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별책부록
  1. 2011년 1월호

鄭周永과 현대

사람 잘 뽑아서 잘 부려먹은 계산 철저한 사업가

글 : 權奇泰 전 현대건설 부사장  
정리 : 李根美 자유기고가  

  • 기사목록
  • 프린트
토목 전공자보다 실력이 더 뛰어났던 정주영 회장. 전문가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방법으로 토목기술을 축적해 불같은 추진력으로 공사를 진행했다. 불가능은 없다는 모험정신으로 국내외에서 기록을 갈아 치우며 수많은 공사를 수행해 현대건설과 국가발전을 동시에 이룩했다.

[권기태가 꼽은 정주영의 다섯 가지 성공법칙]
1. 긴장으로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용했다
2.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이 있었다
3. 전문가를 능가하는 지식이 있었다
4. 치밀한 현장 확인을 했다
5. 원가의식이 철저했다

權奇泰
⊙1932년생. 서울대 토목학과 졸업.
⊙1959년 현대건설 입사. 현대건설 부사장, 두산건설 부사장, (주)한양 사장, 한라건설 회장,
    현대건설 고문 역임.
⊙수상 : 1983년 과학기술상 수상. 2006년 서울대·한국공학한림원 선정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저서 : <건설프로젝트 매니지먼트> <토목시공연습>외 다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공사 현장을 돌아보는 정주영 회장(오른쪽).
  나는 제대한 지 한 달 만인 1959년 3월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대졸(大卒) 엔지니어 30명이 응시하여 10명이 합격했다. 입사하자마자 오산비행장 내 포장공사 현장에 배치되어 미국인 감독의 지시 아래 일했다. 4개월간 포장공사를 마치고 8월에 본사(本社)로 복귀하니 9명은 퇴사(退社)하고 나 혼자만 남았다. 대학을 나온 엔지니어들이 일하기 힘들 정도로 당시 건설현장의 근무환경이 좋지 않았다.
 
  1938년에 경일상회를 설립하면서 사업에 뛰어든 정주영(鄭周永) 회장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은 6·25 전쟁이 터지기 다섯 달 전인 1950년 1월 10일이다. 전쟁 중에도 공사를 계속했던 현대건설은 1962년에 국내 1위 업체로 떠올랐다. 그때까지 어느 회사가 1위인지 몰랐으나 제3공화국이 국토개발을 위해서 건실한 건설업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도급한도액 제도를 실시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정주영 회장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젊고 너무 말라서 놀랐다. 그 시절에는 영양실조로 다들 말랐기 때문에 사장이라고 하면 으레 배가 나오고 살집이 있는 사람을 연상했었다.
 
  정 회장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1959년 8월, 인천 제1도크 복구공사장에 투입되면서부터였다. 당시로서는 큰 액수인 200만 달러 공사를 현대건설이 단독으로 수주했다. 경험이 부족하지만 미국인 고문 두 명을 고용하는 조건으로 계약이 이뤄졌다. 6·25 때 폭격을 맞은 도크를 보수하는 공사였는데 현장에서 측량을 해서 도면을 그린 뒤 그것을 어떻게 복구하겠다는 설계도면(shop drawing)을 또 그려야 했다. 내가 도면을 그리는 담당자였는데 도면이 늦어지면 공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면을 작성하면 미국인 고문인 글로브가 승인을 했다. 이때 열심히 하는 나를 정 회장이 기억하고 후일 빠르게 진급시켰다.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
 
1964년 단양 시멘트공장 준공 당시 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맞은 정주영 사장 부부.

  인천 도크공사는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로 정 회장은 현장 숙소에 새벽 5시면 나타났다. 출근시간이 6시였는데 그때부터 직원들을 깨웠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은 시절, 그 시각에 서울에서 왔으니 새벽 3시 전에 일어났을 게 분명하다.
 
  정 회장은 예리한 판단력으로 현장에서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11t짜리 갑문(閘門)이 앞뒤로 두 개 있었다. 이 문을 들어올려서 보수를 하기 위해서는 미 해군이 소유한 60t짜리 해상 크레인을 빌려야 했다. 진해 해군기지에서 해상크레인이 출발할 때부터 공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경비를 다 지불해야 하니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쌌다.
 
  정 회장이 그 돈을 아까워해 이리저리 궁리를 할 때 내가 “부체(浮體)를 중립 상태로 놓으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자 정 회장은 그 자리에서 부력(浮力)을 이용하여 문을 띄워서 공사를 해 보자고 했다. 좁고 긴 수문(水門)에서 시행하기 힘든 공사였으나 정 회장은 모험심을 발휘해 일을 성사시켰다.
 
  공사를 마쳤을 때 환율이 인상되면서 인천 도크공사에서 큰 이익이 났고, 그 이익금으로 서울 무교동 사옥을 건축했다.
 
  정 회장은 운용능력이 비상한 데다 추진력이 있었다. 누가 아이디어를 내면 그 자리에서 어디에 적용할지 찾아내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소양강댐을 사력(砂礫)댐으로 바꾼 것도 정 회장이 즉석에서 생각해낸 일이다. 현대건설이 태국의 파솜댐 공사 입찰 초청을 받았을 때 일이다. 100m 높이의 댐인데 발주는 태국 정부에서 하고 설계는 미국이 하게 되었다. 입찰 설명을 듣던 정 회장이 “우리나라 소양강 댐도 사력댐으로 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소양강댐은 높이 123m의 중력식 콘크리트댐으로 지을 예정이었다. 건설부로부터 수탁받은 수자원공사가 발주자이고 일본공영이 설계를 했다. 시멘트는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했고 콘크리트 생산에 필요한 부수적인 것도 관급(官給)이었다. 시공사는 모든 기계와 자재를 보관하고 가공과 설치를 하면서도 노임과 운영비밖에 받을 게 없었다. 그걸로는 적자(赤字)를 면키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태국 파솜댐이 사력댐이라는 말에 정 회장은 귀가 번쩍 뜨인 것이다. 소양강에 퇴적된 막대한 사력을 건설재로 사용하면 되니 콘크리트도 수입할 필요가 없었다.
 
  시공자가 임의로 변경을 요청하자 건설부와 수자원공사, 일본공영이 반대했다. 하지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력댐이 콘크리트댐보다 낫다고 판단해 허락을 했고, 오늘날 소양강댐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공과대학 출신이 아닌 정 회장은 당연히 토목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안이든 금방 이해를 했다. 토목을 전공한 사람이 들으면 “이상한 것도 다 묻는다”고 생각할 만큼 계속 질문을 던져 답변을 듣다가 그 사안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해를 한 다음에는 토목 전공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방식을 생각해냈다. 그렇게 해서 바로 현장에서 실행한 일이 셀 수 없이 많다.
 
  정 회장은 “나도 갑종(甲種)면허를 갖고 있는 건설기술자”라고 말할 정도로 건설 지식이 해박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상한 기억력 덕분이다.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지식으로 축적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초창기 건설업은 한마디로 모험정신의 실험장이었다. 그런 만큼 누가 얼마나 더 대범하게 사업을 결정하고 열심히 뛰느냐에 사업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모험심과 추진력·판단력은 정주영 회장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오늘날의 현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동맥이 되어 산업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건설이 아니었다면 훨씬 나중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현대건설은 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하면서 도로에 대한 기술을 축적했다. 초창기 대부분의 건설기술은 곁눈질이나 담 넘어가서 배운 것들이다.
 
  1961년에 4월에 착공한 군산비행장 활주로 포장공사에서 콘크리트 제조설비인 배치 플랜트가 꼭 필요했다. 정 회장은 나에게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배치 플랜트 설계를 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사방에 수소문을 해 보았다. 미국 회사가 지금의 미국대사관 건물을 건축 중이었고, 그 안에 배치 플랜트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높은 담장을 기어 올라가 배치 플랜트를 확인한 후 정문 경비원을 회유해서 경내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국산 제1호 배치 플랜트를 만들었다.
 
  이후 수원 광주 대구 활주로 포장공사를 미국업체와 같이 수행했다. 다 합쳐서 10km에 불과했다. 정 회장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태국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했다. IBRD 차관공사인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공구 수주 경쟁에서 현대건설은 최저가인 520만 달러를 제시했다. 2위는 580만 달러로 60만 달러나 차이가 나자 도로국에서 할 수 있는지 확인했다. 정 회장은 이때 포기하면 현대건설은 해외공사를 영원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여 계약을 결심했다.
 
  1965년 5월부터 방콕에 터를 잡은 현대 기술진은 인근 독일, 이탈리아, 일본 회사의 현장을 견학하면서 어떤 장비를 사용하는지 살펴보았다. 국내업체 가운데 최초로 해외 진출이라는 기록을 세운 파타니-나라티왓 구간은 1968년 5월에 준공했고, 10년이 지나도 파손된 곳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에 서독을 방문하여 아우토반을 질주해 본 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총 건설비 700억 원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고 고심하던 차였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의 태국 고속도로 건설 소식을 접한 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연구해 보라고 했다. 정 회장의 지시로 다양한 조사를 한 끝에 330억원이면 건설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길로 청와대에 가서 내가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설명했다.
 
  1968년 2월 현대건설이 서울-수원 구간을 시범건설하게 되었다. 젊은 공병(工兵)장교들이 이 구간에서 연수를 받아 다음해부터 전 공구(工區)에서 감독을 했다. 2년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420km의 4차선 고속도로를 건설한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정주영 사전에 난공사란 없다
 
1981년 사내 행사에서 노래를 부르는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사장.

  정주영 회장 사전(辭典)에 불가능이란 없었다. “난(難)공사여서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강하게 밀어붙였다. 1972년 파푸아뉴기니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는 하상(河床) 및 지하 200m에 지하동굴을 만들고 발전기를 설치, 낙차(落差)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일종의 유역변경형 수력발전소이다. 정인영(鄭仁永) 사장은 난공사라며 입찰에 응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난공사이기 때문에 우리가 승산이 있다”며 적극 참가하라고 나에게 강하게 명령했다. 정 회장은 “선진국 회사와 같은 기술과 경험이 없으니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이런 난공사만이 우리를 크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정 회장의 적극적인 의지로 입찰에 응했고 결국 성사가 되었다. 대신 공사경험이 없는 우리가 다른 업체의 협력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 식대로 방법을 찾아 공사를 착착 진행하자 착공 4개월 후부터 다른 업체가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다. 1100만 달러의 라무 지하수력발전소 공사에서 현대건설은 이익을 남기고 공기도 6개월 단축하여 준공했다.
 
  중동(中東)지역 진출 역시 정주영 회장의 강력한 추진력과 결단력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 6월 이란 반다르 압바스 동원훈련조선소를 시작으로 중동시대를 열게 되었다. 계약금액이 800만 달러에 불과한 작은 공사였지만 최초로 턴키 베이스로 설계·시공한 해외 공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당시 정 회장은 조선소 건설관계로 울산에 내려가 있을 때가 많았으나 수시로 본사에 전화를 걸어 당시 부사장이었던 나에게 어서 중동에 나가라고 독촉했다. 내가 중동에 가려고 하자 정인영 사장은 중동진출에 대해 신중론을 펴면서 나가지 말라고 호통쳤다. 정주영 회장과 정인영 사장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울산에서 올라온 정 회장이 왜 빨리 중동에 나가지 않는 거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당장 이란의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공사현장은 테헤란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진 인가가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현지 사정을 알아보러 갔다가 2~3일 전에 내린 비로 지프차가 진창에 빠져 고생을 많이 했다. 공사가 시작된 뒤에는 공사장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자야 했다. 찌는 듯한 더위를 참아 가며 모두들 악전고투했다. 자재 조달은 물론 먹고 입는 것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공사를 수행했다.
 
  같은 해 10월에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를 착공하고 12월에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착공하면서 중동공사는 급격히 확대되었다. 그즈음 정인영 사장이 현대양행으로 가면서 중동공사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정인영 사장이 현대건설을 그만둘 때 이명박(李明博) 부사장이 사장에 선임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권기태씨를 비롯한 선배들이 있다는 걸 정주영 회장에게 말하자 ‘그 사람들은 엔지니어여서 관리를 못한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화는 없다>에 MB가 현대건설에 입사할 때 내가 면접관이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면접 당시 일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태국 도로공사할 때 MB가 현장 경리를 맡은 것은 기억난다. 나는 당시 주재이사였다. 나도 진급이 빨랐지만 MB의 진급은 그야말로 초고속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이 실력을 인정한 사람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힘을 실어 주는 스타일이었다.
 
 
  “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느냐”
 
유조선으로 가로막아 유속을 느리게 한 후 마무리한 서산항 간척지 공사.

  정 회장은 ‘안되는 것은 되게 하라’는 불도저식 사고를 갖고 있는 만큼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정 회장의 뜻에 맞춰 열심히 달렸던 나는 1975년 12월 착공한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 때 공사 방식에 대해 반대의견을 내놓았다가 그 공사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정 회장이 말한 준설문제와 말뚝박기 방식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하자 “해 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느냐. 이 일에 관여하지 말라”며 나를 제외시켜 버렸다. 정 회장은 그때쯤 나를 대신할 후배들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1976년 6월 최대 규모였던 주베일 산업항(港) 계약 당시 계약보증서가 빨리 발급되지 않아 계약이 1개월 연기된 일이 있었다. 중간에 여러 과정이 있었으나 내가 다 잘못한 것처럼 보고되어 그 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울산조선 건설사무소로 가서 7개월간 도크 건설 일을 맡았다.
 
  울산에서 콘크리트 블록을 만들어 중동의 공사장에 공급했는데 여기서도 정 회장의 뚝심이 발휘되었다. 일반해운사를 이용하여 콘크리트 블록을 운송하려면 t당 150달러를 내야 했다. 정 회장은 5000t에서 2만 t 되는 바지선을 제작하여 보험에도 가입하지 않고 직접 해상운반을 결정하는 대담성을 보여주었다. 직접 운반을 하니 t당 30달러밖에 들지 않았다. 수십만t을 운반했으니 차액만 해도 상상을 초월했다.
 
  1978년에 이란에서 1년간 수주활동이 금지되면서 이라크를 대체시장으로 주목했다. 7개월의 울산생활을 마치고 본사로 복귀했다가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가게 되었다. 1978년 4월에 바스라 하수처리장 공사에 최저입찰자가 되었다. 이 공사는 굴착 깊이 9m, 총연장 20km나 되는 하수관로와 펌프장, 처리장을 건설하는 공사였다. 낙찰되지 않도록 하려고 했으나 2위 8000만 달러의 거의 반밖에 되지 않는 4500만 달러로 낙찰이 되었다. 그 일로 생전 처음 시말서를 썼다. 하지만 이 공사가 기초가 되어 이라크에서 수십억 달러의 크고 작은 공사를 수행했다. 나는 1979년에 이라크에서 돌아와 국내공사를 담당했다.
 
  내가 현대건설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공사는 서산간척공사였다. 해외공사가 퇴조하던 1970년대 말 해외에서 일하던 근로자와 중장비를 활용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였다. 이 장비를 국내에서 활용할 명분을 찾고 있던 정 회장은 부족한 토지와 전력을 생각하여 간척사업과 수력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1979년 8월 현대건설은 민간기업으로는 처음으로 서산간척사업 면허를 취득했다. 1982년 4월에 B지구를 착수하고 1983년 7월에 A지구를 착공했다. 간척사업의 성패는 최종 물막이의 성공여부에 달려있다. 최고유속(流速) 4~5m면 어렵지 않지만 서산 B지구는 최대유속이 6.5m, A지구는 8m나 되었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철판으로 물막이한 예를 얘기하자 정 회장이 즉석에서 유조선으로 물막이를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유조선으로 가로막아 A지구의 유속을 느리게 한 뒤 1984년 3월 10일 물막이 공사를 완료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훌륭하게 물막이를 해낸 ‘정주영 공법’은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정주영의 성공법칙
 
  25년 동안 정주영 회장을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섯 가지 성공법칙을 발견했다. 내가 본 정 회장은 조직운영의 귀재(鬼才)였다. ‘조직의 효율은 긴장에서 온다’는 것이 정 회장의 첫 번째 성공법칙이다. 건설현장에서 정 회장은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입사 후 3일 만에 배치된 오산비행장에서 구내 포장공사를 하던 어느 날 정 회장이 현장을 방문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정 회장을 보자 아버지라도 만난 듯 반가워 달려갔는데 선배 사원들은 딴 길로 도망가고 없었다.
 
  정 회장은 ‘조직의 긴장은 곧 능률이고 정신통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언제나 무리 중 한 사람은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조직 전체가 늘 긴장 속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현장뿐 아니라 본사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는 긴장 속에서 진행된다. 정 회장은 언제나 정보를 많이 갖고 있었고, 그 정보가 틀린 적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당할 수가 없었다.
 
  정 회장의 두 번째 성공법칙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에 있다. 건설현장의 일은 동일한 사안도 때에 따라 기후조건, 사회환경에 따라 달라지므로 반복이 없다. 날마다 크고 작은 일들이 돌발적으로 생기는 곳이 현장이다.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위에서 해결방법을 찾아 신속하게 아래에 전해 다 같이 그 일을 헤쳐 나가야 돌파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정 회장은 훌륭한 사령관이었다. 정 회장은 매일 새벽 전국 현장과 전화를 하여 정보를 수집한 후 적당한 해법을 하달했다.
 
  현대건설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능력 있는 믿음직한 리더가 있었기에 부하직원들이 마음 놓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의 위기관리 능력은 언제나 현장의 사기와 능률을 향상시키는 지표가 되었다.
 
  셋째, 정주영 회장은 전문가를 넘어서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토목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현장의 그 누구보다도 해박했다. 이는 정 회장이 토목건설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사를 입찰할 때나 시공계획을 확정할 때 반드시 사전에 결재를 받아야 한다. 단순한 보고가 아니라 심문하는 과정이었다. 질문에 충분한 설명을 못하는 자는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걸로 간주하고 재검토 후에 결재를 받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정 회장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전문기술을 완전히 습득해 다음 공사에 활용했다. 기술을 사실지식과 과정지식으로 분류한다면 정 회장은 풍부한 과정지식의 소유자였다. 부족한 사실지식을 결재과정에서 습득하여 최상의 의사결정을 내려 사업에 성공한 것이다.
 
  넷째, 치밀한 현장확인이 정 회장의 성공요인이다. 정 회장은 지나칠 정도로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앉아서 보고받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과 달랐다. 정 회장은 부지런히 현장을 달렸다. 정 회장은 어떤 공정을 언제까지 완료하라고 명령한 뒤 매일 전화로 확인했다. 회장이 언제 현장에 출동해 점검과 질문을 할지 모르니 모두들 긴장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전화로 질문을 받을 때도 만전을 기해야 했다. 예를 들어 “토사운반 덤프트럭을 몇 대 가동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15t 덤프트럭 10대”라고 보고하면 “무슨 트럭이냐”고 또 묻는다. “현대차 5대, 대우차 5대”라고 대답하면 “적재함 뒤 문짝이 없는 차는 몇 대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아무리 철저한 확인을 해도 차 뒤쪽 문짝까지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때 대답을 못하면 가차 없이 꾸중이 날아온다. 정 회장이 현장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뒷문짝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굴착, 상차, 운반에 다 비용이 드는데 뒷문짝이 없으면 흙을 흘리게 되고, 그러면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정 회장의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대답하기 위해 현장에서는 철저한 준비를 했고 그런 것이 바탕이 되어 현대건설이 발전했다.
 
  다섯째, 정 회장은 원가(原價)의식에 철저했다. 근검절약은 곧 원가의식이다. 정 회장의 근검절약 사상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 회장은 원가에 대한 암산능력이 탁월하다. 나는 호주머니에 슬라이드 룰러(slide ruler)를 갖고 다니며 정 회장의 암산을 확인하곤 했는데 틀린 적이 없었다.
 
  중고(中古)차량을 구입하여 태국 고속도로에 투입하고 울산조선소 광장을 5cm 두께로 포장한 것도 다 정 회장의 원가계산에서 나온 결정이다. 해외에 출장가면 국내보다 몇 배의 높은 경비를 지출해야 한다. 따라서 현대건설은 해외에 나가면 국내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일했다.
 
 
  서산간척지 완공 후 현대건설을 그만두다
 
정주영 회장의 사진 앞에 선 권기태 전 현대건설 부사장.

  나는 1984년 서산간척지 사업이 완공된 후 현대건설을 그만두었다. 해외에서 돌아온 이후 틈을 내서 모교인 서울대 토목과에서 강의도 하고 토목 관련 책을 내면서 열심히 일하던 때였다. 1983년에는 과학의 날 ‘과학기술대상’도 받았다. 간척지 사업을 마치고 얼마 안 되어 정주영 회장이 당시 사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에게 “저 사람 학문 좋아하니 울산공과대에 가서 교수하라고 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만두라는 말은 아니지만 석사학위도 없는 나한테 대학으로 가라는 건 사표를 내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25년간 목숨 걸고 뛰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섭섭했다. 정 회장을 만나려고 했지만 만나 주지 않았다. 사표 낼 때 잠시 들어가서 “바라는 사람이 못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정 회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사사로운 정(情)에 이끌리는 성격이 아니다. 공사 현장에서 결정을 과감하게 하듯 사람을 내보낼 때도 냉정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물러나왔다.
 
  정 회장이 돌아가신 뒤 산소에 갈 때 MB와 버스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때 “당시 사장이었으니까 내가 왜 쫓겨났는지 알 거 아니오. 정 회장님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얘기해 달라”고 하자 MB가 웃으면서 “서산간척지를 TV에서 문제로 삼은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서산간척지가 완공된 후 TV에서 ‘재벌에 매립허가를 줘서 개인이 3000만 평이 넘는 땅을 소유하게 된 건 잘못’이라는 내용의 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그 일로 정 회장이 화가 많이 났다고 한다. TV에서 그런 비판 프로그램을 만드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지라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
 
  현대건설을 그만두고 허탈감으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내를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두산건설과 한양건설을 거쳐 1991년 한라건설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정인영 회장이 중앙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를 받았는데 그 자리에 정주영 회장도 참석했다. 정주영 회장이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정인영 회장에게 “당신 권기태 잘 데리고 갔다”고 말했다.
 
  1999년 6월, 15년 만에 정주영 회장의 부름을 받고 다시 현대로 돌아왔다. 복귀했을 때 예전에 왜 나를 내보냈는지에 대해 아무 언질이 없었다. 다시 불려 왔으니 그것으로 오해가 풀어졌다고 생각했다.
 
 
  황해도 앞바다 메워 신도시 건설 구상
 
  내 직책은 고문이었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말동무하면서 점심을 같이 먹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정 회장이 2001년 3월 21일에 별세하셨으니 그때 이미 건강이 많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여전히 구상이 많았다. 당시 김대중(金大中) 정권에서 북한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중동 특수(特需)보다 더 큰 시장이 열렸다”는 말을 했다. 그랬으니 정 회장이 사업가로서 큰일을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고향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업을 위해 북한에 여러 가지를 베풀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면 나를 부른 것은 말동무나 하고 소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전 한창 때처럼 같이 일해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정 회장은 황해도 앞바다를 메워 신도시를 만들 구상을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그런 구상에 대해 별 반응이 없었다. 소규모 개성공단보다 훨씬 더 좋은 사업이지만 폐쇄된 국가인 데다 우리와 생각이 전혀 다르니 그 속을 알 길이 없었다.
 
  매일 아침 7시에 정 회장이 사무실에서 아들 몽구·몽헌과 함께 커피를 마실 때 나도 참석하여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정 회장은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지만 한창 때 못지않게 투지에 불탔다. 나한테 이런 저런 제안을 했지만 그런 구상이 구체화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정 회장은 아들들에게 북한 프로젝트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나한테 금강산댐에 대해 묻기도 했다. 정 회장의 마지막 꿈은 북한에 가서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어 한참을 못 뵈었는데 2001년 3월 21일 비서실에서 곧 임종하실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이미 돌아가셔서 분장을 시키는 중이었다. 나의 청춘을 바친 거인(巨人)이 가시는 길에 만감이 교차했다.
 
 
  사람을 잘 뽑아서 잘 부려먹었다
 
  정주영 회장과 25년을 함께 일한 나에게 인터뷰 요청이 종종 온다. 빠지지 않는 질문은 ‘정주영 회장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정주영 회장은 철저한 사업가였다. 이해관계가 분명한 분이었다. 타산적(打算的)이어서 잘하면 함께 가고, 그렇지 아니면 미련 없이 버렸다. 어떤 사업이든 이익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했다. 계산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업을 크게 일으킨 것이다.
 
  ‘정 회장이 애국심에서 국가적인 공사를 했는가’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나중에 현대그룹이 엄청난 규모로 발전했을 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현대건설 초창기에는 공사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데 주력했다.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사업체인 현대건설을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달렸지만 사업이 점점 커지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정 회장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잘 뽑아서 잘 부려먹을 줄 알았다.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은 정 회장의 직감이 정확했기 때문이고 잘 부려먹은 건 충성하도록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를 확실히 주고, 획기적인 인사를 했다.
 
  현대건설에서 밀려난 일로 섭섭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 크다. 거인과 함께 일하면서 마음껏 일할 무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2006년 서울대학교와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되었다.
 
  1980년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건설기술이 일반화되었지만 그 이전의 건설공법은 모두 현대건설이 최초로 시도한 것이다. 현장감각과 실력이 뛰어난 정주영이라는 뛰어난 인재가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건설이 발전한 것이다. 또다시 그런 큰 인재가 등장해서 우리나라를 한 단계 더 도약시키길 기대해 본다.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너무 놀랐고 믿어지지 않았다.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 이상으로 현대건설을 발전시키길 기대한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