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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玄勝鍾] 열 살도 안 된 아들·딸에게 거짓말하게 한 6·25

공산당 피해, 2달 동안 지하에 갇혀 세상 못 봐
북으로 끌려가다 구사일생(九死一生)
거지 움막에서 자며 목숨 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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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勝鍾 전 국무총리
⊙ 1919년 출생.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경성제대 법학과 졸업.
⊙ 고려대 교수, 성균관대·한림대 총장,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제24대 국무총리.
  92세의 나이에 이제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해마다 더운 6월이면 60년 전을 잊을 수가 없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당시 32세의 나이에 고려대 법과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소문을 통해서 접했다. 하지만 솔직히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상당수의 남한 사람은 ‘공산군이 쉽게 38선 넘어오겠느냐, 우리 남한이 만만히 당하겠느냐’라는 생각을 했고, 나도 태평스럽게 화요일에 있을 수업 준비만 열심히 했다. 피란할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내 생각은 빗나갔다. 전쟁이 터진 지 사흘 뒤 나는 피란 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북한 공산군이 쫙 깔린 서울에서 2달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미 군정청에서 근무하다 4개월 만에 사표
 
  나는 1919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아버지 현기명(玄基明) 선생과 어머니 이경사(李敬娰) 여사의 5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이 네 분 있었는데 세 분은 일찍 돌아갔고, 바로 위 형님과 나, 이렇게 둘만 남았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의 형님인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됐다. 장손인 큰아버지가 대를 이을 후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강점기 큰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느라 만주에 있었다. 친아버지는 평안도 개천에 남아서 형님의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집안은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큰아버지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많이 고생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로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개천에서 평양으로 유학을 가 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유학해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혼자 서울로 와 여관방에 기거하면서 지금의 사법시험인 고등문관시험 준비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시험도 치르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하게 됐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게 되자 1946년 나는 미군정청(美軍政廳) 산하 물가행정처(物價行政處)에서 근무하게 됐다. 당시 미군정청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경험도 거의 없는 내가 과장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런데 나의 상관 중 한 명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 전문학교 출신인 그 사람은 경성제대를 나온 나를 질투했는지 모르지만, 자꾸 괴롭혔다. 결재서류를 아무런 이유 없이 돌려보내거나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하는 수없이 넉달 만에 사표를 쓰고 그만뒀다.
 
  나는 어려서부터 대학교수를 해보고 싶었다. 물가행정처 일을 그만둔 나는 마침 고려대에 자리를 알아봤다. 교수가 아닌 조교 자리를 원했다. 당시 나는 대학만 나왔고 그것도 전공 공부는 2년밖에 하지 않아 학문적 바탕이 없었다. 그런데 교수로 채용됐다. 마침 당시 고려대에는 교수가 부족했고 고려대 법과대학 학장 유진오(兪鎭午) 선생 등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대 법과대학 교수가 된 나는 그렇게 1950년 6월 25일을 맞이하게 됐다.
 
 
  고려대총장, 전쟁 중 학교 나와 3달 월급 미리 줘
 
玄相允 전 고려대 총장.

  앞서 말한 대로 나는 전쟁 소식을 곧바로 듣지 못했다. 소문만 듣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북한군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이틀 뒤에나 전쟁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6월 27일 화요일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지금의 성북구 돈암동 한성대 근처에 있던 내 집에서 쉬면서 강의 준비를 했다. 27일 아침이 되자 나는 평일처럼 안암동에 있던 고려대로 향했다.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전차를 타면 지금의 대학로 부근에 있던 서울대 사범대가 있던 자리에서 내렸고, 거기서 논둑길을 걸어서 고려대로 갔다. 그날은 달랐다. 논둑길이 피란민으로 가득 찼다. 농민들은 소를 끌고, 여자들은 광주리를 이고 논둑길을 걷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연구실에서 이들의 행렬을 보며 그때야 전쟁이 그냥 조그만 충돌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아찔했다.
 
  그 와중에 아직도 인상 깊었던 일 하나가 기억이 난다. 고위층 인사들은 이미 전쟁이 심각해져 가고 있는 것을 알고 한강 이남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럼에도 당시 고려대 총장이었던 현상윤(玄相允) 선생은 직접 걸어서 학교로 나왔다. 나 같은 젊은 교수들이 놀라서 “선생님 위험한데 어떻게 가시지 않고 여길 왜 나오십니까. 위험한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선생님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지목될 텐데 왜 나오셨습니까?”라고 말하니까 현 선생은 “전쟁 나서 생활이 어려운데, 내가 몇 달 월급이라도 미리 주고 피란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 여러분 버리고 나 모르겠다 하고 먼저 갈 수는 없다.”
 
  이렇게 해서 3개월 월급을 미리 주셨다. 그 뒤 스스로 걸어서 나가시다 상황이 긴박해지자 친구 집에 피신했다가 공산군에 발각돼 끌려갔다. 지금은 소공동 롯데백화점이 들어서 있는 자리에 당시 국립도서관이 있었는데 인민군은 그곳에 고려대에서 붙잡아 온 사람들은 모조리 가뒀다. 현 선생도 그곳으로 우선 갔다가 뒤에 북한으로 영원히 끌려갔다. 뒤에 들은 소문으로는 그곳 감시가 워낙 허술해서 얼마든지 도망을 갈 수 있었음에도 현 선생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어서 도망치느냐”라며 달아나지 않고 북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린애 3명과 피란 나섰다가 포기하고 돌아와
 
  현상윤 총장에게서 3개월치 월급을 받아 든 나도 피란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에서 곧바로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받은 월급은 수표였다. 거리는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은행으로 가서 3개월치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서 집으로 갔다. 당시 받아 든 돈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학교수 한 달 월급으로는 채 반달을 지내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내 아내가 거리에 나가 행상도 하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면 그리 큰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돈을 받아 든 나는 현재 돈암동 한성대 근처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약 66㎡(20여 평)짜리 조그만 한옥에 있던 내 두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에게 피란을 떠나야 한다며 준비를 시켰다. 시간이 촉박해 보따리에 돈과 이불, 그리고 간단한 옷가지를 쌌다. 지금은 어느덧 68세의 할머니가 된 당시 여덟 살이던 내 딸의 자그마한 손을 잡고, 두 살이던 둘째 아들은 업었다. 네 살이던 큰아들은 아내가 손을 잡고 다섯 식구가 한강을 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피란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포기하고 돌아섰다. 어린아이 3명을 데리고 수많은 피란민 사이를 헤쳐 한강을 건너기에는 너무 무리였기 때문이다.
 
 
  남한 내 좌익분자들이 인민군보다 더 설쳐
 
  정오쯤 출발했는데 집에 와 보니 밤이었다. 그때부터 9·28 서울수복 때까지 서울을 떠나지 못하고 공산군에 완전히 정복된 서울에서 지내게 됐다.
 
  당시 서울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대신 남한 곳곳에 숨어 있던 공산분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출소도 점령하고, 남한에 있던 자본주의 세력들을 찾아내고 젊은 남자들을 공산군에 입대시키기 위해 동네방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공산군 앞잡이들이 우리 집 문도 두드렸고 나도 끌려나갔다.
 
  끌려가서 도착한 곳은 지금의 삼선교 밑에 있던 한 파출소였다. 나 외에도 이미 잡혀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순간 ‘이제 나도 북으로 끌려가 전쟁터로 가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났는지 아내가 꾀를 냈다. 내 아내는 내가 파출소로 끌려가자 따라와서는 “내 남편은 고려대 교수라서 고려대에 모여 함께 가기로 했다”며 파출소에 강하게 항의했다. 내 아내가 하도 독하게 항의하니까 파출소에 있던 사람들은 “그럼 고려대 집합소로 가라”며 나를 풀어줬다. 나는 그때부터 고려대에 억류됐다.
 
  며칠이 지나자 고려대에 있던 인민군 책임자가 나를 부르더니 “북으로 가라”고 말했다. 당시 나와 함께 북으로 끌려갈 대상은 후일 문교부 장관과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윤천주(尹天柱) 교수였다. 윤 교수와 나는 “이젠 숨을 도리도 없으니 끌려가는 수밖에 없겠다” “피할 수가 없다”라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짐 보따리에 점심으로 고구마를 삶아 넣고 허리에 맸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러다 그냥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군들의 행동이나 태도, 목소리를 들어보니 도저히 끌려가서는 목숨을 지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 교수와 나는 함께 도망치기로 했다. 때마침 고려대 철학과에 있는 한 노(老)교수가 우리를 다른 임무가 있는 것처럼 불러내 집으로 도망올 수가 있었다.
 
 
  마루밑 바닥에 숨어 암흑 같은 생활
 
  집으로 돌아오자 아내와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나를 반겼다. 그러나 곧바로 나는 숨어야 했다. 도망쳐 나온 것을 뻔히 아는 인민군이 나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때마침 내가 사는 돈암동 집의 좁은 마루 밑에는 꽤 넓은 공간인 움이 있었다. 바닥에는 조그맣게 구멍이 나 있어 내 몸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방석 하나로도 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나는 7월부터 이곳에서 숨어 지냈다. 이곳은 내 키가 겨우 닿을 높이에 13㎡(4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숨어서 지내기에는 좋았다.
 
  나는 온종일 빛을 볼 수 없는 거기서 두 달 넘게 있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아내가 몰래 넣어주는 떡이나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목숨을 이어 나갔다. 대·소변이나 세면도 거기서 다 해결했다.
 
  그 어린 나이인 내 아이들도 아버지인 내가 공산당을 피해 집에서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누가 만일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아버지는 집을 떠나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내 아내와 내가 열 살도 안된 어린아이들에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지 움막에서 사정해 함께 묵어
 
  두 달 남짓 지나자 공산군이 낙동강까지 갔다가 후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나는 지하에서 나와 아내, 아이들과 감격스런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나와 보니 내 얼굴은 하얗게 떠 있었고, 수염도 길 때까지 길어 원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서울에서 살았지만, 얼마 후 정말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중공군의 개입 때문이었다. 1951년 1·4후퇴가 시작됐다. 아직 시간이 있었지만, 중공군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고 위험했기 때문에 서둘러 피란을 떠났다. 그때 우리 집 돈은 거의 바닥이 나고 없었다. 아내가 바느질로 돈을 벌었지만 얼마 없었고, 석 달치 월급은 이미 다 써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귀중품은 내가 가진 책이었다. 헌책이라도 팔아서 돈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아이들 옷가지와 이불 등을 보따리를 싸서 짊어지고 서둘러 서울역으로 갔다.
 
  나와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서울역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이미 서울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 가보니 객차는 없었고, 화물차만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타기 어려웠다. 나는 그래도 서울역에 가서 어린 아이들이 3명 있다는 것을 핑계 삼아 역사 안까지 진입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화물칸에 올라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우선 한강을 건너 영등포 근처 역으로 가서 화물차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영등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여의도로 가는 게 가장 좋았다. 아이들을 업고 손을 잡고 한강 나루터로 가서 배를 타고 여의도로 갔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영등포에서 떠나는 기차가 없었기 때문에 하룻밤을 어떻게든 보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여의도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나마 보이는 것은 거지들이 잠을 자던 움막이었다. 1951년 1월의 서울은 너무나 추웠다. 아이들도 아내도 추위에 떨었기 때문에 거지들 틈에 끼여 하룻밤을 보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움막에 있던 거지들에게 “애들 데리고 이리로 왔는데 보다시피 밖에서 잘 수 없지 않으냐”며 잠자리를 좀 내달라고 사정했다. 내 말을 들은 거지들은 아무 불평 없이 순순히 자리를 내줬다. 움막은 커다란 공간에 거지들이 단체로 잘 수 있게 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 다섯 식구가 잘 수 있는 공간은 있었다.
 
 
  추운 겨울 화물차 꼭대기에 탔는데도 동상 안 걸려
 
  거지 움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걸어서 영등포역으로 갔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도착한 당일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영등포역에서도 하루를 더 보내야 했다. 역사 안엔 못 들어가고 또 한 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하룻밤을 더 보냈다.
 
  다음 날에도 여전히 화물차만 있었는데 사람들이 화물차 꼭대기에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을 데리고 화물차 꼭대기에 올라탔다. 아이들을 새끼줄로 모두 묶어서 절대 떨어지지 않도록 했고, 이불로 애들 전체를 감쌌다.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겨울에, 달리는 기차의 화물칸 위에서 몇 시간 동안 찬바람을 맞았는데도 우리 가족 누구도 동상(凍傷)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다. 중공군 때문에 피란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나 아내뿐만 아니라 애들도 모두 엄청나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기차는 지금처럼 직행이 아니라 도중에 수많은 역에서 섰다가 갔다. 몇 시간씩 머무르기도 했다. 나는 잠시 역에 내려 떡을 사서 아이들을 먹였다.
 
  피란을 떠나고 우리 가족이 처음 머문 곳은 대전이었다. 당시 내 형님은 대전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형님도 피란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형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형님과 함께 다시 피란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형님께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걸어서 대구까지 가기로 하고, 내 아내와 아이들은 형님과 함께 화물차를 얻어 타고 대구에 내려가서 만났다.
 
 
  돈이 없어 영어사전 팔고 공군 입대
 
  대구는 피란민으로 들끓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 곳을 구한 뒤 나는 운이 좋게도 대구로 옮겨온 고려대에 있을 수가 있었다. 당시 대부분 대학이 부산으로 갔지만 고려대만은 대구 원대동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대구로 내려온 고려대 교수들과 함께 정세도 논하면서 여러 달을 살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돈이 떨어진 것이다. 3개월 선불로 받았던 월급은 일찌감치 날아갔다. 가지고 온 책을 하나둘씩 팔면서 겨우 애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는데, 가지고 온 책마저 다 팔아버렸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마지막으로 팔던 책이다. 콘사이스 영어사전이었는데 그걸 책방에 팔 때의 심정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 그러던 나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우리 공군은 육군항공대로 있다가 독립해서 공군이 됐다. 그 공군 주요기지가 대구에 있었고, 나처럼 대구로 내려온 젊은 대학교수들은 대부분 입대를 했다.
 
  나도 먹고살 길이 막막해 별도리 없이 공군 입대를 알아봤다. 당시 공군의 인사국장이 평양고보와 경성제대 선배였다. 그분을 찾아갔더니 ‘잔소리 말고 빨리 들어와서 군복 입으라’고 말했고 나는 1951년 5월 공군으로 입대했다. 입대해서 임관하는 데 고작 5주가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전쟁 중임에도 훈련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내가 가장 젊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훈련받으니까 훈련이 엄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대위로 임관했다. 나와 같이 대학 조교수로 있던 사람들은 전부 그랬다. 당시 공군이 급하게 만들어지면서 편제표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좀 배운 사람이 필요했다. 틀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윤천주 서울대 교수 등 젊은 교수들을 여럿 데려다가 미국 공군 매뉴얼을 참고해 공군 편제표를 만들었다. 대한민국 공군은 그렇게 틀을 잡아 나갔다.
 
  나의 첫 보직은 공군 인사국에서 상훈이나 행사 등을 담당하는 상전과장이었다. 그러다가 1년쯤 지나서는 소령이 됐고, 국군이 서울을 수복해 전쟁이 끝날 때쯤 되니까 중령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이 거의 마무리 돼 갔다. 국군과 인민군은 법적으로 전쟁 중이었지만 사실상 전쟁은 끝났고 대학에 돌아가 다시 교편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복을 벗었다.
 
 
  우리 집 머슴, 부모님 찾아와 무릎 꿇고 절하게 만든 것도 목격
 
  아직도 6·25를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다. 이북 출신인 나는 누구보다 공산세계의 위험함과 비인간성, 잔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공산당 때문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 수모도 겪었고, 수많은 똑똑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광복 전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더니 다시 돌아와 우리 부모님에게 무릎을 꿇게 하고 절을 하게 만드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나는 8·15광복이 이뤄지자 잠깐 평양에 다녀왔다. 갔더니 그곳에서 내 고향 개천 사람들의 싸늘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나를 반겨줘야 할 고향 사람들이 오히려 ‘고향엔 오지 마라. 위험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때 당시 나는 공산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다.
 
  당시 공산당의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던 사람이 최용달이라는 나의 대학선배였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 선배는 나에게 ‘동무, 같이 일합시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거절했다. 북한 정권이 어떤 정권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 아는 상황에서 같이 일한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세계의 현실을 똑똑히 본 나는 평양에 있는 내 처가에서만 지내다가 고향을 뒤로한 채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내 친구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남한 최고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다니다 보니 내 친구들 가운데는 정말로 우수한 두뇌를 지닌 사람들이 많았다. 남한 출신인 그 친구들은 그러나 공산세계의 현실을 제대로 모른 상황에서 낙원으로 착각한 나머지 북으로 넘어갔다가 모두 다 숙청되고 제 목숨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시켜야 했던 것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그것이 한(恨)으로 남아 있다. 6·25 60주년을 통해 우리 국민이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리=郭彰烈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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