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東鍵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 1938년 출생. 경기중·고, 연세대 교육심리학과 졸업.
⊙ 동아방송·TBC·KBS 아나운서. KBS <11시에 만납시다>, <가요무대> 등 진행.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이던 1950년, 이북(평양) 출신인 우리 가족은 서울 보신각(종각) 뒤에 있는 집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난 6월 25일 저녁 땐 대포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뉴스를 통해 북한이 소련제 탱크를 몰고 일제히 남침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른들은 한데 모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도 고향사람이 여러 명 같이 살고 있었고,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1938년 출생. 경기중·고, 연세대 교육심리학과 졸업.
⊙ 동아방송·TBC·KBS 아나운서. KBS <11시에 만납시다>, <가요무대> 등 진행.
어른들은 “이북사람들이 내려오면 우리를 가만둘 리가 없다”며 불안해했다. 북한에서 북한을 등지고 월남한 사람들에게 보복한다는 소문에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시민들은 동요하지 말라”고 반복했지만, 우리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모님과 형은 피란을 서두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27일 밤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어린 동생도 보따리를 짊어졌다. 원효로에 있는 지인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28일 새벽에 한강철교를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우리는 27일 밤늦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천지를 흔드는 굉음에 잠을 깼다. 뛰어나가 보니 우리가 건너려 했던 한강철교가 끊긴 것이었다. 철교는 부서지고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한강을 건널 방법이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점심때쯤 됐을까. 서울역 광장에 인민군 탱크들이 보였다. 인민군은 시내 곳곳에 들어와 있었고 당분간 피란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인민군이 빨리 내려왔던지, 빨리 떠난다고 떠난 우리 가족조차 피란을 못 떠났으니 서울시민 대부분은 서울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인민군들을 보면서 우리 집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대학생 형이 전장에 끌려갈까 가장 걱정스러웠고, 이북 출신으로서 겪을 고통이 두려웠다. 집에 오는 길엔 도살장에 끌려오는 소가 된 기분이었다.
그 후 우리는 지옥 같은 석 달을 보내야 했다. 우리 집은 찾아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북쪽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계속 찾아와서 보고 싶었다며 반가워했다. 인민군 내무서원이라느니 하는 감투를 하나씩 달고 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제 걱정 마라, 좋은 세상이 올 것이다”라며 지나치게 반가운 척을 해서 어린 마음에도 반감과 불안감이 커져 갔다.
특히 문제는 서울대 문리대에 재학 중이던 20세의 형(김동석, 전 KBS연수원장)이었다. 젊은이와 대학생은 무조건 인민군이 잡아간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는데, 이북 출신이기까지 하니 잡혀 갈 순위로는 0순위나 마찬가지였다.
지하실-천장-벽장으로 숨어 지낸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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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건너려기 직전 폭격에 끊어진 한강철교(왼쪽). |
형은 계속 구석방에 숨어 지내며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형을 찾아오면 모른다고, 벌써 피란 갔다고 말하는 것이 나와 어머니의 일이었다. 어머니와 내가 잘 아는 옛날 친구들도 어떻게 알았는지 속속 찾아왔다. 형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해도 그들은 순순히 돌아가지 않았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 당장 찾아오라는 사람, 오면 빨리 연락해 달라는 사람 등등 막무가내였다. 어느 날은 형의 옛 친구라는 사람이 왔는데 잠시 밖으로 나왔던 형과 마주쳤다. 그 사람은 형과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며 함께 나갔는데, 저녁때가 돼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형을 찾으러 서울 시내를 다 뒤지다시피했다. 의용군 집합장소는 물론 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다 찾아다녔다. 결국 을지로4가의 한 국민학교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형을 빼내 올 방법은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가서 저녁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당시 잡혀 있던 젊은이들은 이북으로 연행이 결정됐고 도보로 이동을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무작정 그들을 따라갔다. 을지로에서 불광동을 지나 구파발쯤 갔을 때였다고 한다. 미군 비행기가 공습을 시작했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폭격을 피해 흩어지고 숨는 틈을 타 형은 도망칠 수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형은 두 달 가까이 지하실과 천장 등에 숨어 살았다. 사람들이 찾으러 와서 지하실까지 뒤지려 할 때면 천장으로 기어 올라가 숨었다. 사람들은 형을 찾겠다며 천장을 긴 막대기로 마구 찌르기까지 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참담한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천장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형은 벽장 속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는 그 앞에 장롱을 놓아 아무도 그 속에 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없도록 했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보낸 3개월은 우리 가족에겐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언제 끌려갈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부모님은 옛 지인들이 ‘완장 찬’ 사람이 돼 우리 집에 찾아오는 것을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전쟁 발발 직후 국민학교는 휴교상태였는데, 7월쯤 등교하라는 연락이 왔다. 학교에 갔지만 예전의 학교가 아니었다. 교사들은 북한을 찬양하는 사상교육에 열심이었고, 북한 노래를 시도 때도 없이 불러야 했다. 어머니는 학교에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안 가니 학교에서 찾으러 오기도 했다.
베개 속에 숨긴 쌀로 연명
인민군은 모든 집을 뒤져 식량을 모조리 뺏어 간 후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에게만 배급을 실시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머니가 미리 숨겨 놓았던 쌀이 있어 굶주림만은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전쟁이 난 직후 집에 있는 수십 개의 베개에 든 속을 모두 빼내고 쌀을 채워 이불장 안에 넣어 놓았는데, 집을 샅샅이 뒤지던 인민군도 이것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부식거리라고는 전혀 없어서 밥을 지어 시커먼 굵은 소금에 찍어먹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그나마 꽁보리밥이라도 먹는 집은 괜찮은 형편이었다. 초근목피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먹을 것이 귀했다. 그야말로 목숨부지, 연명만 하던 나날이었다. 주변에서는 누군가 여주·이천까지 걸어가서 쌀을 구해 오다가 인민군 총에 맞았다는 등의 흉흉한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다. 식량과 생필품이 없어서 겪는 고통은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서울수복 기쁨도 잠시, 다시 피란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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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를 행진하는 인민군. 인민군 치하의 서울은 우리가족에겐 지옥과도 같았다. |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엔 새벽부터 콩 볶는 듯한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진동했다. 국군이 서울시내로 들어온 것이다. 퇴각하는 인민군이 서울시내 곳곳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보신각은 물론 종로와 을지로 일대가 불바다로 변했다. 보신각 인근의 우리 집도 물론 불에 탔다. 우리 가족이 불을 피해 나왔을 때는 광화문 쪽에 국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마지막으로 퇴각하는 인민군이 을지로 부근을 지나갈 정도로 국군과 인민군이 거의 근접한 형편이었다. 우리는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껴서 삼각지의 지인 집으로 피하고 있었다.
인민군들은 국군이 바로 몇십 미터 앞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는 부상병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날 청계천은 피 흘리는 인민군 부상병들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세종로부터 종로까지 부상병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불길도 하루종일 계속돼 그날의 서울은 마치 아비규환의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29일 동네가 잠잠해지고 나서 친구들과 함께 광화문까지 걸어갔는데, 새카맣게 타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불타 버린 집 대신 근처의 어머니 지인 댁에서 함께 살았다. 좁은 집에 많은 식구가 복잡하게 살았지만 국군이 북진한다는 뉴스를 계속 들으면서 이제 통일이 될 거라는 희망이 생겼고 크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돌연 1·4후퇴 소식이 들려 왔다. 이젠 피란을 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1월 4일 영등포에서 출발하는 피란열차에 탄 피란민들은 다들 당연히 부산 종점까지 가는 분위기였지만, 아버지는 대전에서 내리자고 주장했다. 고향(평양)이 더 멀어지는 게 싫다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대전에 내렸다가 인민군이 대전까지 내려오면 그때 또 피란을 가자는 얘기냐”며 강하게 반대했다. 부모님은 심한 언쟁을 벌였고, 절충안으로 대구에서 내렸다.
대구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웬만큼 자리를 잡은 1951년, 나는 대구사범대 부속국민학교 6학년으로 들어갔다. 전쟁이 난 이후 학교에 전혀 다니지 않았기에 6학년을 두 번 다니기로 한 것이다.
중학교 진학하러 상경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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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전쟁고아들. 나 역시 전쟁고아가 될 뻔한 순간이 있었다. |
당시 대구는 꽤 작은 도시였는데, 시내 전체가 피란민으로 바글바글했다. 그래도 시장이 있어서 식량이나 생필품은 어느 정도 구할 수 있어서 인민군 치하의 서울생활 3개월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셋방을 대여섯 군데쯤 전전하며 살았다. 작은 집을 구할 정도로 피란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우리 형제의 교육이 문제가 됐다. 형이 다니던 서울대는 부산으로 갔고 대구에는 다닐 대학이 없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형은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나는 6학년 때 중학입학 국가고사에 응시했고, 경기중학교 입학전형에 합격해 1952년 3월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경기중은 부산에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부산이 아닌 서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버지는 서울로 가서 불타 버린 집터에 새 집을 짓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나도 상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 중이라 일반교통편이라는 게 없어 당시 소대장이었던 형이 북쪽 전선으로 군용열차를 타고 이동할 때 따라가기로 했다. 4학년이었던 동생도 함께 탔다. 나와 동생 둘이서 아버지에게 갈 요량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중이어서 아무나 한강을 건너갈 수 없었고 민간인이 한강 이북으로 가려면 도강증(渡江證)이라는 게 필요했다. 한강다리 입구에 서 있던 미군 헌병은 나와 동생을 보더니 당장 내리라고 했다. 한국 헌병이라면 사정사정해 가며 조금만 더 타고 가겠다고 부탁했겠지만, 미군 헌병에겐 통하지 않았다. 형은 군인의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중인 만큼 동생들과 함께 내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형은 나에게 약간의 돈을 쥐여 주며 “가까운 흑석동에 여인숙을 운영하는 지인이 있으니 그곳에서 기다리면 금방 데리러 가겠다”고 했다. 형이 가르쳐 준 대로 꼬불꼬불한 골목길 안에 위치한 조그만 여인숙을 어렵게 찾아갔다. 어린 국민학생 둘을 맞은 여인숙 주인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그래도 여인숙 주인은 우리를 내치지는 않았다. 잠은 외상으로 재워 주겠노라고 했다. 다만 밥은 줄 수 없다고 했다.
하루 국수 한 그릇으로 동생과 나눠 먹어
흑석동 허허벌판에는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는 집이 딱 한 곳 있었다. 국수를 파는 조그만 가게였다. 가진 돈이 별로 없어 동생과 나는 점심때 국수 한 그릇을 사서 나눠 먹고 오후 내내 강가에 앉아 한강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리 위에 군용트럭이 한 대 지나가면 긴장했다가 형이 아니어서 실망하고, 또 다른 차를 기다렸다가 캄캄해지면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국수 반 그릇으로 버티자니 배에선 늘 꼬르륵 소리가 났고 동생은 계속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밤에도 배가 고파서 잠이 잘 안 올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인숙 주인도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다. 전쟁 중에 일선에 나간 군인이 멀쩡하게 돌아올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는 “처지는 안됐지만 형이 다시 올 수 있겠느냐”라며 “차라리 힘들더라도 대구로 어머니를 찾아가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대구는 당시 기차로도 꼬박 하루 이상 가야 하는 거리였다. 도저히 어린아이들이 걸어갈 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걸어갈 기력도 없었다. 형과 약속을 했으니 그냥 갈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우리가 머무른 방은 문만 열면 골목길이 나오는 허름한 방이었다. 어느 날 밤 덜컹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계세요?”라며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꿈일까도 생각했지만 눈을 떠 보니 역시 형이었다. 형이 어둠 속에서 “동건이 있니?”라고 하기에 나 여기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눈물부터 먼저 났다. 그렇게 기다리던 형을 만났는데 말 한마디도 못하고 눈물만 펑펑 흘렸다. 당장 자고 있던 동생을 깨워서 떠나기로 했다. 형은 밀린 방값을 계산하고, 우리를 군용트럭에 태우더니 담요를 씌우고 헌병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마터면 전쟁고아 될 뻔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형이 전쟁터에서 부상당했거나 전사했으면 나와 동생은 어떻게 됐을까? 내가 형이나 부모님한테 가겠다고 길을 떠났으면 어떻게 됐을까? 형이 더 늦게 돌아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말로만 듣던 전쟁고아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고생하는 내용의 뉴스나 프로그램을 보면 눈물부터 난다.
그 후 전국의 여러 중학교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서울종합학교라는 곳에서 중학교 공부를 했다. 1952년 경기중학교가 서울로 올라왔고, 그때부터 나는 경기중·고에 다닐 수 있었다. 1952년 중반쯤부터 일반 시민이 서울에 거주하는 것이 허가됐고 대구에 계시던 어머니도 올라와 가족이 모두 모이게 됐다.
학교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전쟁의 그림자를 거둘 순 없었다. 고학년 선배들은 의용군으로 군대에 갔다 오기도 했고, 학생들은 일주일에 3~4시간씩 제식훈련 등 교련수업을 받아야 했다. 휴전 직전에는 선배들과 함께 휴전반대 데모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53년 휴전이 이뤄졌고, 이후 나는 학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6·25의 구체적인 전황을 실감하기엔 어렸지만,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나는 한강철교가 무너진 광경을 기억한다. 다리를 건너던 피란민들이 물에 빠져 죽고, 탱크가 빠져 절반쯤 잠겨 있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참혹한 현장을 그대로 보전해 후세가 전쟁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해야 하는데, 역사의 현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은 매우 아쉽다. 6·25 참전용사를 국가에서 충분히 대우해 주지 않는 현실도 안타깝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 피상적으로 6·25를 가르친들 그들이 어떻게 그 아픔을 실감할 수 있을까.⊙
<정리=權世珍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