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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閔丙敦] 내 총에 죽은 적군의 눈빛, 지금도 잊히지 않아

의용군 끌려갈 뻔했으나, ‘빨갱이’ 선생이 빼돌려 모면
적에게 포로 됐다가 하루 만에 탈출하면서 팔에 부상
나는 비겁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著者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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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丙敦 전 육군사관학교장·예비역 육군중장
⊙ 1935년 출생. 육사(15기) 졸업.
⊙ 공수특전여단장, 제20사단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육군사관학교장 역임. 예비역 육군중장.
    現 경민대 석좌교수.
  <월간조선으로부터 6·25 체험담을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참을 망설였다. 6·25 당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남에게 내세울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부끄러운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6·25 때 겪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첫 번째 부끄러운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예비역 육군 장성이고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우익(右翼)집회에 연사로 나섰던 내가 6·25 때 인민군 의용군으로 나갈 뻔했다는 사실이다.
 
  6·25가 터졌을 때 나는 휘문중학교(당시 6년제) 3학년 1학기 재학 중이었다. 학교에 나갔더니, 3학년 담임선생님 세 명이 운동장에 있는 설립자 민영휘(閔泳徽)의 동상 앞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드러나지 않았던 좌익 교사들이었다. 6·25 당일은 정상적으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빨갱이 선생 도움으로 의용군 면해
 
  다음 날부터는 가끔 학교에 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다가 돌아오곤 했다. 7월 초 어느 날 학교에 나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평소 낯익은 규율부 선배들과는 다른, 낯선 선배들이 완장을 차고 여기저기 서 있었다. 그들이 6·25가 일어나던 날 모여서 수군대던 3학년 선생님들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고, 그 선생님들이 ‘빨갱이’였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들은 학교에 모인 학생들을 학급별로 교실에 들어가게 했다. 우리 반 교실에는 7~8명의 학생이 모였다.
 
  완장을 찬 선배들이 들어와서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가르쳤다. 이어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영용한 인민군이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는데, 미군이 싸움을 걸어왔다. 인민군 전사(戰士)들이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우리도 잠시 펜을 놓고 총을 들자. 힘을 모아 미제(美帝)와 싸우자.”
 
  그들은 학생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나가서 미제와 맞서 싸울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안 들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선배들은 “하나, 둘, 셋…. 음, 모두 지원했군. 좋다”고 말했다. 그들은 “잠시 후 청계국민학교로 이동한다. 집에는 우리가 통지하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그때 옆 반 담임이었던 민영철 선생님이 “병돈아!”라며 나를 불렀다. 그는 평소에도 나를 같은 민씨라며 각별히 아껴 주시던 분이었다. 그는 수첩에 뭔가를 적는 시늉을 하더니, 수첩을 한 장 찢어서 내게 내밀었다.
 
  “병돈아, 심부름 좀 해야겠다. 이걸 전하도록 해라.”
 
  나를 의용군에서 빼 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선생님이나 선배 모두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는 그 길로 도망을 쳤다. ‘빨갱이’ 민 선생이 나를 구해 주지 않았으면, 나는 이름 없는 인민군 전사로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戰死)했을지도 모른다.
 
 
  학도의용군 입대
 
  그로부터 3개월 뒤, 포격과 폭격으로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되고 난 후, 서울이 수복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북진(北進)했다. 이대로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통일의 꿈은 사라졌다. 가두방송 차량이 거리를 누비면서 “청년들이여, 총을 들어라!”고 호소했다. 공산치하에서 3개월을 겪은 터라 ‘또다시 공산당에게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12월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대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군부대들이 직접 병력을 모집했다. 군인들이 학교 등을 찾아와 “여러분, 우리는 1사단 15연대에서 나왔습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하면서 병력을 모집하는 식이었다.
 
  보름 정도 실탄사격과 수류탄투척 훈련을 받고, 그해 12월도 다 갈 무렵 경기도 파주 법원리에 있는 제1사단 15연대 1대대에 배속됐다.
 
  자대에 배속되자 하사관(지금의 부사관)들은 직속상관의 이름부터 가르쳤다.
 
  사단장 백선엽(白善燁) 준장, 연대장 김안일(金安一·육사2기) 대령, 대대장 유재성(육사5기) 중령….
 
  그런 걸 뭐하러 가르치나 싶었다. 하사관들은 “적과 혼전(混戰)이 벌어졌을 때,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암구호를 사용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소리를 듣고 적이 암구호를 알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너희 연대장 누구야?” “너희 대대장 누구야?” 하는 식으로 직속상관의 이름을 묻는 것이 유용하다는 얘기였다. 아마 지금 군대생활을 하는 병사들은 직속상관의 관등성명을 암기하도록 하는 것이 이런 필요에 의해서라는 것을 잘 모를 것이다.
 
  자대에 배속된 첫날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실전 경험이 많은 하사관들은 “아무래도 빠질 것 같다(후퇴할 것 같다)”면서 우리에게 배불리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라고 했다. 하사관들은 우리에게 동서남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 산봉우리를 잘 봐라. 저쪽이 북쪽이다. 저쪽으로 가면 동두천과 전곡이 나온다.”
 
  “저쪽이 남쪽이다. 그리로 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나온다.”
 
 
  중공군에게 포위되다
 
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중앙청에서 춤을 추고 있다.

  한밤중에 이동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는 경기도 양주 덕정리 북방으로 이동했다. 체구가 작은 나는 카빈소총에 15발들이 탄창 등에 150발의 탄약을 휴대하고 있었다. 덕정리에 도착한 후 고단해서 한잠 자고 일어났다. 능선 위로 올라갔더니 맞은편 능선 위에 중공군들이 앉아서 이를 잡고 있었다. 서로 빤히 보면서 총을 쏘지 않다니….
 
  하사관에게 “왜 총을 쏘지 않습니까? 다 쓸어버릴 수 있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하사관은 “총은 마음대로 쏘는 게 아니다. 다 위의 통제에 따라서 쏴야 할 때 쏘는 거다”라고 했다.
 
  저녁을 일찍 먹었다. 남은 밥과 찬으로는 일본어로 ‘니기리’라고 하던 주먹밥을 만들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밤 10시경, 총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예광탄(曳光彈)이 터졌다. 남쪽인 의정부 쪽에서 터지는 예광탄은 아군이 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사관 한 명이 외쳤다.
 
  “포위당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젠 끝장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에 힘이 쑥 빠지면서 쓰러질 뻔했다. 부대는 공황(恐慌)상태에 빠졌다. 어디로 총을 쏴야 할지도 모르면서 총을 쏘려 하는데, 하사관이 제지했다.
 
  “함부로 총을 쏘지 마라. 눈앞에 적이 나타나면, 그놈만 쏴라.”
 
  그날 밤의 암구호는 ‘총’ 과 ‘칼’이었다. 하지만 하사관들은 암구호를 사용하지 말고, 피아를 확인하려면 직속상관 이름을 물어보라고 했다.
 
  얼마 후 우리 부대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정신없이 총을 쏘면서 달렸다. 난 얼마 안 쏘았다고 생각했는데, 한숨 돌리고 나서 보니 탄알이 몇 발 안 남아 있었다. ‘큰일 났다’ 싶어 분대장을 불렀다.
 
  “분대장님, 총알이 다 떨어졌습니다.”
 
  분대장은 내 따귀를 갈겼다.
 
  “바보 같은 자식! 총알을 아껴 써야지, 다 써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그는 15발들이 탄창을 하나 주면서 “아껴 쓰라”고 했다.
 
 
  용감한 하사관들
 
1사단장 백선엽 준장(가운데).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나왔나 싶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정보과장 한인성 대위가 권총과 지도(상황도)를 막사에 두고 나온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한 대위는 낙동강 전선에서 가슴에 관통상을 입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후유증 때문에 모르핀을 맞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도 그는 술을 먹고 잠들었다. 하사관 한 명과 당번병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끌고 후퇴했는데, 한참 뒤에야 권총과 지도를 두고 나온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권총은 그렇다 쳐도 아군의 병력배치 상황 등이 담긴 지도를 적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지휘관이 “누가 돌아가서 한 대위의 권총과 지도를 가져오겠는가”라고 물었다. 하사(지금의 상병) 두 명이 서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보는 순간, “아, 군인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그들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되돌아가 한 대위의 권총과 지도를 찾아 가지고 무사히 돌아왔다.
 
  당시 하사관들은 정말 용감하게 싸웠다. 그때 하사관이라야 국민학교(초등학교)나 제대로 나왔을까? 나는 지금도 “6·25는 촌놈과 이북 출신들이 치렀다”고 말하곤 한다. 그때 누가 이념이 뭔지 알았을까? 막연하게 ‘민주주의는 좋은 것, 공산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끌려 나온 ‘촌놈’들은 ‘가서 죽으라’고 하면 죽는 우직함으로, 이북 출신들은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싸웠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내가 보았던 그들 같은 용감한 하사관은 도처에 있었다. 그때의 국민과 지금의 국민은 다른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었지만, ‘나라에서 하라는 것은 목숨 걸고 하는’ 시절이었다.
 
 
  영등포에서
 
  우리는 의정부 남쪽에 도착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우리보다 더 아래까지 진출해 있었다. 고참 하사관들도 “이렇게 많은 군대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느냐?”고 했다.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중공군은 산하(山河)를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남쪽을 향해 이동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의 군대생활은 적군을 향해 용감하게 돌격하는 게 아니라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는 것으로 시작된 셈이다. 우리는 서울 아현동 뒷산에 잠시 주둔했다가 1월 3일경 한강을 건넜다.
 
  영등포에서는 2~3일 정도 머물렀다. 앞에 있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적과 사생결단을 하고 싸우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대대는 예비대로 영등포 시가지 쪽에 배치됐다. 모처럼 세수도 하고 발도 씻었다.
 
  어떤 빈집에 들어가 보니, 비었는데도 뜨뜻했다. 솥을 열어 보니 밥이 많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주인이 피란을 가면서 뒤에 오는 피란민을 위해 일부러 남겨 놓고 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밥을 먹고 난 후, 더러운 손으로 남은 반찬을 가지고 주먹밥을 만들어 군복 주머니에 넣었다. 방 안에 들어갔다가 옷장에서 내복을 발견했다. 추위에 떨던 참에 잘되었다 싶어, 속에 내복을 여러 벌 껴입었다. 살 것 같았다.
 
 
  거듭되는 후퇴
 
  다시 후퇴가 시작됐다. 수원까지 내려가는 길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피란민으로 가득했다. 멀리서 볼 땐 개미떼 같던 그들의 모습은 가까이에서 보니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이불을 짊어지고, 아이를 끌어안고, 환자를 들것에 싣고 터벅터벅 남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며칠 안 가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텐데, 저럴 바에는 집에서 죽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쟁 때는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힘들다’는 생각도 들었다. 군인은 위험하기는 하지만,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된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가족에 매여 있었다.
 
  때때로 유엔군 비행기들이 나타나 기총소사(機銃掃射)를 했다. 피란민 행렬이건, 국군 행렬이건 가릴 것이 없었다. 그때는 “저놈들은 눈깔도 없나?”면서 이를 갈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들을 욕할 일도 아니었다. 중공군과 인민군은 민가에서 민간인 옷을 빼앗아 입거나, 그게 아니면 이불보나 광목을 구해 뒤집어써서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피란민 행렬을 바짝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오탄(적진을 향해 발사했지만, 날아가는 도중에 떨어지는 폭탄)도 피란민들을 위협했다. 그놈의 낙오탄은 왜 꼭 피란민 행렬에만 떨어지는지….
 
  기총소사나 낙오탄이 떨어진 후에는 곳곳에서 부상자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부상자들을 보면서 ‘저걸 어째…’라며 안타까워하던 피란민들은 잠시 후에는 다시 발길을 옮겨야 했다.
 
  1월 5~6일경 수원을 지나 25일경 안성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는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훈련을 받았다. 백선엽 사단장의 얼굴을 처음 본 것도 안성에서였다. 철모에 별 하나를 붙인 백 사단장은 “잘해”라고 말하며 우리를 둘러보았다. 덕장(德將)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훗날 백선엽 장군을 뵈었을 때, 그때 얘기를 했더니 백 장군은 크게 반가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보니 어찌나 꼬마들이 많이 있던지…. ‘얘들이 여기 있을 애들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적 포탄이 떨어지면 ‘고맙다’는 생각 들어
 
  2월 말 정신교육이 있었다.
 
  “이제 반격이다. 우리가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 때문에 아깝게 후퇴했지만, 이제 우리는 다시 북진한다.”
 
  백선엽 사단장이 친히 나서서 군장(軍裝)검사를 했다. 다음 날부터 북진이 시작됐다. 안성을 출발해 2~3일 후 수원에 도착하기까지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수원 모락산에서 발목이 잡혔다. 모락산을 놓고 일주일 동안 혈전(血戰)이 벌어졌다.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 우리 1사단 외에 미군과 영국군 병력도 전투에 참가했다.
 
  고지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모른다. 고지에 거의 다 도달했다가 적에게 밀려 내려오기도 했고, 고지를 점령했다가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고지를 오르다가 발에 무엇인가 밟혔다. 놀라서 보니 검은 얼굴의 미군 시체였다. 시체 가운데는 중공군도, 인민군도, 국군도, 영국군도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에서는 하사관들이 앙칼진 목소리로 연방 “앞으로!”를 외쳐댔다. 그래도 안 올라가면 뒤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그 목소리와 총알 때문에 정말이지 억지로 올라갔다.
 
  전쟁영화에서 보면 병사들이 “와~” 하고 외치며 고지로 달려 올라간다. 그건 사실과 다르다. 병사들은 사기충천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은 고지로 달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 올라간다. 그것도 마지못해서….
 
  때때로 적진에서 포탄이 날아오면 바닥에 엎드렸다. 적의 포탄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시라도 우리에게 엎드릴 수 있게 해 주니까…. 포탄이 그치면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봤다. 그러면 뒤에서 욕설이 날아왔다.
 
  “개새끼들아, 빨리 앞으로 올라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려 해도 죽어 넘어진 시체를 보면, 혹은 발끝에 시체가 채면, 앞으로 나아갈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도 앞으로 나가야 했다.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돌격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쏘면서 나아갔다.
 
 
  손드는 적병을 사살
 
  눈앞에 적병이 나타났다. 그가 총을 든 채 두 손을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가 쓰러졌다.
 
  전투가 끝났다. 괴로웠다. 내 총에 죽은 적병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항복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조금만 침착했다면, 그를 쏘지 않았을 텐데….’
 
  괴로워하는 내게 하사관 한 명이 말을 걸었다.
 
  - 괴롭지? 그럴 거다. 몇 명이나 죽인 것 같으냐?
 
  “다섯 명 정도 죽인 것 같습니다.”
 
  - 아냐. 너만 총을 쐈느냐? 옆에서도 쏘고, 뒤에서도 총알이 날아오는데, 그놈들은 그 총알에 맞아 죽었을 거다. 네 손에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안될 거다.
 
  그게 위로가 됐다. 자꾸만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처음 전투에 나선 내 총에 누가 맞았겠어? 내가 쏜 총에 죽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 죄책감도 그때뿐이었다. 다시 전투가 시작되고, 고지를 점령한 후에 주위를 살펴보면 옆에 있던 전우(戰友)가 안 보였다. 그러면 눈이 뒤집히고, 악이 받쳤다.
 
  고지를 점령하고 난 후에는 ‘전장(戰場)정리’를 했다. 부상했거나 죽은 척하고 있는 적병들을 확인사살하는 것이었다. 쓰러져 있거나 호(壕)에 기대앉아 죽은 자 가운데 자세가 뭔가 이상한 자들이 있으면, 발로 툭툭 걷어차 본 후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죽은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적군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적’일 뿐이었다. 우리도 인간이 아니었다. 아침에 전투를 시작해 점심때쯤 전투를 끝내고 나면 모두 미친 사람 눈을 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인간의 눈빛으로 돌아오는 것은 저녁을 먹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러고 나면 부상한 적병들을 사살한 일이 후회가 됐다.
 
  ‘그때 후송시켰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포로가 되다
 
  1951년 3월 14일, 우리 연대의 일부 병력이 한강을 건넜다. 다음 날 우리도 보트로 한강을 건넜다. 누군가가 “저기 밤섬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대대 수색소대에 속해 있었다. 3월 15일, 우리는 부대의 선봉으로 수색을 거쳐 지금의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방향으로 진출했다. 마을에 있는 민가에서는 인기척은 나는데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논밭을 지나 지금의 통일로 옆 산으로 들어갔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6~7부 능선을 타고 은밀하게 들어갔어야 하는데 적이 보이지 않자 우리는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10부 능선을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갑자기 옆에 있던 동료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 능선에 인민군인지 중공군인지 모를 적군이 바글바글했다. 발이 얼어붙었다. 그런 우리를 보면서 적은 “야, 그냥 더 와. 더 와” 하고 외쳐댔다.
 
  선임하사가 “오던 방향으로 튀어!”라고 외쳤다. 우리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총알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적탄에 쓰러지거나 적에게 붙잡히는 동료들이 보였다. 총소리가 그치더니 “항복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항복할 수는 없었다. 적은 후퇴하는 중이었다. 진격하는 적보다 후퇴 중인 적에게 붙잡히면 죽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결국 나는 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순간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적은 총과 탄약을 빼앗았다. 내 앞에 선 적병이 왜 그렇게 커 보이는지…. 아마 공포심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그들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 전과(戰果)를 올려준 셈이니 그럴 만도 했다. 내 앞에 가는 적병은 내 총까지 총을 두 자루 메고서도 산길을 훨훨 날았다. 반면에 나는 한 걸음 옮기기도 힘들었다. 그는 가끔씩 돌아보면서 “빨리 오라우, 죽여줄까?”라고 이죽거렸다.
 
  적이 모여 있는 데 가서 보니 병력은 1개 중대가량, 인민군과 중공군의 혼성부대였다. 잠시 앉아 있는데, 배가 고팠다. 주머니에는 주먹밥이 있었지만, 그걸 꺼냈다가는 빼앗길 것 같아 참았다.
 
 
  탈출
 
  다음 날, 다시 산길로 끌려가는데 미군기가 나타났다. 미군기가 우리를 발견한 것 같지 않은데도 적군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그들은 “항공!”이라고 외치면서 흩어져서 엎드렸다. 낙동강에서 미군의 공습에 얼마나 당했으면 그랬을까? ‘이런 기회를 이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미군기가 나타났다. 적군은 다시 엎드렸다. 나를 끌고 가던 적군도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없었는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나는 살금살금 20m 정도 움직였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이젠 됐다’ 싶어서 냅다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놈이 튄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날아왔다.
 
  실수였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적에게서만 벗어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적은 사방에 있는 고지마다 있었다. 기관총탄이 내 앞에 떨어지면서 먼지가 풀썩풀썩 일었다.
 
  ‘앞으로는 못 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배트로 오른쪽 팔을 얻어맞는 듯한 충격이 왔다. 뻐근했다. 군복 안쪽에서 뜨듯한 액체가 흘렀다. 피였다. ‘내가 부상했다는 걸 알고 적이 따라오면 나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붙들고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적은 내가 수풀에 가려 안 보이면 사격을 멈추었다가, 내 모습이 보이면 다시 총을 쏘아댔다.
 
  신작로로 내려서자 나는 그대로 적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다시 총알이 쏟아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적군은 이미 도로로 내려와 쫓아오고 있었다. 다시 도로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앉은 자세로 가만히 이동해서 불광동의 어느 뒷산으로 들어갔다.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나서 살며시 보니 몇몇 적군이 나를 찾는 것이 보였다. 응급처치 요령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러닝셔츠를 찢어서 총에 맞은 부위를 묶었다.
 
  눈을 붙이려 했지만,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눈을 떴다. ‘적이 나를 못 찾았구나’ 싶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주머니에 주먹밥이 있는 게 생각났다. 돌덩이 같은 주먹밥을 꺼내, 물도 없이 조금씩 뜯어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눈을 뜨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의 눈에 뜨이면 큰일이다 싶었다.
 
 
  더운 물 마시고 나서야 입이 떨어져
 
  조금 높은 데 올라가서 보니 아군도, 적군도 보이지 않았다. 민가에서는 밥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민가로 갔다. 집 주인은 나를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 좀 달라”고 하는데, 기운이 없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쪽에서 “물이요?”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물을 가져왔다. 따뜻한 물이었다. 몸이 사르르 녹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한 물을 한 잔 더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입이 떨어졌다.
 
  “이 근처에 인민군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집주인은 그제야 내가 국군임을 안 듯했다. “국군이 있느냐?”고 했더니 역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다시 도로로 나가서 터벅터벅 걸었다. 한참을 걸으니 앞에 한 무리의 군인이 보였다. 국군이었다. 저쪽에서 외쳤다.
 
  - 누구냐?
 
  “나야.”
 
  저쪽에서 다시 물었다.
 
  - 누구냐?
 
  “나야.”
 
  수하(誰何)를 할 때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안 되는 것인데, 그때는 그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쪽에서 총을 쏘려는데, 장교 하나가 그를 제지하면서 소속을 물었다. “15연대”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15연대로 후송됐다.
 
 
  이종권 중사
 
  위생병은 까끌까끌한 솔이 달린 침에 붕대를 감아 내 상처부위에 찔러 넣었다. 침이 상처 부위를 관통해 반대쪽으로 나오자 그는 “뼈는 안 다치고 근육만 상했다. 관통상이다. 정말 잘됐다”면서 좋아했다. 만일 뼈에 총알을 맞았으면 팔을 완전히 못쓰게 될 뻔했다고 했다.
 
  붕대에 묻어 나온 피를 보니 누런색이었다. 벌써 상처가 곪기 시작한 것이다. 위생병은 상처 부위에 알코올을 부었다. 알코올이 반대방향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상처 부위에 머큐로크롬을 붓고 난 후, 붕대를 마개처럼 쑤셔 박았다. 그 위에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였다.
 
  며칠 동안 그런 식으로 치료를 반복했다. 보름쯤 지나자 속살이 차 오르기 시작했다. 위생병은 “이제 가렵기 시작할 거다. 절대로 긁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날 밤부터 팔이 가려워 오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다음 날 위생병을 찾아가 호소했더니 그는 “이제 다 나은 거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속살이 차오르더니 며칠 후 상처 부위에서 딱지가 떨어졌다. 이때 입은 부상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상처는 나았지만, 한동안 오른팔로는 무거운 것을 들 수 없었다. 오른팔에 멜빵을 하고 돌아다녔다. 하사관들이 나를 불렀다.
 
  - 꼬마, 많이 다쳤느냐?
 
  “관통상입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그러면 하사관들은 “다행이다”라면서 건빵이나 국산 레이션을 주면서 귀여워해 줬다.
 
  나를 귀여워해 주던 하사관 중에 분대장 이종권 일등중사(지금의 하사)가 있었다. 그는 전투에 나설 때면 늘 내게 “내 곁에 바싹 붙어라. 내 곁을 떠나지 마라”고 말하곤 했다. 나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각개약진을 하다가 그의 옆에 엎드렸을 때 보면, 그는 조금이라도 위험한 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를 위해 더 안전한 자리를 양보한 것이었다.
 
 
  生死의 갈림길
 
  6월 초 우리 부대는 임진강 부근 파주 월롱면까지 진격했다. 우리 수색소대에 위력정찰 명령이 떨어졌다. 적진에 침투해 적정(敵情)을 살피되, 자신의 존재를 어느 정도 노출해 적의 공격을 유도함으로써 적의 규모와 화력(火力)을 살펴보는 위험한 임무였다.
 
  강변에 배낭을 벗어 모아 놓고 강을 건너기 전, 분대장인 이 중사가 내게 “너는 아직 팔이 낫지 않았으니, 남아서 배낭을 지키고 있으라”고 했다. 그때 내 팔은 이미 다 나은 뒤였다. 이 사실은 부대원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나는 “팔은 다 나았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중사는 “넌 아직 낫지 않았다. 남아라”라고 했다. 내가 계속 고집을 부리자 그는 “그럼 이번에만 남아라. 다음번부터는 데려가 주마”라고 했다. 결국 나는 강변에 남았다.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3~4시간이 지났을까? 폭음과 총성이 들려왔다. 한참 후 위력정찰을 나갔던 대원들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왠지 기운이 없는 것 같았다. 분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물어보았다.
 
  - 분대장님은?
 
  “전사하셨어.”
 
  믿기지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실전을 치른 그는 ‘총알도 피해 가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 총알도 피해 가는 분인데, 어쩌다가….
 
  “총에 맞은 게 아니야. 지뢰를 밟으셨어.”
 
  순간 모골이 송연했다. 만일 나도 따라갔다면, 늘 그랬듯이 나는 이 중사 옆에 바짝 붙어 있었을 것이고, 나도 함께 죽었을 것이다. 이 중사가 내 목숨을 구한 것이다.
 
  만일 이 중사에게 가족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도 평생 그의 가족을 책임졌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출신인 그에게는 가족이 없었다. 북진했을 때 고향에 가 보니 가족이 모두 공산당에 몰살당했다고 했다.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으로 뭉친 그는 포로를 잡는 법이 없었다.
 
 
  나는 겁쟁이였다
 
  전쟁터에서 병사를 움직이는 힘은 바로 그런 적개심이었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 적에 대한 미움으로 눈앞에 보이는 적은 닥치는 대로 쏘아 죽였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라”고 했으면, 그들은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적개심도 적개심이지만, 나도 겁이 났다.
 
  수원 모락산에서만큼 혈전은 아니었지만, 임진강에서 전투를 하면서 정말 적을 많이 죽였다. 진지에 웅크리고 앉아 저항하지 못하는 적도 무수히 죽였다.
 
  그런 적과 눈이 마주친 적도 있었다. 겁에 질린 눈이었다.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쓰러진 적을 보니 내 또래였다. 순간 6·25 직후 학교에 갔다가 멋모르고 의용군에 나가겠다고 손을 들었던 생각이 났다.
 
  ‘저놈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저 애의 부모는 쟤가 여기서 이렇게 죽었다는 것을 알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늙어 가면서 그때 생각을 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돌이켜 보면 저항할 의사가 없는 자를 죽인 것은 적군을 사살한 것이 아니라 살인을 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병사의 겁 먹은 눈빛이 기억에 생생하다.
 
  전쟁 때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뿐이다. 나는 겁쟁이였다. 얼마나 겁이 많았으면 저항의지가 꺾인 적까지 쏘아 죽였을까?
 
  전쟁터에서 용감성을 발휘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남보다 겁이 적은 사람, 용감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은 다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겁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다. 나는 고지로 쳐 올라갈 때도 될 수 있으면 남의 뒤를 따라갔다. 그래서 살아남은 것이다.
 
 
  죽어 가는 소대장의 건빵
 
  부끄러운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한번은 소대장이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를 들것에 실어 옮기는데, 그의 군복바지 주머니(건빵주머니)에서 건빵 한 봉지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눈이 뒤집혔다. 나는 몰래 건빵을 집어 내 주머니에 넣었다. 소대장은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 그 소대장은 결국 이송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나는 남몰래 그 건빵을 먹었다. 함께 소대장을 날랐던 동료와도 나누지 않고 혼자서 그 건빵을 먹었다. 그도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을 텐데, 나 혼자서 먹은 것이다. 전우애(戰友愛)라고? 그런 건 생각지도 못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도 비겁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6·25에 대해 입을 다물고 살아왔다. ‘비겁했기 때문에 살아남았으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인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육사 시절 동기생들을 비롯해 군 시절 동료들 가운데도 내가 6·25 때 실전(實戰)을 치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에필로그
 
  위력정찰을 나갔던 이종권 중사가 죽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학도병들은 제대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게 1951년 6월 말이었다.
 
  서울로 돌아왔지만, 학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1952년 봄 학교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학제(學制)가 바뀌어 6년제였던 중학교는 3년제 중·고등학교로 나뉘어 있었다. 3학년 1학기를 다니다가 전쟁을 맞은 나는 정상적이라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있어야 했다.
 
  교장선생님은 내게 “중학교 3학년으로 복학하라”고 했다. 상급생에게 꼬박꼬박 거수경례를 하던 시절, 나는 동기들은 물론 1년 후배들에게도 경례를 붙여야 할 판이었다. 열불이 났다. 나는 “사지(死地)에서 싸우다 돌아왔는데, 2년이나 유급(留級)시키는 게 말이 되느냐? 고2로 복학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해 선생님들은 “유급시키는 게 아니다. 널 생각해서 하는 얘기다. 고2로 복학해도 중학교 3학년 1학기도 제대로 마치지 않은 너는 따라가기 어렵다”며 나를 달랬다. 나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내가 왜 살아 돌아와서 이 수모를 당해야 하나? 그냥 팍 전쟁터에서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결국 교장선생님은 고1로 복학시키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다른 선생님들은 난색을 표했지만, 교장선생님은 나처럼 학도병을 나갔다가 돌아온 학생들은 고1로 복학시킨 후 특별지도를 해서 실력을 향상시키기로 했다. 나도 못 이기는 척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6년제 휘문중학교 46회로 입학했지만, 졸업은 47회가 됐다.⊙
 
  <정리=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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