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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李鍾贊] “부통령 할아버지 피신 안시켰으면 대한민국 결딴났을 것”

北서 보낸 첩자가 부통령 설득해 서울에 머물게 해
부통령집 가정부 아들, 인민군에 설득돼 완장 차고 주인 행세
인민군 의용군 됐던 작은 형, 극적으로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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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贊 전 국가정보원장
⊙ 1936년 출생. 육군사관학교 16기,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 민정당 원내총무, 국회의원(4선), 국민회의 부총재, 국가정보원장 역임.
⊙ 現 우당기념관 이사장.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이었다. 그날 약간 부슬비가 내렸다. 6사단 사령부에 근무하고 있던 큰형님은 북한의 남침 사실도 모른 채, 아침 일찍 서울로 외출을 나왔다.
 
  그날 오후부터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군장병 여러분! 속히 귀대하시기 바랍니다.” 대로에서는 트럭에 실린 이동 스피커에서도 같은 내용의 거리방송이 시작되었다. “국군장병 여러분! 비상이 발령되었습니다. 속히 귀대하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려던 형님은 귀대를 서둘렀다. 평소대로 어머님에게 작별을 하고 부랴부랴 떠나면서도 전쟁이 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 있는 집이 몇 되지 않았고 신문을 구해 보기도 쉽지 않았다.
 
  다음 날인 월요일, 나는 학교에 가려고 나섰으나 뭔지 모르게 시내 공기가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거리의 벽마다 붙여진 신문지에 붓으로 휘갈겨 쓴 벽보가 붙었다. ‘북한괴뢰군이 남침하였으나 용감한 국군이 이를 격퇴하였다’ 이런 내용의 반복이었다. 어떤 벽보에는 ‘국군이 괴뢰군을 격퇴하고 해주까지 진격하여 점령하였다’는 것도 있었다.
 
 
  거리마다 ‘국군이 괴뢰군 격퇴’ 벽보 나붙어
 
  “그러면 그렇지 우리 국군이 호락호락하지 않을 걸.” 우리는 용감한 국군에 대하여 너무나 과장된 선전에 홀려 있었다.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申性模)는 걸핏하면 “용감한 우리 국군에게 명령만 내리면 해주에 가서 아침 먹고, 평양에서 점심 먹고, 신의주에서 저녁 먹는다”라고 헛소리를 많이 했다. 국방을 책임지고 있는 자가 큰소리를 쳤으니 우리는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도무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부통령(성재 이시영·필자의 작은 할아버지) 관저로 가 봤다. 성재 할아버님이 진지하게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후 방에서 나오는 분의 모습을 보니 카이젤 수염을 한 김석원(金錫源) 장군이었다. 군복을 입지 않고 사복차림이었다.
 
  그는 일본군 대좌로 많은 전설을 남긴 분이었다. 나는 힐끗 그를 보았는데 그는 쫓아 나온 비서관에게 화를 내듯 말하는 것이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났는데 (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시니 참 난처하군요.”
 
  후에 들으니 김 장군은 당시 채병덕(蔡秉德) 참모총장과 불화하고 있었다. 채 총장이 38선에서 북한과 장사하는 것을 묵인하였다고 불만을 품고 충돌하여 보직해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무보직이 되어 집에서 칩거하던 중, 마침 전쟁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성재께서 김 장군을 불러 한시바삐 군으로 돌아가라고 설득을 한 것이었다 한다.
 
 
  부통령 할아버지 “대통령도 없는데 난 서울 사수하겠다” 밝혀
 
  전쟁 상황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삽시간에 의정부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앞집에 사는 주민은 월남가족이었다. 이북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벌써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나는 막강한 국군이 패퇴하리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주변이 뒤숭숭함을 느꼈다. 27일 저녁 일가들은 모두 무교동 규열(圭悅) 숙부님 댁에 묵고 있는 부통령 할아버님 곁으로 모여들었다. 무슨 연락 받고 온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떻게 되어 가는 것입니까?” 하는 정황을 파악하러 모인 것이다. 그날 궂은 비는 오고 황량한 밤이었다.
 
  할아버님은 드디어 결심을 하신 듯 비장하게 한 말씀을 하셨다.
 
  “내 평생 이 나라를 위하여 분투노력했을 뿐 나쁜 일 한 것 없다. 내 나름 부끄럽게 살지 않으려 애써 왔다고 자부한다. 현재 대통령의 행방은 모르겠고, 서울이 이제 위기에 처해 있는데 국민을 놔둔 채 나마저 일신상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하면 국민들이 이 정부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임란(壬辰倭亂) 때 백성들이 정부를 원망한 것을 생각하면 정신 차려야겠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사수하겠다. 너희도 남겠으면 남고 또 난을 피하겠으면 가도 좋다.”
 
  이 말씀을 끝으로 그 어른은 침소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공덕동의 집으로 향했다. 비는 계속 오고, 집으로 오는 길에 보니 시민들은 계속해서 한강 쪽으로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생전 처음 나는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실감했다.
 
전선을 사찰하는 이시영 부통령(뒷줄 모자 쓴 사람).

 
  ‘공화국 정부’ 사람이 성재 할아버지 찾아
 
  다음 날인 6월 28일 아침, 길에 나가 보니 세상이 바뀌었다. 인공기가 휘날리고 탱크가 서대문 로터리에서 계속 몰려들고 있지 않은가? 나는 즉시 작은형님과 함께 무교동 숙부님 댁으로 갔다. 부통령 할아버님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집이 텅 비어 있었다.
 
  10시쯤 되니 당숙 되시는 내외분이 오셨다. 역시 집이 비어 있는데 그분들도 놀라는 것이었다.
 
  “아니 사수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조금 있으니 파나마 모자(원래 파나마 풀의 어린 잎 섬유를 소재로 하여 손으로 짜서 만든 모자. 가볍고 통기성이 좋은 여름 모자)를 쓴 신사 한 분이 찾아왔다.
 
  “선생님 어디 가셨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다.
 
  부엌 뒷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나오셨다.
 
  “어젯밤에 다 떠나셨어요.”
 
  아! 그런데 이 파나마 모자 쓰신 분이 하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아니 내가 분명히 선생님은 계셔야 한다고 말씀드렸고 또 나와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주 낭패한 그런 표정이었다.
 
  당숙께서 그분에게 다가가 “저는 이 댁 일가인데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는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성재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존경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잠시 뵙고, 꼭 서울에 남으셔서 이 전쟁의 뒷수습을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아! 그랬어요. 저희도 어젯밤에 꼭 사수하시겠다는 말씀 듣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셨습니까?”
 
  “모르지요. 우리도 궁금해서 왔습니다. 실례지만….”
 
  파나마 모자는 대답도 않고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하여간 연락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공화국정부는 선생님과 대화를 하여야 합니다. 제가 다시 들르겠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사라졌다.
 
  눈치 빠른 형님이 금세 알아차렸다.
 
  “저 사람은 북에서 온 사람이야. 아마 중국의 연안파에서 활동한 사람이 분명해.”
 
  그제야 당숙님도 멍하다가 정신이 든 모양이다.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경호실장, 수원의 친구가 내려오란다고 말해 省齋 피신시켜
 
  나는 이날 내가 본 광경을 상당히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9·28 수복 후에 다시 한 번 6월 27일 밤과 28일 아침에 벌어졌던 일들을 당시 수행했던 비서관들의 말을 정리하여 복기(復碁)해 봤다.
 
  6월 27일 국회는 ‘서울 사수결의’를 했다. 정부는 아무런 전황(戰況)정보를 국회에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회는 이런 우직한 결의를 한 것이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상황이 위급해짐을 가장 먼저 알고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남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민심의 동요가 없도록 대비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보내는 담화’를 녹음으로 준비해 놓고 피신했다. 정보에 어두운 것은 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성재 할아버님은 서울시민을 놔두고 떠날 수 없다고 고집하면서 홀로 남아서라도 수도를 사수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6월 27일 밤 일가들을 보내고 침소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고 창밖을 보니 마치 나라를 삼킬 듯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장대 같은 빗줄기만 보였고, 지금까지 살아 온 험난한 역정과 더 어려워질 나라의 앞날이 시름을 더해 주었다.
 
  당시 부통령 경호실장으로 임태순(任泰淳) 경감이란 분이 있었는데 세상물정에 밝고 상당히 유능한 분이셨다. 여러 차례 할아버님께 남하를 권고했으나 막무가내였다. “내게 잘못 있다면 독립 운동한 잘못밖에 없는데 누가 온들 나에게 무엇이라 하겠느냐?” 단호하셨다.
 
  비는 억수같이 내리고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암담한 밤이었다. 마침 천장이 부실해서 방 안으로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걸레로 닦고, 대야를 갖다 놓는 등 소동이 났다. 이 틈을 이용하여 임태순 경감이 침소로 들어가 다시 할아버님을 깨웠다.
 
  “비가 새고 한강 물이 불 것 같다고, 수원에 계신 홍 선생님께서 ‘잠시 오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지금 옮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물론 아드님과는 사전에 짜고 한 말이다.
 
 
  ‘공화국 정부’ 사람은 북한의 사전 침투조
 
  홍 선생이란 수원에 사는 할아버님의 유일한 지기지우인데 그분은 고가(古家)를 수리하여 큰 집을 지니고 계시면서 평소에도 할아버님을 그 댁 사랑으로 모시고 더불어 한시(漢詩)를 나누시면서 교유(交遊)하던 분이었다. 할아버님은 이분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셨다. 이런 임 총경의 꾀에 넘어가셨다. 할아버님도 비가 새서 모두가 뜬 눈으로 있는 것이 약간 불안하였는지 그러자며 당장 갈아입을 옷만 챙겨서 부랴부랴 떠나셨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한강을 건너자마자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찾아온 파나마 모자 쓴 분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과거 신흥무관학교도 나왔고, 의열단 활동도 했으며 한때 중경과 연안을 드나들며 임정(臨政)요인들과 조선 혁명당 간부들 사이에 연락업무를 해오던 사람인데 그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했고 6·25동란 직전 북에서 파견하여 사전 작업하기 위하여 침투활동 중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중국 망명시대에도 성재 할아버님을 만났던 인연으로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대통령 부재중에 부통령이라도 서울을 사수하여야 한다고 바람을 잡고 할아버님의 피란을 극구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할아버님을 앞세워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아마 그 때문에 다음 날, 할아버님을 놓치게 되자 조바심을 냈던 것 같다.
 
  나는 또 그 연장선에서 상상해 봤다. 만약 성재 할아버님이 순전히 애국적인 입장에서 서울을 사수하였다면 서울이 점령당한 후 파나마 모자 같은 북의 공작원이 틀림없이 모셔 갔을 것이다. 그리고 북을 대표하는 김일성이나 김두봉 - 특히 김두봉은 중국 혁명시대 동지였다 - 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부통령이 회담을 통하여 어떤 불리한 결정을 하게 되었다면 이 전쟁 상황은 어떻게 변질되어 발전되었을까? 틀림없이 북은 남쪽의 부통령이 항복했다고 선전했을 것이요, 그 순간 대한민국은 침몰되었거나 흡수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여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임태순 경감이 할아버님만 살린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살린 것이다.
 
 
  중앙청 앞에서 아이 업은 채 총에 맞은 시신 목격
 
  그날 오후 형님과 나는 다시 청운동 부통령 관저에 혼자 남은 큰 숙모님이 궁금하여 뵙고자 갔다. 중앙청 앞을 지나가는데 지프차 한 대가 넘어져 있고, 그 옆에 운전사인 듯한 사병 한 사람, 장교 한 사람, 그리고 한 가족인지 아이를 업은 여인이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한여름이라 벌써 시신의 입 주위에는 쇠파리가 날아다녔다. 나는 시체, 그것도 총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체를 처음 봤다.
 
  우리는 얼른 청운동 관저로 몸을 피했다. 관저는 큰 당숙모와 부엌살림을 도맡아 하는 가정부 아주머니 모자(母子)가 지키고 있었다. 비서관들이나 경호 경찰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가정부 아주머니의 아들 조(趙)모군은 당시 경기상고 1학년생이었다. 할아버님은 이 학생이 워낙 착실해 학비를 대주면서 아르바이트 학생처럼 잔심부름도 시켰다. 조군은 중학교 1학년인 나를 무척 좋아했다. 나는 그를 형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우리가 청운장(淸雲莊)에 도착하여 이곳저곳을 뒤지며 귀중품을 챙겨 옮기려던 찰나,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소좌가 맨 우두머리였고 위관 장교 1명, 사병이 두 명인데 따발총을 거꾸로 메고 있었다. 기억나는 것은 어찌나 몸에서 퀴퀴한 땀 냄새가 나는지 불쾌할 정도였다.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님이 그들을 맞이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부통령은 우리 작은할아버님이시고 그분은 어디로 가셨는지 행방을 몰라 우리도 궁금하여 여기 왔습니다. 이곳에 와 보니 숙모님만 계시고 해서 어떻게 하나 의논 중에 있었습니다.”
 
  소좌는 대단히 침착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 사람씩 점검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형님은 또다시 설명을 계속했다.
 
  “여기 있는 어린 학생은 내 아우고, 이분은 우리 숙모님이시고, 또 이 아주머니는 할아버님의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이시고, 또 이 학생은 아주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계속 말을 이어 가는데 소좌가 손을 들어 설명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다짜고짜 조군에게 말을 건넸다.
 
  “동무는 몇 살이지?” 조군은 몹시 당황하고 겁이 났는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열일곱입니다.”
 
  “학교는 다니지, 몇 학년인가?”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인민군 소좌, 가정부 아들에게 “동무가 주인이오”라고 말해
 
  소좌는 조군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동무는 나하고 따로 말 좀 하세” 그러고는 우리 모두에게 강압적인 자세로 말을 했다.
 
  “이제 조국이 진정으로 해방이 된 것이오. 여기 있는 모든 것은 이제 인민들의 것이 되었소. 그러니 옷가지만 정리해서 내일 당장 떠나야 하겠소.”
 
  그들은 벽장부터 열어 젖히고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우리는 그들이 문을 열라면 열고, 열쇠 꾸러미를 갖고 따라다녔다. 그들은 할아버님의 서류를 챙겼고, 또 은제 수저나 귀중한 골동품적 가치가 있는 것은 우선적으로 상자에 넣거나 보자기에 쌌다.
 
  그들이 집안을 뒤지는 동안 소좌는 조군을 따로 불러 옆방으로 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약 한 시간가량 설득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나에 대해서는 ‘소좌동무’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들락날락 거리면서 띄엄띄엄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동무는 여기서 종살이를 할 이유가 없지 않소. 동무야말로 이 집의 주인이오. 그러니 그동안 여기서 벌어졌던 일을 모두 여기에 쓰시오.”
 
  “제가 무얼 아는 것이 있어야지요.”
 
  “우선 동무가 아는 대로 이 집안에 비밀리 숨어 있는 사람은 없소?”
 
  “예, 없습니다. 아까 그분들만 남고, 모두 피란 갔습니다.”
 
  “무기나 기밀서류나 중요 물품을 보관하는 비밀창고 또 숨겨 놓을 만한 곳 같은 것도 모르오?”
 
  “특별히 없는 것 같아요. 저는 부엌 옆방에서 지냈으니깐 내실일은 잘 몰라요.”
 
  “이제 동무가 주인처럼 모두 잘 챙겨 놓으시오. 알았소?”
 
  그러고도 무슨 말인지 계속 두런두런 하는 것이었다.
 
  이제 보따리를 다 쌌는지 소위가 와서 보고한다. 소좌는 나와 조군만 불러서 약식으로 멜빵을 만들어 보따리를 메라 하고 그들도 각각 한 보따리씩 지고 따라오라 했다. 우리는 청운초등학교 교실까지 갔다.
 
 
  동네 사람들, 부통령집에 들이닥쳐 물건 챙겨
 
이시영 부통령.

  소좌 일행은 조군은 남으라 하고 나보고는 다시 돌아가라고 했다.
 
  인민군의 수색이 다 끝난 뒤 형님과 나는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숙모님이 겁이 난다고 계속 붙들었다. 할 수 없어서 우리는 숙모님과 하룻밤을 보내고 내일 이 집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밤중에 조군은 다시 청운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가 싹 달라졌다. 그렇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던 그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봐! 밤이 늦었으니깐 할 수 없지만 내일은 아침 일찍 여기서 떠나라고, 알았지.”
 
  나는 그의 표변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아니 형! 내일 꼭 떠나야 해요?” 그는 나를 본체도 않고 외면했다
 
  “묻긴 왜 물어?” 그의 거만한 태도는 이렇게 반문하고 있었다.
 
  “아! 저놈이 이제 주인행세를 하는구나.”
 
  나는 입안에서 중얼거렸을 뿐 말을 밖으로 내지 못했다.
 
  다음 날 숙모님의 옷 보따리를 챙겨서 나오려는데 아랫동네 사람들 5~6명이 몰려왔다.
 
  “아주머니 동무! 이제 나누어 먹는 세상이 되었어요” 그리고 집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어떤 사람은 의자나 집기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부엌에서 먹을 것을 챙겨 나오고 야단이 났다. 그래도 조군은 그들을 마치 지휘나 하는 듯, 일일이 턱으로 이것 가져가라, 저것 가져가라 가리켰다.
 
  너무 기가 막혀서 형님과 서둘러 숙모님을 모시고 걸음을 재촉했다. 정문 앞까지 나오니 가정부 아주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사모님!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부리나케 부엌 쪽으로 몸을 피했다.
 
  나는 그제야 “이런 것이 인민공화국 세상이구나”를 실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포 동네 사람들, 악질 반동 운운하며 낙인찍어
 
  6월 30일 우리 집은 마포 대원군 별장이 있는 앞 언덕바지 비교적 높은 지대에 있었다. 마포 강변 근방에서 벌어지는 전투상황을 대개 총소리로 가늠할 수 있었다. 밤에 조명탄이 터지고 콩 볶는 소리처럼 따발총 소리인지 자동화 무기의 연속 총성이 계속 들렸다. 우리는 구경 삼아 좀 더 높은 지대로 올라갔다. 동네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서 잡담을 하면서 전투상황을 구경했다. 생전 처음 보는 야간 전투장면이었다.
 
  조명탄이 상공에서 번쩍하면 주변이 약간 훤해지고 약 1분가량 하늘에 머물러 있다가 꺼진다. 내 옆에는 어제까지 충실했던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고(高)씨 형제가 박수를 치며 진격하는 인민군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저 정도로 불을 밝히면 100미터는 전진했겠구먼.”
 
  나는 속으로 자꾸 6사단에 계신 형님 생각이 났다.
 
  “우리 형님도 저렇게 쫓기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겠지”
 
  한참 전투상황을 보다가 우리는 동네 어귀로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네 집은 반동인가 봐, 식구들이 모두 잠적했대.”
 
  “××네집은 경찰가족이야. 가족들은 그냥 있고 본인만 피했대.” 벌써 동네 집마다 딱지를 붙이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좀 더 유식한 체하는 사람은 대화의 주도권이나 잡으려는지 으스대며 말했다.
 
  “결국 미 제국주의 반동 놈들 편에 선 놈들이 이제 혼이 나겠군. 그들은 월가의 달러 힘을 믿는 악질 자본주의 놈들이지.”
 
  그들은 ‘월가’ ‘자본주의’ 어쩌고 하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들을 써 가며 ‘사회주의 교양’을 하고 있었다.
 
 
  北 내무서원, 내가 갖고 있던 누드 사진도 압수
 
  다음 날 아버지는 벌써 눈치를 채고 형과 누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피신했는데 인민군인지 내무서원인지 두 명이 붉은 완장을 찬 동네의 젊은 남녀를 앞세우고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그런데 따라온 여성은 내 누나의 친구였다. 평소 우리 집에 자주 와서 누나랑 떡이나 군것질거리들을 나누어 먹고, 전도 부쳐 먹고 놀던 동네 누나였다. 나도 친누나처럼 늘 따랐다. 그날도 무의식적으로 “아! 누나!”라고 평소처럼 불렀다. 그런데 그 누나가 갑자기 나를 도끼 눈으로 노려보지 않는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눈매가 내가 보아 왔던 누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누나의 흰 블라우스 소매에는 붉은 완장이 둘러져 있었다.
 
  “다들 어디 갔어?” 어머니는 자세를 낮추면서 변명을 했다.
 
  “양식이 떨어져서 구하러 나갔는데요.”
 
  “이 집은 부통령의 친척집이고 국방군 가족 집이어서 오늘 접수합니다.” 내무서원이 마치 재판하듯이 말했다. 그리고 구둣발로 올라서서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면서 형님의 헌병학교 졸업앨범을 압수했다. 그리고 내 책상도 뒤졌다. 그런데 내 서랍에는 핀업 걸의 누드 사진이 몇 장 있었다. 바로 전전날 내 친구, 이발관집 아들 재호놈이 나에게 보여주기에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빌린 것인데 그대로 서랍에 넣어 두었다가 그만 들키고 만 것이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으나 내무서원은 이를 보자마자 흥미 있었는지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것도 자기 주머니에 넣어 압수했다. 그들은 웬만한 물품을 안방에 몰아넣고 안방 문에 종이로 방을 붙여 그 위에 도장을 쾅쾅 찍었다. 그날부터 우리 가족은 건넌방에서만 옹기종기 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학교서 호출해 ‘인민군 자원입대’ 선동
 
  7월 초 전국의 중고생들에게 일제히 등교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또 인편으로 연락이 왔다. 나는 한 달밖에 다니지 못한 중학교가 어떻게 변했는지 호기심도 나서 아침에 학교로 갔다.
 
  그처럼 활기가 넘치던 학교는 맥이 빠진 듯 생기가 없었다. 교실에 들어갔더니 출석 학생이 반도 안됐다. 아직 어린 우리는 그간 밀렸던 소식을 주고받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전 10시가 넘자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왔다. 우리 같은 1학년은 뒤에 앉히고 상급생들이 앞자리에 앉도록 자리배정을 했다.
 
  학교에 나온 2~3명의 선생님은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면서 피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배석장교(교련교관)였던 백 중위가 그 자리에 나와 있지 않은가? 물론 군복은 벗어버리고 흰색 노타이 셔츠를 입고 땅만 보고 서 있었다. 마치 벌 서 있는 학생처럼. 친구와 소곤대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차렷!’ 하는 구령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느 상급생이 단상에 올라갔다. 우리는 모두 청색 셔츠에 회색 바지인 교복을 입었는데, 그 상급생은 마치 흑기사처럼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동무들! 이제 미제와 이승만 도당을 쓸어버리고 위대한 김일성 장군의 뒤를 따라 조국전쟁에 참여할 때가 왔습니다.” 열변을 토했다. 옆에 있는 우리 반 급우 한 명이 나를 쿡쿡 찌르며 말해 준다. “저 선배 엊그제 형무소에서 나왔대.”
 
  그 순간 마치 우리를 꾸짖는 듯이 열변을 토해내는 ‘흑기사 선배’의 얼굴이 왜 그렇게 무섭게 느껴졌는지 소름이 오싹했다. 이어서 몇이 또 단상으로 올라가 찬동연설을 했다. 모두가 앞사람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불과했고 저마다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장군’이란 말을 빼놓지 않았다. 참으로 묘했다. 언제 저렇게 판박이 연설문을 연습했을까?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의 연설이 끝난 후 교련교관 백 중위가 올라가는 것 아닌가.
 
  “이 자리에 나온 동무들! 이제 조국의 부름을 받아 우리는 궐기할 때가 왔습니다. 나는 그동안 수치스런 미제 군복을 입고 여러 동무 앞에 섰지만 이제 모두 벗어던지고 나부터 위대한 김일성 장군 앞에 반성하는 뜻에서 영웅적인 인민군과 같은 대열에 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나갑시다.”
 
  주변에서 일제히 “옳소”, “나갑시다”라는 일대 함성으로 강당이 떠나갈 듯했다. 앞줄 선배들이 혈서를 쓰기도 하고, 또 그 자리에서 의용군에 자진 지원 입대하는 지원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었다.
 
 
  작은형은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가
 
  다행히 우리 같은 중1 꼬마들은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의용군 자원입대 선동 굿판이 벌어진 후 우리는 모두 우르르 강당 밖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그 검은 옷의 ‘선배동무(?)’를 따라 행진을 시작했다. 목표는 서울운동장이었다. 종로까지 나왔을 때 나는 슬그머니 빠졌다. 그리고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 그런데 재학중인 중앙중학엘 간 작은형님은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학교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상세히 얘기했다.
 
  “틀림없이 작은형이 의용군에 끌려 나갔을 거예요.” 나는 결론까지 내렸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 아닌가.
 
  “이거 내 자식 죽게 됐네, 아이고 이를 어째?”
 
  다음 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알 만한 데를 모두 찾아다니면서 계동에 있는 중앙중학까지 갔다. 거기서 그날 오후 의용군 지망 학생들을 수송초등학교에 모아 어디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수송초등학교까지 갔다. 의용군 입대를 자원한 학생의 부모들이 어떻게 알고들 왔는지 모두 교정에 가득히 모였다. 우리는 중앙중학 학생 집합 장소를 알아보고 드디어 구석에 있는 작은형을 찾았다. 의외로 형의 표정은 맑았다.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어머니 그만 들어가세요. 걱정 말고. 다 알아서 할 테니 빨리 돌아가세요.” 어머니는 연방 눈물을 닦으면서 치마 속에 감추어 놓은 돈을 접어서 형에게 찔러 주었다. 눈물 범벅이 되어 말을 잇지 못하셨다.
 
  “그래 잘 갔다 오너라.”
 
  나는 속으로 “오기는 마음대로 어떻게 와”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니가 참 딱하게 여겨졌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수심에 가득 찼다. 아들 셋인데 하나는 6사단 소속 육군 장교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이제 둘째 아들은 북의 의용군으로 끌려갔으니 얼마나 상심했겠는가.
 
  의용군으로 끌려간 형님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편지도 없었다. 어머님도 한 1주간은 밤잠을 설치며 눈물을 흘리더니 망각이 약이라고 그 후부터 평온을 되찾았다.
 
 
  작은형의 인민군 탈출
 
  7월 하순부터 파죽지세로 공격해 내려가던 인민군의 세가 한풀 꺾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곧이어 집이 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폭발 굉음이 몇 차례 거듭 들렸다. 폭격이 지난 후 동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용산 창고에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다음 날 나는 동네 친구들과 용산 폭격 현장엘 갔었다. 창고지대가 쑥밭이 되었다. 어디서 동원되었는지 의용군들과 동원된 사람들이 폭격 맞은 잔해더미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끌어내고 현장을 수습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뜻밖에도 형을 봤다.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궁금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형은 주위를 살피면서 손가락을 입에 대는 듯했다. 그 후론 아는 체도 안 했다. 형의 눈짓은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하는 듯했다.
 
  몇 시간 작업을 하더니 의용군 부대에 다시 정렬을 하라는 구령이 내려졌다. 그 순간 형은 급하게 내 옆을 지나면서 한마디했다.
 
  “곧 집에 갈 테니 엄마에게 전해.” 그뿐이었다.
 
  나는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후 사실을 말했다. 그날 밤, 형이 야심을 틈타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새벽이 오기 전까지 어디로든 몸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부대에서 탈출한 것이다. 부모님은 밤중에 의논을 하고 우선 수원 고모 집으로 가 있으라고 편지를 써 주었고 형님과 나는 그 길로 집을 떠났다.
 
  수원 고모 집에 한동안 숨어 있었다. 조용하던 수원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차츰 피란해 온 다른 가족들을 신고하라는 통문이 도달했다. 우리 형제도 더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충남 당진의 또 다른 고모네 시집으로 갔다. 거긴 벽촌이라 공산당 조직 같은 것이 미처 미치지 못하여 약간 안심되었다.
 
  8월 중순 넘어 하순이 되자 당진에도 인민위원회 조직이 강화되었다. 우리가 머물고 있던 산골에도 호구조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형님은 의용군의 탈주병이라 서울에 갈 수 없어서 다시 공주 근교 계룡산 자락에 있는 할아버님의 동지 이관직(李觀稙) 선생댁으로 피란 갔고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열흘 있으니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을까? 자유가 이렇게 좋은지 미처 몰랐다. 누가 자유는 산소와 같다 하였지만 그 말은 적절했다. 자유가 억압당하고 나서야 자유의 고마움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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