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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李麟求] 내 인생의 직업을 결정해 준 6·25

7월 중순 학도병으로 입대해 20년 동안 군 생활
신병 훈련 끝나기도 전에 ‘다부동 전투’의 후방 부대에 투입돼
장교 면접에 불합격했으나 성기 만져보더니 “생리적 합격”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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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麟求 계룡건설산업 명예회장
⊙ 1932년 출생. 충남大 법학과 졸업. 충남大 행정대학원 수료. 同大 명예법학박사.
⊙ 육군 복무, 계룡건설산업 회장, 제 13·15대 국회의원, 자민련 부총재 역임.
    現 계룡건설산업 명예회장, 계룡장학재단 이사장.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나는 대전중학교 5학년(現 고교 2학년) 친구들과 함께 유성 온천장에서 놀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헌병 두 명이 전투복 차림으로 대중탕에 들어왔다.
 
  “군인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십시오. 비상입니다. 지금 즉시 행동하십시오.”
 
  이들이 나팔처럼 생긴 확성기에 대고 복귀를 독촉하자, 군인으로 보이는 몇몇 청년이 목욕을 하다말고 욕탕에서 뛰어나갔다.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냐?”
 
  욕탕에 있던 어른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유성 온천에서 학교까지는 약 10Km. 버스를 타려면 30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나는 친구들과 함께 비포장 자갈길을 군가를 부르며 뛰어갔다.
 
  학교로 가는 길에 대전 비행장(지금의 대전시청 주변)이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한국군 보병 2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치며 안을 들여다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요일인데도 장병들이 전투 복장을 하고,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군용 차량이 분주히 움직여 도로 일대는 먼지가 자욱했다. 부대가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서둘러 학교까지 달려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학도호국단은 1949년에 대통령령으로 공포된 학생 자치단체다. 학생들의 사상통일(思想統一)과 애국심을 함양시킬 목적으로 생겼는데, 내가 다녔던 대전중학교는 다른 학교의 학도호국단과 좀 달랐다. 당시 대전비행장에 주둔 중인 2사단 원용덕 장군이 대전중을 직접 챙기겠다고 나서, 현역 군인이 교관으로 와 있었다. 현역 군인이 후방 중학교의 교관으로 파견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직도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핸섬한 외모에 좋은 화술을 가지고, 전술의 기본을 쉽게 강의해 주던 전 중위라는 사람이었다. 현역 군인이 교관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여름방학 때에는 직접 2사단에 들어가 학생 신분으로 내무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전 중위는 유성 온천에서부터 헐레벌떡 뛰어온 우리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오! 동지들 잘 왔습니다. 꼭 올 것 같아서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나는 2시간 후에 최전방으로 싸우러 가기 위해 대전을 떠나야 합니다. 이제 가면 살아서 돌아오기는 힘들 겁니다. 마지막이 될지 몰라 정들었던 동지들을 만나고 가고 싶어서….”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전쟁이 일어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는 전 중위와 비장하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그는 6·25 초반에 전사(戰死)했다고 한다.
 
 
  우리 방송과 달리 미국 방송은 ‘우리 군 계속 후퇴 중’ 알려
 
  전시(戰時) 방송은 믿을 수가 없다. 모든 방송과 신문은 ‘우리 군이 휴전선 전면에 걸쳐 남침한 인민군을 동두천, 의정부 북방에서 효과적으로 저지해 반격 중에 있다’는 발표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단파 라디오에서 나오는 얘기는 조금 달랐다. 나는 운 좋게도 6·25가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미국문화원(USUIS)에서 개최한 영어 웅변대회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해, 상품으로 단파 라디오를 받아 갖고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미국의 소리’라는 방송은 “한국군이 계속 후퇴하면서 적을 저지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 발표와 전혀 달랐다.
 
  6월 달력을 넘기려 할 때, 대전에 난생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하늘에 ‘쌕쌕이’(제트전투기)가 굉음을 내며 날았고, 고급 승용차군(群)이 흙을 묻힌 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 천도한 것이다. 충남도청은 정부가 접수했고, 도지사 관사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임시 경무대로 사용했다.
 
  서울과 강원도에서 쏟아져 내려온 피란민이 대전에 모여 전방의 사정을 전하고 있었다. 딘 사단장이 이끄는 미(美) 24사단이 천안과 조치원 사이의 개미고개에서 완전히 격파당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인민군은 천안과 조치원을 공략하고 있었다.
 
  미 사단 본부가 내가 다니던 대전중학교 건물을 사무실로 쓰는 바람에, 우리는 학교를 갈 수 없게 됐다.
 
  ‘매주 수요일 보문산 입구 느티나무 아래로 등교는 하되, 학교 수업은 무기한 하지 않는다’는 공지문이 나붙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학도호국단 간부들과 함께 모였다.
 
  “나라가 망하는데 우리가 앉아서 쳐다만 볼 순 없지 않은가?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싸우자! 여기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은 각자 집에 가서 ‘구국(救國)’이라는 두 글자를 혈서로 써 모레까지 다시 이곳으로 모이자.”
 
  학도병은 최소 1개 소대(30명)는 되어야 지원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그날이 오기도 전에, 대전의 모든 행정 단위에서 “24시간 내에 대전을 떠나 남쪽으로 피하라”는 피란령이 내려졌다.
 
  일주일간만 피란을 다녀오면 된다, 그때는 시민들을 안전하게 대전으로 되돌아오게 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금강방어에 투입된 미군 연대가 지금의 대전시 경계선인 안산전투에서 대패(大敗)해 대전시가지전투(시가전)를 계획하고 있었다 한다. 이 전투에서 미 24사단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추풍령으로 후퇴했고, 사단장인 딘 소장은 길을 잘못 들어 복병을 만나 타고 있던 지프도 버리고 남쪽으로 헤매다 포로가 됐다.
 
 
  아버지는 피란조, 어머니는 잔여조로 나눠 살 계책 세워
 
  피란령을 받은 내 아버지는 대가족을 두 개조로 나눴다. 아버지, 숙부, 장남인 나, 중학생인 동생(이헌구 前 대전서구청장)은 피란조였다. 할머니와 이제 막 해산(解産)한 어머니, 세 동생은 남기로 했다. 아버지는 잔여조에게 죽지 않고 살아남을 계책을 열심히 가르쳤다.
 
  다음 날 새벽, 동네 어른을 포함해 10여 명이 함께 피란길에 올랐다. 정부에서 발표한 대로, 2주간의 식량과 취사도구만을 챙겼다. 떠나는 사람, 보내는 사람 모두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다.
 
  “무사히 다녀와요”, “곧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 할머니 모시고 참고 견뎌야 해.”
 
  그때의 일이 눈에 선하다. 이런 가족 간 생이별은 그 험난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던 일이었다.
 
  우리는 나의 외가가 있는 (대덕군)기성면 봉곡리로 갔다. 두메산골이라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곳에 가보니 벌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피란을 가고 없었다.
 
  험한 산 고개를 넘었고, 다시 태봉재를 넘어 (금산군)추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곳에는 우리 일가가 살고 있었다. 피란길에 동네 원두막에 들렀다. 20대(代)로 보이는 청년에게 “참외 10개만 팔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보아하니 피란민이군요. 난리가 났는데 장사는 뭐 하겠습니까. 열 개 정도 당신이 따 가시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청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청년의 노래를 듣고 있자니, 학도병으로 지원키로 했던 동무들과의 결의가 다시 떠올랐다. 나는 가족과 함께 피란을 떠났지만, 어차피 대구에 도착하면 학도병으로 입대할 생각이었다. 그의 노래가 내 마음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노근리 사건 이틀 전에 그곳 지나쳐
 
1951년, 미국 공병학교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의 모습

  우리 일행은 국도를 피해 영동-추풍령-김천-왜관-대구길을 선택했다. 국도는 전시에 군용차량으로 통제돼 피란민은 통행금지였다. 산길, 논길, 밭길을 따라 남(南)으로 내려갔다. 영동-김천 간은 남행열차가 스톱 상태였기 때문에 철도길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했다. 황간을 지나 노근리 철교를 건너고 있었는데 삼엄한 전장(戰場) 분위기가 먹구름처럼 으스스했다. 북쪽에서 들리는 포성소리가 요란했고 하늘에는 전투기, 정찰기(L-19)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피란민 대열을 감시하던 미군(HID요원인 듯)이 다가와 의심스런 사람을 색출하고 있었다.
 
  “핸즈업!”
 
  갑자기 미군 한 명이 내 가슴에 소총을 겨눴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미군 병사는 나를 끌고 막사로 데려갔고, 아버지와 숙부가 사색이 된 얼굴로 따라왔다. 그는 나를 의심스런 피란민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박박 깎은 머리며, 가방 안에 가득 찬 냄비와 취사도구를 보고, 나를 괴뢰군의 5열로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서툰 영어로 내 사정을 설명했지만, 미군 병사들은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들은 2차 정밀 심문조로 나를 끌고 갔다. 아버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내 머릿속은 멍해졌다. 떠듬떠듬 설명을 하고 있는데,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장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
 
  “네. 조금요.”
 
  “네가 북괴 5열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해 봐라.”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저기 나를 쳐다보며 애태우고 있는 어른은 제 아버지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고요. 북괴 5열이 가족과 함께 오는 것 봤습니까? 나는 중학생입니다. 한국의 중학생은 이렇게 머리를 빡빡 깎아야 합니다.”
 
  나는 떠듬거리며 말을 이어갔지만, 그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무언가 확실한 증거 자료가 더 필요하구나 싶었다. 나는 웃옷을 벗었다.
 
  “몸을 보십시오. 팔은 까맣게 탔지만, 속가슴은 하얗지 않습니까? 인민군이라면 신체 전부가 까맣게 타 있어야지요. 참, 여기 영한(英韓) 사전이 있습니다. 학생이라서 공부를 하려고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동지들과 대구에서 만나 학도병으로 입대해, 미군과 함께 북괴를 상대로 전쟁을 할 사람입니다.”
 
  장교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오케이! 이 학생을 정중히 모셔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갈 수 있게 하라.”
 
  “예스, 써(Sir).”
 
  나를 끌고 왔던 병사가 장교의 말에 거수경례를 보냈다.
 
  나를 풀어 준 장교는 아버지와 일행에게 영어로 설명했다. 아버지가 영어를 이해할 리 만무했지만 그는 말을 계속했고, 나는 통역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훌륭한 아드님이 자랑스럽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피란민 속에 인민군 5열이 있다 해서 잠시 조사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늦었으니 빨리빨리 대구로 남행하십시오. 김천부터는 기차가 다닐 것이니 기차로 내려가십시오.”
 
  나중에 들은 일인데 그 다음다음 날에 ‘노근리 발포사건’이 발생됐다고 한다. 나는 이 사건이 전장(戰場)에서는 있을 수 있지만, 또 있어서는 안 될 안타까운 전사(戰史)의 한 토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일행은 미군 장교의 말처럼 김천에서 마지막 남행열차를 타고 왜관까지 갔다.
 
 
  황성수 목사, “낙동강방어선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없다” 강연
 
  남행열차는 객차(客車)가 아니다. 화물열차인데, 여기에 사람들이 콩나물 시루 같이 빽빽하게 탔다. 피란민들은 열차 지붕 위에 매달렸고, 그것도 안 되면 기관차와 화차(貨車·화물열차의 준말) 연결대에 매달렸다. 화차는 낙동역에서 정차했는데, 미군 헌병이 올라타더니 화물차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검은 수건을 나누어 주면서 눈을 가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살한다고 했다. 한 시간 동안의 보안교육이 끝난 후 열차는 낙동강 철교를 지나 왜관역에 도착했다. 살벌했던 미군 헌병들은 미소를 띠며 “종착역이니 모두 내리시오. 미안합니다”라며 손을 흔들었다.
 
  “짓궂은 놈들!”
 
  피란민들이 미군에게 한마디씩을 했다. 나는 우리 일행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아버지, 아무래도 미군이 낙동강 철교를 폭파할 준비를 끝낸 것 같습니다. 우리 눈을 가린 것은 우리가 지난 지역에 군사 비밀이 있어서일 겁니다.”
 
  어찌되었든 우리 일행은 우여곡절을 거쳐 대구에 도착했다. 우선 먹고 잘 곳이 필요했다. 대덕군민은 달성군청에 ‘만나기 본부’를 설치해 군청직원, 면사무소 직원들로 하여금 안내를 하도록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새파란 색의 피란민 구호금을 받았다. 그들은 군민증을 발부해 줬다.
 
  나는 우리 동지 학생들을 찾아다녔다. 7월 17일에 대구극장에서 시국강연이 있다는 광고를 보게 됐다. 나는 동지들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중에 국회 부의장을 역임한 황성수 목사가 특강을 하고 있었다. 황 목사는 현재의 전황(戰況), UN의 결의내용, 미군 파병과 맥아더 사령관 이야기 등을 해 줬다. 그는 “낙동강 방어가 우리의 생존을 좌우할 것이다. 대한민국 마지막 방어선이다. 이 전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없어진다”고 했다.
 
  황 목사의 강연은 최후의 방어를 위해 남녀노소 따질 것 없이 전쟁에 참전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매우 설득력 있는 연설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우리 학도병끼리 얘기를 나눴다. 우리는 다음 날, 대구 남단에 있는 공병교육대대에 입대하기로 했다. 약 50명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대구 역세권에 북괴가 쏜 박격포탄이 몇 발 터졌다. 대구시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라고 했고, 대구-경산 국도는 피란민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부친과 상의도 안 하고 군에 자원 입대
 
  나는 그 피란민 속에 끼어 고산 국민학교를 접수해 주둔하고 있던 공병교육대대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대대장은 서윤택 중령(그 후 공병감 역임, 육군소장 퇴역)이었다. 서 중령이 직접 우리 일행을 환영했고, 학도병 군번인 560군번을 줬다.
 
  ‘5601267.’
 
  이것이 내 군번이다.
 
  나는 즉시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무반에 수용됐다. 나는 입대에 대해 아버지는 물론, 일행에게 상의를 하지 않았다. 장손의 입대 소식에 아버지는 혼비백산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고 고향 출신의 장교에게 통사정을 해서 면회를 왔다. 내무반에 있는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이인구 이등병! 면회다. 너의 부친이 오셨다. 나하고 같이 면회장으로 가자.”
 
  나는 죄진 놈이 되어 면회장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입대할 때 입었던 사복과 내가 보관했던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아버지 앞에 내밀었다.
 
  “인구야, 아직 늦지 않았다. 네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다시 사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어. 우리 일행과 함께 부산으로 가자꾸나.”
 
  면회에 입회한 전 대위는 말없이 듣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청을 수긍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도 내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아버님, 크게 생각해 주세요. 부산으로 간다고 해도 그때는 나라가 없어지는데요. 학도병으로 입대하자고 50여 명의 친구를 부추긴 사람이 저예요. 동갑내기 동무들은 군에 입대시키고 나만 도망간다면 후일 무슨 낯으로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먼 훗날 출세해서 더 큰 효자가 될게요. 이번에는 아버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중대장님 다 들으셨지요. 면회는 이상입니다. 저를 인솔해 빨리 동무들에게 데려가 주십시오.”
 
  나는 옆에 있던 동생 헌구에게 돈을 내놓았다.
 
  “헌구야, 이제 너는 소년이야. 나 대신 아버님을 잘 모셔라. 내게 남은 돈은 네가 다 가져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 군대식 거수경례를 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중대장을 따라 내무반으로 돌아갔다. 훗날 아버지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억장이 무너졌다’고 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란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때 내 나이 만 17.3세였다.
 
 
  신병훈련 끝나기도 전에 영천전투에 투입
 
  나는 3일 동안 호되게 신병훈련을 받았다. 첫 주에는 군인정신을 기르는 내무생활과 연병장에서 제식훈련이 있었다. 이미 학도훈련과 병영생활을 했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며칠 되지 않아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지금부터 기본훈련을 생략하고 전투훈련에 들어간다. 너희는 3일 내로 전투일선에 배치될 것이다.”
 
  나는 일행과 함께 임시로 설치된 야외사격장으로 갔다. 실탄 장전요령, 목표 조준요령, 방아쇠 당기는 요령, 안전수칙 등 간단한 훈시를 몇 번 반복하더니 바로 사선(射線)에 배치해 실습을 시켰다. 소총분해, 청소, 재결합 등 기초교육을 숙달시키고 실탄사격을 하는 것이 군의 교육요령인데, 오죽 다급했으면 전(前) 단계를 생략했을까. 우리는 실탄사격 훈련을 받았다.
 
  다음 날 우리 대대는 잔류 병력만 남겨두고 경북 영천 북방의 계곡에 투입돼 진지를 구축했다. 6·25 초전의 격전지인 ‘다부동전투’의 후방 예비대가 된 것이다.
 
  그때의 상황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불리했다.
 
  비가 와서 미군의 공중지원이 불가능했고, 밤이 되면 백병전(白兵戰)을 각오해야 하는데 백병전은 아군에게 불리했다. 아군의 사기도 높지 않았다. 3일 동안 예비 진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공병교육대대에 원대복귀명령이 내려왔다. 삼재(三災)를 극복한 전방 아군이 백병전 끝에 인민군을 물리치고 대승한 것이다. 6·25 초전에 일구어낸 대표적인 전투가 바로 다부동 격전이다. 이는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혁혁한 승리다. 만일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나는 영천전투에서 실전(實戰)을 치렀을 거다. 지금 이 글을 쓰지 못하고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원대복귀해 정상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군은 대대급 이상에 미 고문단을 배치했다. 고문단장인 소령과 대위 두 명이 배치됐는데, 통역관이 없었다.
 
  “영어 할 수 있는 사람 나와.”
 
  특무상사가 호통을 쳤다.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전 출신의 학도병 한 사람이 내가 영어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다고 했다.
 
  “너 왜 손들고 나오지 않았어!”
 
 
  영어웅변대회 1등 인연으로 미군 통역병 돼
 
  그는 다짜고짜 몽둥이로 나를 후려쳤다.
 
  “달달 외워서 1등은 했지만, 실력은 없습니다.”
 
  “이 새끼 또 엄살이야. 매를 더 맞아야 정신 차리겠나?”
 
  “아닙니다. 서툴지만 공부하면서 해보겠습니다.”
 
  상사는 나를 데리고 가 미군 고문관 대위에게 소개해 줬다. 그가 나에게 뭔가를 묻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롸잇 다운 플리즈(Write down, please).”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영어로 써줬다. 글로 보니 아까보다는 이해가 됐다. 이해가 안 되는 단어가 있기에, 사전을 보겠다고 했다. 내가 그의 질문에 끼적끼적 답을 쓰자, 미군이 고객를 끄덕였다.
 
  “합격!”
 
  이렇게 해서 나는 영어 통역병이 됐다. 미군 대위와 친해졌고, 밤을 지새우면서 영어 공부를 했다. 이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수석고문관(중령)이 나를 불렀다. 그는 미군의 위장(僞裝) 교본을 한 권 던져주면서,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번역을 해 오라고 했다. 나는 서툰 솜씨로 밤을 꼬박 새우며 책을 번역했다. 그는 내 번역본을 막 부임한 한국인 통역장교에게 보여줬다. 한국인 통역관은 ‘아주 훌륭한 번역’이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번역한 미군의 위장 교본이 가리방(수동복사기)으로 인쇄돼 수십 권 만들어졌다. 이 책은 원서와 함께 교육 자료로 한국 교관에게 배부됐다.
 
 
  17.3세짜리 장교로 임관
 
  얼마 후, 수석 고문이 다시 나를 불렀다.
 
  “이 일병은 사병으로 아깝다. 장교로 임관해라.”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는 군에서 계속 근무할 생각이 없었다.
 
  “저는 학도병입니다. 서울을 수복(收復)하면 학교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입대했습니다. 지금, 일병으로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수석 고문은 알았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사실 나의 꿈은 문학가나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6·25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 후 20년을 군인으로 지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 훈련소장인 서윤택 대령이 집무실로 불렀다.
 
  “이 일병! 서울 수복이 전부가 아니다. 수복 이후는 남북통일 과업이 있어. 너는 학도병이라는 생각을 버려. 장교임관지원서에 서명해라.”
 
  하는 수 없었다. 며칠 뒤, 육군본부에서 나온 오한영 중령의 입회 아래 형식적인 시험이 치러졌다.
 
  “이 일병의 생년월일은?”
 
  “단기 몇 월 며칠입니다.”
 
  “그럼 몇 살이야?”
 
  “만 17.3세입니다.”
 
  “장교 신분령에 미성년자는 장교가 될 수 없어. 불합격!”
 
  “이인구 일병, 불합격!”
 
  나는 불합격을 복창하고 시험장을 나왔다. 오히려 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인구 일병. 다시 들어가!”
 
  나는 다시 심판관 앞에 차려자세로 섰다. 테이블에 앉았던 심판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팬티 벗어!”
 
  그는 나의 성기를 만져보더니 자리로 돌아갔다.
 
  “생리적으로 성년으로 인정한다. 합격!”
 
  뒤에 서 있던 응시자들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모두 나의 동기생이 돼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나는 이런 사연 탓에, 근무 내내 ‘X소위’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깔보는 별명임에 틀림없었다. 이렇게 장교가 된 나는 공병학교로 발령됐다.
 
 
  미군 공병학교 군사 매뉴얼 두 트럭분 한국으로 보내
 
  공병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몇 달 뒤에 나는 서윤택 준장과 함께 수석고문 집무실에 불려갔다. 그는 대뜸 1차 도미(渡美)유학을 준비하라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준장님, 저는 육군 소위입니다. 유학 모집 자격은 중위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
 
  “됐어. 그건 우리가 결정하는 거야. 자네는 유학 중에 중위로 진급할 거야. 유학을 하면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미군 공병학교의 교재와 교육 보조물, 교육 훈련방식을 낱낱이 조사해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정병 육성을 위한 산모 역할을 하는 거다.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막내 소위였던 나는 1951년 여름, 중·대위, 소령, 중령, 대령 등과 함께 나란히 워싱턴DC로 떠났다.
 
  미국에 가보니 또 다른 임무가 있었다. 대사관 무관인 강영훈 소장(후에 국무총리 역임)은 “미국에 있는 동안 매주 1회씩 황재경 목사와 함께 고국 동포에 전하는 메시지 방송을 하라”고 했다.
 
  고국의 우리 식구는 매주 월요일이면 둘레둘레 모여 앉아 이 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그나마 전쟁 중에 장손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이를 통해 잘 전해 들었을 거다.
 
  나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4시간 동안 장교 계급장을 달고 공병학교 신병훈련소에서 미군 신병들과 함께 신병훈련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가 미군 공병학교의 신병훈련법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미국방위성(펜타곤) 매뉴얼 섹션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나는 70만 권의 미군 매뉴얼(FM, TM) 중 한국에 가지고 갈 책과 교육 영화필름 두 트럭분을 골라 한국의 공병학교로 보냈다. 영어로 돼 있는 교육영화필름을 그때는 한국어로 바꾸는 기술이 없어, 황재경 목사의 도움으로 우리 말 해석을 넣었다.
 
 
  네이팜탄 지뢰 만들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1년 뒤인 1952년에 나는 귀국했다. 예정돼 있던 대로, 나는 김해 공병학교에 배치됐다. 당시 휴전선 일대에서는 우리 군과 인민군이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해전술에 사격과 지뢰장벽은 별 소용이 없었다.
 
  미군 전투기는 인명살상폭탄 대신 ‘네이팜탄’을 파도같이 밀고 들어오는 중공군에 퍼부었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네이팜탄 전술은 악천후나, 야간에는 쓸 수 없었다.
 
  김해 공병학교에서는 네이팜을 ‘네이팜지뢰’로 급조하는 방법과 사용법을 연구했다. 나는 이 연구에 참여했다. 이 지뢰를 개발해서, 전방부대를 돌며 제조법과 사용법을 강의하고 실습시켰다. 이 와중에 동부전선의 최첨단인 503고지에서 적의 박격포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운 좋게도 나는 살아남았다.
 
  공병학교의 필수교관에 묶인 나는 7년 동안 다른 부대로 전출할 기회가 없었다. 신(新)교리전수, 정병육성의 교육체계 개발, 교관의 교관, 핵심과목의 대표교관으로 장벽계획과 지뢰전, 토양공학 등 교관,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 1인5역의 코피 나는 고된 군대생활을 지속했다.
 
  공병학교의 긴 생활을 청산하고 나는 대전에 있는 건설공병단에 전속받았다. 전후복구(군시설, 민간SOC건설)에 총력하는 핵심부대였다. 한직(閑職)이 아니라, 요직에 배치된 탓에 고단한 생활은 계속됐다. 대위 시절에 소령 직책을, 소령이 되니 4개의 중령이 합동 시공하는 공사 통제관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보람으로 열심히 책임수행을 다했지만, 계급의 한계를 넘지 못해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내가 했던 대표적인 사업이 대전 지역의 군시설 현대화사업, 조치원, 증평, 전주, 광주에 있는 4개 예비사단 주둔지 시설, 논산훈련소 막사 현대화시설, 계룡산, 식장산, 덕유산, 무등산 등의 통신망 시설 등이다. 또 민간SOC사업으로는 동진간척사업, 철암선 철도사업, 남산 국회의사당 대지조성사업, 천안~대전~김천 간 국도확장 및 포장사업 등이다. 나중에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감독, 경부고속도로 기획단계의 팀장, 서울~춘천국도 확장포장사업, 춘천~원주국도확장 및 포장사업 등이다.
 
  나는 20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민간사회에 나와서 곧바로 건설보국(建設報國)의 사명(使命)을 갖고 현재 내가 경영하고 있는 ‘계룡건설’을 만들었다. 올해가 계룡건설 창립 40주년이고, 내 나이가 여든이 됐다. 뒤늦게 바람이 나서 60~70세까지 10년 동안 13대 국회와 15대 국회에 들어가 국정에 참여한 일도 있다. 이후 아예 정치와는 담을 쌓고 건설 기업을 육성하고, 사회봉사를 하는 것을 나의 업(業)으로 삼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6·25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당연하다. 그때의 다급하고 처참했던 상황들을 잊을 수가 없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아니 죽어서도 그때의 참상을 잊지 못할 것이다. 6·25는 내게 그런 사건이다.⊙
 
  <정리=鄭蕙然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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