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元植 전 국무총리
⊙ 1928년 출생. 북한 해주동중,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졸업. 미국 조지피바디대 대학원 심리학
석사·교육심리학 박사.
⊙ 서울대 사범대 학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역임.
“어디에 있든 죽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 1928년 출생. 북한 해주동중,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졸업. 미국 조지피바디대 대학원 심리학
석사·교육심리학 박사.
⊙ 서울대 사범대 학장, 문교부 장관,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역임.
1950년 6월 26일 오후 5시,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서울대 교정에서 나를 포함한 8명의 동급생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서울사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우리는 김기섭 교수의 철학 강의를 막 듣고 나온 참이었다. 학생들이 떠난 교정은 폭풍 전야처럼 적막했고, 대학로 거리는 전쟁 소식으로 어수선했다.
그날 저녁 간단하게 피란 보따리를 꾸렸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나는 당시 서울 효창동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지내고 있었다. 식구들이 모두 이북에 있었기에 홀로 피란을 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 재종사촌 형님이 충남 공주에 피란처를 미리 마련해 주어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이튿날 오후 서울역에서 마지막 피란 열차를 타고 충남 천안까지 갔다. 전쟁의 서곡을 알리듯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폭우를 피해 천안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공주로 향했다. 하루 종일 빗속을 걸어 도착한 곳은 공주군 신풍면 마량리. 이곳에서 석 달 동안 피란 생활을 했다.
그해 9월 서울 수복 소식을 듣고 상경, 복교했다. 생환을 약속했던 친구 8명 중 2명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북 출신이었던 두 친구의 소식은 휴전 후에도 끝내 듣지 못했다.
1·4 후퇴 직후 통역장교로 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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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직전인 1949년 12월 서울대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맨 오른쪽은 이영덕 전 총리다. |
이듬해 1월, 나는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통역장교 시험을 치르고 군에 입대했다. 일주일 동안의 속성훈련을 받고 장교 임관과 동시에 배치된 곳은 광주 상무대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였다. 통역장교로 임관한 내가 보병학교에 배치된 것은 대학 전공(교육학) 때문이었다.
장교 전담 군사학교인 보병학교에는 당시 학술학과 전술학과 화기학과 등 3개의 병과가 있었고, 6·25 발발과 함께 부족한 장교를 확충하기 위해 갑종(甲種)장교를 대거 배출하고 있었다. 갑종장교는 고졸 이상의 학력자를 선발해 6개월 동안 훈련시킨 후 소위로 임관하게 한 일시적 제도였다. 사관학교를 거치지 않고도 장교가 되는 코스였다.
전시 상황에서도 복장, 구령, 화기(火器) 다루기는 물론 정신 무장까지 우리 군의 교육은 철저했다. 모델이 미국 군대였기에 장교 중 일부를 선발해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보병학교에서 처음 1년 동안 한 일은 미군의 교본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 군에는 교본이 없어서 미군의 교본을 번역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 일을 내가 맡게 된 것이다.
교본 번역과 편찬 업무에 익숙해질 무렵 학술과로 가라는 사령장을 받았다. 학술과에서는 군대 교육법과 독도법을 담당했다. 6개월 만에 소위 계급장을 다는 갑종장교들의 구호는 ‘나를 따르라’였다. 스무 살 안팎의 젊은 그들은 훈련이 끝나는 대로 전선에 투입됐고, 구호대로 맨 앞에 서서 사병들을 지휘하다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져 갔다. 보병학교에서 배출한 갑종장교의 60%가 전선에서 목숨을 잃었다. 교육을 담당하며 특별히 가까워진 몇 명의 갑종장교들이 출전하기 전 나를 찾아와 “우리 내일 전선으로 떠나는데, 아마 정 중위를 두 번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겠다”라고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는 판문점에서 양측 대표의 휴전 회담이 진행된 기간이다. 6월 장마만큼이나 지루하기만 했던 이 기간 동안 우리 군은 38선 일대에서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당시 5만이던 병력을 50만으로 늘리는 확군에 힘썼다. 전국에서 징집된 수천 명의 청년이 논산훈련소와 보충대에 입소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신병을 대상으로 한 병과 분류가 매우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 아무런 근거 없이 1번에서 100번까지는 포병, 100번부터 200번까지는 공병, 하는 식으로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고려치 않고 입소하는 순서대로 분류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나는 ‘군에서도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살려준다면 군사력 보강에 상당히 도움이 될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급 장교이기에 품고만 있던 이 생각이 우리 군의 인사 관리 시스템으로 정착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우리 군의 병과 분류 시스템인 군대 자력검사 개발자가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보병학교 교장과의 우연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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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보병학교 시절 교장으로 있던 정래혁 전 국방부 장관. |
보병학교 시절 나는 광주 시내 동명동이라는 곳에서 거주했다. 이 동네에는 작은 이발소가 하나 있었는데, 어느 일요일 이곳에 갔다가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이발을 마치고 상의를 입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면도를 하고 있던 사람이 “귀관은 어느 부서에 있지?” 하고 절도 있는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얼굴을 보니 보병학교 정래혁(丁來赫) 교장이었다. 그는 내 옷에 부착돼 있는 보병학교 마크를 보고 있었다. 내가 “학술과에 있는 정 중위입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아침에 어떻게 출근하지?” 하고 물었다. 당시 나는 학교 통근 트럭을 타고 다니고 있었다. 그런 내게 정 교장은 “그래, 그럼 아침에 내 차를 타고 나와 함께 출근하는 것이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명령이나 다름없는 제안이었기에 그 자리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동명동에서 보병학교까지는 차로 20여 분 거리였다. 다음 날부터 정 교장 차에 동석하게 된 나는 20여 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화제가 우리 군의 발전에 관한 것이었기에 어느 날 인사 관리에 관한 내 의견을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당시 내가 제시한 의견은 이랬다.
“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교육을 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병들의 적성을 생각하지 않고 병과를 분류하는 것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보충대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병과를 분류하는 것은 너무 비과학적이에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성을 판별할 수 있는 심리검사가 필요합니다.”
묵묵히 내 말을 경청하고 있던 교장은 “AGCT(Army General Classicfication Test) 말이오”라며 “미국 참모대학에서 공부할 때 AGCT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정 교장이 AGCT를 알다니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었다.
AGCT는 미 육군이 2차대전 때 군의 인사관리를 위해 사용한 심리검사이다. 나는 이 분야의 지식을 다소나마 가지고 있었다. 입대하기 전 대학에서 관련 서적을 읽은 덕분이다. 세계1차대전 당시 미국은 100만명 이상을 징집했다. 그런데 그들의 능력이 천차만별이어서 교육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미국 심리학회에 위탁해 심리 검사를 제작했다. AGCT는 이 검사를 기초로 탄생시킨 것이었다.
내 설명을 다 들은 교장은 “내일 시간을 내서 교장실로 오라”고 했고, 다음 날 교장실에 찾아가자 “우리 군도 한국판 AGCT를 가져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나는 학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학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교장은 1년 동안의 서울대 출장을 허락했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심리검사 제작에 관한 보고서를 완성했다. 더불어 대학 졸업에 필요한 학점까지 이수했다.
하급 장교로 육군참모 회의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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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가 한창이던 1950년 9월 고무신에 바지 저고리를 착용한 신병들이 훈련소에서 목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
나의 출장복명서를 받아본 보병학교 정 교장은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는 “이 일은 육군본부에 보고해야 할 일이니 내일이라도 육본에 가서 보고하라”며 육본 인사국장 앞으로 서신을 한 통 써 주었다.
당시 육본은 대구에 있었다. 일개 육군 중위가 육본 인사국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육본에 가 면회를 신청했으나 부관이 오전 중에는 면회가 어려우니 오후에 와 보라고 했다. 오후 1시부터 저녁 무렵까지 면회 대기실에서 기다렸지만 들어오라는 연락은 없었다. 어깨에 별을 단 장성들은 기다리는 일 없이 즉각 면회가 됐다. 하급 장교의 서러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정 중위가 누구야?” 면서 인사국장이 대기실로 나왔다. 그제야 정 교장이 써준 서신을 본 모양이었다.
방으로 안내된 나는 인사국장으로부터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었다. 그는 “앞으로 우리 군에 필요한 심리검사의 제작을 위해 모든 편의와 도움을 주겠다”면서 “빠른 시일 안에 육군참모회의에서 브리핑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의 짧은 준비 기간을 거쳐 마침내 육군참모회의에 참석했다. 초급장교가 장성들 앞에서 브리핑하는 일은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 이상의 전문가가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 있게 설명해 나갔다. 브리핑은 성공적이었다. 신병들의 적성을 가리는 검사의 필요성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몇몇 장성들은 앞으로 잘해 보라는 격려와 함께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육본에서의 브리핑 후 육본 고급부관실에는 인사연구계라는 새로운 직제가 생겼고, 나는 보병학교에서 육본으로 전속됐다. 검사 제작을 총괄하게 된 내게는 필요한 인력을 차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우선 장교 2명과 사병 10명을 예하부대에서 차출했다. 인력이 차출되고 사무실도 준비되었으나 막상 검사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백지나 다름없었다. 새로 공부를 해야 할 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당시 고급부관실 고문관이던 롱 대령과 의논했다. 미8군 고급부관과 절친한 사이였던 그는 이 분야에 조예가 있는 미8군 7사단의 불레이즈델이라는 장교를 소개해 주었다. 불레이즈델 중위는 미8군 장교 중 유일하게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전방부대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그는 본부로 전속된 것을 무척 좋아했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금방 파악했다.
불레이즈델 중위는 우선 미국에 관련 도서들을 주문했다. 한 달 후 도착한 책들은 심리 측정과 검사 제작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우리는 이 책들을 숙독한 후 AGCT의 기본인 언어 요인, 수리 요인, 공간 요인을 기본 토대로 우리 실정에 맞는 검사문항을 작성했다.
한국군 최초의 심리 검사 시행
그리고 예비 검사지를 인쇄해 논산훈련소에서 신병을 대상으로 실험에 들어갔다. 문항 분석을 위한 예비검사는 5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하면 충분했으나 부대 단위로 실시하다 보니 2만여 명이 됐다. 그렇게 많은 인원을 대상으로 검사를 실시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육본의 지시에 따라 협조가 잘되었다. 그래도 꼬박 일주일이 소요됐다.
예비검사 후 문항 분석을 위해 통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주판을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인원을 100명 정도 동원한다 해도 6개월은 족히 걸릴 만한 일거리였다. 할 수 없이 미8군에 도움을 청하자 고성능 IBM 계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을 뿐 아니라 사무실까지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검사제작 착수 2년 만에 규준(norm)까지 마칠 수 있었다. 완성된 검사는 여러 사람이 의논한 결과 ‘군대자력검사’라고 명명했다. 이로써 한국군 최초의 심리 검사가 탄생했다.
육본에서는 이 검사를 어떻게 시행하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깊이 있는 논의가 있었다. 징병 검사 시에 적용할 수도 있고, 또 신병훈련소에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검사의 규준 작성을 위한 최종검사에서 한 가지 부수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한글을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는 신병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실 광복 후에 문맹퇴치를 위한 거국적인 노력이 있었지만 1950년대 초만 해도 상당수의 문맹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골 구석구석에서 징집된 병사들이다 보니 문맹률이 더욱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벅머리에 바지저고리를 입은 시골 청년들을 수도 없이 봤다.
검사 결과 신병의 30% 정도는 한글을 깨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 말을 모르는 신병에게 기본 훈련을 시킨다는 건 무리였다. 더구나 화기를 다루거나 운전 교육을 시킨다는 것은 위험할뿐더러 비효율적이었다. 이런 점을 감안해 입대하는 신병에게 군대 자력검사를 시행한 후 일정한 점수를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6개월 동안의 한글 교육부터 실시하도록 건의했다.
이 건의사항은 육군의 인사 방침으로 채택돼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신병에게 즉시 검사를 적용하기로 했다. 그 결과 신병의 30%가 한글 교육을 별도로 받을 기회를 얻었다. 말하자면 군대자력검사는 신병들의 적성 판정 외에 문맹자를 가려내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 셈이다.
군대 자력검사가 완성될 즈음 제대 통보장이 날아들었다. 이미 휴전은 됐지만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제대 연한이 없어서 6, 7년씩 복무하는 이가 많았다. 내 경우 대학 재학 중 입대한 것인데, 그 무렵 국회에서 ‘학교 다니다 입대한 학생들은 제대를 시켜 학업을 계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덕분에 “대학 재학 중 입대한 군인은 제대시키라”는 국방장관의 특별 지시가 떨어졌고, 전역자 명단에 당시 대위였던 내 이름도 끼였다. 1955년 5월 4년여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우리 군의 발전에 기여한 자부심 가져
전시 상황에 입대해 4년여간 복무했지만 나는 전투에 참여할 기회를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 적과 마주친 적도 없다. 어쩌다 제대한 동료들을 만나면 참혹했던 전선에서 적과 싸운 경험을 훈장처럼 늘어놓곤 한다. 그럴 때마다 총을 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함구할 따름이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군대 자력검사를 만든 것은 우리 군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몇몇 친구들도 이런 내 마음을 알고 “군대 자력검사를 만든 건 일선에서 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고 치켜세워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시 상황에서, 그것도 하급 장교의 제안을 받아들인 우리 군은 상당히 발전 지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유연한 조직이 아니었나 싶다. 일개 하급 장교의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운 직제를 하루아침에 만들었으니 말이다.
6·25 전쟁 직후 우리 군은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다. 5만에 불과했던 군이 짧은 시일 안에 50만으로 확군됐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확군 과정에서 내적인 변화와 발전 지향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군은 커진 몸집을 스스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 소개한 군대자력검사 제작은 확군 과정에서 있어야 할 내적 개선과 발전 지향적인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선에서 싸워본 경험은 없으나 우리 군의 발전을 위해 작은 보탬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은 나로서는 무척 자랑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들은 나의 군 생활이 무척이나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운명으로 돌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 군이 과감한 개혁을 할 수 있는 용이성, 즉 레디네스(readiness)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군의 가능성이며 우리 군을 이끌고 있는 중추세력의 자질이었다.
출근길 지프차 안에서 초급장교의 제안을 경청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해 준 보병학교 정래혁 교장의 사려 깊은 지원이 있었기에 군대 자력검사는 빛을 보게 되었다. 그 고마운 마음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그리고 검사 제작을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해 준 육군본부 인사국장, 이 검사가 탄생하기까지 함께 노력한 동료들에게도 정중한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군이 발전을 거듭할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준 초석들이다.⊙
<정리=徐喆仁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