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彛赫 서울대 의과대 명예교수(전 문교부 장관)
⊙ 1923년 출생. 서울대 의과대 학장, 서울대학교병원장, 서울대 총장, 한국교원대 총장,
문교부·보건사회부·환경처 장관, 성균관대 이사장 등 역임.
⊙ 現 서울대 의과대 명예교수,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1947년 8월,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한 나는 위생학교실(現 예방학교실) 조교를 신청했다. 연구실에 들어가 무급(無給)으로 교수를 돕는 자리인데, 그 일을 2년 해야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사실상 교수의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1923년 출생. 서울대 의과대 학장, 서울대학교병원장, 서울대 총장, 한국교원대 총장,
문교부·보건사회부·환경처 장관, 성균관대 이사장 등 역임.
⊙ 現 서울대 의과대 명예교수,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총재.
1년을 그렇게 지내자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농대 수의학부에서 전임강사 제의가 왔다. 의과대에서 옮겨간 1년 선배 이규명씨는 “월급도 못 받으면서 그러고 있지 말고, 수의학부로 오면 전임강사에 월급도 탈 수 있다”며 나를 설득했다. 이근태(李根台) 학부장도 나를 세 번이나 찾아와 수의학부로 올 것을 제안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 괜찮은 조건이라 생각하며 의과대학을 그만두고 수의학부로 옮겼다. 그리고 일주일 후, 이근태 학부장이 농림부 축산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교무과장을 지내던 김용필(金容弼) 선생이 학부장이 됐고, 그는 내게 공석인 교무과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당황한 나는 “새파랗게 젊은 데다 여기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할 사람이 없으니, 그냥 하라”고 했다. 수의학부로 가자마자 전임강사에 교무과장이 된 나는 1년 반 동안 수의위생학을 가르쳤다. 서울대 수의학부 1회 졸업생이 첫 제자들인데, 대다수가 수원의 고등농림학교를 나온 학생들이라 수의학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았다. 또 나는 수의학뿐 아니라 교양과목으로 철학 강의도 했다. 참 희한했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은 소중한 추억이다. 그런 중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27일에 군부대 위문 간다 하니, “정신 있는 사람이냐”
6월 25일은 일요일이라 나는 고향인 김포에 있었다. 저녁이 돼 서울로 가려는데, 육군 중령 한 명이 서울로 간다는 이야기를 누군가 전하며 같이 지프를 타고 가라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함께 탄 후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중령은 처가(妻家)가 김포여서 놀러 왔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얼마간 달려 김포비행장 가까이 왔다. 멀리 헌병 열댓 명이 보였다. 차를 세운 헌병은 중령에게 “전쟁이 터졌다”고 했고, 그 소식을 처음 전해 들은 중령은 내게 “부대로 가니 여기부턴 선생 혼자서 가야 한다”며 떠났다.
나는 ‘무슨 일이 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단 근처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병이 중령에게 말한 ‘전쟁’이 3년 동안 온 국토를 피폐하게 만들며 200만여 명의 사망자와 1000만 이산가족을 불러올 비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 당시 나름 고급장교였던 육군중령이 저녁이 돼서야 소식을 들은 것을 보면, 6·25는 정말 남한이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전쟁임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에 와서 전쟁 소식을 자세히 전해 들은 나는 그제야 뭔가 큰일이 터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할지 몰라 일단 제일 가까운 사람인 김용필 선생을 찾아갔다. 그는 정말 점잖은 학자였다. “일단 같이 여기서 고생 좀 하자”며 안심을 시켜줬다. 27일까지 이틀간 학교에서 함께 지냈다.
라디오에선 “국군이 진격하고 있으니 시민들은 안심하고 자리를 지키라”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육성 방송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27일 아침에 전선(戰線) 장병들에게 위문을 가라는 공문이 학교로 왔다. 상황 파악이 제대로 안 됐지만, 일단 국립대 교무과장으로서 국가의 명령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생 7~8명을 데리고 의정부 군부대로 향했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는데, 육군 중위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장병 위문을 가는 길이라고 답했더니, 그는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며 당장 돌아가라고 했다.
장석윤 치안국장의 南下 목격
학교로 다시 돌아와 학부장인 김용필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는 전세가 자꾸 밀리는 것 같다며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시내에서 인민군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때 서울 명륜동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고, 장인어른은 을지로6가에서 ‘경성서비스’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수리공장이었다. 일단 어르신들의 안부를 살펴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으로 갔더니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장석윤(張錫潤) 치안국장(후에 내무부장관)이었다.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전략정보국) 출신으로 당시 한국 정보 분야의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깜짝 놀라 서 있는 나를 불러 “중앙청 앞에 가서 지프가 한 대 있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중앙청까지 달려갔다. 가서 보니 지프가 마침 한 대 서 있었다. 서둘러 돌아와 그에게 알려줬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장인어른에게 베잠방이 옷에다 기름칠을 해달라고 했다. 남하(南下)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반인들은 피란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내려가느냐고 물었더니 광나루 쪽으로 간다고 했다. “그러면 광나루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니 “요즘 같은 시기엔 무조건 혼자 다녀야 한다”며 떠났다. 그날이 6월 28일이었고, 그 후로 한동안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날의 사연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에서야 듣게 됐다. 내무부장관 시절 만난 그는 6·25가 터지자마자 중앙청 건물을 지켰는데, 정말 한심하고 답답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군인들은 뭐 하는지도 모르겠고, 대통령 신변은 극도로 위험해져 자신이 일단 대통령을 피란시켰다고 한다. 자신은 서울에 남아 후속조치를 하려고 하는데, “한국의 치안국장을 중앙청 앞에서 사살했다”라는 첩보보고가 들어왔다.
자신과 부하가 큰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안 그는 27일 밤 34명의 경찰관을 이끌고 이태원 맞은편 야산에 들어가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새벽이 돼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부하들에게 “이젠 헤어져야 한다. 각자 흩어지고, 절대로 2명 이상이 함께 행동하지 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며 모두 해산시켰다. 그리고 바로 을지로6가에 있는 경성서비스로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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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협동단사건에 관련된 동문들이 1947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찍은 사진. 필자는 협동단에서 항일운동 중 평남 ‘사인장’이란 곳에 피신했는데, 그 인연으로 납북 중 사인장에서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첫째줄 왼쪽 두 번째가 필자) |
서울대 교수 등 70여 명과 함께 拉北
나는 3개월 동안 서울에 있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세월이었다. 수차례 김포로 피란을 가려고 마음먹었지만,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점령과 수복을 반복할 정도로 격전지가 됐다는 말에 포기했다.
그러던 중 인민군 사병 10여 명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곳저곳을 뒤지던 그들 중 한 명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손을 펴보라고 했다. 손을 보여주자 그는 “이 사람은 노동을 안 했군”이라며 핀잔을 줬다. 나는 차고 있던 시계를 빼서 줬고, 그는 아무 일 없는 듯 돌아섰다. 그들은 거의 매일 집집이 몰려다니면서 시비를 걸거나 사람을 데려갔고, 그때마다 무언가 값진 것을 주면 그냥 돌아갔다. 한번은 명륜동 근방에서 사람들과 붙잡혀 갔다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인민반 반장 비슷한 것을 하고 있어 그를 통해 빠져나오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앉아 상황 파악을 해봤다. 돈도 없고 야단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도 학교에는 가끔 나가 김용필 선생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는 머지않아 미군이 들어올 것이라며 낙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비밀방송을 몰래 들어서 안다”고 했다.
김포에서 살던 시절 개를 키웠던 나는 개고기를 먹지 못했다. 명륜동 처가에는 셰퍼드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내가 아주 좋아했고 그놈도 나를 잘 따랐다. 하루는 장인어른이 동네 사람들과 상의한 후 셰퍼드를 잡았다. 먹을 것이 떨어져 굶주리다 마지못해 내린 결정이었다. 배고픔에 지쳐 있던 나도 한 그릇을 먹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개고기 식사였다. 60년이 지난 요즘도 길에서 셰퍼드를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렇게 나날을 보내던 8월 어느 날 인민군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생리학과의 김형록(金炯祿) 교수와 나를 잡더니 일단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서울대 총장 관저였다. 이미 70여 명이 잡혀 있었다. 눈에 익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이종수(李鍾洙) 사범대 교수, 이한기(李漢基) 법대 교수(후에 국무총리) 등 선배 교수들이 곳곳에 있었다. 나중에서야 북한이 사회 지도층 또는 엘리트들을 강제로 데려간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땐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평양 도착 직전 탈출… 산속 헤매다 한 달 넘겨 귀경
인민군은 70여 명을 데리고 밤에만 이동했다. 낮에는 공습의 위험이 있어 건물에 들어가 쉬고, 밤이 되면 기나긴 행렬로 움직였다. 양옆의 인민군은 계속 우리를 감시했다. 어두운 때만 걸었기 때문에 제대로 속도가 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평양 쪽으로 가는 것만은 확실했다.
내 옆에 함께 가던 사람은 꽤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김씨라고 소개한 그는 철도 관련 일을 했다며 매일 밤마다 “이곳은 어디쯤”이라고 귀띔을 해 줬다. 며칠을 걷자 평양 가까이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씨는 그곳을 사인장(舍人場)이라고 알려줬다.
일제강점기 때 나는 대한협동당에서 항일(抗日)운동을 하다 쫓긴 적이 있다. 의학부 학생 시절 11명이 가담했는데, 6명은 붙잡혔고 나를 포함한 5명은 도망쳐 8개월을 숨어지냈다. 사인장이란 말을 듣고 주변을 둘러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근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누워 있다가 일어난 나는 김형록 교수에게 “나는 조금 있다가 변소에 가는 척하고 도망칠 것이니 생각이 있으면 따라오라”고 하고선 어둠을 타 무리를 뛰쳐나왔다. 뒤를 보니 김 교수도 어느새 따라오고 있었다. 서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는데, 산속 길이라 방향과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무작정 걸어 산속을 헤맸다.
밤에 멀리 불빛이 보여 뛰어가니 작은 오막살이였다. 노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전쟁이 난 것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우리를 보더니 “배가 고프지 않으냐”고 물었고, 우리는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왜 도망 다니는지, 어디로 가는지는 전혀 묻지 않았다.
밥을 얻어먹고 나선 다시 움직였다. 산속을 한 2주일 동안 헤맸는데, 중간에 북으로 도망가는 인민군도 종종 보였다. 아마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후의 일인 것 같지만,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인기척만 보이면 무조건 숨었고, 사람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10월 초가 돼서야 우리는 귀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후엔 집과 친척집을 전전했다. 한번 납치를 경험한 학교엔 다시 갈 수가 없었다. 혼자 힘들고 외롭게 시간을 보내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갔다. 장인어른의 공장에서 준비한 버스 2대에 온 가족이 나눠 타고 이동했다. 장인어른은 고향인 충남 공주에서 먼저 내렸고, 나머지 가족은 내가 이끌고 갔다.
타이프 한 장 쳐 주며 “홍천 美 9군단으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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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서울대 학회에 군복을 입고 참석한 동기생들. (첫째줄 왼쪽 세 번째가 필자) |
한동안 부산 초량동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고단한 피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루는 4년 선배인 한범석씨를 우연히 만났다. 내가 1학년 시절 생리학 실습을 할 때 그는 실습조교였다. 머리가 아주 좋아 광복 직후 미(美)군정청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보건행정을 배운 후 한국으로 돌아와 유엔민사처(UNCAC) 보건과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는 그의 안부에 나는 “이렇게 된 판에 뭘 할 수 있겠느냐”며 “그냥 슬슬 지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미(美) 9군단이란 곳에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기도 잘 모른다고 했다. 일단 가보고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오라고 했다. 6·25 당시 한국 방위를 수도권은 미 해병대, 서부는 미 1군단, 중부는 미 9군단, 동부는 미 10군단이 맡았다. 한씨가 말한 미 9군단 민사처는 강원도에 있었다.
아무래도 군대에 가야지 하는 마음이 있던 차에 그런 얘기를 듣고선 그의 사무실에 일단 따라갔다. 그는 타이프를 한 장 쳐 주며 “이걸 가지고 홍천에 가면 된다”고 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특별 인가가 필요했는데, 타이프친 서류면 어디서든 다 통하던 시절이었다. 일단 군복과 군모를 구해서 아무 차나 얻어 타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계급이 없는 군복을 구해 입고 서울 청량리행 열차에 올랐다. 청량리에선 군용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더니 바로 태워줬다.
홍천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처음 온 곳인데다 어둡기까지 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가을바람이 꽤 쌀쌀해 일단 어디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멀리 등잔불이 보였다. 한 오막살이에 갔더니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더니, “자는 건 괜찮은데, 아침에 먹을 게 없다”고 했다. 나는 잠만 자면 된다고 하고 방에 들어가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아침이 돼 깨보니 할머니가 조밥에 고추장을 조금 찍어서 상을 차려줬다. 얼마나 맛이 좋았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너무 고마워서 지금으로 치면 한 만원쯤 되는 돈을 줬다. 그러자 “이런 큰돈은 처음 만져본다”며 눈물을 흘렸다.
미 9군단 민사처를 찾기 위해 홍천 시내로 나왔다. 전쟁 중이라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침 흑인 병사가 지나가기에 준비한 서류를 보여주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민사처가 홍천에서 춘천으로 이동했다고 알려줬다. 나는 다시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어야 했다.
“당신이 오늘부터 이 병원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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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9군단 민사처 병원장 시절의 필자. |
몇 차례 차를 갈아타며 물어물어 민사처에 도착했다. 춘천여고 자리에 있었는데, 당시 처장인 라우리 중령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는 “잘 왔다”며 실무자인 아이비(Ivy) 소령이 곧 오니 그의 지시대로 하라고 했다.
잠시 후 도착한 아이비 소령은 나를 지프에 태워 가평에 데려갔다. “왜 가평으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병원본부는 춘천에 있고, 그 산하 진료소 두 곳이 각각 청평과 가평에 있다고 했다. 당시 가평 진료소의 정원이 의사 1명, 간호사 1명, 약사 1명, 식모 2명이었다. 가보니까 의사 빼곤 다 있었다.
위생학과 수의위생학을 전공한 나는 임상을 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나이 든 간호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냥 걱정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그리고 2달 동안 그곳에서 의사 노릇을 했다. 민사처 병원은 원래 민간인을 위한 곳인데, 전쟁 중이라 아무래도 군인이 많이 왔다. 일단 환자가 오면 진단을 하는 척만 했고, 경험이 많은 간호사가 와서 모르핀을 찔러주는 게 전부였다.
2달 후 아이비 소령이 다시 찾아와 처장이 부른다며 춘천으로 데려갔다. 라우리 처장은 갑자기 “당신이 오늘부터 이 병원 원장이다”라고 했다. 뭘 잘못 생각하는 것 같아 “나는 임상을 몰라 진찰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진료가 아닌 병원행정을 하면 된다며 병원장직을 맡겼다. 그때부터 나는 3년 동안 원장을 했다. 1952년에 포천으로 병원을 옮겼고, 임상을 몰랐던 나는 고광욱(高光昱) 교수 등 이름 있는 선·후배 교수들을 많이 불러모았다.
하루는 병원 훈련 중 후퇴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식(式) 교육을 받은 내 사고방식으론 후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식 교육은 무조건 자결(自決)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참 괴상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9군단장인 젠킨스 중장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름 가까운 사이였던 나는 “왜 도망가는 연습을 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단장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부하의 생명을 지켜내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건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지면 일단 후퇴해서 사람이 살아야 한다. 물러서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군단장인 나의 책임이다. 병원장인 당신도 환자를 후송해 생명을 지켜야 한다.”
스펠먼 추기경에게 받은 엑스레이 기계 기증식날 도둑맞아
그때 나는 미국인의 생각이 이전까지 내가 겪었던 생각이나 철학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명이 최우선인 미국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전쟁 중에도 민간인을 위한 병원부터 지었고, 바로 그 민사처 병원에서 내가 원장으로 있었던 것이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이뤄져 공식적인 전쟁은 마무리됐지만, 내가 근무하던 강원도는 계속 전시와 다름없었다. 포탄이 오가는 곳에서 우리는 휴전된 줄도 모른 채 계속 근무를 했다.
하루는 군단장이 나를 불렀다. 군단장실에 가니 점잖은 사람이 한 명 있었고, 인사를 시켜줬다. 뉴욕 교구의 대주교인 스펠먼(Spellman) 추기경이었다. 군단장이 쩔쩔맬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다. 그는 내게 “병원에서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엑스레이 기계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했고, 얼마 후 그는 1만 달러를 보내왔다.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군단 의무부장 던롭(Dunlop) 대령에게 의뢰해 일본제 엑스레이를 사왔다. 큰 기계를 들이기 위해 병원 문을 헐어냈고, 엑스레이 기계를 설치한 후 다시 문을 만들었다.
공식 기증식을 하는 날 아침, 병원을 한 바퀴 돌고 있는데 수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는 큰일 났다며 엑스레이 기계가 없어졌다고 소리쳤다. 행사 시각은 다가오는데 야단이 난 것이다. 던롭 대령에게 달려가 기계가 없어졌다고 했는데, 그는 “농담이 심하다”며 웃었다. 그를 현장에 데려가 보여주니 그제야 사단이 난 것을 실감했다. 군단장이 도착하기 20분 전의 일이었다.
잠시 후 군단장 헬기가 도착했고, 바로 달려가 엑스레이가 없어졌다고 보고했다. 큰 징계를 받을 줄 알았는데, 그들의 반응이 참 희한했다. 군단장도, 던롭 대령도 일단 걱정하지 말라며,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더 크고 좋은 중고품을 구해와 실제로 설치해 줬다. 경기도 경찰이 사흘 동안 인력을 총동원해 샅샅이 수색했지만, 엑스레이의 행방은 묘연했다. 아마 엑스레이 기계를 잘 아는 전문 절도단이 분해 후 훔쳐간 것으로 짐작됐다.
최고권위 美 자유훈장 받고 미국 유학 떠나
1953년 9월, 미군 중령이 대위와 함께 와선 “닥터 권이 누구냐”라고 물었다. 내가 닥터 권이라고 하자, 잠깐 앉으라고 하고선 종이를 꺼내 심문을 시작했다. 학교, 가족관계, 아내 이력, 취미 등 시시콜콜한 것까지 캐물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줄 수 없다”며 계속 질문만 했다. 다음 날 군단장을 찾아가 “내가 뭔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며 웃어넘겼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한 반년이 흘러 하루는 헌병 대위가 찾아왔다. 나는 속으로 ‘날 잡으러 왔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지프 내 상석에 앉히고 군단장에게 데려갔다. 군단장은 “반년 전 조사받은 일이 기억나느냐”며 그 결정이 나서 불렀다고 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묻자 “죄가 아니라 훈장을 주기 위해 신원조회를 한 것”이라고 했다. 사흘 후 나는 미국대통령이 수여하는 민간인 최고 훈장인 미국자유훈장을 받게 됐다.
훈장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일도 할 만큼 한 것 같아 군단장에게 서울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얘기했다. 군단장은 “이곳에 있는 동안 공부를 못 했으니, 좀 충전을 하고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며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1955년 9월, 그들의 도움으로 미네소타 대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잊을 수 없는 은인들이다.
전쟁의 비극은 아프고 비참했지만, 꽤 많은 이에겐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나는 덕분에 휴전 후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고, 보다 넓은 영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다시 한 번 조국에 감사함을 느끼고,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정리=金正友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