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英淑 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 1932년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 YWCA연합회 총무, 한국여성단체연합회 부회장, 평화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환경특위위원장,
환경정책연구소장, 녹색연합 대표,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역임.
한국전쟁은 1950년 발발했지만, 나의 전쟁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우리 세대에게 전쟁 이전의 일제강점기는 동족상잔의 비극 못지않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시기였다.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게 만든 한국전쟁의 경험담을 들려주기 전에 ‘탈주와 이주’로 점철된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1932년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 YWCA연합회 총무, 한국여성단체연합회 부회장, 평화민주당 부총재, 민주당 환경특위위원장,
환경정책연구소장, 녹색연합 대표,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역임.
평양의 일본 자동차회사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1941년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열한 살부터 강보에 싸인 아기까지 두 살 터울 6남매를 남겨두고 떠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곱게 살림만 하던 어머니는 삶의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때 어머니가 생각해 낸 생활의 방편은 장사였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어린 두 아들을 키우다 재가(再嫁)해 만주에 살던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만주와 평양을 오가는 보따리 무역상이 된 것이다. 열 시간도 넘게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며, 무거운 보따리를 이고 지고 다니면서, 곱기만 하던 젊은 아낙은 차츰 억척아줌마로 변신해 갔다.
만주와 평양을 오가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던지 만주에서 상당한 부(富)를 이룬 친할머니는 아예 만주에 정착하라고 권유를 했다. 어린 남매들과 늘 헤어져 길 위의 삶을 살아야 했던 어머니는 시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주로 터전을 옮겼다. 새 할아버지인 윤해봉은 나의 가족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만주의 유일한 조선학교이자 새 할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던 길림 동영학교에도 이때 입학했다.
만주에서 평양으로
![]() |
1951년 8월 피란수도 부산에서 임시로 문을 연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
1년쯤 지난 후 어머니의 야무진 살림 솜씨에 후한 점수를 주던 새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시내에 있는 술 도매상과 살림집을 아예 맡기고는 교외로 이사해 길림에서 가장 큰 누룩공장을 운영했다.
어머니가 장사에 수완을 발휘하면서 우리의 삶은 안정되었고,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만주에서의 유년 생활은 순탄했다. 코흘리개 아이였던 내가 소녀로 점차 성장해 가는 동안 광복을 맞았다. 그 무렵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본군이 물러간 후 만주의 사정은 뒤숭숭했다. 어머니는 만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평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장사를 하기에 만주의 상황이 점점 험악해졌기 때문. 어머니는 격변의 시기 타국에서 머물기에는 마음이 불안했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주에서 평양까지 돌아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중국 기관사와 승무원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조선인들의 돈을 뜯어냈다. 극심한 차별을 받았던 중국인들이 일제 치하가 끝나면서 조선인들에게 그 울분을 쏟아내는 바람에 위험한 고비도 많았고, 실제로 험한 일을 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렵게 돌아온 평양은 떠나갈 때의 고향이 아니었다. 광복의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사회 분위기는 예전과 달라졌다. 새로운 시대가 주는 압박감이었는지 모르지만, 공산주의로 흐르는 사회 분위기가 자유롭기만 하던 평양의 공기를 장악했는지도 모른다.
평양에 돌아온 후 제일여중으로 이름을 바꾼 정의여중 2학년에 편입했다. 꿈 많은 나였지만 학교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어수선한 광복정국에서 학생들은 일요일에도 매스게임이나 정치 집회에 동원되기 일쑤였다. 어떤 모임에는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매일 그런 외적인 일로 심신은 지쳐갔다. 학생들 사이에 얼마나 불만이 높았던지 평양 시내 학교들이 1946년 3월 1일 삼일절을 기해 일제히 동맹휴업을 결의하고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도 했다.
만주에서와 달리 생활의 방편을 구하지 못한 어머니는 어수선해져만 가는 평양의 정국에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공산 정권이 점차 강화되는 것을 피부로 느끼던 어머니는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가기로 결심을 굳힌다. 작은 아버지(朴基丙)가 남한에서 한국군 창군(創軍) 멤버로 고위 장교였던 탓에 이북에 남아 있다가는 곤욕을 치를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더는 평양에서 살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남하를 결심한 1947년은 이미 남북(南北)을 가른 38선의 경계가 점차 넘기 힘든 장벽이 돼가고 있었다.
장충동 적산가옥에서 전쟁을 맞다
![]() |
서울 수복 당시 이화대학교 기숙사 앞에서.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다. |
어머니는 38선 근처를 오가며 남한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탈주를 도울 안내원을 구하고, 남하할 선을 대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치밀한 탈주 계획이 세워졌다. 남한으로의 이주를 위해 가족을 세 그룹으로 나눴다.
첫 번째로 평양을 떠난 것은 나와 막내 여동생이었다. 어머니는 기차에 오르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38선 부근의 친척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위장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임진강 근처까지 갔다. 그러나 마지막 검문소에서 사단이 나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호기심에 닫힌 기차 창문을 열었다가 검문하는 군인들과 눈이 마주쳤고, 이를 수상히 여긴 군인들이 우리를 끌고 내려가 조사를 했다. 그들은 다행히 친척집을 방문한다는 어린 우리의 말을 믿어주었고, 우린 몇 시간 만에 풀려났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에 식은땀이 흐른다. 다행히 우리가 풀려나오기를 기다려 준 안내원은 무사히 38선 너머 남쪽의 안전한 장소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나머지 식구도 이내 합류했다.
남쪽으로 온 우리 가족은 작은아버지가 살던 전라도 광주에 정착했다. 작은아버지가 우리에게 살 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어머니는 작은아버지의 도움으로 제과점을 열었고, 나는 전남여중 4학년에 편입했다. 다시 만주에서처럼 새로운 생활이 시작됐다.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우리 가족의 일상에 잠시 평화가 깃들었다.
내가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무렵인 1950년 초에는 서울 장충동으로 이사를 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거주하던 일본식 가옥(家屋) 중 하나가 우리가 새로 정착한 서울의 옛집이었다.
우리 가족은 장충동에서 전쟁을 맞았다.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소식을 들은 우리 가족은 뒤늦게 피란 보따리를 꾸렸다. 거리 곳곳에 피란민으로 넘쳐나고 있을 때였다. 여자들과 어린 남동생들만 있던 우리 가족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짐만 꾸리고 우왕좌왕했다.
어머니는 “우리는 북에서 내려왔고, 작은아버지가 한국군의 장교이니 만약 인민군들이 내려오면 우리 가족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집을 피하자”며 일단 피란길에 올랐다.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선 우리는 얼마 안 가서 인민군 탱크와 마주쳤다. 보따리를 하나씩 둘러 멘 우리는 인민군 행렬과 마주치자 당황해서 근처 주택으로 피했다.
인민군 행렬이 지난간 뒤에야 우리는 숨어들었던 집에서 벗어나 다시 장충동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 이남으로 피신하기에는 이미 시기를 놓쳤고, 오히려 움직이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장충동 집에서 은신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불안한 서울생활이 시작됐다.
서울의 3개월은 생애 가장 긴 암흑기
하루하루가 불안의 나날이었다. 인민군의 파상공세에 대구까지 밀렸던 한국군은 UN이 참전을 결정하면서 반격을 시작했다. 서울은 UN군의 주요 타깃이 되어 매일 전폭기가 출동했다. 인민군 점령으로 공포 분위기에 휩싸인 서울은 폭격 공습에 숨을 죽여야 했다. 폭탄에는 눈이 없어 인민군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을 했기 때문에 대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공습의 횟수가 많아지면서 주검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길거리에 쓰러진 시체를 보고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전쟁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언제 누가 밀고(密告)를 해 인민군이 집으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이웃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UN군이 서울을 탈환한 9월 28일까지의 3개월은 내 생애 가장 긴 암흑기였다. 우리 가족은 UN군의 공습과 인민군의 수색작업을 피해 서울 인근의 사찰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마땅히 잠자리가 없어 밤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청했지만 도저히 잠들 수 없었다. 모기가 기승을 부리던 그 여름밤은 전쟁의 불안감보다 모기의 습격 때문에 잠들 수 없었다.
그때 장충동 집에는 금붕어 어항이 있었는데, 며칠이고 집을 비우고 피신을 할 때는 먹이를 잔뜩 주고 광 한쪽에 잘 건사해 두었다. 다행히 그 기간 동안 금붕어는 죽지 않고 팔팔하게 살아 있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금붕어와 일종의 공동운명체였다.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하던 그때 우리 식구는 금붕어에 우리의 운명을 걸 정도로 약한 존재였다. 다행히 금붕어는 우리가 서울을 떠날 때까지 무탈하게 살아 있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갑작스런 전쟁으로 미처 고향으로 가지 못한 여고 동창생 몇이 몸을 의탁해 있었는데, 의용군 차출이 시작되면서 젊은 남녀들의 불안감이 더 컸다. 그래서 우리는 밤에 잠을 잘 때는 집 천장 위에 마련된 곳에 숨어서 자야 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인민군들로 인해 우리는 늘 불면(不眠)의 밤을 보내야 했다.
모든 것에 치밀한 성품을 가진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천장 위의 잠자리에 두꺼운 솜이불을 깔아두었다. 간혹 불시에 쳐들어온 인민군들이 천장에 총을 난사하는 경우도 있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솜이불을 일종의 방탄용으로 깔아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천장 위의 공간에 따로 비밀신호 장치를 만들어서 피신하는 방법을 연습시키기도 했다. 다행히 인민군은 어머니와 어린 남매들만 사는 집에 불시에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집에만 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황을 알아보고 불안감을 씻기 위해 언니와 함께 멀리 불광동 시장에서 좌판행상을 하기도 했다. 머리를 따고 다니다 인민군에게 붙들리면 의용군에 차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쪽진 머리를 해서 유부녀 행세를 하고 다녔다. 행상을 해도 손에 쥐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불안했기 때문에 우리는 좌판행상을 하나의 돌파구로 여겼다.
다행히 전쟁 직전 작은아버지가 사주고 간 쌀이 독에 가득해 배를 곯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그 쌀을 작은 항아리에 나누어 담아 집 곳곳에 숨겨 놓았다. 된장 항아리 아래쪽에 쌀을 숨겨놓기도 했다. 그렇게 숨겨놓은 쌀 덕분에 하루 한 끼는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황 때문에 어머니는 쌀을 아끼고 아꼈다. 그러니 허기만 가까스로 면하는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전쟁은 점점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서울은 매일매일 폭격이 이어졌다. 비행기에서 내리 퍼붓는 폭탄은 마치 까만 눈처럼 시야를 메우기도 했다. 국군이 하루 빨리 서울로 돌아오기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인천 쪽에서는 매일 폭탄 터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이 수복됐다.
우리는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이미 만주에서 광주로 돌아온 친할머니는 우리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이 수복된 지 며칠 만에 장충동으로 찾아왔다. 생선과 주전부리를 잔뜩 싸들고 나타난 할머니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인양 반가웠다. 그러나 그런 반가움과 안도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전쟁보다 무서웠던 제주도 화장실
중공군이 다시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대대적인 1·4후퇴를 앞두고 우리 가족은 서울을 떠나 광주로 갔다. 작은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염려해 여수를 거쳐, 전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제주도로 피신시켰다. 나는 가끔 작은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살아남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국전쟁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제주도로 피란을 갔지만 생활이 편안했던 것은 아니다. 자유롭지도 못했다. 1948년 발생한 4·3사건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흉흉했다. 1954년까지 이어진 당시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내에서만 3만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제주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작동하는 섬이었다.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치안조차 확보되지 않아 우리 가족은 매일 작은 방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특히 4·3사건에서 희생된 유족들은 매우 격앙된 상태였는데,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외지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이북 출신의 사람들을 싫어했다. 4·3사건 당시 가장 심하게 탄압한 이들이 이북 출신으로 구성된 서북청년단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경찰이었고, 그 다음은 군인이었다. 이북 출신의 군인가족인 우리는 그들에게는 매우 적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피란지에서의 삶이 편할 수 없는 이유였다. 가능하면 사람들과 접촉을 피한 채 은둔했다.
배부른 소리인지 모르지만 제주도에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언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낼지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볼 일을 볼 때 꿀꿀거리며 내 밑을 서성이는 돼지들이었다. 제주도의 통시(화장실의 제주도 사투리)가 내게는 그야말로 공포였다. 제주도 생활 내내 가장 적응하지 못한 것은 돼지우리 위에 지어진 화장실이었다.
인민군 치하의 장충동 시절만큼이나 제주도 시절도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인민군의 직접적인 위해(危害)만 없을 뿐 제주도도 우리에게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전쟁을 겪는 땅에서는 육체적 평안에 차이가 있을 뿐 정신적 고통은 어디에 있건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1951년 봄이 돼서야 우리 가족은 다시 광주로 돌아온다. 할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최전선에서의 전투는 갈수록 치열했지만 후방은 점차 전쟁의 온도에 적응을 하면서 일상을 영위해 가기 시작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으로 놀랍다. 전쟁 발발 초기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전쟁에 만성이 되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병사의 신음과 비명 속에서도 사람들은 제각각 다음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이화여대도 1951년 8월 부산에서 신입생을 모집했다. 나도 광주를 떠나 부산으로 가서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기존 학생들을 모으고 신입생을 선발한 부산 부민동의 천막학교는 활기를 띠었다. 전쟁으로 인해 정지된 청춘이 다시 박동하는 듯했다. 흙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강의를 들어도 학생들의 얼굴엔 진지함과 열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형인 마당에는 학업이 평소처럼 진행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피란지 부산은 갑작스레 몰려든 피란민들로 인해 삶의 최전선으로 변한 곳이었다.
나 역시도 꿈에 그리던 영문과에 진학했지만 학업보다는 전쟁고아나 피란민들을 돕는 자원봉사활동에 더 열성이었다. 강의를 듣는 시간 외에는 모든 시간을 자원봉사에 할애했다. 부산에서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사람을 돕는다는 것의 기쁨에 빠져 몸이 힘든 줄도 몰랐다. 마치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처럼 부산에서의 바쁜 생활은 전쟁의 공포를 벗어나게 해 주었다.
전쟁이 바꾸어 놓은 것들
전쟁이 끝나면서 부산에서 문을 연 학교들이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분위기였다. 1954년 3월 이화여대도 서울로 돌아왔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건물들은 개보수를 거쳐 옛 모습을 찾아가고 포탄에 파헤쳐진 화단에는 다시 꽃씨가 뿌려졌다. 전쟁의 후유증은 하루아침에 치유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그 기억을 지우려 했다.
캠퍼스는 다시 청춘의 시간들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가난했지만 낭만도 깃들었다. 나의 청춘도 좀 더 빛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에너지를 전후복구 사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발산했다. 대학생 YWCA 회원이 되어 전쟁고아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방학 때는 농촌 계몽 활동에 나섰다. 낮에는 밭도 갈고 길도 닦았고, 밤이면 사랑방에 모여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어머니들에게는 재봉과 양재를 가르치기도 했다. 내 눈은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으로 향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난중(亂中)에 나고 자라 그 한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살았다. 내가 공부를 한 환경을 보면 그 고단한 역정이 묻어난다.
소학교 입학은 평양에서 하고 졸업은 만주에서 했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마쳤다. 대학 역시 부산에서 입학해 서울서 졸업을 했다. 평양에서 시작해 서울서 대학교를 마칠 때까지 나는 만주와 한반도의 전역을 돌아다니며 공부를 했다. 차분하게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어찌 나만 그랬을까. 나와 동시대를 산 사람 중에는 나보다 더 파란만장한 유년기와 청춘을 보낸 이들이 많을 것이다.
전쟁은 많은 이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내게 한국전쟁은 피란과 전쟁에 대한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일찌감치 경험케 했다. 그리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빨리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봉사하는 삶, 여성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게 한 원동력도 전쟁이었다.
천만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가족 중에는 전쟁의 와중에 희생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군인이었던 작은아버지도 무사히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이 우리 가족에게 남긴 상처는 다른 이들이 겪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불러온 시련과 그 후유증은 내게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 전쟁으로 인해 빚어낸 거리의 고아들, 활력을 잃은 미망인들의 아픔을 돌보도록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돕는 일에 기꺼이 내 작은 힘을 보탰고, 그러는 사이 내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내 삶의 이정표를 바꾸어 놓은 셈이다.
60년이 지났지만 우리 민족에게 한국전쟁은 여전히 미완(未完)의 전쟁이다. 전쟁의 참담한 결과가 어느 한쪽의 것만이 아니면서 여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南北) 간의 대치와 경계가 봉합되지 않은 채 갈등의 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념의 탈을 쓰고 있거나 체제의 틀에서 민족을 갈라놓고 이 순간에도 서로를 적대해야 하는 시대의 아픔이 계속되는 때문이다.
내가 삶이 끝나기 전에 이 전쟁이 끝날 수 있을까. 한국전쟁 60년 내내 습관처럼 묻는 질문이다.⊙
<정리=張世璡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