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喜卿 전 이화여고 교장
⊙ 1932년 출생. 이화여중·서울대 사범대 졸업.
⊙ 성균관대 여학생처장, 서울대 사범대 교수, 이화여고·현대고·계원예고 교장,
前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15대 국회의원 역임.
⊙ 現 청강학원(청강문화산업대학) 이사장, 대한YWCA 후원회 이사장.
1950년 5월, 나는 이화여자중학교 6학년(現 이화여고 3학년)이 됐다. 나는 마지막 중등학교 생활을 하루하루 음미하면서 공부의 재미와 의미를 곱씹어갔다. 학교 분위기는 광복 후 어느 때보다도 안정적이었다. 대학 입학 성적에 관심이 깊은 학교 당국에서는 6학년인 우리에게 가장 유능한 선생님을 배치했고, 우리는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됐다.⊙ 1932년 출생. 이화여중·서울대 사범대 졸업.
⊙ 성균관대 여학생처장, 서울대 사범대 교수, 이화여고·현대고·계원예고 교장,
前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15대 국회의원 역임.
⊙ 現 청강학원(청강문화산업대학) 이사장, 대한YWCA 후원회 이사장.
그런 희망찬 6월 말의 일요일. 고종사촌 오빠 한 분이 집에 들러서 빨갱이들이 38선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원래 그 양반은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어 집에 있던 어머니도 나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더구나 훈모(남동생, 1950년 1월 사망)를 잃고 계속 허전해 하시던 어머니가 며칠 전(6월 22일) 미국 유학을 떠난 오빠 생각으로 더더욱 가라앉으신 터라 별다른 관심도 없었다. 북에 관해서 들려오는 소식은 늘 흉하고 독하고 악한 것들이어서 그들은 우리와는 별개의 세계에서 사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기로 한 터였다. 6월 하순 일요일 오후의 햇빛은 역시나 맑고 따갑기만 했다.
일요일에 들었던 그 오빠의 괴상한 얘기가 마냥 헛소리가 아님을 월요일 등굣길에서 직감할 수 있었다. 오전 11시쯤 돼서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지금 곧바로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별도의 소식이 있을 때까지 집에서 자습하라”고 일렀다. 무엇인지 암담한 일이 벌어진 게 확실했다.
아이들은 어제 새벽에 38선에 빨갱이 군대가 밀려들어 왔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들었다고 했다. 그제야 전쟁이 나기는 났구나 싶었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제2차 세계대전)도 몇 년을 끌었지만 서울엔 폭탄 하나 안 떨어졌는데, 설마한들 무슨 일이야 있으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들 말로만 38선 38선 했지 사실 서울에서 얼마나 먼지도 알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귀갓길에 젊은 군인을 태운 트럭들이 서울 혜화동 쪽으로 달려갔다. 큰 트럭의 행렬은 10여 대나 이어졌고 그걸 본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리 식구는 집에서 꼼짝 않고 라디오만 듣고 있었다. 전황에 대한 뉴스인데 지명을 대도 그게 어디인지 짐작이 안 가니 상황을 알 수 없었고, 그러니 당연히 태평이었다.
27일 초저녁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요란한 가운데 비는 밤이 깊도록 쏟아졌다. 바로 귀밑에 대고 총을 쏘듯 따다다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도 들려왔다. 평생 들어 보지 못한 파열음과 굉음이 번갈아 들렸다. 얼마를 그랬을까. 새벽에야 지쳐 잠이 들었나 본데, 여름의 새벽은 빨리도 밝는 법. 사방이 밝았는데 어디선지 들어 보지도 못한 남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 노랫소리는 먼 곳에서 들려오기는 했으나 분명 귀에 무척 선 노래였다. 아침 7시가 넘자 그 소리는 제법 분명해졌다. 더불어 쇳소리 섞인 굉음이 스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남자들 벌거벗겨 맨발로 행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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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서울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의용군으로 징집돼갔다. |
원래 호기심 많은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와서 지금의 방송통신대와 예술진흥원(옛 서울대 문리대)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소리는 혜화동 쪽에서 들려왔다. 단숨에 혜화동 로터리 가까이까지 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무시무시한 탱크가 풀 더미를 뒤집어쓴 채 굉음을 내면서 전찻길 위로 굴러갔고, 이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희한한 총(따발총)을 들고 행진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게 알고 보니 ‘원수와 더불어 싸우다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로 시작되는 섬뜩한 <적기가(赤旗歌)>였다.
더욱 기절할 노릇은 젊은 남자들을 몽땅 벌거벗겨 두 손을 머리에 얹게 한 채 맨발로 걷게 하면서 뒤에서 총을 겨누며 행진하는 것이었다. 저 벌거벗겨진 이는 도대체 누구며 저 총을 겨눈 이는 또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일순간 다가온 혼란에 나는 넋을 잃고 나도 모르게 행진의 흐름을 따라 서울대병원 쪽으로 흘러가다가 바로 발아래 피로 범벅이 된 시체가 나둥그러진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금의 국립과학원 건너편 서울대병원 끝자락쯤이었다. 나는 그만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되돌아서 가로지르는 뒷길을 따라 뛰어 집에 돌아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만난 가장 참혹한 장면이요, 죽음이었다. 어느 집의 아들이었을까. 왜 그리 비참하게 6월 28일 아침에 길에 내팽개쳐진 채 피 흘리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집에 들어선 내 몰골을 보고 아버지, 어머니, 언니 할 것 없이 혼이 빠져나간 꼴에 어지간히 놀라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본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헐떡거리면서 내가 방금 보고 온 광경을 보고했다.
다음 날인 29일엔 미국에 간 오빠를 찾으려고 좌익 학생들이 찾아와 오빠 방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갔다. 학생 간부(호국단장)를 지낸 언니의 처지도 안전하지 못했다. 현관을 들어서면 조그만 대기실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 바닥을 걷어 내고 숨을 굴을 파기 시작했다. 무슨 기척만 있으면 언니를 거기에 숨길 요량이었다.
‘완장 찬’ 여학생
며칠 뒤인 7월 3일, 학교에서 비상 연락망을 통해 등교 지시가 왔다. 28일 아침 이래의 첫 외출로 일주일 만의 등교였다. 학교가 달라져도 어찌 그리 달라질 수 있을까. 학도호국단 간부는 온데간데없고 학년을 뒤섞어 반으로 갈라서 모이는데 내가 속한 반은 보지도 못했던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지도자란다. 예쁘장하고 똑똑하게 생겼는데 얼마나 딱 부러지고 분명하던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어디서 그렇게 공산당 이념 교육을 받았는지 ‘위대하신 스탈린 수상, 영특하신 김일성 수령님!’을 자연스럽게 서두에 달면서 우리에게 사상 교육을 시키고 <김일성의 노래>와 <적기가> 등을 연습시켰다. 연습을 안 했어도 이 노래들은 적군 치하 3개월 내내 아침저녁으로, 아니 하루종일 듣는 노래여서 자연스레 배워졌다.
학교에 한 사나흘 나갔던 것 같다. 그날도 학교에서 사상 공부며 노래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서울법대 담 밑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는 자국이 선명한 게 아닌가. 눈을 들어 보니 법대 시멘트 벽돌담에 총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게 보였다.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집에 와 보니 그날 그곳에서 동회 일을 보던 사람 셋이 즉결처분을 받았고, 문리대 교정에서는 인민재판이라는 것이 열려서 그곳에서도 몇 명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조여 오는 공포 분위기랄까, 아니면 삶에 대한 위험이랄까. 이대로 가다간 어쩐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언니와 같이 굴속에서 숨어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집 뒷마당 축대 위 비스듬한 작은 둔덕에 심어 놓은 호박을 따러 갔다가 같은 반 친구가 올라오고 있는 걸 봤다. 예전 같으면 뛰어나가 반가이 맞을 법도 한 친구인데 나는 급히 뛰어 내려와 호박을 부엌에 내던지면서 어머니께 말했다. “친구가 와서 찾거든 학교 간다고 나갔다고 해 주세요.” 그리고 파 놓은 굴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세상에서 누군들 믿을 수 있으랴. 그저 위험에서 피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7월 10일에는 큰집 큰오빠(정학모, 서울대 사대 교수)가 평양 시찰에 참가해야 한다고 해서 끌려갔고, 14일에는 사촌 형부도 끌려갔다.
우리 집 앞길 막다른 골목 끝에 어려운 학생들의 합숙소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평소에 그 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다. 6·25 때는 이 학생들 대부분이 공산당 열성분자로 날뛰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중의 한 학생이 어머니께 귀띔을 해 주었다. 그 학생은 과묵하고 성실하게 생긴 다부진 체구의 고학생이었는데, 아무래도 우리 자매를 피란시키는 게 좋겠다는 거였다. 뒤숭숭한 가운데 얻은 정보라서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교 2학년, 중학교 6학년 계집애들이 뭐 대단하다고 피란까지 가야 할까. 나는 지금도 공산당의 그 어처구니없던 인간 사냥을 이해할 수 없다.
멀건 호박죽조차 먹기 힘들어 농가로 피란
결국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서 끼니때는 쌀 한 공기에 애호박 몇 개 저며 넣고 물을 잔뜩 부어 죽을 쑨 뒤 온 가족이 먹어야 할 형편이니 어디론가 식구가 흩어지긴 해야 할 판이었다. 큰집과 의논한 끝에 언니와 나, 그리고 조카 영숙이는 농사를 짓는 조용한 농가인 김포 고모님 댁으로 피란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결정이 났다. 7월 25일 전쟁이 터진 지 한 달 만에 언니와 나는 집을 떠나 조카 영숙이를 데리고 김포군 고촌면에 있는 고모님 댁으로 갔다. 족히 90리는 되는 곳이었는데, 지칠 줄 모르고 걸어서 오후에 고촌에 있는 고모님 댁에 도착했다. 그 어려웠던 세월에 말 만한 처녀가 셋이나 들이닥쳤으니 얼마나 황당했으랴마는 고모네 식구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멀건 호박죽만 먹고 지내던 서울 집과 달리 비록 보리밥이지만 오이지나 호박나물, 감자찌개나 된장찌개와 같이 배불리 먹는 기쁨은 대단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낮에는 서울에서 짊어지고 온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책을 읽었고, 해가 설핏해지면 고종 올케를 따라 밭일도 나가고 부엌일도 돕곤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오이, 호박, 가지 등을 거둬들이는 일도 전쟁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 평화로움을 맛보게 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우리는 고모님 댁에서 굶지도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는 세월을 보냈다.
8월에 들어서서 심심찮게 비행기 소리가 들렸는데, 서울이 폭격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안부도 무척 궁금했다.
하루는 고종 올케가 대청마루에 앉아 지나가던 방물장수에게 재봉틀을 내놓고 흥정하고 있었다. 그제야 재봉틀까지 팔아야 우리를 포함한 식구들이 입에 풀칠할 지경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서울에 공부하러 갔던 고종사촌의 자녀가 셋이나 내려와 있었고, 거기에 시집간 딸네 식구도 와 있었으니, 이 모두를 먹이려면 여간 큰일이 아니었을 게 뻔하다. 끼니때면 넓은 대청마루가 먹어대는 식구로 꽉 찼었다. 방물장수 등에 실려 나가는 올케의 재봉틀을 보면서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염치없이 먹어대던 밥이 자꾸 목에 걸려 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기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8월 하순 아침에 푸성귀 바구니를 들고 동네 큰 우물에 나갔다. 푸성귀를 씻고 있는데 웬 남정네 소리가 들려서 눈을 들었다가 그만 소스라쳤다. 눈앞에 인민군 장교 복장을 한 이와 병사 몇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다행히 그들은 나에게는 무엇을 물어보지 않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 장교와 병사는 고모댁 사랑채 앞마당에 나타났고, 또 그 다음 날에는 안채까지 왔다. 우리는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네가 좁고 서로 빤히 아니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어려웠던 시절 빈둥거리며 책이나 읽던 우리에게 싫은 얼굴 한 번 안 보인 올케며 오빠며 식구들이 너무 고마워, 도망치듯 떠나면서도 눈물을 흘리며 뒤돌아보았다.
식량 얻기 위해 밤샘 노역
서울에 도착해서 어둠이 올 때까지 연지동 큰집에서 기다렸다 밤길에 동숭동 집으로 숨어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언니를 찾으러 빨갱이 후배가 몇 번 왔었고 이화여고에서도 두어 번 다녀갔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수척해진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전에 우리를 피란시키라고 충고했던 그 학생은 우리의 귀가를 알고 우리 집에 와서 또 제안을 했다. 마포 강가에 야간 공사가 있어 주민 동원이 있는데, 거기 참가하면 곡식 배급도 주고 노역 증명도 줘 안전을 기할 수 있으니 가족 한 사람은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자진해서 나섰다. 어머니의 망설임은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던 탓이다. 동네 사람들이 각기 삽을 들고 마포 전차 종점으로 행렬을 지어 떠나는 대열에 내가 끼었다. 마포 종점에 닿았을 때는 이미 사방이 캄캄했다.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어떤 사람의 구령에 따라 어디론지 한참을 걸어가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서 땅을 파고 흙을 걷어 내어 둔덕을 쌓는 일을 밤새도록 하게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철길이나 도로를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칠흑 같은 밤에 삽질만 계속했던 것이다.
8월 말의 밤공기는 제법 싸늘하고 축축했다. 얼마나 그렇게 기계처럼 흙을 파 올렸을까. 무엇인지 내 어깨를 걷어차는 게 있었다. 깜짝 놀라 보니 내가 흙더미에 기대어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꺼풀은 왜 그리도 자꾸 내려왔던지. 어처구니없는 노역의 긴 밤이 지나고 동트기 전 우리는 다시 마포 종점에 돌아와 노역 증서 도장과 곡식 배급표 한 장을 받았다. 마지막에 <적기가>를 제창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어땠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할 만했다고는 했지만 그게 어디 할 짓이던가. 그래도 한 일주일은 매일 밤 그런 노역장에 다녔다. 날이 갈수록 발길에 차이는 횟수가 잦아졌다.
9월로 접어든 어느 날 외출했던 아버지께서 새 일을 알아봐 오셨다. 재봉 일이니 흙 파는 일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그 무렵 부역하고 있던 아버지의 친지가 어렵사리 알아봐 준 자리라고 했다. 마포 강가의 노역에서 주는 배급표는 수수 한 됫박, 도토리깻묵 한 됫박 같은 것들이었는데 재봉하는 곳에서는 쌀을 준다니 그것 또한 여간 매력이 아니었다. 배고픈 우리 가족을 위해 빨갱이들의 일을 도와 안전도 기하고 먹을거리도 벌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자 새로운 결의가 불끈 솟았다. 어떻게든 굶지 말고 살아남아야 했다.
재봉일도 역시 밤일이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수숫가루와 도토리깻묵을 섞어 쪄 낸 떡을 한 덩이 싸 가지고 첫 출근을 했다. 장소는 지금의 회현동 아시아나항공 자리에 있던 남산교회 건물이었고, 작업은 인민군 솜 군복을 누비는 일이었다. 다 같은 딱한 처지며 강제노동일 텐데, 몹시 불친절하고 못되게 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가운데도 친절한 이도 듬성듬성 섞여 있어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일주일 일하니 배급표가 나왔다. 흰쌀이 반 말 가까이 됐다. 쌀을 받고 보니 어찌나 큰 성취감을 느꼈던지. 그것이 부역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사라진 주변 사람들
9월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매일같이 수많은 젊은이를 의용군으로 끌어갔고, 수많은 사람을 북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회현동으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일신국민학교(지금의 극동빌딩) 마당은 매일 저녁 잡혀 온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일하는 곳에서 준 푸른 쪽지(통행증)가 있었으니까 붙잡히면 그걸 내밀면 되겠지만, 겁나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였다. 여학생들도 간호 의용군으로 끌려가곤 했기 때문이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문리대에 들어갔던 고모님의 큰외손자 좌섭이도 영영 사라졌고, 가까이 지내던 정인보 아저씨도, 사촌오빠도, 사촌언니 남편도 사라졌다.
나는 식량을 얻기 위해 매일 회현동으로 출근했는데, 재봉틀 소리 때문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로 진격해 오면서 서울에서도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9월 20일이 좀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총성이 무척 가까워지고 있다며 재봉일을 그만 다니라고 말렸으나 나는 계속 다녔다. 27일 저녁에도 일하러 나가 밤새 재봉틀을 밟았고 28일 아침을 맞았다. 가을 햇살은 유난히도 눈부셨고 내 손에는 곡식 배급표가 들려 있었다.
교회 건물을 빠져나와 길 건너 중앙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건너편 한국은행 건물 앞에 쌓아 놓은 모래주머니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을 든 인민군이 서성이면서 앉았다 일어섰다 하고 있었고,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쪽에도 인민군 같은 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상공회의소 건물(지금의 프라자호텔 별관)에 가서 쌀 배급을 받아서 집으로 가야 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서도 기어이 배급은 받아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소공동길로 접어들었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고 당장이라도 누군가 뒤에서 총부리를 들이댈 것 같았다. 다행히 상공회의소에서 배급은 주고 있었다. 배급을 해 주던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더니 자루째 곡식을 넘겨주며 빨리 집에 가라고 말했다. 나는 쌀자루를 머리에 이고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집에 다다른 것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쌀자루를 팽개치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도 언니도 어처구니없어 했다. 밤새도록 총소리 대포소리가 들리는데 돌아오지 않는 딸이 얼마나 걱정됐을까. 그날이 서울 수복의 날이었다.
이번엔 “빨갱이 색출해라”
서울 수복 이후 위세를 부리고 다니던 동네 인민위원회 사람이며 인민군은 모습조차 볼 수 없게 됐다. 9월 30일에는 학교에도 가게 됐다. 학교 가는 길에서 불에 탄 까만 시체, 파리가 새까맣게 붙어 있는 시체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빨갱이들이 철수하기 전 우리 집 뒷산인 낙산에서 수많은 사람을 총살하고 제대로 묻지도 않고 갔다는 얘기는 집에 돌아와 들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심사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됐는데, 임무는 지난 3개월 동안 부역한 아이들을 심사하고 빨갱이를 색출하는 일이었다. 인민재판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무척 우울해졌다. 인민재판에 즉결처분에 반동분자 색출이니 뭐니 하며 겁을 주는 빨갱이가 지겨워서 서울 수복이 그리도 반갑고 기뻤는데, 우리가 우리 동료를 심사하게 된다니 이 무슨 슬프고 소모적인 갈등이란 말인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부역을 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유력한 한 학부형이 학생들을 집에 초대해 놓고 교장선생님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나도 합동수사반에 소환돼 교장선생님에 대해 취조당했다. 결국 나는 학교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너무나 기대 밖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서울 수복이 됐다 해서 양식을 비롯한 생활필수품이 갑자기 넉넉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콩 배급이 실시돼서 콩죽을 거의 매일 먹다시피 했다. 처음엔 고소하고 맛있었던 콩죽에 곧 질리고 말았다. 콩죽은 아직까지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음식이 됐다. 얼마 후 아버지가 체신부장관실에 근무하게 되면서 우리는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나는 쌀밥이 그렇게 맛있는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새로 이사한 체신부 관사도 옛날 집에 비하면 훨씬 보잘것없었지만 우리는 아무 불평도 없었고, 오랜만에 평화롭게 지냈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월이 되자 서울 시민들에게 피란 명령이 내려졌다. 우리도 인천으로 가서 부산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재봉틀과 부엌살림, 떡을 등에 지고 배에 탔다. 원래 물자 수송용 배여서 화장실도 따로 없었고, 며칠이 지나자 냄새가 진동해서 견디기 힘들었다. 갑판 위는 칼날 같은 바닷바람 때문에 힘들었고, 선실은 넘쳐 나는 사람들과 냄새로 지옥 같았다.
부산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시조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부산 서면 거제리로 가 한 절에 살림을 꾸렸다. 살림을 꾸렸다고는 하지만 추운 날씨에 빨래도 목욕도 할 수 없어 거지꼴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달 만에 공중목욕탕에 가게 됐는데, 온몸에 검은 때가 끼어 있어 목욕탕에 들어가기가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1월 말 언니는 미국 문화원에 취직이 됐고 나는 2월 체신부에서 영어번역 요원을 뽑는 시험에 합격돼 체신부에서 일하게 됐다.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돈도 벌게 됐지만 대학 입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7월 말에 체신부를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했다. 9월 초 서울대 사범대 입학시험 장소로 갔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넓은 마당에 사과 궤짝 같은 것을 하나씩 놓고 흙바닥에 앉아 뙤약볕 밑에서 시험을 치렀다. 그늘 한 점 없는 곳에서 국어 영어 역사 수학 생물 등 여러 과목을 치르다 보니 시험 후에는 기진맥진 초주검이 돼 있었다.
피란지에서의 대학생활
어질어질하면서 시험을 본 터라 낙방할 줄 알았지만 나는 영문과에 합격했다. 1951년 서울대의 입학식은 구덕운동장에서 열렸다. 사범대 교사는 구덕운동장에서 구덕산 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지어 놓은 판잣집이었다. 흙바닥에 등받이도 없는 걸상을 놓고 듣는 강의였지만 교수님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공부는 즐거웠지만 집과 학교의 거리가 너무 멀어 부담이 컸는데, 그러던 10월의 어느 날 가정교사 제의를 받았다. 학교 가까운 곳에서 큰 여관을 하는 집의 여중생이 나의 학생이었는데, 1년 반을 그 집에서 신세 졌다. 우리나라 가정교사 1세대인 셈이다.
대학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교수님들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강의가 마음을 들뜨게 했고, 귀갓길에는 국제시장 옆 고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지기도 했다. 기독학생회 활동을 하며 1952년 7월에는 남성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제주도 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53년 나는 3학년이 되었고 학교 공부는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나라는 매우 요동치는 것 같았다. 6월쯤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대학에서 학생 대표 몇을 어디론지 가라 해서 그곳에 도착해 보니 국무총리 백두진(白斗鎭)씨 댁이었다. 각 대학에서 모인 학생이 100여 명은 될 성싶었다. 어떤 분이 나오더니 유엔군이 휴전을 하려고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 나는 크게 놀랐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귀중한 생명을 잃고, 얼마나 많은 가슴을 할퀴고 간 빨갱이들의 전쟁 도발이었는데 어찌 중도에 얼렁뚱땅 휴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살인마 빨갱이를 몰아내고 북한 동포도 구출하고 나라도 통일해야 될 일이 아닌가. 유엔군이 지쳤으면 이제 우리 힘으로라도 이 전쟁을 승리로 완결지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는 휴전 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결국 휴전은 되고 말았다. 판잣집 서울대는 1951년 9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피란지에서 학생들에게 꿈과 의지, 생각과 낭만을 키워 주고 문을 닫았으며, 나는 1955년 3월 동숭동에서 서울대를 졸업했다. 나에게 대학생활의 추억은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은 대학생활의 기쁨과 낭만, 사랑 외에도 전쟁과 피란생활의 아픔, 안타까움, 괴로움까지 포함한 것이다.⊙
<정리=權世珍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