월남전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중견기업에서 자본금 1000억원대의 대기업으로 발돋움한 한진은 1967년 7월에 ‘대진해운’을 세웠다. 조 회장의 다음 계획은 해운사업 분야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조 회장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늦춰져야 했다. 정부에서 부실덩어리인 국영 대한항공공사의 인수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전 중역이 거세게 반대했다.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번 돈을 어떻게 부실덩어리인 대한항공공사 인수에 퍼부어야 하느냐는 반발이었다.
 
  조 회장은 고심했다. 그분이 선택한 것은 보국(報國)이었다. 그분은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결심했다. 조 회장이 어려운 결단을 내린 또 다른 이유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거듭된 부탁 때문이었다. 조 회장은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게 아니겠소.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오”라는 박 대통령의 강권에 가까운 권유의 말씀을 듣고 결국 인수를 결정했다.
 
  1969년 2월 28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은 대한항공공사 사장에 선임됐고, 3월 6일에는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을 열었다. 이것이 오늘날 항공기 보유대수 132대, 국제화물수송 부문 세계 1위, 국제항공여객수송 부문 세계 13위 항공사로 우뚝 선 ‘대한항공’의 첫출발이었다.
 
  인수 초기 조 회장은 회사를 정상화시킬 걱정에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일하는 직원에 비해 자리만 꿰차고 앉은 임원이나 간부급이 너무 많은 역(逆)피라미드식 조직이었다. 심지어 이름만 걸어놓고 출근부 도장만 찍는 유령 직원까지 있었다. 요즘의 기준이라면 과감하게 정리해고를 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그러나 인화를 중시했던 조 회장은 ‘못 쓸 사람은 못 쓰는 대로 쓸만한 사람은 쓸만한 대로 쓰겠다’며 단 한 사람도 해고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1969년 2월 사장 취임 일성으로 주주총회에서 “앞으로 기종의 증가는 프로펠러기가 아니라 성능 좋은 4발 제트기로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과감한 투자를 시작했다.
 
  세계의 선진 항공사들이 대형 제트기로 치열한 ‘하늘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무리가 따르더라도 대한항공이 살아남을 길은 짧은 시일에 최대의 수송 능력을 갖추는 것뿐이란 판단에서였다.
 
 
  미국의 하늘길을 열다
 
초기 대한항공 비행기.

  국제선 항로 확보 작업에도 착수했다. 외화를 벌어들여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는 외국 항공사들이 선점하고 있는 국제선 노선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러나 항로는 비행기와 수요만 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나라의 하늘길이라 해도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빼앗기거나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 문제 때문에 막히는 일이 허다했다. 보통 나라와 나라 간 항공 협정은 공무원들의 외교적인 노력보다는 민간외교가 큰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 플러스알파로 그 나라가 갖고 있는 국력이 작용하는 것이다. 당시 보이지 않는 하늘길을 놓고 세계열강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국력이 약했던 우리나라가 기댈 수 있는 것은 민간외교였다. 조 회장은 하늘길을 열기 위해 민간외교로 동분서주했다.
 
  1969년 2월, 조 회장은 일단 서울~사이공 노선에 B720 여객기를 취항시켰다. 항공 협정을 맺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우선 ‘착륙 허가’만 받아 운항을 시작했다. 다행히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병력과 근로자 수송을 위해 취항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한항공의 운항을 제지하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했다.
 
  조금씩 취항지를 늘려가면서 대한항공은 서서히 국적 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주(美洲)노선이 문제였다. 미주노선에 취항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 항공협정부터 개정해야 했지만 미국 측은 아예 협상 테이블에조차 나오려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이면서 동시에 1970년 11월 로스앤젤레스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 영업소를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미국 정부를 집요하게 설득, 1971년 1월 결국 미주노선 취항을 허락받았다.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노선으로 대한항공 출범 2년 만에 마침내 태평양 상공의 하늘길이 뚫린 것이다. 조 회장은 첫 미주노선에 화물기 취항을 결정했다.
 
  당시는 정부 주도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활발히 진행되던 중이었고, 특히 수출을 통한 외화 획득을 최대의 당면 과제로 여기고 있던 시기였다. 조 회장이 미주노선에 여객기보다 화물기를 먼저 띄운 것은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수출길을 열겠다는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화물운송 세계 1위
 
  우선 전담조직을 구성하려고 보니 항공화물 운송에 종사해 본 전문가가 없었다. 또 무역규모가 크지 않은 시절이어서 실어나를 화물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중역들 사이에서 취항을 연기하자는 얘기까지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첫걸음부터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미주노선 개설은 피 말리는 협상 끝에 따낸 대한항공의 숙원사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가발이었다. 조 회장은 직원들에게 가발업체를 찾아가 물량을 확보해 보라고 지시했다. 느닷없이 가발 비상이 걸린 실무자들은 외국인 바이어들이 주로 머물던 조선호텔로 찾아가 숙박부를 뒤져가며 접촉을 시도했다. 또 일부는 생산업체를 찾아나섰다. 가발업체는 대부분 중소규모로 도처에 산재해 있어 소재를 파악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수출조합에서 주소록을 확보해 복덕방에 위치를 물어가는 방식으로 가발업체를 하나씩 찾아나갔다. 조 회장은 당시의 절박했던 심정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오직 사명감 하나로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지만 수출업체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우리 항공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는 하주들과 힘겨운 설득전까지 치러야 했다. 같은 값이면 우리나라 비행기로 수출해 달라는 부탁에 선선히 응해 주는 일부 업자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이처럼 어렵게 확보한 화물을 싣고 대한항공 화물기는 1971년 4월 26일 마침내 태평양 상공을 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대한항공의 화물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가발로 시작된 화물은 오늘날 반도체와 휴대전화로 바뀌었고, 국제선 화물운송 부문에서 세계 유수의 거대항공사를 물리치고 6년 연속 세계 1위의 자리를 굳건히 고수하고 있다.
 
  여객 부문에 있어서 대한항공 중흥의 전기를 마련해 준 것은 중동 붐이었다. 석유파동과 중동전으로 대한항공에 모진 시련을 안겼던 중동지역이 전쟁 종결 후 새로운 기회로 다가섰다. 한국 기술자의 중동 진출은 1974년 400명에 불과했으나 1975년에는 7000명으로 늘어났고, 건설 수주가 본격화된 1976년에는 2만명을 넘어섰다.
 
  대한항공은 1975년 말부터 바레인에 부정기 전세기를 운항한 데 이어 1976년 5월 최초의 정기여객 노선을 정식으로 개설했다. 1만km가 넘는 거리였고, 왕복 27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운항이었다. 2개월 뒤에는 이 노선을 스위스 취리히까지 연장했다. 서울∼바레인 정기 노선의 첫해 수송인원은 1만3500명에 달했다.
 
  대한항공은 여세를 몰아 1977년 4월에는 중동 최대의 산유국이던 사우디아라비아에 노선을 개설했고, 이듬해 7월에는 쿠웨이트에도 취항했다. 바야흐로 중동 붐이 절정에 달했고, 중동으로 향하는 기술자들이 몰려들자 사우디 대사관은 대한항공 항공권이 없으면 비자를 내주지 않을 정도였다. ‘중동특수’는 19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됐다.
 
  발 빠른 대한항공의 중동노선 개척으로 인해 외국 항공사로 빠져나갈 막대한 외화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음을 물론 국내 건설사들의 플랜트 수출에 결정적 도움이 됐음은 말할 나위 없다.
 
 
  수출 고속도로 바닷길 개척
 
1970년 제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군납최고 표창을 받고 있는 조중훈 회장.

  1966년 6월. 미군 군수품 수송을 지휘하기 위해 베트남에 머물러 있던 조 회장은 퀴논항 부두에서 미국 ‘시랜드’ 소속 화물선의 하역 작업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2시간 넘게 100여 개의 컨테이너가 다 내려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갠트리 크레인’이라는 특수장비로 화물선에서 집채만 한 크기의 컨테이너들을 하나씩 부두 위에 내려놓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컨테이너 한 개의 무게는 30~40t. 이를 배에서 부두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분에 불과했다. 당시 12명의 노무자가 한 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옮길 수 있는 화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 속에 든 군수품은 따로 부리는 과정 없이 통째로 트럭에 실려 미군부대로 향했다.
 
  그것은 해상운송의 ‘혁명’이었고, 조 회장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현재도 세계 최대의 해운선사 중 하나로 꼽히는 시랜드는 이미 1957년 10월 컨테이너 시대를 열고, 대형화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컨테이너의 출현은 증기선에 맞먹는 기술혁신으로 평가된다. 선박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가 인부들에 의해 옮겨지던 화물은 컨테이너를 통해 단위화·규격화됨으로써 자동화기계에 의해 옮겨지기 시작했다. 또한 배에서 곧바로 철도로 연결, ‘해륙일관(海陸一貫)’ 수송 시스템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 시스템을 갖춘 시랜드는 하역비를 기존의 20분의 1로 줄이고, 항구에서의 정박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시켰다.
 
  컨테이너를 통해 해상수송의 미래를 내다본 조 회장은 베트남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조 회장은 젊은 시절 화물선 기관사로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운왕’의 꿈을 키웠고, “한진상사를 설립하면서 인천을 사업 근거지로 삼은 것도 또한 바다와 맞닿아 있는 항구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1967년 대진해운을 설립한 조 회장은 당장 컨테이너 수송 시스템을 도입하고 싶었지만 한국의 해상운송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컨테이너 전용 부두가 필요했다. 그해 12월 ㈜한진을 통해 정부에서 추진 중이던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참여키로 결심한다. 컨테이너 시스템이야말로 수송산업을 현대화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당장의 손익 계산을 떠나 장래를 내다보고 민자부두 건설에 참여키로 결정한 것이었다.
 
  부두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조 회장은 노르웨이로부터 1만2000t급 화물선을 도입했다. 이름을 ‘오대호’로 붙였고, 한·미·일 정기 항로에 투입했다. 그리고 일본 조선소에 컨테이너선 2척을 주문했고, 1972년 한 척을 인도받아 부산∼고베(神戶) 항로에 투입했다. 이것이 국내 해운 사상 최초의 컨테이너 운항선인 ‘인왕호’이다.
 
 
  수출입국 토대 구축을 위한 선견지명
 
  한진은 이미 1970년 1월 시랜드와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했고, 3월 2일에는 시랜드의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입항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컨테이너를 통한 하역 작업이 이뤄졌다. 조 회장은 시랜드의 경영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한진의 시랜드 대리점 관련 부서에 우수한 직원을 집중 배치했고, 해운영업과 마케팅, 컨테이너 운영 업무를 숙달하도록 독려했다.
 
  1974년 당시 대진해운은 ‘일본우선(日本郵船·NYK)’의 대리점 업무를 맡고 있었고, 한진은 시랜드의 총대리점이었는데 시랜드사에서 두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해 왔다. 조 회장은 시랜드를 선택했다. 당장은 일본우선의 화물이 필요했지만 세계 해운업계의 흐름을 전망해 볼 때 당시 세계 최대의 해운사였던 시랜드와 협력관계를 더욱 다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시랜드 대리점 사업을 통해 해운사 운영에 필요한 노하우를 축적한 데 이어 1974년 5월 10일에는 그토록 기다리던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준공됐다. 컨테이너 운송에 필요한 인적자원과 제반시설, 필요한 장비가 확보된 셈이다.
 
  마침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 회장은 컨테이너 전용 선사 설립에 착수한다. 그러나 컨테이너선을 운항하려면 막대한 시설·장비·영업망이 필요했다. 조 회장은 신규 투자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랜드가 갖고 있던 세계 주요 항구의 시설과 장비를 이용한다는 구상을 세웠다. 한진을 중심으로 해운사 설립을 준비하던 조 회장은 1977년 초 우연한 기회에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대한항공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항공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는 육상운송과 항공사업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격려까지 받게 되자 조 회장은 1978년으로 예정했던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 설립을 그해 5월로 앞당겼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톱10 해운사로 우뚝 선 ‘한진해운’의 시작이었다.
 
  만일 한진그룹이 70년대 초 한진해운을 설립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수출입국 꿈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우리의 제품들이 이 컨테이너를 통해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지금의 선진국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물류는 한 국가의 경제를 살리는 혈관이라 할 수 있으며 조중훈 회장의 선견지명이 경제 개발의 디딤돌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민간 외교관
 
  조 회장은 글로벌 물류 사업을 통해 전 세계 정·재계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와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민간 외교관으로서 전후 50년 동안 국가 브랜드 향상 및 국가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함으로써 재계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곳곳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일례로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포스코(옛 포항제철) 건설에도 조 회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초반 포항제철 건립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 교섭을 벌이던 당시 조 회장은 일본 정·관계의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민간 차원에서 아낌없는 막후 지원활동을 펼쳤다.
 
  또 한일 간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인 1964년, 일본에서 들여온 2000만 달러의 긴급차관 역시 조 회장의 작품이다. 당시 한국의 외환 보유고는 1961년 말 2억 달러에서 1963년 말 1억3000만 달러로 곤두박질쳐 있었고 한국 경제는 심각한 외환 위기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일본과의 차관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자 장기영 부총리는 조 회장에게 긴급 요청을 했고 조 회장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와 담판을 시도했다.
 
  조 회장은 밤샘 궁리 끝에 “짧은 시간에 단 몇 마디의 말로 일을 성사시키려면 대화의 기선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는 ‘혼네(속마음)’를 숨긴 채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다나카에게 “이왕에 제공할 거라면 서두르자”고 제안했고 화통한 응답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해 7월 21일 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2000만 달러 규모의 1차 경제협력차관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한편으로 조 회장은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10여 년 이상 맡으면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 증진에도 크게 기여했다.
 
  주어진 지면 때문에 여기서 글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게 개인적으로 너무 안타깝다. 그만큼 할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뛸 때도 생각하면서 뛰어라”고 현장에서 다그치던 그분의 목소리가 다시 그리워진다. 조 회장은 생각이 많아 아이디어가 많았고 아이디어를 실천으로 옮겨 오늘날 우리 경제 발전의 밑거름을 만든, 우리 재계에서 몇 안되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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