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順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전 체신부 장관
⊙ 1931년 출생. 서울대 공대 전기과·미국 버클리대 전기공학 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박사.
⊙ 미국 NASA-JPL 연구위원, 전기통신연구소장, 체신부 장관,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한국과학기술대 학장,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등 역임.
1950년 봄, 나는 서울대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등록금이 당시 돈으로 4만원이었는데, 집이 가난해서 마련할 수 없었다. 등록 날짜를 못 지키면 합격이 무효가 되기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다. 답답한 현실에 산에 올라가 뛰어내릴 생각까지 했다.⊙ 1931년 출생. 서울대 공대 전기과·미국 버클리대 전기공학 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전기공학 박사.
⊙ 미국 NASA-JPL 연구위원, 전기통신연구소장, 체신부 장관, 한국전력공사 이사장,
한국과학기술대 학장,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등 역임.
마감 하루 전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혼자 대구 서성로를 정처없이 걷던 내 등을 누군가가 쳤다. 고교 학부형회장님이었다. 같은 반 친구 윤창호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그는 대뜸 내게 “내일 서울 가지?”라며 물었다. 그의 아들도 서울대에 합격해 함께 진학할 예정이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는 눈치를 챈 듯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선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의논을 했다. 잠시 후 돌아온 그는 크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순달이 너 내일 이분과 함께 서울로 가라.”
그가 소개해 준 분은 ‘도 선생님’이란 사람이었다. 사업가인 그는 마침 중・고등학생 아들 2명과 초등학생 딸이 1명 있었다. 가정교사를 해 주는 조건으로 등록금과 숙식을 모두 해결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꿈만 같았다. 등록을 마친 나는 6월 10일 개강 날부터 신나게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원하던 학교에 진학했는데, 15일 만에 전쟁이 난 것이다. 처음엔 상황파악이 잘 안 됐다. 무슨 일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기억이 나는 장면은 군인들이 정복 대신 작업복에 카빈소총을 메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이동하는 것이었다. 전쟁 전 군인들은 나름 사치스런 복장을 하고 다녔는데, 전쟁이 터지자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배고픔 이기려 사카린 녹여 먹다 배탈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당했고, 북한 비행기는 삐라를 뿌려댔다.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순 거짓말인 것을 모두 알지만, 당시 꽤 많은 사람이 그 내용을 믿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동대문운동장 뒤 큰 기와집이었다. 스무 살 청년은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고향인 대구로 내려갈 길도 막막했고, 다른 방법도 없어 처음엔 그냥 집에 가만히 있었다. 인민군이 싫었지만, 밖에 나가면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빨간 리본을 달고 환영하는 척도 했다. 인민군도 처음엔 우리에게 친절하게 대해 줬다.
문제는 먹을 것이었다. 부잣집이긴 했지만, 준비된 식량은 한정돼 있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몰랐고, 그렇게 오래가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먹을 것을 아끼기 위해 큰 사발에 감자와 보리밥을 넣어 먹었다. 아침, 저녁 하루 두 끼를 먹었는데, 스무 살 청년에겐 턱없이 모자란 양이었다. 배고픔을 참다못해 하루는 사카린을 사다가 물에 녹여서 먹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았다. 며칠 동안 계속 그렇게 먹다가 결국 탈이 났다. 화장실에 가는데 갑자기 혓바닥을 잡아당기는 듯한 고통이 왔다. ‘큰일 나겠다’ 싶어 동기생인 윤창호와 함께 남양주로 쌀을 사러 나섰다.
농가를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옥수수밭 옆 길을 걸어갈 때였다. 멀리 미군 제트기가 보였다. 우린 아군(我軍)인 줄 알고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옆 밭으로 폭격하는 것이 아닌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우리는 부리나케 옥수수밭에 몸을 숨겼다. 순간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전쟁의 공포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안 사실이지만, 그 전투기들은 남양주의 금곡역을 폭격한 후 돌아오는 길에 인민군 잔당을 공격했다고 한다.
결국 쌀을 구하지 못한 우리는 농가에서 참외를 샀다. 대충 허기를 때운 후 남은 참외를 집으로 가져와 동대문 운동장 뒷담 아래 장을 열고 참외를 팔았다. 전쟁 중에 제대로 팔릴 리 만무했다. 반은 우리가 먹고 반은 팔아 치웠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8월 초순이 됐다. 밤 10시쯤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그 집엔 바깥 대문과 안대문이 따로 있었는데, 식모 아주머니가 문을 열려고 나가는 순간 이미 바깥 담벼락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다짜고짜 방들을 차례로 뒤져댔다.
나는 당시 도 선생의 둘째 아들과 한방을 쓰고 있었다. 내 책상에서 교과서와 영어사전을 발견한 그들은 “동무, 이런 책을 보니까 정신 상태가 형편없는 것 아니냐”며 타박했다. 그리고 다른 방까지 수색을 마친 그들은 별말 없이 집을 떠났다.
인민군, 젊은이 없자 주인아저씨 대신 잡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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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부산의 판자 칸막이 노천학교. 전쟁 중에도 한국인의 교육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
내가 살던 도 선생의 집은 친척들과 손님들이 많아 대가족이었다. 그리고 주인아주머니가 참 총명했다. 아주머니는 “그들이 오늘은 그냥 갔지만, 정탐을 했으니 반드시 또 올 것”이라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부엌 뒤편 담장에 구멍을 내 놓고 평소엔 닫아 뒀다. 만약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집안의 젊은 남자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8월 중순 그들은 또 집에 쳐들어왔다. 이번엔 바깥 대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담을 넘더니, 곧바로 안대문을 두드렸다. 마침 집에 있던 주인집 조카와 나는 곧바로 부엌 뒷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모퉁이를 돌아 길가 담 옆에 숨었다. 그들이 집을 조사하는 것을 멀리서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은 손전등을 이곳저곳 비추며 집을 수색했다. 마침 모기가 속옷만 입은 내 온몸을 물어댔다. 따갑고 간지러워 때려잡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진 그들은 떠났고, 숨어 있던 우리는 그들이 완전히 안 보이자 다시 집에 들어왔다. 주인아주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젊은 남자가 없어 집주인인 도 선생을 데리고 가 버린 것이다. 아주머니는 “젊은 놈 때문에 영감이 잡혀갔다”며 화를 냈다.
다음 날 집에서 쫓겨나듯 나왔다. 주인아주머니 심정도 이해돼 뭐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주인집에서 소개해준 신당동의 한 공장에 들어갔다. 낡은 공장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미군들이 자는 침대가 있어 거기서 밤을 지새웠지만, 두렵고 막막한 마음에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먹을 것과 숨을 곳이 없는 공장에서 홀로 며칠을 보냈다. 전깃불도, 라디오도 없었다. 답답한 심정에 밤에 살짝 동대문 시장에 나가 양담배 세 개비를 사왔다. 생전 입에 대본 적이 없었지만, 일단 담배라도 피워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시니 정신이 멍해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그날 밤엔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처절한 공포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전쟁이 금방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한두 달만 더 있으면 미군이 와서 모두 물리칠 줄 알고 꽤 많은 사람이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세 살 위 이모와 부부 행세 위해 증명서 받아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인민군은 계속해서 서울 곳곳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잡아내 의용군 강제모집에 합류시켰다. 주변 남자들이 수없이 끌려갔다. 사상적으로 좌경화돼 있거나 얼떨결에 ‘의용군’이 된 경우도 많았다.
세상 물정을 자세히는 몰랐지만, 죽어도 의용군에 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더라도 차라리 국군에 입대해 싸우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감시와 수색의 망이 좁혀 오는 것이 느껴졌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피란길에 오르기로 결심한 순간, 마침 5촌 아주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편하게 ‘이모’라고 불렀던 그분의 남편은 육군 대위였다. 같은 해 봄 대학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에 왔을 때도 용산 미군부대 내 장교 관사인 그의 집에서 머물렀었다.
남편은 전쟁이 나자마자 옹진 전투에 나간 상태였고, 인민군이 집을 비우라고 해서 쫓겨온 것이었다. 세 살 딸과 함께 왔는데, 갈 곳이 없어 결국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나도 잘됐다 싶어 같이 가자고 했다.
이모는 머리가 좋았다. 여자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갔던 시절에 경북여고를 나왔으니 당시로선 꽤 엘리트였던 셈이다. 나보다 세 살이 많았고, 키는 작았지만 당찬 면이 있었다. 내가 “피란 가다가 검문소에서 걸려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가면 어떡하느냐”고 묻자 해결해 주겠다며 서류를 하나 받아 왔다. 인민위원회가 발부한 가족증명서였다. 이모가 평소 잘 알던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자신과 내가 부부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받아 온 것이다. 혼자가 아닌 ‘가장(家長)’이 된 나는 모병을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8월 22일, 기나긴 피란길이 시작됐다. 이모는 등짐을 허리에 걸어 매고 아이를 등에 업었다. 손에도 짐이 한 보따리였다. 건장한 체구의 내가 위축될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해 보였다. 위기가 닥치면 여자, 아니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했다.
나는 공장 근로자처럼 보이기 위해 구멍난 보릿짚 모자에 허름한 바지를 입었다. 신발도 낡은 것을 신으려고 하는데, 이모가 “신발만큼은 괜찮은 것을 구하라”고 했다. 역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다. 오래 걷기 위해선 좋은 신발이 필요했다. 이모는 발가락 사이에 비누도 칠하라고 했다. 물집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 짐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주로 학교에서 보던 책들을 쌌다. 책이 무엇보다 귀하던 시절이라 다른 것은 다 버려두고서도 책만은 꼭 챙겼다. 담배도 3갑을 사서 챙겼다. 내가 직접 피우기보단 어떻게든 쓸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장호원에서 마주친 인민군 장교
동대문에서 출발해 왕십리를 거쳐 한강에 다다랐다. 광진교 다리는 끊긴 지 오래였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강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 없다는 심정으로 강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마침 조그만 배 한 척이 보였고, 사공에게 부탁을 했다. 피란 가는 사람들과 함께 배에 올랐는데, 혹여 미군의 폭격이 있을까 두려워하며 강을 건넜다.
그리고 충청도를 향해 하염없이 온종일 걸었다. 소 달구지가 보이면 준비해 간 담배 한 개비를 주인에게 주고 짐을 올려놓고 걸었다. 밤이 돼 더는 갈 수 없어 사람들에게 어디냐고 물으니 장호원이라고 했다. 쉴 곳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마침 큼직한 기와집이 보였다. 부잣집인 것 같아 잠이라도 잘 수 있겠다 싶어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대답이 없어 돌아가려다 문이 열린 것 같아 밀었다. 쉽게 문이 열렸고, 마당에 들어선 우리는 누가 있나 싶어 방문을 열었다.
‘큰일 났다!’
방 안엔 저녁을 먹으려던 인민군이 가득 들어 서 있었다. 놀란 마음에 부리나케 도망가려 했지만, 사립문에도 이르기 전에 권총을 찬 인민군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동무, 어디 가나?”
인민군 장교는 우리의 행선지와 목적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또 ‘조국해방전쟁’과 ‘유물변증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서울 공장에서 직공(職工)으로 일해 그런 어려운 말은 잘 모른다”며 “고향에 가족을 데려다 놓고 의용군에 곧바로 지원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다급한 마음에 이모가 준비해 준 가족증명서를 내보였다.
그는 증명서를 보자마자 “이 위원장 또 가짜 증명서 만들어 줬구먼”이라며 우리를 험상궂게 노려봤다. 우리 전에 이미 몇몇 사람이 이 증명서를 이용했던 것이다. 인민군이 사람 한 명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시절, 그가 권총을 들어 쏘기만 하면 우리는 아무 소리 없이 죽어야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이었다.
“대장님! 준비 다 됐습니다!”
생사(生死)를 오가던 순간, 한 인민군이 뛰어와 보고를 했다. 그러자 그 장교는 잠시 생각하다 우리에게 “당신들 오늘 운 좋은 줄 알라우”라며 당장 떠나라고 했다. 상황 파악은 안 됐지만, 일단 우리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한참을 달려 멀리 벗어난 후에야 그들이 조금 전 소 한 마리를 잡아 저녁 잔치를 하려던 참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근처 농가에 들어가 하룻밤을 대충 자고, 가져간 양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이모는 허리에 찼던 보따리를 풀었다. 옷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찾아가 옷과 식량을 바꿨다.
친구 것이라 둘러댄 책에서 내 사진이 덜컥
한참을 걸어 충청도 음성에 도착했다. 시골의 아주 작은 초가가 보여 사람을 불렀다. 누가 봐도 못사는 집이었다. 하지만 충청도는 인심이 좋았다. 주인은 누추하지만 들어오라며 빈방을 내줬다. 흙방이었다. 없는 살림에 음식도 꺼내 주고, 막걸리도 줬다. 평생 처음 맛본 막걸리였다. 서울에서 음성까지 걸어가 죽음의 공포 한가운데서 마신 그 막걸리의 맛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피란길은 고통스러웠다. 종일 남쪽을 향해 공격을 피해 걸으니, 피곤함과 공포감이 함께 심신을 압박했다.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뭐라도 한번 타 봤으면 좋겠다’ ‘기차 한번 타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인민군의 물자를 나르는 기차를 보면 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한창 힘 잘 쓸 나이의 나는 힘들어 죽겠다며 계속 푸념했고, 옆에서 키도 작고 짐과 아이까지 업은 이모는 나를 달래 줬다. 그때 이모는 자신이 학교 다닐 때 일본인 선생이 해 준 말이라며 이런 말을 해 줬다.
“자꾸 여자처럼 약한 소리 토하지 마라.”
문경새재쯤에 왔을까, 우리는 어느새 산을 넘고 있었다. 마침 산 중턱에 검문소가 있었다. 인민군이 우릴 보더니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다. 고향에 가는 길이라고 하자, “지금 남쪽에 전쟁이 한창인데 당신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며 나의 행위를 “화약 들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나는 가야겠다고 말하자, 그는 대뜸 내 보따리를 풀어 보라고 했다.
보따리를 풀어헤친 그는 속에 가득한 책을 보면서 이게 뭐냐고 캐물었다. 다급한 마음에 “고향 친구가 의용군에 가면서 이 책들을 자기 집에 전해 주라고 부탁했다”고 둘러댔다. 내 말이 미심쩍었는지 인민군은 책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가 펼친 책 속에서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내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그는 내게 “친구 책 속에 당신 사진이 왜 있느냐”며 추궁했다.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왜 이 친구가 내 사진을 여기에 꽂아 놨을까”라며 대충 둘러댔다. 또 하늘은 우리를 도왔다. 인민군은 별 조치 없이 우리를 풀어줬다.
언덕을 넘어 내려가는 길에 또 한 명의 인민군과 조우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봤던 인민군과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많아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그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거의 기다시피 산을 오르고 있었다. 다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어깨엔 총을 둘러메고 있었다.
우리를 본 그는 자신이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다 의용군으로 끌려가 총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우리 처지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도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홀로 다리를 절면서 산에 올라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어린아이를 못 도와준 것이 가슴의 한으로 남는다.
발 뺀 신발에 발가락 껍질이 그대로 보여
우여곡절 끝에 언덕을 수차례 넘어 상주군 외남면에 도착했다. 어머니의 외삼촌(외외종조부) 집이 있는 곳이다. 이모와 함께 집에 들어가 마당에 걸터앉았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인지, 발바닥의 고통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바닥이 다 해진 신발을 벗으려는데, 발이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 했다. 물집이 다섯 겹으로 생겨 신발에 붙어 있었다. 겨우 발을 빼내니 발가락 5개 모양의 껍질이 신발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거의 일주일, 8월 말의 무더위와 오랜 피란길은 스무 살 청년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한 달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회복을 했다. 인민군이 쫓겨 후퇴하는 모습을 봤고, 국군이 치고 올라와 사람들과 함께 나가 환영을 하기도 했다.
나는 학도호국단 출신이다. 1949년에 발족한 학도호국단은 반공(反共)교육 등을 통해 투철한 민족의식과 국가관의 확립을 추구하는 단체였다. 전국 각 도(道)에서 몇 명씩 차출해 서울에 올라와 한 달간 훈련을 받았는데, 나는 경북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상하게 공산주의, 사회주의에는 정이 가지 않았다. 전쟁 전에도 주변의 소위 유식하다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주의를 선호했다. 북한이 유물변증법으로 모두가 잘살 수 있다며 이론 공격을 해 오자, 많은 사람이 홀딱 넘어가 버렸다. 나는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지금도 큰 변화보단 일단 지금 현재의 리더를 도와주자는 주의다. 고교 시절 같은 반 친구들도 상당수 좌익(左翼)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나는 그때부터 그런 모습이 싫었다.
한 달간 인민군과 국군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나는 군에 입대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마을 인근의 육군부대를 찾아가 입대 의사를 밝혔는데, 내 사연을 들은 담당자는 “당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난 후 입대해도 늦지 않다”며 나를 돌려보냈다. 상주경찰서에서 차를 주선해 줬고, 트럭을 타고 드디어 고향인 대구로 향했다.
내당동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나를 맞아 줬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온 것에 감격해 또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동생들도 다들 무사했다. 가족은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만약 서울에 안 가고 대구에 남았다면 인민군에 잡혀가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홀로 된 아들을 위해 아침마다 냉수를 떠놓고 기도했다. 하루도 안 빼고 오로지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빌었는데, 하루는 비둘기가 손에서 날아오르는 꿈을 꿨고, 그날 내가 돌아왔다고 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은 모두 완장을 팔에 두르고 허리엔 방망이를 차고 있었다. 일명 치안활동을 한다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어머니도 뵈었으니 다시 군에 입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왕 군에 가는 것 장교로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육군 병참학교 생도 모집에 지원했다.
20대1 경쟁률 뚫고 철도경찰시험 합격
원서를 내자 접수하는 사람은 내게 “이놈의 자식, 나이 스물도 안 된 놈이 장교를 하려고 한다”면서 나가라고 했다. 장교 지원에 연령 제한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엔 몰랐다. 다시 군에 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에 있던 헌병학교가 대구로 옮겨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신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대구 수창소학교로 시험을 보러 갔다.
시험장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시험 순서는 헌병학교 교장과의 면접이 먼저였고, 그 다음이 학과시험이었다. 순서가 돼 내가 교장 앞에 서자, 그는 다짜고짜 “너 뭐 잘해”라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큰 소리로 “다 잘합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는 “이것 봐라, 팔방미인이 여길 찾아왔구먼”이라면서 질문을 이어갔다.
- 너 연애 잘해?
“못해 봤습니다!”
- 대한민국 헌병은 연애도 잘해야 해.
“예, 알겠습니다!”
- 백두산에 태극기 꽂을 준비 됐는가?
“예!”
그러곤 면접을 통과했다. 2차 학과시험은 필기로 치렀다. 문제가 몇 개 나왔는데, 대포를 쏘고 3초 뒤에 소리가 들렸는데 대포와 나와의 거리를 묻는 것들이었다. 서울대 공과대학을 다니던 내겐 어려울 것이 전혀 없었다. 쉽게 시험을 마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느낌이 좀 이상해 고민하다가 막상 소집 날엔 안 갔다. 그리고 철도경찰 시험을 봤다. 고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동기생 임영호(林泳顥·現 숭실대 명예교수)와 함께 지원했는데, 10명 뽑는 자리에 200명이 몰려들었다. 대구역 부근에서 시험을 봤는데, “국방과 청년에 관해 논하라”는 등의 문제가 출제됐다. 영호와 나는 앞뒤로 빡빡하게 답을 적어냈고, 합격자 10명 안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우리는 서울 용산의 철도경찰학교로 가서 훈련을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훈련생들과 함께했다. 학도호국단 훈련 경험이 있는 나는 구대장을 맡아 구대원들을 이끌고 훈련을 받았다. 서북청년회 등 다양한 조직에서 사람들이 많이 왔다.
훈련을 받다가 소집명령을 받으면 곧바로 떠나야 했다. 사실상 차출대기였던 셈이다. 군에서 치고 올라가 점령을 하면, 경찰이 가서 치안을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함께 훈련 받다가도 새벽에 소집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나갔다. 어떤 이들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시체가 돼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시신도 많이 운반했다.
소총 쏘는 법 알려주다 난 오발사고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친구 영호와 나는 가급적 북한 지역엔 가봐야 연고지도 없고 힘들 것 같다며 함께 서울 이남으로 가자고 다짐했다. 최종 배치를 받는 자리에서 우리는 평택 지역에 지원했다. 훈련주임이 일렬로 서라고 한 후, 사람들을 한 번씩 지나치며 훑어봤다. 그러다 나를 본 그는 “구대장은 들어가”라고 했다. 큰일 났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친구와 윗도리를 바꿔 입고 다시 평택 줄에 섰다. 훈련주임은 나를 잡아내 “옷 바꿔 입으면 모를 줄 아나!”라며 고함을 친 후 따귀를 때렸다.
영호는 결국 평택으로 떠났고, 나는 남았다. 며칠 후 어느 날 밤, 경사 계급의 훈련계장이 나를 찾아왔다. “들어가 있으라면 들어가지 왜 말썽을 피웠느냐”며 물었다. 나는 “남쪽으로 가고 싶어서 그랬다”고 털어놨다. 그는 알겠다며 떠났고, 며칠 후 나는 대구로 배치를 받았다. 하늘이 날 도왔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구역 대합실이 미군 숙소였다. 바로 옆에 철도경찰 대구본부가 있었고, 우리는 역 주변 경비를 섰다. 하루는 보초를 서고 있던 내게 젊은 여자가 찾아왔다.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그녀는 다짜고짜 내 옆에 섰다. 나는 “당신 왜 여기 서 있느냐”며 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쫓아내도 나가지 않고, “오빠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나는 “잔소리 말라”며 쫓아 보냈다.
며칠 후 동료와 함께 대합실 앞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일본의 구식 총을 들고 있었는데, 같이 있던 동료가 총을 어떻게 쏘는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우쭐한 마음에 탄창을 넣고 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탕!”
아뿔싸, 하늘이 노랬다. 실수로 쏴 버린 총알이 바로 옆의 함석으로 된 얇은 벽을 치고 나갔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 한 미군이 속옷만 입은 채로 허겁지겁 뛰어나와 “누가 총을 쐈느냐”고 물었다. 내가 쐈다고 하니, 그는 나를 숙소 안으로 데려가 벽 앞에 놓인 침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5분 전에 내가 화장실에 안 갔더라면 당신이 쏜 총알이 내 머리부터 발 방향으로 관통했을 것이다.”
내용이 상부로 보고됐고, 나는 오발로 인한 징계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누가 찾아왔다고 해서 나갔더니, 용산에서 나를 대구로 보내준 훈련계장이 서 있었다. 그땐 경사였는데, 이후에 경위로 승진했다고 한다. 대구대 책임자와 동기였는데, 마침 공비토벌을 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마 전에 처녀 한 명이 찾아오지 않았느냐”며 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때 그 시골처녀의 오빠가 훈련계장임을 알게 됐다. 진작 알았으면 밥이라도 사 먹여 보냈을 텐데…. 내 무뚝뚝한 성격이 참 후회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서울대 다닌다고 해서 그 계장이 시집갈 나이가 된 자신의 동생을 소개시켜 주려 했던 것 같다.
오발사고 이야기를 들은 그는 책임자에게 나에 대해 설명을 하며, “일부러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다”고 보증을 서 준 후 떠났다. 또 신세를 진 것이다.
“아무리 전쟁하는 나라라도 젊은이를 다 죽일 수 없다”
징계는 무마됐고, 나는 본대를 떠나 지대로 발령을 받았다. 일주일 후 소식이 날아왔는데, 그 경위가 공비토벌 대장으로 갔다가 전사(戰死)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고 고마운 분이다.
대구역 근처 파출소에서 근무하다가, 1951년 2월 서울대학교가 부산 대신동에서 가교사(假校舍)를 만들어 학생 등록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전시연합대학이 출범해 대학생들이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전쟁하는 나라라도 젊은이를 다 죽일 수 없다”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부산 보수동 산비탈 ‘하꼬방(판잣집)’을 잡아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성전기(現 한국전력) 전력제한실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또 가까이 서울서 피란 온 공업중학교가 있어 시간강사를 했다. 그때 교사 중 한 명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해 여동생을 소개해 줬다. 이화대학에 다니던 그 여학생은 편지를 몇 차례 보내왔는데, 글도 잘 썼던 것 같다. 하지만 세상 물정 몰랐던 나는 “학생이라 연애 같은 건 할 여유도 시간도 없다”며 모른 체했다.
대다수의 대학은 천막에서 수업을 했다. 한 반에 보통 30~40명의 학생이 모여 기초과목을 들었고, 전문과목은 10여 명이 들었다. 서울대 천막은 대신동 운동장 근처에 설치됐는데, 이쪽으로 가면 수학 강의, 저쪽으로 가면 공학 강의, 그런 식이었다. 수업 방식은 칠판 하나 갖다 놓고 일본어로 된 책을 우리말로 읽어 주면 학생들이 받아쓰는 것이 전부였다. 교과서도 없고, 교육 장비도 없었다. 제대로 공부가 되질 않았다.
기억에 남는 교수가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일본 경도제국대학을 나와 평양 김일성대학에서 강의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쫓겨난 후, 대동강변에서 고물상을 하다가 전쟁이 나서 월남(越南)했다. 장사를 하던 사람이라 제대로 가르치기가 어려웠고 수업 내용도 별로 안 좋았지만, 학생들은 다 참아 주고 격려해 줬다. 전쟁 중에 실력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났다. 부산에서 휴전 소식을 들은 우리는 모두 뛰어나와 만세를 외쳤다. 서울로 올라와 학교로 찾아갔는데, 공과대 캠퍼스를 군인들이 사용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어영부영 강의는 시작됐는데, 제대로 들을 환경이 못 됐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어 중학교 교사를 했다. 하지만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처럼, 선생 노릇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군 제대 후 25달러 들고 미국 유학길
결국 군 제대 후 유학을 결심했고, 1956년 단돈 25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을 참 파란만장하게 겪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돌이켜보니 함께했던 많은 사람이 떠나갔음을 알았다.
고향 친구 중 한 명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전쟁이 나자 의용군이 돼 북한으로 가 버렸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평소에도 내게 북한 헌법을 설명하며 설득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와 함께 피란길에 올랐던 이모의 남편은 전사했다. 홀로 남은 이모는 공부를 계속해 박사 학위까지 받아 딸을 훌륭히 키워냈다.
60년 전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은 지금도 내 가슴 속 깊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를 이겨낸 우리 세대와 선·후배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은 ‘비참한 나라’에서 ‘위대한 나라’로 도약하고 있다. 6·25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건이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되는 민족의 역사다.⊙
<정리=金正友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