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恭熙 대주교
⊙ 1924년 출생. 함남 덕원 신학교 수료,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로마 울바노대 졸업.
로마 그레고리안대 신학박사.
⊙ 명동성당 보좌신부, 가톨릭중앙협의회 총무, 천주교 수원 초대 교구장, 광주대교구 대교구장,
광주 평화방송 이사장 역임.
나는 아버지 윤상(베드로)과 어머니 최상숙(빅토리아)의 4남1녀 중 3남으로 1924년 평남 진남포 용정리에서 출생했다. 진남포 성당은 신자 수가 2000~3000명이 됐을 정도로 교세(敎勢)가 컸다. 아버지는 성당의 사목회장이어서 성당 살림을 도맡았다. ‘빅토리노’라는 세례명은 본당 신부님이 지었다. 내가 태어난 날이 빅토리노 성인의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세례명을 지어준 ‘육(陸) 루카’ 신부님은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이었다.⊙ 1924년 출생. 함남 덕원 신학교 수료, 성신대학(현 가톨릭대), 로마 울바노대 졸업.
로마 그레고리안대 신학박사.
⊙ 명동성당 보좌신부, 가톨릭중앙협의회 총무, 천주교 수원 초대 교구장, 광주대교구 대교구장,
광주 평화방송 이사장 역임.
4남1녀지만 원래는 아래위로 10형제가 넘는다. 가난한 시절이라 잘 먹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떴다. 큰형은 월남해 10여 년 전 돌아갔다. 둘째 형은 왜정 말기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폐병으로 의병 제대했다. 하지만 제대 후에도 병이 호전되지 않아 끝내 세상을 떴다. 남동생도 폐병으로 죽었다. 다 못 먹어서 생긴 병이다.
나는 성당에 열심이었다. 꽤 어릴 때부터 미사 복사를 했고 노는 것도 성당 앞마당에서 놀았을 정도다. 초등과정은 진남포 성당이 세운 해성(海星)학교에서 마쳤다. 해성학교 6학년 때 예비신학교에 들어가게 돼 교구청이 있던 서포(평양에서 북쪽으로 기차 한 정거장 거리)로 전학을 갔다. 평양교구에서 예비신학생을 가르치려고 서포에다 초가집 두 채를 지었던 것이다. 예비신학교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교리를 배우고 신앙인으로서 몸가짐을 다지는 학교다.
1년간 학업과 기도로 예비신학생 시절을 보낸 뒤 1937년, 그러니까 13세 때 함경남도 원산 인근에 있는 덕원으로 가게 됐다. 북간도, 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지역에서 모인 신학생 24명이 덕원신학교에 함께 입학했다.
덕원신학교의 장상(長上)인 안셀로 로머 교장신부가 우리를 보나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아빠스는 라틴어로 ‘아버지’를 뜻한다.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의 베네딕토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들과 자치 수도원의 원장을 일컫는 명칭)에 데려갔다. 그때 주교님이 이런 말을 했다. 그 말씀은 사제서품 때까지 늘 가슴에 새겼다.
“너희 24명 가운데 6명만 사제가 되어도 나는 좋아서 춤을 추겠다.”
“6명만 사제가 되어도 나는 좋아서 춤을 추겠다”
덕원은 함경남북도와 북간도를 아우르는 영성지(靈性地)였다. 경치도 빼어났다. 정방형으로 논이 질서있게 정돈돼 있었고 논밭 사이 지평선 끝으로 증기 기관차가 연기를 뿜으며 북쪽으로 달려갔다. 덕원신학교는 자족(自足)이 가능한 곳이었다. 신학교와 수도원 소유 논과 밀밭이 있었고, 농장에서는 목축과 양돈이 가능했다. 또 과수원, 목공소, 철공소, 인쇄소, 재봉방이 따로 있었다.
고향인 진남포만 해도 도시에 가까웠지만 덕원은 시골 풍광이 가득한 곳이었다. 생활도 만족스러웠다. 아이들끼리 지내니 재미가 있었고 처음으로 배우는 과학이니 물리학, 동·식물학 같은 수업은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덕원신학교는 모두 13년 과정이었다.
독일의 후원을 받아서인지 생활이 풍족했다. 솔직히 집에서보다 더 잘 먹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1937년 중국과 일본이 중·일(中日)전쟁을 치르면서 점점 궁해졌다. 물자가 부족한 데다 먹을 것마저 모자라 항상 배를 곯았다. 저녁에는 쌀이 없어 죽을 먹었다. 무척 허기졌다. 그 상황은 1949년 신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거의 계속됐다.
박해가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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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21일 사제서품 다음 날 첫미사(서울 중림동 성당). |
일제가 패망할 무렵, 덕원신학교는 일본군이 접수, 건물 곳곳을 병영으로 썼다. 중국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신학교 뜰에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친 얼굴에 패색이 짙었다. 일본군에게 기숙사를 내주고 우리는 덕원 본당, 주일학교 교실과 수도원 공장 등지로 분산돼 지내야 했다.
그리고 광복이 됐다. 때마침 방학 때여서 고향 진남포에서 8·15광복을 지켜보았다.
아침에 성당에 들렀더니 “낮에 특별방송이 있을 것”이라고 누가 말했다. 성당에서 대축일 미사 합창소리가 들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낮에 광복을 맞았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조카에게 “독립이 됐다”고 하니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우리나라가 일본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쓰는 말이 조선말이잖아. 우리가 나라를 빼앗겼다가 이제 되찾은 것”이라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북한 공산당과 소련군이 총칼을 들고 나타났다. 신학교 살림 역시 광복 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전쟁 동안과 마찬가지로 들판에 나가 직접 모를 심고 가을에 추수하는 일이 주요 일과가 됐다. 그리고 갑작스레 비극이 찾아왔다. 신학과 4학년이던 1949년 5월 9일 한밤중에 신학교 종소리가 크게 울렸다.
보통 큰 화재가 나면 모를까 수업시간이나 기도시간을 제외하고, 더구나 밤중에 종을 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세차게 종이 울렸다.
나는 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몇몇 학생은 벌써 일어나 있었고 누군가 “지금 수도원에 공산당이 쳐들어왔다”고 했다. 나는 급히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보나파시오 주교 방 앞 복도에 수도자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곧 주교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주교님은 문 앞에서 우리를 향해 돌아서더니 말없이 모두에게 강복을 줬다. 구부정한 몸을 지팡이에 힘겹게 의지한 백발의 주교아빠스, 비교적 젊은 아르눌포 슐라이허 신부님, 강직한 루치오 로토 원장신부님, 탁월한 노(老)철학교수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님이 연행됐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수도 가족들은 아직 벽에 붙어 늘어서 있었다. 공산당 우두머리는 향후 수도원 활동지침을 시달했다. 안셀로 신부님이 명령을 받아 적었다.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나면 안 되고, 계곡에 면한 수도원 현관 회랑의 손님방은 경비실로 사용하며, 수도원 농장은 한국인 농부들에게 일임하고 전화통화는 금지한다는 식이었다. 그날 저녁 수도원 성당에서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는 선창자의 노래로 시작됐다.
“형제들이여,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어라. 너희의 적 악마가 포효하는 사자처럼 배회하며 먹잇감을 찾으니, 믿음으로 굳세게 저항하라.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성모찬가(magnificat)를 부른 후 우리들은 야간 대침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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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30일 사제 서품 직후 고향 진남포 교우들과 함께(서울 대신학교). |
38선을 넘어 南으로
신학교로 돌아온 나는 다른 신학생들과 의논해 평양교구 홍용호(洪龍浩) 주교께 이 사실을 전하려 했다. 누굴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신학과 3학년인 지학순(池學淳)을 보내기로 했다. 마침 안셀로 신부님이 신학교로 오기에 “다니엘(지학순의 세례명)을 보내면 좋겠다”고 말하니 “지금은 갈 수 없다”고 했다. 이유인즉, 이미 북한 공산당이 인원을 체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장 평양교구에 전해졌고 홍 주교님은 북한 공산당에 항의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도주 염려도 없는데 왜 보나파시오 주교를 체포하느냐’며 몰수한 재산도 즉각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상이 홍 주교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주교가 납치된 상황에서 무턱대고 ‘사자 굴’로 들어갈 수 없었다. 세 번째 만나자는 전갈이 왔을 때는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웠다. 내무상을 만나러 떠난 홍 주교는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보나파시오 주교님이 납치되고 이틀이 지난 뒤 덕원수도원에 남아 있던 외국인 신부와 수도자들마저 잡혀갔다. 남은 이는 한국인 신학생과 수사들뿐이었다. 정치보위부는 우리에게 “착취에서 해방됐다”며 신학교를 떠나게 했다. 그때가 1949년 5월 13일이었다. 신학과 4학년, 부제(副祭·부제품을 받은 성직자. 사제를 도와 강론과 성체 성사 따위를 집행할 수 있다)로서 사제 서품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평양교구 출신 신학생들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홍 주교님마저 그날 오후에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양교구청을 찾아갔더니 “재주껏 남쪽으로 내려가 서울의 신학교에 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지학순 신학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두 번이나 잡혀 옥살이했다는 이야기를 나중 들었다. 그러나 부제인 나는 갈 수 없었다. 신부님들이 “이북의 신부들이 다 잡혀갈 테니 부제라도 남아 교구를 돌봐야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고향인 진남포로 내려가 부모님과 조우한 뒤 진남포 성당 사제관에서 몇 달을 지냈다. 그 사이 홍 주교님에 이어 부주교님까지 잡혀갔을 정도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평양교구장 서리가 된 박용옥 티모테오 신부님이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부제이니 미사를 집전할 수도 없고, 그러니 남쪽으로 갈 수 있으면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 초 평양주교관을 지키던 덕원신학교 동기인 장선흥 부제에게 전갈이 왔다. “남쪽으로 안내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의 얘기를 다 들어보고 (탈북을)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지학순 신학생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그날 저녁 7시쯤 우리를 안내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평양의 한 여관에 들어섰다. 일찌감치 오후에 사전답사까지 해두었다. 그 안내원은 내게 거짓 주소를 알려주며 “혹시 잡히면 삼촌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둘러대라. 도중에 잡혀도 꺼내 주겠다”고 말했지만, 도무지 맘이 안 놓였다. 동행하기로 한 지학순이 남쪽으로 내려가다 두 번씩이나 잡혀 감방살이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모험을 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이튿날 지학순은 농부 차림, 나는 양복을 입고 전혀 남남처럼 평양에서 황해도 금교까지 가는 기차에 올랐다. 예정대로라면 금교에서 내려 38선을 넘을 계획이었다. 기차를 탄 나는 지학순이 어느 칸에 탔는지를 알아둬야 했기에 기차 칸을 차례로 훑었다. 먼저 지학순을 발견한 나는 헛기침과 눈빛으로 내 존재를 알렸다.
‘신막’이라는 곳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깜깜한 밤중이었는데 검열관들이 승객들을 모두 플랫폼에 일렬로 세웠다. 그런 다음 공민증을 일일이 확인했는데 지학순은 무사통과했지만 나는 잡히고 말았다. 다른 승객들이 하나둘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 불안한 마음이 심해졌다. 그런데 역 출구 쪽을 보니 평양에서 만났던 안내인이 있지 않은가.
그 안내인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검열관에게 무언가를 내보였다. 그리고 잠깐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나를 빼내 주었다. 그가 도대체 무얼 보여줬으며 그가 나눈 얘기는 무엇이었을까.
나중에 그 안내인이 이중첩자란 사실을 알게 됐다. 남한에서는 국방부 2과에 소속된 요원이었고, 북한에서는 대남공작원으로 남북을 오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작원을 호송하는 ‘요원 패스’를 보여주며 나를 대남 공작원으로 둘러댔을 것이다. 그렇게 지학순과 나는 남쪽을 넘어 1950년 1월 17일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다.
죄를 고하겠다고 찾아온 피란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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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포 성당. 해성학교 운동장. 중간)진남포 성당 전경. 당시 전국적으로 몇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교세가 컸다. 아래)덕원 수도원의 아침 풍경. *사진 출처: 평양교구 설정 80주년 준비위원회, 메리뇰외화방점교회 미국 뉴욕주 본원.(평화신문 2007년 4월 22일자) |
서울에 도착한 나는 1950년 3월 20일 혜화동 성신 대학(현 가톨릭대)에서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 중림동(약현) 성당에서 첫 미사를 올렸다. 38선을 넘어 사제의 길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뜻대로 살리라 다짐했다. 혼자 월남해 축하해 줄 가족이 없었지만, 평양출신 신자들이 크게 축하식을 베풀어 주었다. 나는 명동성당 보좌신부이자 본당의 혼성합창단 지도신부, 계성초등학교 교리교사로 목자의 길을 걸었다.
6·25가 발발한 그날, 나는 가을로 예정된 합창단 공연준비로 분주했다. 오후에 공연 협찬문제를 상의하러 경향신문에 갔던 신태민(당시 그는 경향신문 기자였다)씨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전쟁이 터졌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기총소사 소리가 들려왔고 전투기 한 대가 서울 하늘 위로 무섭게 날아다녔다. 6월 27일에는 명동성당 앞을 지나는 피란민이 큰 무리를 이뤘다. 명동성당 본당신부인 장금구(莊金龜) 신부께서 “죽든지 살든지 여기 있자”고 했는데 밤중에 포성이 들리고 상황은 점점 급박해졌다. 그날 밤 인민군이 서울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6월 28일 미사를 빨리 드리고 어떻게 대처할지 결정하려는데, 교우들이 성당 고해소(사제에게 죄를 고백하는 곳)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전쟁과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러 찾아온 것이다. 조당(阻擋·가톨릭 교리에 어긋난 혼인)을 풀어 달라는 신자도 적지 않았다. 28일부터 2~3일 동안 고해소에는 신자의 줄이 끊이질 않았다. 아침 먹고부터 저녁 잠들 때까지 신자들의 죄 고백을 들어야 했다.
그런 어느 날, 내게 교리를 배우던 육군 대위가 찾아왔다. 사복을 입은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종로4가 인근에서 인민군과 싸우다 혼자 낙오됐다는 것이었다. 그는 남쪽으로 부대를 찾아가겠다고 했다. 생사가 위급한 상황이어서 중요한 교리 몇 가지를 더 설명하고 사제관 싱크대 앞에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나중에 서울거리에서 그를 잠깐 만났는데 춘천 전투에 참가했었다고 했다. 그 후로는 소식이 끊어졌는데 아마 전사했으리라.
또 성당 합창단원 중 한 분(직지심경을 발견한 在佛 서지학자 박병선)이 찾아와 나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가슴이 떨리고 무서웠다. 피란갈까, 아니면 그냥 있을까. 어떤 판단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당시 노기남 주교님을 대신해 서울교구를 책임지고 있었던 이기준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하느님 뜻을 따르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죽는 것이 더 낫다. 떳떳하게 있다가 잡혀가자.”
나는 “알았습니다” 하고 답했다.
며칠 후 북한 정치보위부에서 나를 찾아왔다. 성당 마당에서 한참 동안 신문을 하고 승강이를 벌였는데, 성에 차지 않았던지 “잠깐만 경찰서에 와서 마지막으로 정리하자”고 했다. 나를 잡아가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본당 신부님께 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맡기고 서울 중부경찰서로 향했다.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게 됐다. 정치보위부는 내가 이북에서 어떤 경로로 탈출했으며 누가 탈북을 도왔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게 “당신이 여기 남아있는 것은 ‘오열(第五列)’, 스파이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지금 지령을 받는 게 뭐야. 무슨 공작을 하려는지 말하라”고 다그쳤다. 한참을 반동분자라며 협박하고 나서는 나를 달래는 투로 이런 말도 했다.
“절대로 여기서 했던 말을 옮기지 마라. 돌아가면 신부님이 물을 텐데 그냥 둘러대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천주교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반동분자가 있어 문제다. 반동분자를 색출하는 데 협조해 달라.”
나는 이북에서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정치보위부 앞잡이로 이용한 경우를 잘 알고 있었다. 신자를 포섭해 성당소식을 빼냈던 것처럼 나를 앞잡이로 삼으려는 게 뻔했다. 그는 오늘 나눈 얘기를 누설하지 말 것과 반동분자를 보면 알려달라며 각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상황을 모면해야겠다 싶어 도장을 찍었다.
그랬더니 “1주 뒤에 다시 와 교회 얘기나 하자. 혹시 내가 없으면 그냥 몇 자 적어놓고 가라”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편하게 대하다가 나중엔 꼬투리를 잡으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1주가 지났다. 이미 명동성당과 사제관은 몰수됐고 성당에서 운영하는 계성여학교 기숙사 하나만 쓸 수 있게 됐다. 그곳엔 나 외에도 피란 안 간 신부님과 수녀님이 몇 분 있었다. 혼자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종이에 몇 자 적어 경찰서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를 단칼에 끊어야겠다고 생각해 다시 되돌아왔다. 기숙사 사감 수녀에게 “누가 찾으면 없다고 해달라”고 부탁했다. 꼼짝 안 하고 며칠을 숨어 지냈다. 보위부에서 여러 번 나를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었다.
구산공소 시절
그러나 기숙사마저 몰수되자 당시 신학교 자리가 있던 용산으로 향했다. 용산역 부근은 워낙 포격이 심해서 내가 그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보위부가 알면서도 잡으러 오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나 잡혀갈까 봐 내 주임신부인 장금구 신부님이 많이 걱정했다. 결국 장 신부님이 경기 하남에 ‘교우촌’이 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 9월 8일 피란을 하기로 했다. 그곳에 구산(龜山)공소(公所·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을 이른다)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피란 가기로 한 그날, 의사 한 분이 찾아왔다. 신자이기도 한 그는 “왕진하고 오는 길인데 환자가 위독해 신부님께서 병자성사를 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가겠다고 자원했다. 어차피 잡힐 몸이라면 구산공소로 가는 중에라도 잡힐 것이 아닌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에 천막을 걷자 한 부인이 앓고 있었다. 병자성사를 주고 돌아오는데 발길이 무거웠다.
장 신부님과 함께 태릉을 거쳐 워커힐 쪽으로 걸어 경기 하남의 구산공소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신부님이 한 분 있었고 신학생도 여럿이었다. 신학생들이 우리에게 서울 소식을 자꾸 물었다. 전남 광주(光州)가 고향인 한 신학생이 “전쟁이 길어질 것 같으냐”고 묻기에, “빨리 끝날 것 같지 않다”고 답했다. 아마 전쟁이 오래갈 것이라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호남 출신 신학생 3명 중 2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다 인민군에게 살해됐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됐다. 무척 마음이 아팠다.
구산공소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함포 사격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9월 15일인가, 하루는 함포 사격이 쉬지 않고 들리는 것이었다. 무슨 큰일이 일어났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마을 앞으로 인민군 패잔병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전세가 바뀌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갈 궁리를 했다. 장 신부님과 나, 그리고 최민순 신부님이랑 작은 배를 빌려 다른 피란민과 함께 한강을 건넜다. 그때 미군 정찰기가 우리를 보고 저공비행하며 다가왔다. 몇 번을 머리 위로 비행하더니 되돌아갔다. 북한군이 아니라 양민으로 봤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한강을 건너 워커힐 쪽으로 걸어가는데 포탄이 머리 위를 지나 북쪽으로 빗발치듯 날아갔다. 휙 소리가 나고 얼마 후 꽝 소리가 들렸다. 서울에 입성, 광나루 쪽으로 향하는데 미군 지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마주 오던 지프가 어느 집 앞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다가가니 미군 병사가 우릴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손을 번쩍 들고 “가톨릭 신부”라고 외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손을 들게 한 뒤 돌려세웠다. 순간 뒤에서 총을 쏘려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주머니를 막 뒤지더니 ‘굿 피플’ 하며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얼마 후 장 신부님이 “군인들은 미군이나 인민군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볼멘소리를 하셨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처음엔 의아했는데 그 이유를 알았다. 우리를 돌려세운 미군 병사가 담배쌈지가 담긴 장 신부님의 가죽케이스를 슬쩍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서울 시내 쪽에 다다르자 태극기의 물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에 있을 신앙인들
인천상륙에 이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됐다. 평양교구 출신 장선흥·강현홍 신부님은 군복을 입고 국군과 함께 평양에 입성하셨다. 나는 일주일 뒤 평양교구 소속 미국 신부 안 몬시뇰, 길 신부님, 그리고 미국 기자랑 넷이서 지프 두 대에 나눠 타고 평양을 향했다. 평양 대성당에 도착하니 성당이랑 사제관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북한 선교의 희망이 가득 찼다. 진남포로 부모님을 찾아뵈었더니 모두 무사했다. ‘진짜 신부’가 되어 돌아온 나를 보며 가족과 교우들이 모두 기뻐했다.
교황청은 안 몬시뇰 신부님을 평양교구장 서리에 임명했고 나는 평양에서 북쪽으로 20, 30km 떨어진 영유본당 신부로 발령을 받았다. 영유로 떠날 준비에 분주한 어느 날 중공군이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전세가 어떻게 변화될지 알지 못했다. 급박하게 반전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교우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하기에, 나는 밀려났다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자들이나 먼저 피해 보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남편들이 먼저 피란을 떠났다. 뒤늦게 아내와 아이들이 남편 뒤를 쫓았으나 국군 뒤로 처지는 바람에 결국 영영 만날 수 없게 됐다. 그때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팠다. 내가 무조건 피란 가라고 말했다면 생이별은 없었을 텐데….
나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60년이 됐지만, 여전히 북한 신자들이 하느님을 믿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덕원신학교가 폐교되고 고향인 진남포로 돌아왔을 때 본당 신부님이셨던 조문국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얼마 안 가 다 잡혀가고 신부도 교회도 사라진 채 신자들만 남아 있을 텐데 그땐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목자(牧者)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했다.
또 홍 주교님이 조 신부님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조 신부님은 홍 주교님의 비서로 재임했다. “결국 북쪽의 신부들이 모두 잡혀갈 텐데 누가 남쪽으로 내려가 평양교구 복구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조 신부님과 나는 6·25가 터지기 전의 공산 치하에서 신자들에게 순교자의 정신을 가르치려고 애썼다. 매일 저녁 기도 후에 <순교복자전>(殉敎福者傳)을 신자들에게 읽어주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순교 선열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다.
조 신부님은 부제인 내 생각을 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부가 남쪽으로 피란 갔을 때와 끝까지 남아 신앙을 지키다 잡혀갔을 때, 어느 쪽이 신자들에게 더 힘이 되겠는가. 아무래도 후자 쪽이었다.
결국 조 신부님은 끝까지 진남포 성당을 지켰다. 그분은 성당을 뺏기고 어느 교우 집에서 지내시다 6·25가 터지기 하루 전, 공산당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후 소식을 듣지 못했다. 분명 조 신부님이 지키셨던 신앙이 신자들 마음속에 여전히 이어지리라 확신한다.
만일 내가 북한에서 사제가 되었더라면 선배 신부들과 같은 순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양교구장 서리 박 티모테오 신부님의 명에 따라 월남해 남한에서 사제가 됐다. 나를 살아남게 해 주신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오늘도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정리=金泰完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