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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1월호

李秉喆과 삼성

“똑똑한 사람 데려다 바보를 만들면 기업가가 아니다” (사장들에게 수시로 당부하며)

글 : 李弼坤 전 삼성물산 부회장  
정리 : 鄭蕙然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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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화의 일등공신이 박정희라면, 그 뒤엔 이병철이 있었다
⊙ 사업보국의 신념으로 부강한 경제국가 꿈꿔
⊙ 기력 쇠해 커피잔 못 들어올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사업 챙겨

李弼坤
⊙ 1940년생. 서울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 1965년 삼성물산 입사. 제일제당 상무,
    삼성물산 부회장, 중앙일보 회장, 삼성21세기 기획단 회장, 삼성자동차 회장,
    삼성전자 중국본사 회장 역임, 서울시 행정1부 부시장 역임. 금탑산업훈장, 석탑산업훈장 수훈.
⊙ 現 알티전자 회장.
기흥 반도체공장을 돌아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
  고(故) 이병철(李秉喆) 회장을 떠올리면 흰색 와이셔츠에 노타이, 깔끔하게 다려진 재킷과 가지런히 빗어넘긴 머리가 떠오른다. 이 회장이 작고한 지 어느덧 23년이 흘렀지만, 이 모습은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회장을 처음 뵌 것은 1964년 겨울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삼성그룹에 입사 지원을 했고,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중역들과 함께 앉아 있는 이 회장을 봤다. 단정한 매무새에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는 이 회장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무서웠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빈틈없어 보이는 완벽한 인상이랄까. 삼성에 입사해서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면서 그가 남을 배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적어도 그날의 첫인상은 그랬다.
 
  “우리나라 농촌 경제에 대해 우째 생각하노?”
 
  이 회장이 내게 던진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경상도 억양이 강한 이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힘줘 말하는 편이었다.
 
  이렇게 면접을 치른 나는 이듬해에 삼성물산에 입사해 ‘삼성인’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날이 내가 30년 넘게 삼성그룹에 몸담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 회장을 가까이서 모신 것은 1973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부강한 경제 국가 육성에 대한 들끓는 갈망 속에서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삼성그룹은 조선업에 진출할 요량으로 그룹 비서실 내에 조선팀을 만들었다. 당시 김동철씨가 팀장, 내가 관리부 부장이 됐다.
 
  회사의 관리담당은 최고 경영자에게 보고를 자주 하는 자리다. 삼성그룹은 조선업의 입지 선정, 대규모 자금 투입 등 굵직한 결정을 자주 내려야 했다. 대부분의 중요 결정을 최고 의사 결정자가 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수시로 이 회장을 만났다. 가까이서 뵌 이 회장은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반듯한 분이었다. 하루 일과가 일정했고, 조선소 입지 선정을 할 때에는 일일이 찾아가 자리를 확인했다.
 
  삼성의 조선사업은 이듬해인 1974년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좌초에 부딪쳤고, 나는 제일제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나는 삼성의 중역으로서 이병철 회장을 만나게 됐고, 이 회장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매일 불려다니다시피 했다. 체신부 장관을 지낸 고 배상욱(裵相稶)씨가 1984년에 삼성물산 사장을 맡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가 외부 출신이다 보니 이 회장은 나를 자주 찾았다. 사실 이때부터는 이 회장께 매일 ‘꾸중’을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전경련 초대 회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에 아이디어 제공
 
5·16 직후 군사정부에 의해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기업을 통한 경제성장을 제안했다.

  1970~80년대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이병철 회장은 큰 비전을 갖고 있었다. 국가 경제는 엉망이었다. 오일쇼크가 왔고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겪었고, 이는 군사 쿠데타로 이어졌다.
 
  나는 국가의 리더였던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부강한 국가를 이룩하는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키워드는 ‘외자도입’, ‘기업육성을 통한 경제성장과 개발’ 등이었다. 이런 아이디어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를 통해서 나왔다. 전경련은 동시대를 살았던 경제인들이 모여서 발족했는데, 초대 회장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전경련을 통해 이런 아이디어가 박 대통령에게 전달되는데 이 회장의 공이 꽤 컸을 것이라고 본다. 산업화의 일등공신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면, 그 뒤에는 이병철 회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끊임없는 열정으로 새 사업에 진출했다. 사업의 진출과정을 잘 살펴보면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물자 부족을 해결하고자 갈망했던 1950년대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세웠다. 1950년대 후반 들어서는 보험회사를 만들었다. 국가의 성장 드라이브를 강력하게 추진해야 했던 1960년대에 전자회사, 1970년대 중반에는 중공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또 한 번의 경제 도약을 꿈꿨던 1980년대에는 IT, 통신업에 진출했다.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과 삼성의 사업 진척은 거의 맞아떨어진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이는 이 회장의 평소 신념인 ‘사업보국’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신규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어떤 사업을 해야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관심이 컸다.
 
  이 회장은 사장들을 앉혀놓고 “사업은 시류(時流)에 맞아야 하는 기라”, “자기 수준을 잘 알아야 한데이. 너무 욕심을 내도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시류라는 것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이다.
 
  이병철 회장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말을 좋아했다. 젊은 시절부터 만주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해서인지 통이 컸다. 특히 ‘일본 종합상사’를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는 여러 중역에게 일본 종합상사를 유심히 보라고 했다.
 
  왜 하필 일본 종합상사였을까. 이 역시 ‘사업보국’이라는 이 회장의 신념과 맞아떨어진다. 경제 원조 수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우리와 달리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다. 이 회장은 일본을 벤치마킹하면서도, 언젠가 일본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이 회장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만 계속 할 생각을 버려라. 일본의 종합상사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다. 일본을 배워서 국가와 삼성의 발전을 위해 모두의 역량을 다해라. 해외 시장을 개척해 수출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1970년대 말에 글로벌 기업 꿈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삼성상회 건물. 대구시 인교동에 있었다.

  이병철 회장은 아주 오래전부터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일본을 넘어서겠다는 꿈과 함께, 한국을 세계 경제를 이끄는 한 축으로 키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사업을 하는 내내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병철 회장은 1970년대 말부터 중역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는 글로벌 시대가 온다. 우리는 수입구조가 취약한데 일본은 기반이 굳건하다. 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전(全) 세계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이에 대한 기반을 닦은 사람은 이병철 회장이다. 이병철 회장이 이 시기에 세계화에 대한 혜안(慧眼)을 갖고 있었고, 이를 직원들에게 지시해 삼성물산이 해외 시장 개척에 앞장섰다. 회사는 기술력은 물론 이와 결부된 마케팅, 판매처가 중요하다. 오늘날 삼성전자의 해외 판매처 개척에 대한 초석을 놓은 곳이 삼성물산이다.
 
  1980년대 초까지 그룹 내에서 삼성물산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 인문계의 99%가 물산 입사를 지원했다. 20~30대(代)의 피끓는 젊은이들이 007가방 하나 달랑 들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에 심취했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007작전’이라고 불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전자제품의 수출 판로를 뚫었는데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아 해외 소비자들이 클레임을 걸고, 외교 경쟁 때문에 북한 요원에게 우리 주재원이 붙잡힌 적도 있다. 콜롬비아에서 미팅을 할 때 현지의 마약 게릴라들이 그 건물 아래층에 폭탄을 설치해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이런 우여곡절 중의 일부는 이병철 회장에게 보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회장은 통이 큰 사람이었다. 사업상 일어날 수 있는 실수들에 대해서는 일절 타박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무랐지만,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직원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크게 야단을 치지 않았던 것 같다.
 
  C사장은 이 회장이 많이 아꼈던 사람이었는데, 과음이 잦은 편이었다. 하루는 이 회장이 그를 불렀다.
 
  “니 술 끊을래, 회사 그만둘래?”
 
  직설적인 이 회장의 어투에 C사장이 많이 놀랐다. 물론 C사장은 이후에도 술을 끊지 않았지만, 이를 빌미로 이 회장의 눈 밖에 나지는 않았다. 믿는 직원들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정치는 不可近不可遠
 
  내가 아는 한 이병철 회장은 정치에 대해서는 거리를 뒀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정치에 대한 그의 신조였다. 이 회장이 한창 사업을 벌이던 시기가 격동기이다 보니, 처음부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와는 거리를 좀 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개발연대의 거인(巨人)’ 중 한 명인 이병철 회장의 가장 큰 업적으로 인재 양성과 반도체 진출을 꼽고 싶다.
 
  이병철 회장의 ‘인재 육성’에 대한 열망은 오늘날 이 땅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삼성의 채용제도, 교육제도, 사회에서의 역량 강화가 그의 주요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1964년에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처음 회장을 뵀던 나는 나중에 임원이 되어 회장을 모시고 면접을 들어갔다.
 
  이 회장은 “삼성 들어와서 뭐할래? 뭐까지 해볼래?”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가정교육이 한 사람의 인품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서 가족 사항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폈다.
 
  이 회장은 살아생전에 종종 “회사를 경영하는 데 80% 이상을 인재를 키우고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에 할애했다”고 말했다.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고 이들을 잘 키우고, 이들의 일을 공정하게 평가해 그들에게 비전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신입사원 면접장에서 면접관들에게 이 회장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내 보기에 인사라는 것이 참 어렵데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70%가 잘됐다고 하면 성공한 거지. 그러니까 다들 단디해라.”
 
  이 말씀이 여전히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회사의 역량은 사장의 역량과 같다”
 
  이병철 회장은 임원인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관여했다. 나중에 삼성그룹이 커져서 한 해 임원 인사가 300~400명이 됐지만, 주력 계열사는 거의 챙겼다.
 
  이 회장에게는 ‘경영자 그릇론’이 있었다. 부장으로 끝날 사람, 사장이 될 사람이라는 식(式)으로 직원들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했다. 다양한 특성의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인사의 ‘핵’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늘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바보를 만들면 기업가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똑똑한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교육을 통해 인재로 길러내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삼성의 모든 CEO가 갖고 있는 정신이다.
 
  삼성은 평가의 공정성을 엄청나게 따진다. 회사 내에서 혈연, 학연, 지연에 대한 어떠한 프리미엄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삼성의 전통은 이병철 회장이 만든 것이다. 이 회장이 인사에 대해 공정하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는 ‘나는 이병철 회장의 친인척이 아니지만 열심히 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예전에 거래처에 나가 보면 “삼성 사람들은 회사 일이 아니라 자기 사업하는 사람들 같네요”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삼성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됐을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신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신입사원에서 임원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이병철 회장은 특히 ‘사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 회장은 회의시간에 “회사의 역량은 사장의 역량과 같다”고 자주 언급했다. 실적이 좋지 않은 회사 사장에 대해서는 인사 이동이 잦았다.
 
  이병철 회장은 사장이라는 직함을 ‘중책(重責)’으로 보고 중용을 잘했다. 사장의 연공서열이 파괴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입사가 늦은 사람이 먼저 사장자리에 올라서 선배들을 거느리는 일이 잦았다. 이 회장은 애사심이 많은 사람, 회사를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5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
 
1979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는 이병철 회장(가운데).

  나는 이병철 회장의 또 다른 큰 업적은 반도체 사업 진출이라고 꼽는다. 처음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야 한다고 건의했을 때 이병철 회장은 시기상조라고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이건희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계기로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경제가 이 수준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반도체다.
 
  하지만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진출하는 데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망할 것이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을 할 즈음에 외국 업체들은 벌써 2세대를 앞선 상황이었다. 우리가 16K 개발에 박차를 가할 때 그들은 256K를 하고 있었다. 외국 업체가 몇 세대를 앞서가는 상황에서 이를 따라잡고, 또 넘어서야 했다.
 
  초기 투자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연구소를 만들고, 사장보다 월급을 많이 주면서 외국에서 인재를 스카우트해야 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한 번 정하면, 밀어붙이는 성격이다. 그는 한 번 결정한 사항이 틀렸다고 판단되기 전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없었다. 물론 탄탄한 정보와 지식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진출을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라도 하면 성공 확률이 있지만, 이거 안 하면 반드시 회사 망한데이.”
 
  이 한마디가 끝이었다. 늦었지만 그나마 지금이라도 사업에 진출을 하면 성공할 수도 있지만, 두려운 나머지 시작조차 하지 못하면 결국에는 회사가 망한다는 소리였다. 몇 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분명하다.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신 뒤 10년도 채 되지 않아, 우리 경제에는 ‘반도체 착시현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반도체 하나만으로 수출 실적이 늘어난 해도 있었다.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국무총리를 지낸 고 김정렬(金貞烈)씨가 1970년대에 삼성물산에 몸담았던 적이 있다. 그는 이 회장에 대해 ‘5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철저하게 준비한 뒤 신규 사업 추진
 
해외사업추진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이병철 회장.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일 때 외부에서는 우려의 빛이 역력했지만, 내부에서 반대를 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순히 회장의 카리스마에 눌려서가 아니다. 그만큼 사장단의 회장에 대한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관련 지식으로 무장을 한 다음에야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정보나 판단 근거는 주로 일본 도쿄에서 얻었다. 일본의 전경련인 게이단련 회장과 친분이 두텁고 많은 지인을 가졌던 이 회장은 수시로 일본을 다녔다. 특히 연초에는 도쿄에 머물면서 ‘동경구상’을 했다. 일본에서 들은 내용을 차곡차곡 메모해 뒀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관련자들을 만나서 확인하고, 다시 정리하고 감수를 한 다음에야 사업을 추진했다. 회장의 지식이 확고한데 그 앞에서 뭐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이 회장에게 수시로 불려가는 사장들은 야단을 맞기 일쑤였다.
 
  이 회장을 모시고 하는 회의는 통상 점심시간을 많이 활용했는데 주제에 적합한 계열사 사장들이 주로 불려갔다. 그룹 비서실에서 그날의 주제를 미리 귀띔해 주는 덕분에 준비를 한다고 하지만, 이 회장은 간혹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해서, 또는 이 회장의 작은 목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해 동문서답을 했다가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있다. 이병철 회장의 앞에서는 변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 회장에게 ‘호출’받지 않는 사장단의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좌불안석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회장은 공개적으로 “내는 발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면 부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 회장의 꾸중을 듣더라도 자주 불려다니는 임원은 여전히 이 회장의 신임을 받는다는 증거였다.
 
 
  완벽주의자
 
  이병철 회장은 완벽주의자였고, 일등주의자였다. 계열사 사장들이라면 누구나 ‘일등주의’라는 단어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을 것이다. 이 회장은 1등을 하지 못하면 성이 안 차는 분이었다.
 
  조미료 시장에서 삼성이 고전하던 때가 있었다. 대상의 ‘미원’ 브랜드가 워낙 강해서 어떤 제품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이 회장은 우리가 미원을 못 따라가는 이유에 대해 잘 납득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좋다면서 왜 결과는 그 모양이냐고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난다. 이 회장에게 ‘일등’이라는 것은 운이 좋아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고, 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화법은 직설적이었다. 직설적으로 주문했고 일하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열심히 노력하는데 잘되지 않는 일은 이해했고, 게으른 것은 용서를 하지 못한 편이었다.
 
 
  산림활용의 시범단지, 자연농원 사업
 
  이병철 회장이 했던 사업이 당대에 사회적으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간혹 이 회장의 의중이 오해받은 적이 있었다. 자연농원(오늘날의 에버랜드) 사업이 대표적인 경우다.
 
  자연농원 사업에는 이 회장의 큰 뜻이 담겨 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의 70%가 산림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산림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국토 활용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식목일이 되면 유실수를 심고, 돌산에 불모지였던 450만 평의 자연농원 땅을 가꿨다. 주요 목적은 우리나라 산림 활용의 시범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970년대 중반에 제조업을 등한시하고, 서비스업, 향락업을 한다며 비판했다. 이 회장의 순수한 의도를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이 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내가 알기에 한비(현 삼성정밀화학)는 이 회장이 돈을 벌 목적으로 만든 회사가 아니었다. 농민이 전체 국민의 60%를 차지했던 시절에는 농민의 발전, 소득보호가 필수였다. 한비는 결과적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회사가 국가에 귀속됐지만, 이병철 회장의 본래 의도와 상관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병철 회장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워하지 않았을까 싶다. 삼성그룹은 1970년대 후반부터 폴크스바겐과 만났고, 1980년대 초에는 크라이슬러와 접촉하면서 자동차 사업 진출을 꿈꿨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성의 차기 사업은 자동차였다. 하지만 법에 저촉됐고 결국 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삼성에서 시작한 사업 중에는 최초인 것이 제법 많다. 이병철 회장의 평소 소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회장은 남들보다 먼저 시작하고, 제대로 일등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업이 존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등전략과 첨단 관리기법, 사업의 다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회사의 생존 전략 그 자체였다.
 
  이 회장은 평소에 “기술력이 없는 사업에 진출하지 말아라. 괜히 잘못해서 나라 돈만 축내는 것은 국가 자원 낭비다”고 말했다. 사업과 국가를 끊임없이 걱정하던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열정
 
  “남 얘기 잘 듣거레이.”
 
  이병철 회장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내가 삼성에 몸담으면서, 이 회장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가 바로 이 얘기다.
 
  이 회장은 중역들을 불러놓은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성은 고문 제도를 열심히 활용하는 편이다. 과거에 일본에서 기술을 잘 주지 않을 때에는 정년퇴직한 일본인을 고문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계열사 사장이 혼자 생각으로 일이라도 추진할 요량이면, 이병철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얘기만이 아니다. 남 얘기는 늘 잘 듣거레이.”
 
  나에게 이병철 회장은 무서우면서도 온화한 분으로 기억된다. 나는 말이 빠른 편이다. 하루는 이 회장이 나를 불렀다.
 
  “이 군, 내 두 번째 경고다. 사람이 말을 빨리하면 경박해 보인데이. 말 천천히 해라. 몇 번 더 경고하고 안 들으면 내 니 안 본다.”
 
  이 회장은 믿는 직원들의 개개인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타고난 것을 바꾸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회장 앞에만 서면 긴장이 돼서 말이 더 빨라지는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업에서 손을 놓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병이 있다는 것을 안 이 회장은 연초만 되면 “나 이제 쉴란다”고 했다. 중역들이 이건희 회장과 함께 그룹을 잘 꾸려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 역시 당시뿐이었다. 쉬시겠다는 분이 또 회사에 나오고, 또다시 업무 보고를 받는 일이 계속됐다. 커피잔을 한 손으로 잘 들어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회사에 대한 열정을 내려놓지는 못했다.
 
  이병철 회장은 왜 사업가가 됐을까.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중에 선진문물을 접하고, 드넓은 만주 땅을 오가면서 느낀 점이 많아서가 아닐까 싶다. 사업으로 성공하는 것이 본인은 물론이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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