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東安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정치학
⊙ 1945년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중앙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임.
6·25전쟁은 세계 전쟁 역사상 보기 드물게 독특하고도 치열한 전쟁이었다. 독특하다는 것은 교전 쌍방이 마치 축구경기를 하듯이 한 차례씩 상대방 진영의 엔드라인까지 진격하여 상대 진영을 휩쓸다가 다시 중앙선으로 돌아와서 ‘비김으로’ 전쟁을 중단(종료가 아닌)한 점을 말한다. 치열하다는 것은 전쟁으로 인해 교전 쌍방이 모두 사실상 국가와해의 지경에 밀렸으며, 양측 군대가 상대방 영토를 끝에서 끝까지 오가는 과정에서 짧은 기간 인간과 재산의 대대적인 파괴가 발생했다는 점을 말한다.⊙ 1945년 출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중앙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 합동통신 기자, 경기대 조교수, 경향신문 논설위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임.
6·25전쟁이 이처럼 독특하고 치열했기 때문에 그것이 교전 쌍방의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또한 매우 크고 깊었다. 6·25전쟁이 미친 정치·사회적 영향은 북한보다는 남한에서 더 심각했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정체와 남한 사회의 개방성이 전쟁의 상처를 더 심하게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대한민국의 정치에 미친 중요 영향으로는 ▲통치의 독재화 ▲반공(反共)의 공고화와 중도파(中道派)의 몰락 ▲대미(對美)의존의 심화 등을 들 수 있고, 사회에 미친 중요 영향으로는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 ▲도시화 ▲군부(軍部)의 비대화 등을 들 수 있다. 이 6가지 사항을 항목별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통치의 독재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라도 전쟁은 집권자의 독재를 용인한다. 6·25전쟁은 집권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독재를 용인했다. 당시의 상황은 이승만 대통령이 독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통치 메커니즘은 6·25전쟁이 발발한 지 2일 만에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급속한 민주주의 통치 메커니즘의 붕괴는 6월 27일 새벽에 행해진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 피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전방에서 국군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26일 오후까지는 행정·입법·사법 3부(府)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27일 새벽에 이승만 대통령이 극비리에 서울을 탈출하자 3부가 모두 혼란에 빠져 마비되었다.
이 대통령이 서울을 극비 탈출하기 전, 국무회의에서 정부 피란이 공식적으로 논의된 바도 없었고, 대통령 자신도 27일 아침에 경무대(景武臺)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할 것을 장관들에게 통고해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26일 오후부터 피란 갈 태세를 취했으며, 마침내 27일 새벽 4시에 특별열차 편으로 극비리에 서울을 탈출했다.
대부분의 장관은 국무회의 참석차 27일 아침에 경무대에 들렀다가 대통령의 피란 사실을 알고는 황급히 집으로 가서 가족을 데리고 피란길에 올랐다. 국회의장과 대법원장도 대통령의 피란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다.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은 전쟁수행과 관련하여 26일 국회가 결의한 사항을 대통령에게 직접 통고하기 위해 27일 7시에 경무대를 방문했다가 대통령이 피란한 사실을 알고 급히 국회로 가서 가까운 몇몇 의원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피란을 서둘렀다. 27일 오전에 국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국회에 출석한 의원이 없어서 국회는 기능이 정지되었다. 사법부도 대통령의 피란 소식이 알려지자 피란 가기에 바빠 마비 상태가 됐다.
戰時독재에서 권위주의 독재로 변질
민주주의적 통치 메커니즘이 마비되고, 뒤이어 수도가 적군에 함락당하여 중앙정부가 해체되었으나, 급속한 민주적 통치 메커니즘의 마비를 초래한 원인을 제공한 이승만 대통령은 건재했다. 다른 통치기관이 마비되고 대통령만이 건재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 대통령의 전시(戰時)‘독재’가 시작되었다.
이 대통령의 전시독재라고는 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 만에 영토의 90%가 적에게 점령당했고, 우리나라 군대는 적군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주된 역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이 대통령 전시독재는 대한민국 국민의 상징적 구심점(求心點)의 역할과 국군에 대한 상징적 통수권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작전 편의를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 등에 그쳤다.
그러나 9·28 서울 수복 이후부터, 이 대통령의 전시독재는 점차 구조적인 ‘민주주의 이탈= 권위주의 독재’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전쟁의 혼란과 참화 속에서 심리적 의존대상을 찾기 마련인 대중은 이 대통령을 국민이 의존할 지도자로 생각하게 되었고, 전쟁기간 중에 규모와 역량이 크게 확대된 군대는 이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강화되었다. 전쟁 중에 진행된 대중과 군부의 이 대통령에 대한 지지 강화는 장차 이 대통령이 반대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할 수 있는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대중과 국민의 지지를 배경으로 반대세력을 민주 이탈적 방법으로 제압한 첫 번째 사건은 1952년 5월에 시작되어 7월에 끝난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안 통과이다. 이 대통령은 전쟁기간 중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다수(多數)의 야당(野黨) 국회의원을 구금하거나 국회의원들을 강제로 회의장에 소집·감금하여 자기를 대통령에 재선(再選)시킬 수 있는 헌법개정(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을 관철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52년 8월 대통령에 재선된 이 대통령은 휴전(休戰) 이후에도 자신의 권력강화와 집권연장을 위해 민주주의 원칙을 위반하는 조치들을 계속 동원하면서 독재를 유지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독재는 6·25전쟁 기간의 전시독재의 연장선상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반공의 공고화와 중도세력의 몰락]
6·25전쟁은 남한 정치에서 강력한 반공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민들은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인해 전쟁의 참화를 겪었기 때문에 북한 정권과 공산주의에 대해 분노했고, 전쟁 기간 중에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공산당의 살벌한 통치를 경험했던 국민들은 강한 반공태도를 갖게 되었다. 사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공산군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은 국민들도 6·25전쟁 후 반공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6·25전쟁 기간 중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해 온 80만~100만명에 달하는 ‘월남(越南)동포’들이 이 나라 각 지역과 사회 각 분야에 확산되어 국민의 반공의식을 강화시켰다. 이들은 6·25전쟁 전에 월남해 온 이북(以北) 출신 국민들과 합세하여 공산통치의 비(非)인간성을 우리 국민에게 알려주는 ‘반공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6·25전쟁 기간 중 공산군 점령지역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과 그 우호분자들의 성분이 모두 노출되었고, 그들은 북한군의 점령통치 기간 중 북한군 앞잡이로 활동했다. 그 부역자(附逆者)들은 전쟁기간 및 휴전 후에 국군과 경찰에 의해 대거 구금·처형되거나 자진 월북했다. 그 결과 남한에 잔류한 공산주의자들은 크게 희소해졌고, 그들은 생존을 위해 비공산주의자로 위장했다. 따라서 반공을 노골적으로 비판·견제하는 세력이 남한 사회에서 사라졌다. 이로 인해 반공은 더욱 활발하게 확산되었다.
6·25전쟁 전에는 우익(右翼)진영 정치인들이나 청년단체 단원 및 공무원을 제외한 일반 국민은 반공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전쟁 전에는 용어도 ‘반공(反共)’이 아닌 ‘방공(防共)’이었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으로 인해 반공의식이 대중에게 광범하게 확산되었다. 용어도 전쟁을 거치면서 방공에서 멸공(滅共)으로 강화되었다가 반공으로 정착되었다.
반공의 대중화에 따라 정치권도 반공을 합의된 대의(大義)로 인정했다. 그러한 사실은 1955년 5월의 야당통합 및 민주당 창당과정에서 전향이 불확실한 좌익전력자들(대표적으로 조봉암을 비롯한 훗날의 진보당 구성원)의 참여가 배제되었던 점에서 잘 확인된다.
중도파의 附逆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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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력을 강화시켜 권위주의 통치로 이어졌다. 사진은 전선을 시찰 중인 이승만 대통령. |
6·25전쟁은 반공강화와 동행한 현상으로서 중도세력의 몰락을 초래했다. 중도파 정치세력은 대부분이 광복공간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반대했다. 그들의 다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고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지원하는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에 불참(不參)했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사람이라도 대한민국 영토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허용했다. 6·25전쟁 기간 중 북한군 점령통치 지역에서 점령통치에 협조한 부역자 총수가 55만명에 달했다는 사실은 당시 대한민국에 충성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았음을 입증해 준다. 그중 상당수는 중도파 성향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했던 중도파 진영 정치인의 대부분은 6·25전쟁 발발 4주 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상당수가 국회에 진출했다. 소규모 정당 소속이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중간파 정치인은 40명 내외였다. 이들은 조소앙(趙素昻), 안재홍(安在鴻), 원세훈(元世勳), 윤기섭(尹琦燮), 박건웅 등을 중심으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이 서울에 접근해 오자 대부분의 국회의원은 서둘러 서울을 탈출했는데, 중간파에 속한 국회의원은 대부분이 서울을 탈출하지 않았다. 서울을 탈출하지 않은 중간파 의원 및 여타 중간파 정치인들은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소환당하거나 붙들려 갔다.
자의였건 타의였건 김규식(金奎植), 조소앙, 안재홍 등을 비롯한 중간파 정치인 대부분이 북한군을 위한 이른바 귀순(歸順)방송에 참여했다. 서울중앙방송 전파를 타고 나가는 귀순방송이란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미국 등을 비난하고 북한군의 점령통치를 찬양하면서 대한민국의 군경(軍警)과 국민에게 북한군에 투항·협조할 것을 호소하는 방송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철수하는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갔다. 강압에 못 이겨 간 사람도 있고 자발적으로 따라간 사람도 있다. 이로써 중간파는 정치 엘리트 차원에서는 인적 자원이 고갈되었고, 대중적 차원에서는 전쟁기간 중의 중간파 정치인들의 행동 때문에 지지기반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대미의존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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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대미의존을 심화시켰다. 사진은 원조물자전달식 모습. |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존립에 있어서 대미의존도를 크게 심화시켰으며, 그것은 한국의 정치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강화로 연결되었다.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1950년 6월 25일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군의 무력침공을 독자적으로 격퇴시킬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러한 한국을 강력한 군사개입을 통해 ‘공산화=멸망’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미국은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전쟁 발발 직후부터 휴전 때까지 연병력 572만명을 한국에 투입했다. 휴전 후에도 한국은 독자적 역량만으로는 적의 침략을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야 했다. 미국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주었고, 방대한 규모의 미군을 지속적으로 주둔시켰으며, 한국군의 강화를 위해 많은 액수의 군사원조를 제공했다.
미국은 한국을 구원하기 위해 많은 액수의 경제원조도 제공했다. 6·25전쟁 기간 중에 미국이 우리나라에 제공한 경제원조만도 약 5억2000만 달러였고, 휴전 후인 1954년부터 1961년까지 우리에게 공여한 경제원조는 약 21억 달러에 달했다. 이러한 미국의 대한(對韓)원조 규모는 해당 기간 한국의 연평균 국민총생산의 12% 정도였고, 한국정부 총세입의 32~35%에 달하는 것이었다.
美, 영향력 이용해 은밀히 야당 지원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은 군사·경제적으로만 대미의존도가 심해진 것이 아니라 외교나 문화 분야에서도 대미의존도가 심해졌다. 6·25전쟁 기간 및 그 후 상당기간 한국의 외교활동은 미국의 후원과 안내하에 전개되었다. 문화적 대미의존도는 미군정 기간부터 시작되었다가 6·25전쟁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대규모 미군병력이 한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게 됨에 따라 미군 병사들과 함께 미국문화가 한국에 전파(傳播)되었고, 교육분야에 대한 미국의 지원으로 한국의 선진(先進)문화에 대한 정보 입수가 주로 미국이라는 창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다방면에 걸친 한국의 대미의존도 심화는 자연히 한국의 국내 정치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수반했다. 모든 원조에는 원조제공자의 간섭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미국은 자기들이 구원했고 존속을 지원해 주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가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정치로 정착되는 방향으로, 그리고 한국 정부가 미국의 대한정책 및 동북아(東北亞)정책에 순응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한 영향력 행사의 일환으로 미국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부터 이 대통령을 실각(失脚)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취소했다를 반복했으며, 이 대통령의 독재가 심화되던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의 야당을 은밀히 지원하고, 자유당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고취시키는 간접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960년 4월혁명 때는 자유당 정권에 반대하는 학생과 민중의 봉기를 은근히 고무했고, 학생과 민중의 봉기를 계기로 이 대통령을 실각시키기 위한 이면공작을 전개했다. 미국은 4월 26일의 대학교수단 시위를 고무했고,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이 이 대통령을 찾아가 사임을 권유하기도 했다.
[가치관의 급격한 변화]
6·25전쟁은 한국인들의 가치관을 급변시켰다. 전쟁기간 동안 한국인들은 죽음의 공포와 기아의 한계상황을 경험했고, 휴전 후에도 상당기간 폐허 속에서 굶주림과 전쟁의 공포를 안고 살았다. 이러한 경험과 상황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의리·명분·예의를 중시하던 종전의 가치관을 버리고, 생존에 필요한 실용성과 물질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전란 속에서 죽음과 기아의 한계상황을 벗어나는 데는 의리·명분·예의 등이 지장을 준다는 것을 경험한 한국인들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것들을 경시하게 되었다.
실용성과 물질을 중시하는 새로운 가치관은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에 기회주의와 범법(犯法)친화적이고 부패친화적인 요소가 자연스럽게 침투되도록 만들었다.
아무도 보호해 주는 사람 없이 홀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대부분의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없다. 살기 위해서는 이기는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는 북한군이 점령하면 대문에 인공기(人共旗)를 걸고, 국군이 진격해 오면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전란(戰亂) 속에서의 그러한 생존방식은 휴전 후에도 한국인의 삶의 방식에 기회주의를 만연시켰다. 사람들은 그런 기회주의를 실용주의라고 미화(美化)하기도 했다.
6·25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물질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혼란과 빈곤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식량과 위기탈출에 필요한 물질이었다. 아무리 난리가 났어도 식량을 숨겨둔 것이 있으면 자기와 가족은 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으며, 어지간한 위기에 봉착했어도 귀한 물건과 돈이 있으면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혼란과 빈곤 속에서 물질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전란 속에서의 그러한 경험은 한국인들에게 명분·명예를 중시하던 종전의 가치관을 버리고 물질을 중시하도록 강요했다.
犯法·부패친화적 사고, 불신심리 확산
전쟁의 혼란과 기아 속에서 한국인들은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 물건 훔치기, 뇌물 주고받기를 자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자기와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 식량과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행동이었다. 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현명한 행동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전란 속의 그러한 경험들은 한국인들에게 필요에 따라서는 범법과 부패도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러한 생각이 범법친화적이고 부패친화적인 가치관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6·25전쟁은 또 한국인들에게 허무주의심리, 퇴폐심리, 불신(不信)심리 등을 확산시켰다. 전란 속에서 인명과 재산이 한순간에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나 명예, 재산 등의 가치를 경시하게 되었다.
또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여유가 생기면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퇴폐적 행동을 자행하게 되었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한국인들은 어제까지 우익행세를 하던 사람들이 다음 날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며 인공만세를 선창하고, 인공에 부역하던 사람들이 하룻밤 새에 반공투사로 표변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했으며,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친구의 도움 요청을 외면하는 배반을 무수히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불신심리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6·25전쟁은 한국인들에게 서구적 가치관, 보다 정확하게는 미국적 가치관을 많이 수용하게 만들었다. 다 죽었던 대한민국이 미국의 도움으로 살아난 것을 경험하면서 한국인들은 미국의 위대성을 실감했다. 미국의 위대성에 대한 실감은 한국인들에게 숭미(崇美)심리를 심어주었고, 숭미심리는 다시 미국의 문화, 미국인의 가치관을 긍정·수용하는 태도를 갖도록 유도했다. 미국은 위대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의 것은 다 좋은 것이며, 미국의 것은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사고가 한국인들 사이에 확산된 것이다.
[도시화]
6·25전쟁은 한국사회에서 대대적인 인구이동을 유발했고, 그러한 대대적 인구이동이 급격한 도시화를 초래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은 전선을 피해 이동을 하기 마련이다. 6·25전쟁은 우리 국군의 입장에서 보면, 후퇴→ 반격→ 수복→ 북진→ 후퇴→ 재수복→ 전선고착의 일진일퇴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전황변화와 전선의 이동은 많은 인구에게 피란을 강요하고 또 가능하게 만들었다. 전쟁기간 중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 온 인구만도 90만명 내외였고, 남한에서 남한으로 피란을 했던 사람도 매우 많았다.
전쟁 통에 진행된 이러한 대규모 인구이동은 도시지역 거주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했다. 피란민들은 대체로 국군이 지켜주는 도시지역에서 거주지를 찾았다. 전쟁기간 중 북한에서 피란 온 인구는 60%가 농촌지역, 그것도 북한에 가까운 농촌지역에 거주하고, 나머지는 도시지역에 거주했다. 농촌지역에 거주하던 월남 국민들도 휴전 후 점차 도시지역으로 이동했다. 또한 남한의 농촌지역에 거주하던 국민들도 피란 간 도시지역에 잔류(殘留)하기도 하고 전쟁 기간에 농촌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보다 안전한 거주지를 찾아 도시로 이동했다.
그 결과, 한국의 도시화율이 전쟁을 겪으면서 급속히 높아졌다. 한국의 도시화율은 1949년에 17.3%이던 것이 1950년에는 18.4%, 1955년에는 24.5%, 1960년에는 28.0%로 높아졌다. 당시 공업화로 인한 도시화 유인요인이 약했던 점을 생각하면, 50년대에 진행된 한국의 도시화 확대의 주된 원인은 6·25전쟁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도시화는 제3공화국의 경제성장 정책이 진행될 때까지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6·25전쟁의 영향으로 촉진된 도시화는 휴전 후 가열된 교육열로 인한 고등교육 이수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한국정치에 민주화 압력을 가하는 작용을 했다. 도시화로 인해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야당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 선거의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을 초래했다. 그 이후 도시는 한국정치에 있어서 ‘민주화추진의 요새’가 되었다.
[군부의 비대화]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 국군은 비약적으로 증강되었다. 전쟁개시 시점의 국군 병력은 9만8000명이었으며, 병기는 빈약하고 노후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의 지원으로 병력과 장비가 급속히 증강되었다. 병력은 1952년에 25만명으로 증가했고, 1954년에는 65만명으로 증가했다. 장비 및 무기도 급속히 증강되었다.
6·25전쟁이 ‘종전(終戰)’된 것이 아니라 ‘휴전’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북한군의 남침이 재개될 가능성이 상존했기 때문에 6·25전쟁 후에도 국군의 증강은 계속되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휴전 후에 북한군의 군사적 도발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도발은 국군의 증강을 촉진했다. 그에 따라 국군은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다른 부문과는 차별화된 급속한 비대화가 이루어졌다.
국군은 전쟁을 통해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질적(質的)으로도 도약하여 한국사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집단으로 발전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그리고 휴전 후에도 전쟁에 대비하는 노력을 전개하면서 국군은 미군의 지도 아래 현대적인 군사행정 기술을 도입·실천했고 새로운 군사장비를 취급하는 데 필요한 현대적인 과학기술을 습득했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을 거치면서 국군은 한국사회의 여타 부문에 대해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군대가 가장 애국적인 집단이라는 것이 과시된 데다가 한국사회의 다른 부문은 부패와 무능을 현저하게 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 내부에도 부패가 있었지만, 그런 군 내부의 부패는 언론매체를 통해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군의 부패는 심각히 인지(認知)되지 않았다.
다른 부문과는 차별화된 군부의 급속한 발전과 비대화는 여타 부문에 비교할 때 매우 불균형한 것이었다. 이처럼 군부만의 불균형 비대화와 군부가 가지는 도덕적 우월감은 한국사회에 군사문화를 확산시켰고, 장기적으로는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초래했다. 불균형하게 비대해진 군부는 4월혁명 기간 중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느슨한 배반’을 감행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유도했고, 마침내 1961년 5월에는 쿠데타로 이 나라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결어
6·25전쟁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나쁜 것이었지만, 위에서 정리해 본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미친 6·25전쟁의 영향은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영향의 대부분은 나쁜 것이지만, 일부는 대한민국이 현대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직·간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있었다. 전쟁과 같은 격심한 파괴행위가 없고서는 파괴될 수 없었던 현대화 저해 요소들이 6·25전쟁의 영향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인류역사는 간혹 절대적 재앙도 부분적으로는 의도하지 않은 선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6·25전쟁의 영향도 일부분은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