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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金章煥] 전쟁이 선물한 기적

1951년 11월 12일, 칼 파워스 상사가 사준 408달러짜리 배표를 들고
미국에서 부산으로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칼 파워스 상사는 근무연장 기간이 12월 8일에 끝나기 때문에 나 혼자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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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章煥 목사
⊙ 1934년 출생. 한국전쟁 때인 17세에 渡美. 미국 밥 존스 대학교 신학과·신학대학원 졸업.
⊙ 제19대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 역임.
⊙ 現 극동방송 이사장,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 한국십대선교회 명예이사장,
    명지대학교 명예이사장, 국민일보 이사.
  같은 시기에 전쟁을 맞았어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나이 등 여러 요소 때문이다. 1950년에 열여섯 살이었던 나와 내 친구들에게 한국전쟁은 지루한 일상을 깬 사건이었다.
 
  가난한 농가의 다섯 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 하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형편이 더욱 어려워져 고등학교 진학이 쉽지 않았다. 중학교도 우마차로 짐을 운반해 돈을 벌던 큰형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 다니고 있었다.
 
  정치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어떻게든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학업을 계속하기 위한 방도를 찾느라 이리 저리 수소문을 하다 서울 용산에 있는 철도고등학교는 무료인 데다 매달 용돈까지 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순간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수원역장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꿈을 수정했다.
 
 
  전쟁 터진지 모르고 수원에서 서울로
 
  1950년 6월 25일, 전쟁의 그림자가 한 오라기도 없던 수원에서 나는 가족과 함께 논에 모를 심었다. 어머니께 “내일 서울 용산에 있는 철도고등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한숨을 쉬셨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막내아들을 밀어주지 못하는 것이 어머니에겐 늘 한이었다.
 
  다음 날 철도국에 다니는 동네 아저씨를 따라 서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어머니는 내가 먹을 건 챙겨 가야 한다며 보리쌀 한 말을 자루에 담아 주셨다. 미아리 외삼촌댁에 묵으면서 철도학교 들어가는 일을 확실히 성사시킬 요량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여 외삼촌댁에 짐을 풀어놓고 바로 용산으로 갔다.
 
  철도고등학교 정문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학교 정문에 시험이 무기 연기되었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외삼촌댁으로 향했다. 보리쌀 자루와 책보를 찾으러 가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가는데 사람들이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왔다. 빨리 피해야 한다”고 소리질렀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다 사람들을 따라 서울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 도착했지만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제야 가슴이 쿵 떨어졌다. 이러다가 수원으로 못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쪽으로 나도 따라갔다. 모두 한강대교로 달려갔으나 경찰과 헌병이 다리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다시 사람들을 따라 한강 백사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백사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어떻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수원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배를 탔다. 10명이 정원인 배에 2배가 넘는 인원이 타자 사공이 사람들에게 계속 내리라고 종용했다. 몸집이 작은 나는 사람들 틈에 숨어 있다가 간신히 강을 건넜다.
 
  노량진에 도착했으나 역시 기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영등포역으로 갈 때 무차별 폭격이 시작되었다. 모두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재빨리 차바퀴 아래로 몸을 숨겼다. 놀란 아주머니가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제 몸 하나 숨기기에 급급했다. 숨어 있는 동안 이대로 가족과 헤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폭격이 중단되었다.
 
  사람들을 따라 기찻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걷고 있어서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빨리 수원에 가서 가족을 만나야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인민군의 흑색선전
 
나를 미국에 유학시켜 준 칼 파워스 상사와 함께.

  다행히 시흥에서 화물차를 얻어 타고 밤 9시경에 수원에 도착했다. 이미 수원도 전쟁 소문으로 초긴장 상태였다.
 
  다음 날 아침 큰형님이 형수님과 조카들을 우리 집에서 30리쯤 떨어진 화성군 정남면 친척집에 데려다주고 오라고 했다. 수원보다 좀 안전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침 일찍 정남면에 갔다가 돌아오니 우리 집 대문에 판자를 대고 못을 박아 놓은 게 보였다. 가족은 나도 정남면에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이웃집에 물어보니 사촌누이 집으로 간 거 같다고 했다. 마구 달려 사촌누이 집으로 가서 겨우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6월 27일에 국군 패잔병들이 총도 없이 수원까지 내려와 남쪽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펑펑 소리가 났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다들 허둥댔다. 미군 제트기가 쌕쌕 소리를 내며 날아갈 때면 소름이 끼치면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라디오에서는 “우리 국군이 잘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이 나왔다. 이미 이 대통령은 대전에 있으면서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국민들을 기만했다. 비행장과 역전이 폭격당하고 국군이 모두 남쪽으로 갈 때도 우리 가족은 수원에 그대로 있었다. 잘사는 사람들은 피란을 떠났지만 형편이 어려운 집은 그냥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촌 집에 며칠 숨어 있을 때 인민군이 수원을 점령했다. 우리 가족은 별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인민군이 무슨 위원장이다 단장이다 조직하느라 법석이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동네 사람이 위원장이 되어 설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가난한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잘살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며 의용군을 모집했다. 친구 여러 명이 의용군 모집에 따라나섰다. 나도 멋모르고 의용군을 따라가려다 어머니의 만류로 발길을 돌렸다. 겨우 중학교 3학년을 마친 열여섯 살이니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금세 휩쓸렸다.
 
  인민군이 형님들을 포섭하기 위해 우리 집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큰형님과 둘째 형님은 집 뒤에 있는 방공호에 숨어 있고 셋째 형님은 국군에 입대한 상황이었다. 인민군은 형님에게 감투를 주겠다며 어머니에게 형님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했다. 우마차로 탄환 같은 것을 실어 나르기 위해 형님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은 벌써 피란 갔다. 소와 마차를 끌고 가라”고 했고 인민군은 우마차를 끌고 간 뒤에 다시 오지 않았다. 어머니 덕분에 두 형님도 나도 무사히 전쟁을 날 수 있었다.
 
  동네에 경찰가족, 지주(地主), 반장, 이장을 지낸 집은 난리가 났지만 우리는 인민군에게 별다른 해를 입지 않았다. 셋째 형님이 입대한 군인가족이었지만 인민군이 소를 끌고 가서인지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않았다. 의용군 모집이 잘 안 되자 덩치 큰 내 친구들을 끌고 갔다. 그때도 나는 몸집이 작아 별다른 위협을 받지 않았다.
 
 
  서울 수복 소식에 만세 불러
 
미군 막사 앞에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 내 모습.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이 수원까지 들려왔다. 친구들과 시내로 가서 만세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인민군이 산으로 들어가면서 마구 총을 갈겨대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우리는 골목에 숨었다가 다시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인민군이 송판에 ‘김일성 만세, 인민군 만세’ 따위의 글을 써서 전봇대에 붙여놨는데 친구들과 그걸 떼러 다녔다. 어른들은 “이놈들아, 그러다가 인민군한테 총 맞아”라면서 벌벌 떨었지만 우리는 그걸 떼어다가 썰매도 만들고 테이블도 만들었다.
 
  인민군이 떠났지만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학교가 언제 문을 열지도 모르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재미있는 일이 없어 무료하기만 했다. 매일 아침밥을 먹고 친구들과 4km 정도 떨어진 광교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서너 시쯤 돌아오는 게 나의 일과였다.
 
  마침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줄 대상이 하나 생겼다. 1·4후퇴 때 퇴각한 미군 24사단 21연대가 텅텅 비어 있던 수원교도소 자리에 주둔한 것이다. 우리는 나무를 하고 오는 길에 미군부대 주변을 기웃거렸다. 재수가 좋으면 초콜릿이나 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날도 친구 7~8명과 교도소 울타리에 나무 지게를 세워놓고 미군 막사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미군 한 명이 다가와서 우리를 쓱 훑어보고는 나를 딱 가리키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막사 안으로 따라 들어갔더니 미군이 난로를 가리키면서 불을 지펴달라는 시늉을 했다. 재빨리 밖으로 나가 논두렁에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 와서 난롯불을 피웠다. 그러자 미군이 불이 꺼지지 않게 난로를 지키라고 했다. 불을 지키면서 주변을 보니 실내가 지저분했다. 담요를 털어서 햇볕 잘 드는 곳에다 널고 식기도 닦아 놓았다. 흙 묻은 구두도 밖에 들고나가 깨끗하게 닦았다.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던 미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넘버원!”이라며 다음 날 또 오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미군이 쿨 담배 한 상자와 초콜릿, 막대사탕을 주었다. 당시 쿨, 럭키 스트라이크, 카멜, 체스트필, 필립모리스 같은 미국 담배는 현찰과 다름없었다. 가장 비싼 담배인 쿨 한 갑이 4000환에 거래되었는데 나무 다섯 짐과 맞먹는 가격이었다. 나무 석 짐으로 쌀 한 말을 살 수 있었으니 담배가 얼마나 비쌌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다. 내가 담배상자를 들고 들어가자 가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담배를 시장에 내다 팔아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다음 날 친구들과 함께 또 미군부대에 갔는데 이번에도 그 군인이 나한테만 일을 시켰다. 나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담배를 한 상자나 준 미군이 고마워서 더 열심히 일했다. 수원교도소 마당을 가득 채웠던 미군 막사가 하나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남하함에 따라 미군도 남쪽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자 천막이 서너 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이 일도 못하게 되나보다 하고 있을 때 미군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언제 학교가 문을 열지 모르는 상황이니 미군들을 따라가서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고 싶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쟁 중에 헤어지면 영영 못 만나게 된다며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포기하고 미군들이 버리고 간 물건을 줍기 위해 삼태기를 들고 부대로 갔다. 짐을 싸는 미군들을 보니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불 일 듯 일었다. 다시 집에 와서 어머니를 졸랐으나 어머니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결국 못 가게 되어 미군부대에 인사하러 갔을 때는 막사가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쉬운 마음에 어머니에게 가고 싶다며 울면서 매달렸다. 그러자 화가 난 어머니가 “죽으려면 가라!”고 소리질렀다. 나는 어쨌든 “가라!”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그 길로 달려나가 미군 트럭에 올라탔다.
 
  동네에서 미군을 따라나선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 수원을 떠나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추위에 떨면서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비로소 내가 전쟁의 한가운데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장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군들이 나를 보호해 줄지,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치 내가 거대한 바다 위를 떠도는 작은 조각배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미군 하우스보이가 되다
 
  경산에 도착해 정식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되었다. 네 개의 막사 가운데 한 군데에서 20여 명의 미군 시중을 들었다. 알아듣는 영어라고는 “헬로, 컴온” 정도였다. 미군들은 ‘장환’이 발음하기 어렵다며 자기들끼리 의논을 하더니 ‘빌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막사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다가 시간이 날 때면 미국잡지를 봤다. 그 안에는 장난감과 자전거 등 온갖 종류의 물건 사진이 그득해 마치 꿈의 세상 같았다.
 
  하우스보이에게는 특별한 월급이 없었다. 미군들이 닷새마다 한 번씩 담배, 초콜릿, 커피, 통조림, 시레이션, 양말, 속내의, 파카 등의 보급품을 받았는데 미군들이 버리는 물건이 내 월급이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다 나를 귀여워해서 쓰지 않은 물건을 나에게 많이 주었다. 어떤 군인은 미국에 있는 어머니한테 야구 유니폼과 카우보이 옷을 보내 달라고 하여 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다 나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군인이 저녁마다 여자를 막사로 데리고 와서 좋지 않은 짓을 하기에 ‘갓댐!’이라고 했더니 날 쫓아내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군인들이 오히려 내 편을 들어주어 계속 일할 수 있었다.
 
  미군들은 근무시간 외에 별로 할 일이 없어 술을 먹는 시간이 많았는데 내가 달걀을 삶아 주고 프라이도 해 줬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눈치껏 하자 다들 나를 귀여워했다.
 
  막사에서 나오는 빨래를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맡기고 담배나 커피, 초콜릿 같은 물건을 품삯으로 주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미군부대 빨래를 하청받고 싶어서 하우스보이들에게 잘보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다.
 
  하우스보이 생활은 특별히 어렵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다들 친절했지만 어머니 생각에 종종 외로움을 느꼈다. 그럴 때면 막사 앞에 있는 사과나무 아래서 하모니카를 불었다.
 
  어느 날 하모니카를 불고 있는데 옆 막사의 칼 파워스 상사가 다가오더니 “너, 미국에 가고 싶니?”라고 물었다. 잡지에서 본 화려한 미국에 간다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예스!”라고 답했다. 하지만 기대를 하진 않았다. 이전에도 여러 미군 병사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지만 미국으로 돌아갈 때 어느 누구도 다시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칼 파워스 상사는 어쩐지 기대가 되었다. 그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친절하여 하우스보이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았다.
 
  아군이 북쪽으로 진격하게 되면서 경산에 있던 부대가 안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막사를 정리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안성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목수에게 부탁해 궤짝 2개를 짰다. 담배와 초콜릿, 통조림을 가득 담아 지프차에 싣고 수원으로 향했다. 6개월 만에 내가 미제 물건을 가득 싣고 나타나자 집에서 난리가 났다. 어머니는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미제 물건을 큰형님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형님, 이 물건을 팔아 소를 사세요. 나중에 제가 학교에 가면 학비를 대 주세요.”
 
  인민군이 소를 끌고 가서 우마차 일을 못하고 있던 큰형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안성으로 돌아가서 잠시 머물다가 북한강으로 이동해 강변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어느 날 아침 강물로 세수하고 이를 닦다가 인민군 시체가 강가에 떠내려 온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북한강변에 3일 정도 머물다가 부평으로 다시 옮겼다. 경산에서부터 계속 이동을 하느라 상당히 힘들었지만 전쟁이 끝나면 학교에 다닐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이겨냈다.
 
 
  미군에게 배운 세 가지 교훈
 
  내가 경산에서 안성으로 옮길 때 칼 파워스 상사는 전방으로 이동했다. 그가 가끔 떠올랐지만 헛된 꿈은 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칼 파워스 상사가 부평으로 나를 찾아와 입학원서를 보여주며 사인을 하라고 했다. 사인을 하면서도 과연 미국에 가게 될지 의심스러웠다. 다만 칼 파워스 상사가 잊지 않고 나를 찾아준 것이 신기하면서 고마웠다.
 
  초가을에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 밥 존스 고등학교 입학허가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정말 미국에 간다고 하자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어리고 키가 작고 영어를 못하는 데다 어머니가 못 가게 할 거라며 발뺌을 했다. 칼 파워스 상사는 통역할 사람과 나를 지프차에 태웠다. 어머니가 분명히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며 수원 우리 집에 도착했다.
 
  칼 파워스는 통역을 통해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자신이 나를 데려가고 싶은 이유를 설명했다.
 
  “저는 작년에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보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때 이 어린이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전쟁에서 구해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빌리를 보는 순간 내가 도와주어야 할 아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국에 데려가서 공부시키고 싶습니다.”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그러더니 칼 파워스 상사에게 “그 애를 데려가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공부하고 싶어 안달하는 막내가 한국에 있어 봐야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하여 힘든 결심을 하신 것이다.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구쳤다. 당시 22세였던 칼 파워스 상사는 나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제대 날짜를 여섯 번이나 연장하였다. 백낙준 문교부장관과 변영태 외무부 장관에게 탄원도 하고 진정서도 제출하여 어렵게 나의 비자를 받았다.
 
  나는 한국전쟁 때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첫째, 남의 물건을 훔치는 미군을 본 적이 없다. 미군부대에 일하는 한국 사람들은 기회만 생기면 물건을 빼돌렸는데 미군들은 막사 안에 비싼 물건을 그대로 놓아두어도 절대 남의 것에 손대지 않았다. 둘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우울하고 어두웠는데 미군들은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밝고 명랑하며 여유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집 생각이 날 때도 명랑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셋째, 미군들은 하루 8시간 근무하는 동안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이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놀다가 누가 오면 열심히 일하는 척했는데 미군들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소년시절에 그런 모습을 통해 무언의 교훈을 얻었고, 일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삶의 지침이 되었다.
 
 
  미군 상사의 도움으로 미국유학
 
  1951년 11월 12일, 칼 파워스 상사가 사준 408달러짜리 배표를 들고 미국에서 부산으로 보급품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칼 파워스 상사는 근무연장 기간이 12월 8일에 끝나기 때문에 나 혼자 가야 했다.
 
  뱃고동이 울리고 배가 떠날 때 너무나도 설레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줄여 입은 미군 군복 가슴에 마중 나올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이름표를 달고 옷 안쪽에는 어머니가 주신 부적 두 장이 들어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불안감이 밀려왔으나 곧이어 멀미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틀 동안 속이 뒤집힐 만큼 토하고 나서야 서서히 기운을 차렸다.
 
  12월 23일 드디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금문교 위로 석양이 물들어 있었다. 배가 서서히 항구에 닿았을 때 건물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휘황찬란한 전등불을 보자 드디어 미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미국에 와서야 칼 파워스 상사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버지니아주(州) 단테시(市)에서 한참 들어가는 산중에 그의 집이 있었다. 칼 파워스 씨도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입장이건만 나를 버지니아주의 공립학교가 아닌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한국에서 나를 어느 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을지 동료들에게 알아보던 중에 “밥 존스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을 잘 돌본다”는 말에 학비가 비싼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까지 칼 파워스 씨도 나도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기독교재단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내가 먼저 기독교인이 되었고, 나의 전도를 받아 칼 파워스 씨도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는 칼 파워스 씨가 힘든 상황에서 나를 위해 희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8년 동안 칼 파워스 씨는 변함없이 나를 지원해 주었다. 방학을 맞아 칼 파워스의 집으로 가면 가족이 모두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8월 8일에 학교 후배인 트루디와 결혼했다. 트루디는 사촌오빠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실 때문에 한국에서 온 나에게 호감을 가져 사귀게 되었다. 장모님은 우리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면 차별을 받게 된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밥 존스 대학 총장이 “빌리 김은 내가 보장하는 청년”이라고 추천하자 마음을 바꾸어 우리의 결혼을 허락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칼 파워스는 내가 미국인과 결혼하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봐 은근히 걱정했다. 내가 미국에서 배운 것을 활용하여 한국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 중에 한국으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보다 더 가난한 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트루디와 함께 1959년 1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의 큰 교회에서 나를 초청했지만 나는 수원으로 돌아가서 청소년들을 전도하는 일에 힘썼다. 전쟁 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피폐한 고향 수원에서 청년들의 꿈을 키워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올해 85세인 칼 파워스 상사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면서 한국의 빌리를 도왔듯 고향의 청소년들을 도우며 살았다.
 
  2000년 7월 5일 나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제19대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에 취임했다. 전 세계 1억6000만명의 대표가 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칼 파워스 상사였다.
 
  한국교회는 올해 6월 22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를 개최한다. 특별히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강사로 참여하여 자유에 대한 강연을 할 예정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반도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나지 않고 우리나라가 번영할 수 있도록 늘 기도하며 산다.⊙
 
  <정리=李根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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