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成洙 전 성공회대 총장
⊙ 1930년 출생. 단국대 정치과 졸업. 성공회 성미카엘신학원 졸업.
⊙ 성베드로학교 교장,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 성공회대 재단 이사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역임.
6·25 전쟁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기 전에 먼저 나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1930년생인 나는 일제강점기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배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중 광복을 맞았다. 배재중학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출신교여서 ‘우리 배재학당, 우리 배재학당, 노래하고 노래합시다’라는 교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1930년 출생. 단국대 정치과 졸업. 성공회 성미카엘신학원 졸업.
⊙ 성베드로학교 교장,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 성공회대 재단 이사장,
전국신학대학협의회 회장 역임.
배재중학교는 운동 잘하는 학교로도 유명해 체육 선생님은 전국 각지에서 운동 잘하는 아이들을 선발해 훈련을 시켰다. 운동에 관심과 소질이 많았던 나는 그 틈에 끼여 여름에는 농구, 겨울에는 아이스하키를 하면서 학업보다는 운동에 열중했다.
당시 아이스하키 명문은 휘문중학교였다. 그런데 배재중이 아이스하키부를 창단하던 해 마지막 시즌에 휘문을 물리치고 선수권 대회 우승컵을 차지했다. 신생팀이었지만 선수들의 실력이 그 정도로 뛰어났다.
주치의였던 군의관 매형 행방불명
배재중학교 졸업반(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중·고등학교가 중학교로 통합돼 있었다)이 되어 마지막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러 춘천에 갔다. 운동을 끝내고 합숙소인 여관으로 돌아와 쉬는데 난데없이 각혈을 했다. 나는 행여 시합에 누가 될까 전전긍긍하면서 남몰래 밤새도록 피를 토했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엄청난 양의 피를 쏟자 놀란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갔는데 의사로부터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폐결핵 3기였기 때문에 생명에 위협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담임이었던 이종진 선생님께 이러한 사실을 고하니 어떻게든 졸업은 할 수 있게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다.
입시철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 내내 공부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그저 할 줄 아는 건 운동뿐이니 아이스하키부가 있는 학교를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연세대학교에 지원을 했다. 결과는 불합격. 신체검사에서부터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말았다. 운동선수의 몸 상태가 그런 지경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건강을 회복하는 데 내 모든 신경을 쏟게 되었고, 그러던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나에게는 군의관인 사촌매형이 있었는데, 워낙 재미있고 다정한 분이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픈 나를 찾아와 주사도 놔 주고 밥도 사 주곤 했다. 어느 일요일, 매형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군인들은 속히 부대로 복귀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부대로 돌아간 사촌매형은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6·25의 비극은 당장 눈앞에 보이고 기억하던 사람들이 수없이 사라진 데서 시작되었다.
며칠 후 서울 시내에 대포소리가 나고 피란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종로구 가회동인 우리 집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재동이었는데, 그쪽 거리에는 마차에 피란 보따리를 가득 실은 인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의 북쪽인 성북구 돈암동에서부터 남쪽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진풍경이었다.
폐병 환자는 인민군도 피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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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ㆍ4 후퇴 때 소 달구지에 짐을 가득 싣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피란민. |
그렇게 많은 사람이 피란을 가는데 라디오에서는 연일 아무 걱정하지 말고 집에 있으라는 방송을 했다. 순진한 소시민들은 정부 말만 믿고 피란을 가지 않고 있다가 한강철교가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불안에 떨기도 했다. 우리 가족도 피란을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는 판단과 무엇보다 아픈 나를 어찌할 수 없어 집을 지켰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을 의용군으로 뽑아 집 앞에 있는 재동초등학교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동네 반장이던 할아버지는 인품이 좋은 분이었는데, 행여나 내가 의용군에 뽑혀 고생할까 봐 일부러 내 병을 소문내고 다녔다. “김성수 저놈은 중학교 다니며 운동하다 폐병에 걸렸다. 저런 애 의용군으로 데려가 봐야 밥만 축내고 병이나 옮기니 내버려 두라”고. 그 때문인지 그 누구도 내게는 접근해 오지 않았다. 인민군에게 우리 집은 ‘폐병 환자가 있는 집’으로 격리 대상이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결성된 의용군에게 총과 칼로 훈련시킬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재동초등학교 교정에서는 밤낮으로 노랫소리만 쩡쩡 울려댔다. 의용군의 군가는 처음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불협화음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웅장하고 그럴싸한 화음을 찾아갔다.
서울 사대문 밖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국군이 들어온다, 인민군이 퇴각을 한다,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다들 먹을 게 없어 배를 곯고 있었다. 가회동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은 일찌감치 피란을 가거나 쫓겨나 인민군 간부들이 그 집들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앞을 내다보고 사는 분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 집에는 그해에도 1년치 쌀이 쌓여 있었다. 인민군이 그 쌀가마를 보면 부자로 여길 게 뻔해 쌀들을 치운다고 부산을 떨기도 했다.
쌀이 많아도 식구들은 아껴 먹어야 한다며 죽을 쑤어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데도 아픈 나에게는 매 끼니 밥을 지어 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서울에서 버티다 전쟁이 국군에 불리해진다 싶자 동생들은 선대의 고향인 강화도로 피란을 갔다. 부모님은 나 때문에 가회동에 남았다. 국가적으로 가장 위급한 시기에 개인적으로 중병을 앓고 있었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나라와 가족에 대해 큰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전쟁 중에도 폐결핵 요양원은 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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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전쟁 당시 서울 명동의 모습. 파괴된 건물 잔해 너머로 명동성당이 보인다. |
전쟁이 나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온 나라가 전에 없던 환란에 휩싸여 있는데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만 누인 몸을 일으켰다. 꼬박 석 달 동안 방 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병을 치료하는 데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밥 먹고 누워서 자다가 화장실 가고, 다시 밥을 먹고…. 세상과 차단된 내 방 안은 적막강산이었다. 가끔 문틈으로 내다보이는 군인들의 모습과 사람들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날 바깥세상과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우습게도 정점에 오른 병세는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다. 민족사의 가장 비극적 상황인 6·25전쟁 중에 오히려 내 병은 나아 가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그렇게 투병을 하다 1·4후퇴 때가 되어서야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여동생은 그곳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남동생은 훗날 여의도 비행장에서 도미(渡美)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6·25전쟁 이후 가족이 모여 살 기회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그때만 해도 폐결핵은 생명을 위협하는 무서운 병이었기 때문에 내 병균이 어린 동생들에게 전염이라도 될까 봐 말도 잘 섞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병들고 못난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열의는 피란 중에도 계속되었다. 가족이 부산에 있을 때에도 아버지는 내 병을 고쳐 보겠다고 여기저기를 수소문해 마산 요양원으로 데리고 갔다. 폐결핵 환자가 넘쳐 나는 통에 마산에 있는 여관에서 한 달을 대기하면서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얼마 동안 요양원 생활을 하다 부산으로 가서 지냈다. 그리고 서울이 수복되자 상경했다.
전란 중이라 폐결핵 치료제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부모님께서는 몇 년 동안 그 비싼 약을 떨어지지 않게 마련해 놓았다. 몸에 좋다는 음식과 보약은 모조리 구해 놓아 하루가 멀다 하고 내 밥상에는 고깃국이 올라왔다. 선박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궁핍하지 않은 생활을 했는데, 그렇다 해도 나의 치료비로 나가는 비용이 꽤 부담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늘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시간은 그렇게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멈춰진 시간과 공간에 갇혀 아무 생각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병세가 호전될수록 정세는 어제와 또 달라져 있었고, 내 주위의 상황도 급격히 변해 갔다.
3대째 모태신앙이던 나는 당시 정동에 있는 성공회 교회를 다녔는데, 난리 중에 신부님이 인민군에게 잡혀갔고, 교인들을 두고 피란 갈 수 없다던 주교님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수녀원에 있던 영국과 한국 수녀 중에도 몇 분은 고초를 겪다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친구 가운데 어떤 이는 인민군이 들어온 후 협조를 하다 철수할 때 그들을 따라가고, 어떤 이는 피란을 가다 가족과 생이별을 하거나 죽기도 했다는 둥 어수선한 풍문은 만감이 교차하게 했다. 시대적 격변기에 단지 건강해질 날만을 기다리는 내가 한심했다. 전쟁이 낳은 많은 이의 아프고 슬픈 사연들을 접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더욱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다.
평생 기도하며 살아야 할 운명
휴전이 되고 난 후, 나의 건강도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어머니께서는 이제 건강을 되찾았으니 대학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전후 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에 대학 가는 게 어렵지는 않아서 그 길로 단국대에 등록을 했고, 졸업 후 아버지가 친구들과 동업으로 운영하던 회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수원에 있는 회사 인근에는 성공회 교회가 있어 자주 놀러 갔고 그 안에 있는 고아원의 원아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아 주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고아원의 원장님, 보모, 아주머니 등 많은 분께서 입을 모아 신부가 되면 좋겠다고 한번 해보라고 설득한 게 평생 나를 성직자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나는 엉터리 주교다. 그동안 나를 밀어주고 끌어 준 사람들 덕에 감사하게도 제대로 한 일 하나 없이 이 자리까지 왔다.
6·25전쟁은 민족의 아픔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많은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위중한 병에 걸려 다른 이들의 비극적 현실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도 그러했지만 가족의 헌신에 대한 미안함과 나 자신의 무력함이 덧대어져 한동안 심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전쟁이 나를 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사람, 특히 6·25 때 희생된 수많은 영혼을 위해, 그리고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죽을 때까지 기도하며 살아야 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리=郭少慶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