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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년 1월호

崔鍾賢과 SK

“당장 급하다고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다”

글 : 洪思重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정리 : 崔善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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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감공장에서 원사공장 설립, 유공 인수, 이동통신 인수 거치면서 회사 키워
⊙ “장사꾼과 기업가는 다르다”, 올곧은 성품으로 정부에 쓴소리
⊙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 국가 발전에 기여할 인재 양성

洪思重
⊙ 1931년생.
⊙ 美시카고대 대학원 사회사상학과, 위스콘신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 서울대·한양대·경희대 교수,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선일보 논설위원·논설고문 역임.
⊙ 저서 : <근대 시민사회사상사> <한국인의 미의식> <한국인에게 미래가 있는가> 등.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정부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1995년 11월 3일 열린 긴급 제계중진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 회장.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SK그룹은 최종현(崔鍾賢) 회장의 형님인 최종건씨가 수원에서 시작한 작은 안감 직물공장이 모태다. 형님이 급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뜨면서 회사경영은 당시 부사장이던 그의 몫이 되어 최 회장은 1970년 선경직물 사장으로 취임했다.
 
  SK는 최 회장 생전에 3번 큰 도약을 했다. 그 첫 번째가 1968년의 원사(原絲)공장 설립이었다. 당시에 국내에는 직물공장이 800여 개나 있었지만 대부분 자본금 5000만원 정도의 중소기업들이었다. 선경직물도 그 수준이었다. 공장이 난립하면서 과잉생산이 됐고 시장은 혼란스러워졌다. 언제 불경기가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감 생산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최 회장은 원사공장 설립을 계획했다.
 
  늘 불안정한 원사 공급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 더없이 좋은 일이었지만 당시 직물업자가 원사 생산에까지 손을 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데다 선진 외국으로부터의 기술·기계 설비 도입을 위한 외자(外資) 동원 능력도 필요했다. 게다가 그가 기술 이전을 원한 일본의 원사업체 ‘데이진’은 세계적인 기업이었다. 이제 겨우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선경직물이 데이진과 손을 잡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데이진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였으니 작은 중소업체인 선경직물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는 생각 끝에 아세테이트 원사로 눈을 돌렸다. 일종의 우회작전이었다. 아세테이트는 사양(斜陽)산업이라 경합자가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국내 수요량이 많아 시장을 독점(獨占)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결국 경제기획원으로부터 아세테이트 공장 건설을 위한 지불 보증 승인을 받았고, 1967년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이윤보다 자체 기술개발이 중요”
 
최종현 회장이 직물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최종현 회장은 안감공장에서 시작한 SK를 석유화학과 이동통신을 망라한 대기업으로 일구었다.

  그 사이 폴리에스테르 생산업체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데이진의 독점물이던 것을 일본의 다른 업체들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말 어느 날, 평소 그에게 각별히 호의를 가지고 있던 일본 거래처 이토추의 부사장이 데이진이 아닌 도요보의 기술을 살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말해 왔다. 최 회장은 다음과 같이 거절했다.
 
  “나는 도요보의 기술로 폴리에스테르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없다. 도요보 기술로는 앞으로 일류 폴리에스테르 메이커로 발전할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다고 해서 아무 기술이나 살 수는 없다. 기업의 생명은 오늘보다도 내일의 전망에 달려 있는 것 아니냐.”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데이진의 오오야 사장은 그의 기업 정신에 반했다. 그러고는 그때까지 거래가 있던 다른 한국 기업들을 제치고 우선적으로 선경을 돌봐주기로 했다. 지금의 선경인더스트리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메이커인 선경합섬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그가 폴리에스테르 생산 기술을 얻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도쿄(東京)를 왕래하고 있을 때 우연히 그를 도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날 저녁 호텔 방에서 그는 ‘남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처럼 아니꼬운 것은 없다’며 교섭이 순탄치 않은 데 대한 울분을 터뜨렸다. 그가 어떻게 해서든 독자적인 기술개발을 서둘러야겠다고 다짐한 것도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여러 해가 지나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에 성공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산비를 줄이려면 기술 개발보다 로열티를 주고 외국으로부터 사오는 편이 안전하고 유리하다. 그러나 이윤을 많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체적인 기술 개발이다. 부존(賦存)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술 개발을 통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고 계속 수출을 확대시켜야 발전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 기업가의 사명이다.”
 
  선경화학의 기술진이 1980년 말, 미국의 3M, 독일의 BASP, 일본의 소니에 이어 세계 네 번째로 비디오 테이프 개발을 할 수 있었던 뒤에는 그의 이런 철학이 있었다. 최 회장이 평소 은근히 자랑하고 있던 몇 가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폴리에스테르 생산과 비디오 테이프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인데, 이것은 모두 국내 최초의 성과였다.
 
 
  유공·이동통신 인수로 새로운 도약
 
  두 번째 도약은 1975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신년 하례식에서 최 회장은 ‘우리의 목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른 산업의 완전 계열화(系列化)를 확립시키는 것’이라며 제2창업 선언을 했다.
 
  사실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말은 이보다 2년 전인 1973년의 선경창립 30주년 기념식 때 처음 했다. 이해에 SK는 일본 이토추, 데이진 등과 합작하여 일산(日産)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온산 지역에 100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하는 한편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공급 약속을 받아내고 정부로부터 정유공장 건설 내인가까지 받아놓은 바 있었다. 그러나 제4차 중동(中東)전쟁으로 야기된 석유파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최 회장에게 포기가 아니라 일시적인 유보였다.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은 1980년 11월. 정부는 대한석유공사(유공)의 민영화 계획에 따라 그 인수기업을 SK로 선정한다고 발표했다. SK가 여러 해에 걸쳐 정유공장 건설을 계획해 왔다는 사실과 그동안 다져 온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의 친분을 인정받아 얻은 성과(상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2010년 3월호 참조)였다. 마침내 그해 12월 24일에 최 회장은 유공 사장에 취임했다.
 
  그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20세기형 첨단산업으로 선경을 발전시키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폴리에스테르 생산에 성공한 이후부터였다. 폴리에스테르가 원유 가공품에서 나오는 것인 만큼 그로서는 당연한 발상이었다. 그런 집념이 유공 인수로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21세기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는 1985년 뉴욕에 따로 회장실을 차리고 이곳을 거점으로 은밀히 정보통신 분야 개발 계획을 짜 나갔다. 전년도 선경의 총매출은 15조원이었는데 그중에서 직물 부문은 2500억원에 불과했다. 수원의 한 작은 안감공장에서 시작된 선경이 새로운 사업들로 인해 21세기를 향해 새롭게 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정보통신사업에 뛰어들다
 
SK그룹 창업주인 최종건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최종현(오른쪽에서 두 번째) 회장이 1969년 2월 준공된 수원 선경합섬(현 SK케미칼)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정보통신사업이었다. 1992년 신년사에서 “선경그룹이 대통령 사돈이기에 특혜를 받을 것이라는 세간의 눈초리가 두려워서 이동통신사업을 포기할 수는 없으며 특혜를 받지 않고 공정한 게임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 초에 정부가 제2이동통신을 민간에 넘긴다고 발표했을 때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이었다.
 
  정부의 심사에서는 선경이 1등으로 선정되었지만 언론은 대통령과 사돈이라는 점을 들어 ‘선경의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불리한 여론 속에서 계속 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면 노태우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물론 두고두고 특혜시비에 시달릴 것이라 생각하고 그는 선정결과를 백지화(白紙化)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동의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로서는 여간 괴로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는 제2이동통신사업에 대한 계획을 포기하는 대신 정부 소유의 기존 이동통신 주식을 당시 예상 가격을 훨씬 웃도는 비싼 값으로 샀다. 아마 그 곱절이나 돈이 더 들었다 해도 그는 사려고 했을 것이다. 그만큼 정보통신사업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경과야 어떻든 뜻한 대로 후에 이동통신 사업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대로 정보통신사업은 SK그룹의 도약에 새로운 날개가 되었다.
 
  여담이지만 그는 장남 태원이 대통령의 딸(당시에는 노태우 장관)과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내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노태우 장관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과 사돈이 된다면 기업을 이끌어 가는 데 상당한 불이익이 올 것이 틀림없었다. 또 최 회장의 성격으로 봐서는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위치를 기업에 이용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때 나는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를 물었다. “시카고대학원에서 유학 중 만나 테니스를 치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는 말에 나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 만났으니 정략(政略)결혼이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을 거고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사 아니겠어?”라고 조언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사돈인 노태우씨가 대통령이 되자 그는 회사 임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일렀다. “이제부터 우리 SK는 눈을 밖으로 돌리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생각을 해야 한다. 앞으로 6~7년 간은 국내에서는 조금도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경영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
 
 
  미국 유학 중 형 돕기 위해 귀국
 
최종현 회장이 1970년대 충주 조림지 산비탈에 나무를 심고 있다.

  최 회장과 나는 시카고대학 유학 시절 처음 만났다. 같은 대학을 다니고는 있었지만 그는 경제학과요, 나는 사회사상연구소라서 처음 두어 달 동안은 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와 같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근 반세기에 걸친 우리의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학 중의 최 회장은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당시 시카고대학 유학생 중에서 비록 털털이 시보레 차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자가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남의 뒷바라지를 잘해 주는 성품이라 유학생들이 이사를 한다거나 다운타운에 나갈 때는 으레 그의 신세를 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일들을 그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도 나를 대학 기숙사까지 안내해 주기 위해 비행장까지 마중 나온 내 친구를 그가 태워 준 덕분이었다.
 
  그의 비교적 여유 있는 유학생활 뒤에는 형이 있었다. 그는 부친에게 부탁해 유산(遺産)으로 받을 논마지기를 미리 조금 떼어 형님에게 투자하는 셈치고 맡겼고, 형님한테서 이자 조로 송금(送金)을 받고 있었다.
 
  형으로부터의 송금은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다음해부터 제때 송금이 안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그러던 중 아버지로부터 “빨리 돌아와서 네 형을 좀 도와줘라”는 애절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그전에도 형님이 “그만하면 미국에서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는 돌아와서 나와 함께 일하자”는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그는 일시 귀국이라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짐을 미국에 남겨둔 채 1962년 11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의도 공항에서 회사가 보내준 지프차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는 도중에 최 회장은 운전기사를 통해 어려운 회사 형편을 알게 되었다.
 
  선경직물은 처음 몇 해 동안은 호황(好況)의 연속이었다. 품질이 좋았고, 전쟁의 상처로부터 회복하기 시작한 탓으로 수요도 많았다. 워낙 통이 큰 형은 이런 경기가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계속 생산시설을 늘려 나갔다. 다른 생산업자들도 경쟁적으로 시설을 확장해 나가 과잉공급 현상이 빚어지면서 선경직물은 5000만원이 넘는 부채(負債)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밤잠을 설쳐 가면서 고심하고 있던 형을 내버려둔 채 미국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최 회장은 형님을 돕기로 했다. 그는 서울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회사에 나갔다.
 
  최 회장은 형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외국으로의 수출 길을 열어 놓고 정부의 수출장려 정책을 이용하여 단시일 내에 악성(惡性)부채를 모두 갚아 나간 것이다. 형을 설득해 원사공장까지 만들었다.
 
 
  “기업가와 장사꾼은 다르다”
 
최종현 회장은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관리했다.

  이처럼 늘 믿음직스러운 동생이었지만 형이 가진 한 가지 불만은 거래선 사람은 물론이요 정부 관리들을 만날 때에도 조금도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곧잘 “당신 동생은 너무 거만스럽다”는 불평을 들었다. 최 회장은 남들이 아첨하고 아양 떨고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자기도 남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는 ‘장사란 서로 수지가 맞으면 성립이 된다. 아양을 떤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부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떳떳한 일을 정정당당하게 하는데 왜 허리를 굽히고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평소 그가 자주 했던 말 중의 하나가 “장사꾼과 기업가는 다르다”는 것이다. 1987년 유공이 해외 유전(油田) 개발에 성공했을 때의 일이다.
 
  “노다지를 찾았으니 이제부터는 돈이 쏟아져 들어오겠구나”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장사꾼이고 돈만을 벌겠다면 그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돈 이외의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진짜 기업가다. 나는 돈만을 탐내는 장사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는 돈을 어떻게 모으느냐는 데도 있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개인적인 이해보다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을 우선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라 할 것이다.”
 
  기업을 하며 인재에 대한 갈증을 많이 느꼈다는 최 회장은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시카고대학과 교수와 학생들을 교환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대학이었다. 그 준비의 하나로 세운 것이 바로 한국고등교육재단(1974년 설립)이었다.
 
  그가 대학다운 대학을 만들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교수진이었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학자들부터 확보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꼭 학자가 되지 않는다 해도 세계적인 두뇌라야 새로운 시대의 나라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 적어도 장학재단의 장학생 중에서 박사가 100명은 넘어야 한다. 그러면 대학도 살고 아까운 인재를 활용하는 길도 된다.’
 
  이것이 그가 재단을 설립한 이유였다.
 
  그는 재단 기금으로 자신이 당시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절반을 출연(出捐)했다. 고등교육재단 장학제도의 특징은 장학 유학생들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아무 조건 없이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급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혜택을 받아서 박사가 된 다음에 그가 꼭 어느 기업, 어느 분야를 택해야 한다는 조건도 없다. 단 한 가지 최 회장이 붙인 조건은 “최고의 대학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최고의 이론을 몸에 익힌 다음에 한국에 돌아와서 사회에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여기 한 가지 조건이 더 붙는다면 “단순히 최고의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의 현실에 맞는 이론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혜택을 받은 장학생 출신은 고려대 최장집(崔章集·정치학) 교수를 비롯하여 서울대 정진성(鄭鎭星·사회학), 동국대 양영진(梁永鎭·사회학), 고려대 임혁백(任爀伯·정치학), 고려대 한성일, 일리노이대 조인구, 서강대 하영원(河英源·경영학), 고려대 염재호(廉載鎬·행정학) 교수 등 현재 100명이 넘는다. 박사학위 취득자들도 어느새 200명 가까이 되었다.
 
최종현 회장의 장학생들. 왼쪽부터 최장집 고려대 교수, 정진성 서울대 교수, 양영진 동국대 교수, 임혁백 고려대 교수, 하영원 서강대 교수, 염재호 고려대 교수.

 
  “기업은 사람이다”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를 묻는다면서 끝내 물어보지 못하고 만 것이지만 SK에는 경영의 3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그 안에는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만큼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는 1980년 7월에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업(業)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한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이것은 조금도 빈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유공을 인수할 때 여실히 나타났다. 2000명이나 되는 종업원을 해고하지 않고 그대로 인수했다. 한국이동통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93년 제21대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 소신 있는 기업가였던 그는 전경련 회장직을 그저 명예직으로만 여겨 오던 그때까지의 회장들과는 달랐다. 한국경제를 대표하고 한국경제 전체를 걱정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다는 책임감과 사명감이 그를 한시도 가만있게 하지 않았다.
 
  “설사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나는 나 혼자 호강하기 위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많이 남겨 주기 위해서 사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 사업에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 걱정해서 내가 맡은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졸장부로 끝난다. 남들이 나중에라도 나를 손가락질할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가 나에게 들려준 얘기였다.
 
  그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거침없이 정부 정책을 비판해 나갔다. 당시의 기업계 전체가 품고 있었지만 정부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한 것들을 거침없이 지적했다. 그러니 그가 정부 측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것들이 화근이 되어 한동안 세무조사,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 조사 등에 시달렸다.
 
 
  “어찌 사람의 기가 땅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도 그의 건강이 나빠진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의대교수들의 세미나 자리에 초청 연사로 참석했다가 우연히 식사 자리에서 옆에 앉은 이비인후과 의사에게 “요즘 코피가 자주 난다”며 지나가듯 한마디를 했다. “내일 꼭 병원에 들르시라”는 의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진찰을 받았고, 이내 폐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까지 건너갔지만 이미 너무 많이 번진 상태라 손을 쓸 수 없었다. 이후 1년3개월간 이어진 투병(鬪病) 기간을 그는 평소 성품대로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버텼다.
 
  최 회장이 암수술을 마치고 돌아온 1997년 11월의 어느 날 풍수지리학자인 서울대 최창조 교수는 최 회장이 살고 있는 워커힐의 집이 풍수학적으로 좋지 않다고 최 회장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광나루 쪽을 찌를 듯 달려드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곳은 일시 머물며 완상(玩賞)하고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당하지만 장기간 머물며 살기에는 매우 문제가 많은 곳”이라고 했다.
 
  그러자 최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차피 집이란 일시 머물다 떠나는 곳. 이 세상 모든 것 중에서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인데 어찌 사람의 기(氣)가 땅의 기운에 눌릴 수 있겠는가. 나는 이곳이 좋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집을 옮길 수는 없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일찍 돌아가신 그의 형님을 떠올렸다. 형님이 삼청동에 새 집을 마련했을 때도 풍수를 잘 아는 지인(知人)이 “지형이 사나워서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때 형님은 자기가 기가 센 만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면서 예정대로 이사했다. 그러나 줄줄이 나쁜 일이 겹쳐 일어나더니 드디어는 형님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최 회장도 형님의 일을 떠올렸지만 그러면서도 최 교수의 권고를 물리치고 이사하지 않았다. 자기가 형님처럼 기가 세다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내가 여기서 산 지도 1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그만큼 행복하게 잘살았으면 됐지 뭐 더 이상을 바라겠느냐”며, 그는 껄껄 웃었다.
 
  이제 그가 떠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워커힐호텔에 운동을 하러 갈 때면 그가 살던 집 쪽을 한 번 돌아보곤 한다. 항상 10여 년 씩 앞을 내다보며 인생이며 사업을 설계해 왔고, 70세가 되면 은퇴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던 최 회장. 은퇴 후의 여생을 즐길 새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그가 그립다. 그 역시 자신이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덕분에 지금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SK의 모습을 하늘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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