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春和 전 삼성석유화학 사장
⊙ 1927년 출생. 육군사관학교, 국방대학원 졸업.
⊙ 통신학교 교장, 육군본부 통신감, 합동참모본부 초대 통신전자국장,
(주)한국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주)삼성석유화학 사장,
(주)제일합섬 사장, (주)중앙개발(에버랜드) 사장, 조선호텔 사장 역임.
“따르르릉 , 따르르릉.”⊙ 1927년 출생. 육군사관학교, 국방대학원 졸업.
⊙ 통신학교 교장, 육군본부 통신감, 합동참모본부 초대 통신전자국장,
(주)한국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 사장, (주)삼성석유화학 사장,
(주)제일합섬 사장, (주)중앙개발(에버랜드) 사장, 조선호텔 사장 역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모처럼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사령부와 직접 연결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일상적인 이상 유무 보고겠지’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는데 비상소집 명령이었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왔다는 것이었다. 그즈음은 38선에서 북한의 도발이 잦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령부로 달려갔다. 그런데 사령부 분위기가 여느 때와 달리 긴박했다. 단순한 도발이 아님을 직감했다. 북한이 전차를 앞세워 38선을 넘어 남침한 사실이 공표됐다.
육사7기(후반) 출신인 나는 6·25 당시 수도사단의 전신인 수도경비사령부 통신부장 겸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령부는 서울 삼각지 육군본부 부근에 위치해 있었고, 사단장은 송요찬(宋堯讚) 장군이었다.
적의 전차공격에 대응할 대포조차 없던 아군 전선은 힘없이 무너졌다. 처음 맞는 전차 공격에 놀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후퇴하기 바빴다. 서울은 순식간에 대혼란에 빠졌다.
어머니를 적지에 남기고 홀로 남하
전선이 무너지고 전방 부대가 후퇴하자 통신망도 두절됐다. 당시 군의 주요 통신 방식은 전선에 연결된 전화기로 직접 상대 부대와 통화하는 것이었다. 적의 포탄이 떨어지거나 전차와 차량의 이동으로 단선된 곳이 많다 보니 전방 부대와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전방 예하부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운전병과 함께 전방으로 향했다. 서울 시내는 피란민 행렬과 군 작전 차량이 뒤엉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교통 혼란 속을 뚫고 종로통을 겨우 빠져나와 의정부 방향으로 길을 잡았지만 일부 전방 부대의 후퇴로 더 이상 전진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귀대해 보니 사령부가 이미 후방으로 이동한 후였다.
한강철교가 폭파된 상황이라 사령부를 쫓아갈 길이 막연했다. 빠르게 머리를 굴려 일단 유일한 한강 도하(渡河) 가능 지점인 서빙고 쪽으로 가기로 했다. 지체할 겨를 없이 스리쿼터를 몰아 서빙고에 가 보니 강변에 작은 보트가 한 척 있었다. 배에 오르려는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났다. 당시 어머니는 삼각지 부근의 적산가옥에서 나와 단 둘이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위로 형님이 세 분이나 있었지만 막내인 내가 미혼인 관계로 나를 돌봐줄 겸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차를 몰아 삼각지 집에 도착했지만 어머니는 “다 늙어서 무슨 피란이냐, 나는 집에 남아 살림을 지키겠다”며 극구 마다했다. 결국 적지가 된 서울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홀로 강을 건넜다. 이 길이 어머니와 영원히 이별하는 길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솟구쳤다. ‘대구에 사는 큰형님 댁에 그대로 사시게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우리 사령부는 영등포(당시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읍)에 위치한 조선맥주 공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녁이 돼 인근 야산에 올라가 보니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을 미군 폭격기들이 무차별 폭격하고 있었다.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낙오병으로 농가 짚더미 속에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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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투 중 5사단 부대원들을 격려하러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악수하고 있는 이가 필자다. |
아군은 한강을 방어선으로 적의 남하를 저지하려 사력을 다했지만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경기도 시흥까지 내주고 말았다. 미군기의 폭격만이 유일한 반격인 가운데 전방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또다시 전령으로 나섰다. 전선에 배치돼 있던 예하부대는 이미 후퇴하고 없었다. 귀대해 보니 이번에도 사령부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였고, 부하 사병 3명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과 함께 사령부를 뒤따라 후퇴하기로 작전을 짰다. 적군이 이미 모든 도로를 점령한 상태라 차량 이동은 불가능했다.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논과 밭을 횡단하기로 했다.
우리 일행이 (경기도)광주로 연결된 도로를 약 30m 정도 지났을 때 한 사병이 “중대장님, 저쪽에 군인이 오고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1개 소대 병력 정도의 군인이 우리 쪽을 향해 이동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아군들이 후퇴하는 것으로 알고 다가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우리 쪽으로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아군이 아니라 인민군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쪽에 있는 야산을 향해 뛰면서 적의 공격을 분산시키기 위해 제각기 흩어졌다.
사람이 본능에 가장 충실할 때는 절체절명의 위기 때일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육사 시절에 배운 지형지물을 이용한 포복으로 적탄을 피했다. 인민군 소총이 자동이 아니어서 한 번 쏜 후 재사격을 하기 위해서는 2~3초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 틈에 뛰었다가 다시 포복을 하는 방법으로 적진을 탈출해 작은 언덕을 넘었다. 인민군의 기습으로 나는 ‘적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면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을 하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언덕을 넘어 낮은 포복 자세로 전진하는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불과 5~6cm 앞으로 총알이 날아가 땅에 박혔다. 그 순간 ‘천우신조로 적탄을 피했으니 만일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흙에 박힌 적탄이 기념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땅에 박힌 탄환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어 포기했다.
인민군이 우리를 모두 사살한 것으로 판단했는지 얼마 후 사위가 조용해졌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펴보니 인민군은 물론 나와 함께했던 사병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빈 농가의 헛간에 쌓인 짚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숨을 죽인 채 몇 시간을 있었다. 소변도 옷을 입은 채로 봤다.
발에 피가 나도록 걷고 또 걷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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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통신단장 시절 송요찬 장군으로부터 모범부대 표창을 수상하고 있는 필자.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희미하게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꼬마 하나가 도망치는 닭을 잡겠다고 헛간으로 뛰어들어 왔다. 그러곤 헛간 안에서 푸드득거리는 닭과 일전을 벌이다 짚더미 속 내 옆구리를 밟았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낙오한 국군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면 당장 인민군에게 신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꼬마가 닭을 몰아 헛간을 빠져나간 후에도 오랜 시간 숨을 죽인 채 꼼짝하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 그러다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보니 캄캄한 밤이었다. 예상대로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잠시 마루에 앉아 발의 무좀 상태를 살펴볼 요량으로 군화를 벗었다. 바로 그때 키 큰 사내 하나가 불쑥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집 주인인 듯싶었다. 그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우선 목이 마르니 물 한 바가지만 달라”고 부탁했다. 사내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당 한편에 있는 우물을 가리키며 “직접 떠먹으라”고 말했다. 사내는 내가 두레박질을 하는 틈에 신고하러 갈 태세였다. 할 수 없이 권총을 들이대며 물을 떠오라고 했고, 사내가 떠다 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그 순간 사내가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렸다. 나 역시 두레박을 내동댕이치고 군화도 신지 않은 채 인근 야산으로 도망쳤다. 날카로운 아카시아 그루터기와 가시덤불에 찔리고 긁힌 발과 다리가 쓰리고 아팠지만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어둠 속 어디선가 인민군이 총을 들이댈 것 같아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렇게 조그만 야산을 하나 넘고 나니 발바닥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손으로 만져 보니 수없이 긁히고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군복 바지 밑단을 소리 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물어뜯어 도려낸 후 붕대처럼 발에 칭칭 감았다. 그러곤 북두칠성을 좌표 삼아 남쪽으로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시야가 어두워 논두렁에 빠지기도 하고, 아카시아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찔리기도 했다.
그렇게 밤새 걷다 보니 멀리서 야광탄 소리와 총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가니 천안으로 가는 국도가 나타났고, 자동차와 군부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하지만 칠흑 같은 밤이라 아군인지 적군인지 도무지 식별할 수가 없었다. 우선 날이 밝아 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근처 빈 농가 마당에 있는 두엄자리에 몸을 숨겼다. 갖가지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밤새 걸은 피로에 지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1시간쯤 잤을까. 인기척 소리에 깨어 보니 농가 주인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전시에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무섭다는 걸 몸으로 체험한 나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두엄자리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걸어갔다. 우기(雨期)라 성긴 빗방울이 온몸을 적셨다. 낙오자 신세가 된 처량함에 빗물과 함께 눈물이 한없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단신으로 남하한 나는 마침내 천안에서 기적처럼 부대와 합류했다. 부대 참모들은 전령으로 나간 내가 전사(戰死)하거나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지 몹시 반가워했다. 개중에는 낙오한 것을 책망하기도 했다.
북진 중 평양에서 조카 잃어
천안에서 합류한 부대는 적진에 밀려 청주까지 후퇴한 데 이어 경북 안강에 이르러서야 작전을 펴게 됐다. 그 전까지는 이렇다 할 작전 없이 적군에 밀려 계속 후퇴하고 있을 뿐이었다. 안강에서부터는 새로 부임한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지휘했다.
김석원 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용장(勇將)이었다. 그는 부대를 철저한 작전에 따라 이동시켜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게 했다. 김 장군의 사단 지휘는 전 부대원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분 덕에 나는 용장 밑에 졸장이 없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김 장군의 후임으로 사단장에 부임한 B장군은 역대 사단장 중에서 그 지휘 능력과 신망을 받지 못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자신이 왜 수도사단장에 부임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 때문에 부임 며칠 만에 송요찬 장군으로 교체됐다. 그는 후임 사단장에 별다른 인수인계를 하지 않고 사단을 떠났다. 그 바람에 후임 사단장이 적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가운데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1950년 9월 3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우리는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민군이 사단 본부를 유격전으로 기습 공격했다. 용감하고 지휘 능력이 뛰어난 송 장군이었지만 사단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우리 부대는 논밭을 횡단하는 야간 이동으로 경주까지 후퇴했다. 이곳에서 부대를 정돈한 사단은 유엔군의 적극적인 참전으로 더 이상 밀리지 않게 됐다. 또한 낙동강을 교두보로 아군과 함께 전선을 폈다.
이 무렵 나는 큰형님의 아들인 조카 우락(愚洛)이 경주에 군속으로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했다. 나이가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아 내게는 친구 같은 조카였다. 그는 6·25 발발과 동시에 자진해서 현역이 아닌 군속 자격으로 입대해 경주에 있던 한 부대의 수송부 차량정비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수소문해 어렵게 조카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조카에게 우리 부대에서 함께 지내자고 권했다. 조카로서는 현역이 아닌 군속이라 어디에 속하든 상관없었다. 그런데도 착실한 성격의 조카는 우선 부대에 가서 상관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귀대했다. 그날 이후 조카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면서 부대가 이동해 버렸기 때문이다. 훗날 전해 들은 소식에 따르면 조카는 북진 작전 중 평양 부근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경주에서 만났을 때 강제로라도 우리 부대에 잡아 두었어야 했다. 큰형님의 외아들이자 집안의 대를 이을 장조카를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뼈에 사무친다.
그해 9월 15일 아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우리 수도사단은 반격 명령을 받고 북진의 선봉 부대가 됐다.
우리는 하루에 100리 이상을 강행군하며 진격에 진격을 거듭, 오합지졸이 된 인민군을 뒤쫓았다. 속도가 너무 빨라 통신망 구축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처음에는 전방 부대와 함께 전진하며 야전선(野電線)을 가설했는데, 부대 이동 속도가 너무 빨라 신설 통신선이 무용지물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해 도로상의 기존 전기선과 민간 전화선을 최대한 활용, 기존선의 단절된 부분만 야전선으로 재연결하는 방법을 고안해 통신망을 신속하게 구축했다.
인민재판 중 “대한민국 만세” 부른 어머니
서울 수복과 함께 어머니 소식이 궁금해 집으로 달려갔다. 천만 다행히도 어머니는 무사했다. 하지만 그동안 겪은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인민군이 육군본부를 점령했을 당시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동네에 남아 있던 주민 몇몇은 붉은 완장을 차고 양민들을 괴롭히며 북한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들은 우리 집 옆에 있던 절집 마당에 인민재판소를 차렸다. 아들이 국군 장교라는 이유로 어머니도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됐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재판이 진행됐는데, 재판이 끝날 무렵 인민군이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했다. 어머니는 무의식중에 “대한민국 만세!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쳤다. 조용했던 재판장이 순식간에 웅성거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동네 주민들이 놀라서 “저 노인네가 아들이 전쟁터에 나가 생사를 모르니까 실성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덕분에 재판은 중단됐고, 어머니는 죽음을 면했다고 한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어머니를 더 이상 홀로 서울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설득해 대구에 있는 큰형님 댁으로 모셨다. 그러곤 북진 중이던 부대에 합류했다.
내가 소속된 수도사단은 동해안 전선을 따라 38선을 돌파해 원산, 함흥을 공략하고 청진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주요 도시에서 후퇴하면서 선량한 주민을 반동분자로 몰아 총살하거나 생매장하는 방법으로 처참하게 살해했다. 우리가 가는 도시마다 양민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우리 부대는 시체를 수습해 땅에 묻어 주곤 했는데, 한번은 시체 속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발견해 구출해 주기도 했다.
청진을 점령한 우리 사단은 감격에 겨워 압록강의 물을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다. 한반도 통일이 목전에 와 있었다. 하지만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전세는 또다시 역전됐다. 우리는 함흥항에서 철수선을 타고 속초항에 도착, 간성 일대의 동해안 방어선에 배치됐다.
전시 중 막간을 이용해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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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중이던 1951년 1월 대구에서 아내 유임선과 결혼했다. 이후 신혼살림을 전방에서 꾸렸다. |
사단 사령부가 진부령에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 여인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전쟁이 나기 전 지인의 소개로 몇 번 데이트를 했고, 이성 상대로 호감을 갖고 있던 여인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뜯어 보니 이 여인의 감정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결국 이 편지가 계기가 돼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10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2남7녀의 딸부잣집 셋째딸인 아내는 일본 도쿄에서 여학교를 나온 현모양처형 여인이었다. 아내의 큰오빠가 후일 합참의장과 주미 대사를 지낸 유병현(柳炳賢) 장군이다.
아내와 결혼할 무렵 나는 부산에 새로 창설된 교육총감부의 창설요원인 통신부장(소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6·25 발발과 함께 전선에 투입된 지 1년3개월 만에 후방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1952년 3월 나는 불과 9개월간의 후방 근무를 마치고 다시 전방 부대인 5사단 통신참모로 발령을 받았다. 결혼한 지 5개월째 되는 시기였다.
당시는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던 때라 서로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으로 전투가 보통 때보다 더욱 치열했다. 우리 5사단이 위치한 강원도 간성은 피의 351고지가 전투의 주목표 지점이었다. 낮에는 아군이 장악하고 있다가 밤에 적의 공격이 치열하면 우선 넘겨주어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그야말로 주야로 주인이 바뀌는 격전지였다. 이런 치열한 전투에서는 통신 선로가 공격의 주요 목표가 돼 단절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유선 통신선을 적 포탄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 철도 레일의 하부에 통신선을 가설함으로써 전선이 보호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공로로 사단장 표창을 받았다. 당시 5사단장은 김종갑(金鍾甲) 장군이었고, 인사참모는 후에 포항제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박태준(朴泰俊) 소령이었다.
5사단 시절을 떠올리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아내와의 비밀 동거생활이다. 결혼한 지 불과 5개월여밖에 되지 않은 나는 아내를 근무지인 최일선 지역 부대 근처에 있는 민가로 데려왔다. 그러곤 비밀스런 신혼생활을 이어 갔다.
아내는 가급적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삼가야 하는 처지라 감옥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방에서 나와 하늘의 별을 보면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좋았고, 전선에서 보낸 6개월 동안의 신혼생활을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장남도 이때 잉태됐다.
한국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던 1953년 1월부터 9월까지는 새로 창설된 21보병사단 통신참모로 근무했다.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을 상징화한 21사단 마크는 내 작품이기도 하다.
21사단 시절에도 우리 부부는 사단 부근인 강원도 양양의 민가에 살림집을 얻어 함께 살았다. 물론 사단장에게는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사단장이 우리가 집을 얻어 사는 농가에 예고 없이 방문했다.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던 우리 부부는 몹시 당황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는 기지를 발휘해 짧은 시간에 술상을 봤고, 정성껏 대접했다. 알고 보니 사단장은 처남인 유병현 장군과 동향이었고, 아내에 대해서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야전지역에 차린 우리의 신혼살림을 인정하는 셈이 됐다.
24년 군 생활 육군 소장으로 마감
휴전 후인 1953년 봄, 나는 전투 훈련 중 천막 속에서 틈틈이 익힌 영어 실력으로 미국 유학시험에 합격했다. 그해 8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저지에 있는 미 육군통신학교(Fort Monmouth)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귀국 후 나는 3군단 통신참모를 지냈고, 육군대학교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1군사령부 비서실장, 제1통신단 단장, 육군본부 통신감, 합동참모본부 초대 통신전자국장 등을 거쳐 197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24년 동안의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후 나는 국가 연구 기관과 국내 굴지의 기업에서 CEO로 근무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훈장도 받았다. 능력에 비해 과분한 삶을 누려온 셈이다.
6·25를 떠올리면 전방 부대에서 통신선을 가설하다 적의 총탄에 쓰러져 간 부하 병사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유명을 달리한 그들의 은덕으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에 늘 감사하며 사는 요즈음이다.⊙
<정리=徐喆仁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