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順載 탤런트
⊙ 1935년 함북 회령 출생. 서울고·서울대 철학과 졸업.
⊙ 연기자협회 회장, 14대 국회의원, SBS방송예술센터장 역임.
⊙ 現 서울시 홍보대사.
6·25가 나던 날 아침 나는 두 살 아래의 동생과 함께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방학에 대천해수욕장으로 물놀이를 갈 계획을 세워 모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복을 사러 나선 길이었다. 백화점 앞에 도착하니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휴가 중인 군인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는 가두방송이 시내를 뒤덮었다.⊙ 1935년 함북 회령 출생. 서울고·서울대 철학과 졸업.
⊙ 연기자협회 회장, 14대 국회의원, SBS방송예술센터장 역임.
⊙ 現 서울시 홍보대사.
놀란 우리 형제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전쟁이 났다는 것을 알았다. 뒤숭숭하기는 했지만 그 다음 날인 월요일은 정상적으로 등교했다. 당시 나는 서울고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중·고등학교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서대문 경희궁터에 있었다.
수업은 평소와 똑같이 진행됐다. 그런데 굉음과 함께 하늘에 쌍발 비행기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한참 밖을 응시하던 선생님은 갑자기 책을 덮더니 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결국 오전수업만 마치고 모두 하교했고, 이튿날인 27일 우리 가족은 피란길에 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피란을 미루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겁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빨갱이들이 내려온다”며 서둘러 짐을 꾸렸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들짝 놀란 데는 사연이 있었다.
남로당원이었던 친척 때문에 피란 서둘러
나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아버지가 연변 외곽의 노두구라는 곳에서 역무원으로 일해 네 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일찌감치 서울에 자리를 잡은 할아버지는 1년에 두 차례 정도 기차를 타고 와 고향과 아들 집을 둘러보고 갔다.
내가 네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는 장손인 나를 서울로 데려왔다. 얼마간 함께 지낼 요량이었지만 할아버지와 재혼해 슬하에 자손이 없던 할머니가 얼마나 잘 대해 주는지 나중에는 내가 할아버지와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 38선으로 남북이 고착화되기 직전 부모님이 서울로 내려올 때까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래서 가끔 “할아버지가 그때 나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조선족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이렇게 서울 생활을 하게 된 나는 2차대전 말기에 아현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일본인들의 발악이 극심해지면서 조선인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가평의 설악면으로 이주했다.
농사 경험이 없던 할아버지에게는 무척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4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2년간 그곳에서 생활하며 나는 모심기도 해보고, 나물도 캐보고, 지게도 져보는 등 도시에서는 할 수 없었던 좋은 경험을 많이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할머니 친정 조카 되는 분 집에 겨우 방 한 칸을 얻어 한동안 신세를 졌다. 그런데 한양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그 집 아들이 열성 남로당원이었다. 당시 남한은 남로당과 한민당 계열로 나뉘어 갈등이 많았다.
가령 3·1절 행사를 해도 남로당은 남대문공원에서, 한민당은 서울운동장에서 따로따로 진행한 뒤 남대문에서 만나 투석전을 벌였다. 그런 어수선한 시국에 그 아들과 우리 할아버지는 매일 논쟁을 벌였다.
할아버지의 논리는 아주 단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왜 남의 것을 공짜로 뺏으려 드느냐, 뭔가를 얻으려면 열심히 일을 해야지”라는 것이 할아버지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났고, 인민군의 기세가 등등해지니 할아버지는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했던 말들이 생각나 더럭 겁이 났던 것이다.
‘지방 빨갱이’ 토박이 공산주의자들의 위세
그렇게 우리는 부모님만 서울에 남기로 결정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나, 작은집 식구까지 모두 아홉 명이 길을 떠났다. 처음 목적지는 작은어머니의 친가가 있는 경기도 용인의 오산리라는 곳이었다.
거기서 이틀을 머문 뒤 수원을 지나 오산 쪽으로 가는데 하늘에 미군 비행기 한 대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따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폭격이 시작됐다. 피란민 행렬을 인민군으로 오인한 미군이 사격을 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렸다. 위협사격이었는지 다행히 주변에 사상자는 없었다.
생사(生死)가 오간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때 일을 떠올릴 때마다 한바탕 웃곤 한다. 할아버지가 만든 재미있는 일화 때문이다. 당시 폭격이 시작되면서 놀란 작은아버지는 개울가로 떨어졌고, 할머니를 비롯해 모두 엎드린 채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자리에 앉아 모자를 벗어 하늘을 향해 흔들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니, 여기 사람 있으니 쏘라고 알리는 거예요, 뭐예요?”라고 퉁박(?)을 주자 할아버지는 “이 사람아, 하늘에서도 노인네는 다 알아본다고!”라고 받아쳤다. 전쟁 초기인 데다, 곧바로 피란을 나와 치열한 전투 상황을 실감하지 못한 데서 나온 여유(?) 혹은 무지였다고 생각한다.
피란 동안 시골 마을을 다니며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 지역에서 세를 떨치고 있던 토박이 공산주의자들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중에는 머슴살이를 했던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은 주인들을 악덕지주로 고발해 총살당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탤런트 이낙훈씨의 부친도 전쟁 중에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인민해방위원회라는 단체가 들판을 돌아다니며 막 나오고 있던 벼의 낱알을 세는 장면도 보았다. 낱알 수와 논의 면적을 곱해 생산량을 가늠하는 것으로 수확 뒤 수탈(收奪)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개인 소유를 금하고, 모든 것을 국유화하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발상으로 일제시대 강제 공출할 때의 방식과 똑같았다.
작은 체구 덕에 의용군 징집 면해
서울을 떠난 뒤 우리는 매일 30~40리씩을 걸으며 충청도 쪽을 향해 갔다. 특별한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충청도를 유난히 좋아했던 할아버지가 선택한 노선이었다. 그렇게 유구쯤 갔을까? 전세는 날이 갈수록 불리해져 인민군은 이미 금강을 건넜다.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으니 피란민 사이에서는 이제 다 끝났다는 절망감이 퍼졌다. 마침 싸 가지고 간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8월 중순쯤 우리 가족은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한번은 서울로 오는 길에 천안 광덕면에 들러 열흘을 머문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낯선 동네에 들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같은 문중인 ‘광주 이씨(廣州 李氏)’ 집안을 찾는 것이었다. 시골마을이었지만 이 방법은 신기하게도 잘 통했다. 그런데 광덕면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르쳐준 집을 찾아가 보니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었다. 방을 하나 얻기는 했지만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집이라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지냈다.
물론 우리도 식량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하루 한두 끼를 모두 보리밥으로 해결했다. 전쟁이 아니라도 여름철은 쌀을 구하기 어려울 때라 보리도 감지덕지였다. 그릇도 변변히 없어 바가지 하나에 담아 온 식구가 함께 퍼먹었다. 보리밥 때문인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여기저기서 방귀 소리가 요란했다.
그렇게 온 길을 되짚어 우리는 서울로 왔다. 작은아버지는 혹시라도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작은어머니의 친가인 오산리에 남아 은둔 생활을 했다. 당시 내가 말죽거리 고개를 넘어 작은아버지가 있는 용인까지 다녀오곤 했는데, 어느 날 산속에서 한 무리의 의용군을 만났다. 어림잡아 300명쯤은 되어 보였다. 어린 학생들을 선발해 급한 대로 군복만 입혀 끌고 올라온 터라 무장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고등학교 1학년이기는 했지만 나는 체구가 작아 초등학생 정도로 보여 의용군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성숙한 남학생들은 상당수가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갔다. 학생들을 차출하는 과정은 매우 야비했다. 아이들에게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고 거짓말을 해 학교로 불러 모았다. 그러고는 좌경화된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이번 전쟁은 조국통일을 위한 선전(善戰)”이라며 의용군이 될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도저히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의용군이 되었다. 멀쩡히 길을 가다 끌려간 젊은이들도 많았다.
오산리에서 만난 의용군들은 마을에서 돗자리 등 산속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뺏다시피 가져갔다. 의용군 장교는 마을 주민들에게 “그간 고생들 하셨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얼마 뒤 그들이 전부 산속에서 항복하고 내려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고 전세가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9·28 서울 수복으로 얻은 짧은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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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북한의 공세를 피해 남쪽으로 떠나는 피란 행렬. |
그해 9월 28일, 마침내 힘든 여름을 보내고 서울 수복을 맞았다. 서울에 태극기가 다시 걸리면서 조금씩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학교도 다시 나갔다. 물론 수업은 어려웠다. 서울중·고는 전쟁 때 인민군 사령부로 쓰여 학생들은 탄약(彈藥) 치우기 같은, 전쟁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주로 했다.
한번은 탄약을 치우다 작은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걸 뜯어보니 전선(電線)이 들어 있었다. 그 친구가 “여기 전깃줄이 좋은 게 있네”라며 손에 둘둘 감기 시작했다. 그걸 본 선생님이 사색이 되어 얼른 도망가라고 소리를 쳐 냅다 뛰었다. 알고 보니 지뢰였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전쟁 기간에는 이런 폭약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고가 많았다. 오산리의 고갯길에서 한 지게꾼이 작대기로 무언가를 툭툭 건드리다가 그게 뻥 터지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보았다. 옥천에서 머물 때는 미군 정찰기가 떨어진 적이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고철로 쓰기 위해 도끼를 들고 달려들다 안에 있던 포탄이 터져 여러 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어른들에게 전해 들었다.
내가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처럼 부모님도 전쟁 전에 하던 비누공장을 가동시켰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양잿물로 빨래를 하던 시절이라 비누는 꽤 귀한 물건이었다. 우리나라에는 함경도 흥남에 유일하게 일제가 군수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비료 공장과 비누 공장이 있었다.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와 정어리에 기름이 많아 그것으로 비누를 만들고, 찌꺼기는 비료로 만들었던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 뒤 그때 남은 재고들을, 이북 사람들이,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장단 지역으로 가지고 와서 남쪽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했다. 할아버지는 그 비누를 가져다 남대문 시장에서 팔았다. 이후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서울로 와 합류하면서 할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비누 좌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면서 더 이상 비누를 가져다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누를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 집뿐만 아니라 애경, 말표 비누, 평화유지 등 훗날 크게 성장한 비누 회사들이 모두 이 무렵 태동했다.
물론 번듯한 공장을 갖춘 것은 아니고 드럼통에다 재료들을 붓고 휘휘 저어 만드는 가내수공업 형태였지만 장사는 제법 잘돼 경제적으로도 넉넉했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수복과 함께 다시 비누를 만들며 재기(再起)를 꿈꾼 것도 잠시, 중공군의 반격으로 1·4후퇴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또다시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부모님은 비누부터 챙겼다. 이것은 피란 생활 내내 우리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어찌됐든 빨래는 해야 했기 때문에 비누는 꾸준히 수요가 있었고, 이것을 식량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위, 배고픔과 싸우며 南으로
겨울 피란은 여름 피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식구가 더 늘어 무려 14명이 함께 떠났다. 충북 보은을 지날 때쯤에는 얼마나 눈이 많이 내리는지 피란민들은 끌고 가던 소를 버리는 것을 비롯해 어린아이를 나무에 매달아 놓거나 갓난아기를 바구니에 넣어 그대로 두고 가는 경우까지 있었다.
한 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걸음이 느리거나 아픈 아이, 젖먹이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우리도 백일을 갓 넘긴 사촌여동생이 자꾸 병이 나자 “가망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해 두 번이나 버리려고 했었다. 딸이 귀한 집이니, 어떻게든 살려보자고 설득하는 작은아버지 덕분에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며칠 후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러니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상황임에도 죽거나, 부모와 헤어져 미아가 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어른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역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난데없이 길을 가는 장정들을 잡아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별다른 통신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가장(家長), 아들과 헤어진 가족들은 종이에 숯으로 가족의 이름을 쓰고 행선지를 표시해 길 중간중간 나무나 전봇대 등에 매달아 놓으며 걸어나갔다. 우리도 “순재, 청주 쪽으로”라고 써 붙이며 갔다.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전쟁 와중에 미리 서울을 떠났고, 여름 피란 경험이 있어서인지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무렵이면 더 이상 나가지 않고 무조건 하루 묵을 만한 집을 찾아들었다. 이미 피란을 떠나 빈집이 많아 신세를 지기에는 수월했다. 안방을 찾아 불을 지폈고, 추수가 끝난 후라 운이 좋을 때는 쌀로 밥을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면 하나 둘 다른 피란민들이 들어와 이 방 저 방 나누어 쓰게 되고 한 방에 많게는 수십 명이 들어차는 날도 많았다. 방이 부족할 때는 남자들은 밖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노숙을 해야 했다. 특히 우리 식구는 14명이나 돼 잠잘 곳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춥기는 또 왜 그렇게 추웠는지, 살을 엔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였다. 한번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리가 끌고 다니던 손수레가 없어졌다. 보은천 밑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가 추위에 떨다 동네 나무란 나무는 다 주워서 땔감으로 가져갔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족을 대표해 찾아갔다. 손짓 발짓으로 미군들과 의사소통을 해 찾아왔더니 할아버지가 기특해하며 동네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랑을 했다. “봐라, 우리 애가 미군들이 가져간 손수레를 찾아왔다. 애들은 모름지기 서울서 키워야 한다”고.
피란길 路毒이 가져온 할아버지의 죽음
충북 보은 인근에서 정처없이 걷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옥천리로 가자고 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증조부 친구 되는 분이 조선시대 말에 높은 벼슬을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 후손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의견을 따라 옥천리로 찾아갔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가 찾던 집도 그중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를 외치자 집주인인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나왔다. 이 집을 찾아오게 된 사연을 듣던 할머니는 자신도 회령 사람이라며 반가워했다. 그 집 손부인데, 메이지대(明治大)에 다니고 있던 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안돼 강가에서 익사를 해 자손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었다고 했다.
그분의 배려 덕분에 한동안 편히 지낼 곳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됐다. 그러고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도 시름시름 앓다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환갑 넘은 노인들이 두 차례의 피란을 겪으며 노독(路毒)이 쌓인 탓이었다. 두 분은 내게 부모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상실감이 컸지만 오래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후 우리 가족은 대전에 자리를 잡고 부모님은 그곳에서 다시 비누공장을 시작했다. 나는 청강생 자격으로 대전고등학교에 다녔다. 전쟁 중이라 이런 경우가 흔해 청강생이라도 학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때 함께 공부한 동창이 나웅배(羅雄培) 전 부총리다.
연극도 그때 시작했다. 당시 충남여고에서 학예회를 하며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린 것을 본 후 “우리도 한번 해보자”고 영어 선생님을 졸랐다. 마침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부하고 있을 때라 선생님이 그 작품으로 대본을 만들었고, 미술 선생님이 무대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 당시 함께 연극을 했던 친구가 바로 미국에서 하원의원까지 지낸 김창준(金昌準)이다. 보성고 학생이었던 그 친구도 나처럼 청강생 자격으로 대전고에 다니고 있던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왔다. 개학은 했지만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나마 1학년이라 강제 징집을 면한 경우가 많았는데 2학년, 3학년은 상당수가 끌려가 전쟁에 동원됐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렇게 젊은 청년들의 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전쟁이 남긴 교훈, 절대 잊지 말아야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로서, 가끔 6·25가 북침(北侵)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가 막힌다. 군인들을 휴가 보내고 전쟁을 치르는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으며, 한강 이남・북을 잇는 중요한 교통수단인 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하는 정부가 있을까.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는 뜻이다.
이 밖에도 남쪽이 전쟁 준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방비로 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반면 철저히 준비한 북한은 거의 무혈(無血)입성이나 마찬가지로 전쟁 개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그 기세로 낙동강도 쉽게 접수했다. 오죽하면 여름 피란길에 국군 패잔병과 함께 내려간 적도 있을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전쟁에 관한 정확한 내용은 역사가 기록하겠지만 나는 6·25 세대로서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증언하고 싶다. 어떤 교수가 당시 우리 국민의 70% 정도가 좌경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발언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인민군이 내려와 두 달 남짓 점령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도망갈 때 그중 10분의 1인 7%라도 인민군을 따라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흥남철수 때 무려 10여만 명의 북한 주민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것도 쫓겨 내려오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서 말이다. 원하는 사람을 다 태우지 못하고, 공간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배에 태워 온 숫자다. 김일성(金日成) 치하에서 약 5년간 공산주의 체제를 직접 경험한 그들은 남쪽을 택했다. 이것만으로도 체제의 우월성은 극명하게 구분된다.
전쟁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행운아에 속한다. 작은 체구 덕분에 징집을 면해 전쟁의 전면에 서지 않았다. 다만 전쟁의 처참함을 목격했을 뿐이다. 전쟁 기간 동안 겪어야 했던 어려움, 전쟁이 민간인들에게 준 피해, 후유증 등은 직접 겪지 않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전쟁의 참상을 알고 있는 세대가 점점 줄고 있는 지금, 젊은 세대와 그 경험을 나누고,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해 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증언을 남기는 이유다.⊙
<정리=崔善喜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