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在鳳 전 국무총리
⊙ 1936년 출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뉴욕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14대 국회의원, 서울디지털대 총장 역임.
기억의 힘은 얼마나 거대한가. 고사리처럼 질긴 기억이 아직도 불쑥불쑥 나를 압도한다. 그것도 60년 전, 열다섯 살 무렵 여름과 가을을 헤매던 산하(山河)가 나를 고집스레 버티고 있다. 나는 전란(戰亂)을 헤쳐 살아남았고 그 질긴 생명이 여전히 나를, 내 삶을 매만진다. 그때마다 헛되이 살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1936년 출생.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미국 뉴욕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 14대 국회의원, 서울디지털대 총장 역임.
6·25가 터지기 하루 전, 고향 마산에서 모직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불쑥 서울 청운동 내 하숙집으로 찾아왔다. 당시 나는 경복중 4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배고플 때 먹으라”며 미숫가루 보자기를 손에 쥐여주곤 그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6월 25일, 늦은 아침을 먹고 서울대 공대에 다니는 고향 선배 집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점심 무렵 거리로 나섰다. 그런데 헌병들이 지프를 요란하게 몰고 다니며 확성기로 “군인들은 즉각 복귀하라, 복귀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저 그러려니 생각했다. 당시 38선에선 매일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한번은 인민군 연대가 귀순해 서울 중앙청에서 대대적인 환영식이 열리기도 했다.
26일 아침 등교를 하니 교장선생님이 교문 앞에 서서 학생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났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수업이 없다고 하니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다. 교장선생님께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으니 “전쟁이 나 수업을 못한다”고 하셨다. 그때야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음 날에도 학교에 가니 교문이 굳게 닫힌 채 몇몇 선생님이 나와 학생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하숙집에 돌아와도 어수선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라디오에선 “안심하라”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육성만 들렸다. 그날 밤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세브란스 의전에 다니는 5촌 아저씨의 서대문로(路) 하숙집에 찾아가 “피란을 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 길로 근처에 살던 외가(外家) 친척 할머니댁에 갔는데 갑자기 포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서대문로 지금의 고려병원 쪽을 바라보는데 포탄이 유성처럼 빗발쳤다. 하늘이 마술을 부린 것처럼 불타올랐다.
을지로 쪽에서 국군이 인민군 탱크와 육탄전
집을 나서기 전 근처에서 쾅 하는 포탄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부랴부랴 짐을 싸서 거리로 나서는데, 소 떼를 몬 농민이 우리 쪽으로 오지 않는가. 한강 다리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모를까 할머니를 모시고 한강을 건너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다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28일 아침 일찍 일어나 관악산 쪽을 바라보니 멀리서 국군 패잔병이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뒤 인민군 탱크가 사이드카를 앞세워 서울로 몰려들고 있었다. 거리로 다시 나가 봤더니 인민군 행진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입이 딱 벌어졌다. 을지로 쪽으로 가니 국군이 인민군 탱크와 육탄전을 벌이고 있었다.
다시 걸어 중앙청을 거쳐 집으로 가는데 시신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한 시신을 가리켜 사람들이 서울대 학생회장이라고 수군댔다. 인민재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전세(戰勢)가 악화되자 하숙집에도 먹을 게 떨어졌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술 찌꺼기를 구해 와 기름에 달달 볶아 먹었다.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바닥이 났다. 하루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배낭을 메고 따라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나더러 “입도 떼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는 것이었다. 홍제동 쪽으로 함께 걸어 어느 농가에 이르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살다 온 아주머니는 임시정부 쪽 사람과 교유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 농가 주인이 중국인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는 중국인 행세를 하며 먹을거리를 청했고 배낭 가득 감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자도 얼마 못 가 바닥이 났다. 그때부터 친척집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부탁했지만 차마 두 끼 이상 청할 수는 없었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경복중 학생동맹’이 나를 잡으러 왔었다는 것이었다. 왜 나를 잡으러 왔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해 4월 전국 중학교 남녀 농구대회가 마산에서 열렸다. 대회에 참가한 경복중 농구팀이 우리 집에서 숙식하며 지냈었다. 아마 그 얘기를 듣고 나를 ‘부르주아 집안’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길로 하숙집을 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친구 집에 숨어 지내는데 내가 없는 사이 또다시 ‘학생동맹’ 패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오금이 저렸다. 할 수 없이 친구 집을 나와 거리를 헤맸다. 물어물어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은행 간부의 집을 찾아갔다. 식구가 많기에 재워 달라는 말은 못 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숨어 지내다 다시 학교에 갔는데 상급생들이 갈 데가 없어 모여든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러 가자”며 명동의 ‘시공간 극장’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영화는 안 보여주고 1시간 동안 인민군 의용대에 입대하라는 선동을 했다. 묘한 울림이 심장을 흔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선동이었다. 많은 학우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민군에 지원했다. 나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앞자리 친구가 벌떡 일어서려는 걸 혁대를 움켜쥐고 주저앉혔다. 선동이 끝나자 ‘엘베강의 상봉’이란 영화를 틀었다.
의용군에 끌려갔다 부모님 인사 핑계로 탈출
7월 초 다시 학교에 갔는데, 인민군이 우리를 강북구 번1동에 있던 수송초등학교로 데려갔다. 인민군 장교가 내게 “의용군으로 가는 게 어떠냐”고 묻기에 “아파서 못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웬걸, “합격”이었다. 당시 낙동강 전선이 위급했었다. 나는 속으로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다.
새벽 2시쯤 됐는데 인민군이 주먹밥을 나눠주었다. 그때 한 학생의 아버지가 우리가 대기하고 있던 교실로 들어오더니 학생 뺨을 철썩 때리고서 “엄마가 다 죽어가는데 너는 여기서 뭐 하느냐. 집으로 가자”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자식을 구하기 위한 ‘쇼’였다.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날이 밝아 왔다. 그날 아침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한참을 궁리하다가 인민군 본부로 불쑥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조국해방 전선에 나갈 판인데, 부모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왔다. 그러니 집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빨리 오겠다.”
내 이야기를 듣던 인민군 장교가 거짓말처럼 “갔다 오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의용군 입대를 앞둔 30명의 학우를 데리고 수송초등학교를 나왔다. 물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다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다 마산에서 올라온 친구를 여럿 만났다. 한 친구가 “인민군이 부산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니 지금 입대하면 고향에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내가 극구 말렸지만, 그 친구는 결국 의용대에 입대했다. 지금까지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수송초등학교 부근에 살던 부모님 친구 분 집에 숨어 지내게 되었다. 그 집에는 경남 진주 출신 인사들이 자주 오갔다. 서울에서 경찰을 하던 내 외삼촌의 친구도 그곳에서 뵙곤 했다. 하루는 종로를 거쳐 집에 갔더니, 한 남자가 권총을 빼 들고서 외삼촌의 친구가 있는 곳을 대라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총을 겨눈 이의 낯이 익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마산에서 좌익운동을 하다 서울로 도망온 사람이었다. 나는 너무 놀란 데다 차마 거짓말을 못해 화신백화점 뒤에 살던 외삼촌 친구 집으로 데려갔다. 그 자리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됐다. 걱정이 되고 괜히 말했다는 죄책감에 책망하다가 오후에 그 집에 다시 갔더니, 끌려갔던 그분이 돌아와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이 “(인민군이) 잘 대해 주더라. 하루에 한 번씩 와서 보고만 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주일 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며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민심이 흉흉하지 않게끔 잘 대해 주다가 마음을 놓을 무렵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한 것이다.
피란길에 인민군 여군 장교와 자주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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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행렬. 머리에, 등에, 손에 세간살이를 이고, 지고, 들고 살기위해 산하(山河)를 헤매었다. |
그걸 보고 도저히 서울에 있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서울 중심가를 비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7월 30일, 내가 기거하던 부모님의 친구 분 가족 6명과 함께 피란을 떠나게 됐다. 어둠이 깔리고 길을 나서는데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남대문을 지날 무렵, 차고 있던 시계를 1만5000환에 팔았다. 인민군이 손목시계와 라이터를 좋아해 시계방에서 값을 후하게 쳐줬다. 나는 그 돈으로 하루 1000환씩 쓰면 2주는 버틸 수 있겠다 싶었다.
큰길 대신 골목길로 가려는데 완장을 찬 인민위원회 ‘여성동맹’ 사람들이 골목에 버티고서 젊은 남자를 죄다 잡아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할 수 없이 큰길로 갔다. 종로 한길로 나왔는데 그때까지 전차가 다녔다. 밤 9시쯤 마포에 도착했다. 아마도 지금의 절두산 아래쯤이었을 것이다. 뗏목이라도 구해야겠는데 배는 없고 하늘 위에는 전투기가 폭격을 해댔다. 발을 동동 구르다 겨우 자정이 되어 쪽배를 구했다. 강을 건너 숨을 돌릴 겸 모랫바닥에 퍼질러 앉았는데 갑자기 조명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인민군이 도하(渡河)작전을 하고 있었다. 그 위로 B29가 폭격을 해댔다. 모래가 휘날리고 파편이 튀는 아비규환이었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모래톱 아래 몸을 묻었다. 한바탕 공습이 끝나서 일어나니 인민군 일행이 뚜벅뚜벅 걸어와 내게 “별일 없느냐”고 물었다. 그들 중에 여장교가 있었는데 신체가 건장해 기억에 남았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 길로 수원과 안양을 거쳐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우리는 자주 그 인민군 여장교와 만나게 됐다. 우리가 낮 동안 걷고 밤에 쉬면, 인민군은 밤에 움직이고 낮에 쉬었다. 공교롭게도 이동경로가 비슷해 이른 새벽 자주 마주쳤다.
한번은 수원 근방을 내려가는데 삐라가 날아왔다. ‘피란민은 흰옷을 입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나는 홑겹의 옥양목(玉洋木)을 달랑 걸쳤다. 같이 걷던 대학생이 카키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쌕쌕이(무스탕機)’ 전투기가 날아왔다. 조종사 얼굴이 보일 정도로 저공비행 하더니 총알을 뿌려댔다. 그 대학생이 배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일행 중 몇이 그를 부축해 다시 걷는데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도저히 못 가겠으니 여기서 묻어 달라. 고향에 소식을 전해 달라”고 말하곤 끝내 숨을 거뒀다. 부근 민가에서 삽을 구해 논두렁에다 묻고서 십자 표시를 해 두고 다시 남쪽을 향했다.
발바닥은 물집으로 흥건했지만 쉴 수 없었다. 다리가 저려 와 고통마저 먹먹해질 때까지 계속 걸어야 했다. 심지어 씻지 못하니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 양지바른 곳에 가서 아무리 옷을 털어도 이가 사라지지 않았다.
감나무 올라갔다가 총알 쏟아져 매달려
충남 홍성과 전북 군산을 거쳐 임실로 내려가 지리산을 넘어 경남 산청에 다다랐다. 생전 처음 지리산의 가풀막진 고개를 넘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풀이 사람 키만큼 우거져 있었다. 고개를 넘으니 다 쓰러져 가는 농가가 보이기에, 돈을 주고 주먹 크기도 안 되는 돌감자를 구해 삶아 먹었다.
당시엔 비행기 폭격 때문에 옷을 벗을 수 없었다. 여름의 뙤약볕을 견뎌야 했으니 땀으로 옷이 삭아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지기 일쑤였다. 준비해 간 실과 바늘로 듬성듬성 꿰매어 어느덧 누더기가 되었다.
산을 넘는데 계곡이 눈에 띄었다. 옷을 입은 채 뛰어들어가 멱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더위를 식히는데 계곡 위쪽에 오누이가 얼굴을 씻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얘기를 나누니 동향(同鄕) 사람이었다. 누구 집 자제라고 소개하고 헤어졌다. 나는 “동행하는 이와 함께 거창, 진주를 거쳐 고향인 마산에 가겠다”고 말했다.
드디어 경남 거창에 도착했다. 일행 중 거창에 친지가 있어 며칠을 지내고 다시 진주로 내려갔다. 남강을 건너려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폭격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군은 마산을, 인민군은 진주를 점령하고서 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낮에 남강을 건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형수씨의 비밀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밤이 되길 기다렸다. 밤이 되면 남강을 건너 진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삼십대 초반의 남자가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고 알은체를 했다. 성함이 이형수(李亨洙)씨로, 진주에서 술도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남강을 건너 형 집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고향으로 가는 길인데 길이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고 말하니 불쑥 “우리 형 집에 가자”는 것이 아닌가.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분 뒤를 따라갔다.
이형수 아저씨의 형 집에 봇짐을 풀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향이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진주지역 인민위원회를 찾아가 마산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인민위 사람들은 “지금은 전쟁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라”고 했다.
그나마 아저씨 형제가 나를 귀엽게 여겨 먹고 잘 수 있게 허락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놈의 배는 자꾸 고파 왔다. 한번은 땡감이라도 따 먹으러 감나무에 올라가는데 갑자기 ‘쌕쌕이’가 날아왔다. 총알이 쏟아지는데 나무에 엉거주춤 매달려 혼쭐이 났다. 게다가 땡감을 먹어서 대변이 나오지 않아 큰 고생을 했다.
이형수 아저씨가 자꾸 사라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어디서 마셨는지 술에 잔뜩 취해 처량하게 울곤 했다. 저녁때가 되면 아무 말 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우연히 남강 모래톱에 주저앉아 우는 그를 발견했다. “왜 그러시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만나기 전 그는 남강 모래톱에서 젊은 아내와 젖먹이를 한꺼번에 잃었다. 날아온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남강 모래톱에다 아내와 피붙이를 묻고 돌아오던 길에 나를 만났다. 내게 “우리 형 집에 같이 가자”고 말한 것도 혼자 집에 가기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날 나는 오래도록 그의 곁에서 슬픔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아내가 죽기 전, 장남을 먼저 시골로 피신시켜 그나마 화를 면했다. 장남은 나중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나와 조우했다. 그는 후일 대기업 부사장을 역임했다.)
그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도 폭격은 계속됐다. 빨리 피하기 위해 베개 대신 신발을 베고 잠이 들었다. 우리가 숨어 살던 집 앞에 제법 큰 공장이 있었는데, 그 공장을 타깃으로 폭격과 기총소사가 쉼 없이 쏟아졌다. 하루는 전투기 소리가 들리기에 마루 밑으로 뛰어들어 갔다. 부들부들 떨다 보니 오금이 펴지질 않았다. 총알이 마루 밑에 먼지를 일으키며 우두둑 박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으면 총알이 등과 배를 관통해 다리까지 뚫지 않겠는가. 그러니 몸을 쫙 펴야겠다.’
인명(人命)이 재천(在天)이니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갑자기 마루 밑에서 기어 나와 마루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곤 먹을 갈아 헌 신문지에 붓글씨를 썼다. 아저씨 가족이 기가 막히다는 듯 쳐다보았다.
당시 그 집에 이형수 아저씨의 친척이 찾아오곤 했는데, 경찰 신분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인민군에 자수하겠다”고 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엔 경찰이라면 인민군이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저씨 도망가세요. 큰일 납니다”고 만류했지만, 고집을 피웠다. 그런데 자수하러 갔던 사람이 잠시 후 다시 돌아왔다. 나는 서울에서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곤 “지금 도망가라”고 종용했지만 듣지 않았다. 그 역시 일주일 뒤 종적을 감췄다.
이런 일도 기억에 남는다. 인민군이 점점 밀리면서 이형수 아저씨가 자칫 인민군에 끌려갈 판이 됐다. 나는 아저씨께 “인민위원회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주민자치 조직인 인민위에 들어가면 의용대에 끌려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인민위에 들어갔다. 나중 진주가 국군에 수복된 뒤 아저씨는 잠깐의 인민위 전력 탓에 큰 고초를 당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신원보증을 했겠지만 그분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죽음의 더께
전쟁 와중에 찬거리를 구할 수 없었다. 도저히 밥이 넘어가지 않아 우리는 머리를 맞댔다. 진주 시내에 있던 아저씨의 집 장독에 멸치젓이 있었다. 그걸 가져와 반찬으로 삼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남강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어른거리면 총알이 날아올 판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자원했다. 팬티만 달랑 입고 남강 다리 옆에 숨어 밤이 되길 기다렸다. 남강 다리 위에 피투성이 말(馬)이 머리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나는 며칠 전 대대적인 폭격이 떠올랐다. 그 폭격에 무참히 불타는 촉석루를 멀리서 지켜봤었다.
밤이 깊어지자 온 힘을 다해 다리 위를 냅다 뛰었다. 동네에 들어설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런데 아저씨 댁이 폭격에 완전히 사라져 형체가 없었다. 지붕도, 건물의 골격도 없었다. 장독들마저 박살이 났지만 놀랍게도 멸치젓이 담긴 장독은 무사하지 않은가. 준비해 간 바가지로 멸치젓을 퍼 담아 돌아오는데 마치 죽음의 더께에 눌린 듯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내 발목을 잡을 것만 같았다.
하루는 그 집을 들락날락하는 이웃 어른이 있었는데 그에게 작은 라디오가 있었다. 전지(電池)가 달랑달랑해 뉴스 시각 때만 짧게 틀었는데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이제 살았다고 환호했다.
그러던 어느 새벽녘, 괄~괄~괄~ 하는 쇳소리에 잠이 깼다. 나는 이형수 아저씨를 깨웠다. 아무래도 불길한 소리였다. 밖에 갔다 오신 아저씨는 “인민군이 후퇴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 양측이 서로 저항하다 한쪽이 힘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분명히 균형이 무너진 쪽 진영은 불바다가 되지 않겠는가. 일방 공격으로 쑥대밭이 될 게 뻔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인민군 퇴로를 따라 우리도 피하자고 제안했다. 아저씨는 어린 내 이야기를 물리치지 않았다. 우리는 부랴부랴 짐을 꾸려 인민군 뒤를 쫓아갔다. 곧이어 폭격이 쏟아졌다.
한참을 걸어 새벽 동틀 무렵, 지리산 자락에 다다랐다. 도중에 후퇴하는 인민군 트럭을 만나기도 했다. 태연스레 “태워달라”고 했더니 “민간인은 안 태운다”고 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리산 산속 마을에 아저씨의 사촌 집이 있어 그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은 전쟁이 일어난지도 모르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그곳에서 며칠을 지냈는데 추석이 다가왔다. 더부살이 피란민 신세였지만 나름 새끼도 꼬고 두부 만드는 일도 거들며 차례상을 준비했다. 그때 두부제조법을 처음으로 익히게 됐다. 추석날 아침, 차례를 준비하는데 느닷없이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길을 잘못 들어 산중으로 숨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몇 가구 안되는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밥을 지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인민군 장교가 나를 불러 손을 만졌다. 총을 만진 흔적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학생이 굳은살이 있겠는가. 일단 의심을 면하긴 했는데 “아버지는 무얼 하시냐”고 다시 추궁하는 것이었다. “농사꾼의 아들”이라고 하자 “부농(富農)의 아들이지!” 하고 쏘아붙였다. 간이 털썩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그때 정찰기 소리가 마치 잠자리 소리처럼 윙윙 들려왔다. 온 산하를 헤매며 피란을 다녔던 나는 이 소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체득하고 있었다. 잠자리(정찰기) 소리가 지나가면 곧바로 폭격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정찰기가 적의 위치를 파악해 폭격기를 불렀기 때문이다.
나는 부엌에 뛰어가 인민군 밥을 준비하는 마을 주민들에게 피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혼자 인민군에게 밥을 운반한 뒤 나 역시 부엌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
아버지와의 우연한 만남
마을에서 500m쯤 떨어진 소 마구간으로 뛰어가 숨어 있는데, 내가 머무르던 집 큰아들이 커다란 술독을 들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었다. 빨리 오라고 손짓했더니 “거동 못하는 우리 어머니를 놔두고 왔다”고 울먹이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폭격이 쏟아졌다. 마구간 문짝이 하늘로 날아가고 총알이 비 오듯 쏟아졌다. 밤이 되어서야 폭격이 그쳤는데 그제야 마을 아이들이 배가 고파 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겁이 나 마을로 내려가지 못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다. 조심조심 지게를 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참혹했다. 길에는 인민군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피가 사방으로 낭자했다. 그때 정적 속에서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지무지 크게 들렸다. 다가서니 죽은 인민군 병사의 손목에서 째깍째깍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끌러 내 손목에 차 보았다.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섬뜩한 생각이 들어 다시 인민군 손목에 매어주었다. 내가 묵었던 집 뒷담을 조용히 넘어가는데 마당 텃밭에 인민군 장교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게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대꾸가 없었다. 다가가 흔드니 옆으로 쓰러졌다. 외상은 없었지만 날아온 포탄의 파편에 숨진 것이었다.
문득 거동 못하는 할머니 생각이 나 안방 문을 열었다. 할머니가 벽 쪽을 향해 누워 있었는데 폭격으로 벽이 날아가 온데간데없었다. 할머니는 기적적으로, 손톱 만한 상처도 없이 살아 있었다. 방바닥에는 총알 구멍이 가득했다. 기적이란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나는 지게에다 할머니를 얹고 쌀과 음식을 챙겨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생환에 주민 모두 환호했다.
며칠이 지나고 국군이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됐구나 싶어 진주로 향했다. 진주는 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진주중학교에서 학도병과 장교 몇이 주민을 죄다 모아놓고 인민군 부역 여부를 심사했다. 그런데 고향인 마산으로 가기 위해선 통행증이 필요했다. 시내에 있는 ‘진주 CIC’로 찾아가 통행증을 신청하려니 경찰서 소관이라 하지 않는가.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경찰서 쪽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군인 트럭이 멈춰 섰다. 군인이 우르르 내리는데 언뜻 고향 1년 선배가 눈에 띄었다. 나를 보고 대뜸 “네 아버지도 이 트럭 타고 같이 왔다”는 것이었다.
정말 트럭에 아버지가 계셨다. 우리 부자는 한참 동안 말을 못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우리는 시간이 멈춘듯 서로를 응시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진주에 왔던 걸까. 내가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 알았을까. 나중 알게 된 사실인데, 지리산 계곡에서 만난 오누이가 먼저 마산에 도착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 집에 찾아가 나를 만났다는 얘기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이동했을 경로를 따라, 진주를 거쳐 거창으로 갈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어수선한 진주 시내 한복판에서, 그렇게 우연히 조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리=金泰完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