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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노라노] 피란지 부산에서 댄스홀 무대의상 만들어

6·25전쟁 나기 몇 달 전 미국에서 귀국
화장품·보석 챙겨서 피란길 올라
육군병원 환자들 위해 미군들에게서 모르핀 얻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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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노 패션 디자이너
⊙ 1928년 출생. 美 프랭크외칸 양재전문학교 졸업. 6·25 당시 의상실 운영하다가 부산으로 피란.
    뉴욕 패션쇼(1974년) 열어.
⊙ 現 의상숍 ‘노라노의 집’ 운영 중.
  충격적인 사건은 쉽게 잊히지 않는 법이다. 6·25 때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가족을 서울역에서 피란 보내면서 꼭 살아 있으라고 플랫폼에서 손을 흔들던 아버지, 부산 육군 임시병원 계단 층층이 널브러져 있던 부상병들, 수술용 모르핀을 나눠 달라고 미군을 찾아가 사정사정했던 기억들….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눈을 감으면 어제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나는 스무 살이었던 1948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은 꼭 천국 같은 나라였다. 당시 일본 치하에서 막 벗어난 한국의 사정은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 열악했고, 그 격차 때문에 내가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미국인 스폰서가 나의 도미(渡美)를 도왔고, 내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는 데 힘을 실어줬다. 나는 디자이너가 되고자, 프랭크외칸 기술학교에서 디자이너 수업을 받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의 젊은 동양 여자아이가 신기했던지, 나는 미국의 곳곳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할리우드에서 스카우트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미국 생활이 한 해를 넘기면서, 나는 고국이 정말 그리웠다. ‘가족이 모두 한국에 있는데, 미국이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무슨 소용이랴’ 싶었다. 나는 패션 공부가 끝나는 대로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미국 생활을 돌봐준 스폰서는 내가 계속 미국에서 살 것으로 기대했지만, 1950년 초 나는 귀국을 선언했다.
 
  하루는 스폰서가 나를 불렀다.
 
  “노라, 한국에 곧 전쟁이 난다는 소문이 있어. 중공처럼 공산주의 국가가 될 거라고들 해. 노라가 패션 디자이너로 살든, 영화 일을 하든 내가 밀어줄게. 한국에 가지 말고 미국에 남는 것이 어때?”
 
  고국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일로 결심을 바꿀 내가 아니었다. 나는 만류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만일 조언을 해 준 미국 스폰서의 말을 들었다면, 6·25전쟁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과 몇 달 뒤 내게 닥칠 시련을 알지 못한 채, 한국행(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쟁을 겪을 운명이었나 보다.
 
 
  옷 지어주던 외국대사 부인들, 6월 26일 속속 본국으로 떠나
 
피란지 부산에서도 일상생활은 계속됐다. 배급을 타기 위해 주민들이 부산시 초량5동 사무소 앞에 줄을 서 있다.

  나는 디자이너가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딱히 할 일이 없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다가 공짜로 옷을 만들어줬다. 하루는 한국에 살고 있는 한 미국인 친구의 파티 드레스를 만들어줬는데 그 드레스가 빅히트를 쳤다. 그 친구는 “파티 내내 누가 의상 디자인을 했느냐는 얘기를 들었다”며 “의상실을 열면 인기를 끌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원래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친구 얘기를 듣고, 곧장 의상실을 개업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있는 2층 양옥에서 살고 있었다. 집이 꽤 넓었는데, 나는 2층을 의상실로 개조했다. ‘노라 노’라는 이름을 걸고 고국에서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딛게 됐다.
 
  주로 파티 참석이 잦은 외국 대사의 부인들이 내 고객이 됐다. 명동에서 맞춤옷 한 벌에 1달러를 받았는데, 나는 10달러를 불렀다. 10배나 비싼 값인데도, 내 의상실을 찾아오는 외국 대사들의 자가용이 신당동 일대를 꽉꽉 메우곤 했다. 나는 일이 하도 재미있어서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 변변한 원단이 없어서, 대사 부인들이 직접 가져오는 적이 많았다. 나는 대사 부인들의 몸 치수를 재고, 스타일을 정해, 그들이 가져온 원단으로 옷을 만들었다.
 
  1950년 6월 25일은 늘 그렇듯이 내게 바쁜 날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의 한 극장에서 공연 중인 인도 연극 의상을 함께 담당하고 있어서,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잦았다.
 
  ‘쿵!쿵!’
 
  새벽녘에 멀리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대포소리였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인근 주민들이 하나둘씩 대문을 열고 나와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이북이 남한으로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딱히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음 날인 6월 26일, 나에게 옷감을 맡겼던 외국 대사의 부인들이 하나둘씩 의상실로 찾아왔다. 그들은 “사정이 긴급하게 되었으니 옷감을 도로 찾아가고, 나중에 다시 옷을 짓겠다”고 했다. 이들은 이날 대부분 일본을 통해 본국(本國)으로 돌아갔다. 옷감 값이 비싸다 보니, 본국으로 가기 전에 찾아간 것이었다.
 
 
  철없는 20代 아가씨의 피란 물품
 
  이튿날인 27일 새벽 3시쯤,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왔다. 내 아버지 고(故) 노창서옹은 KBS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국영 방송국을 설립한 분이다. 공무원 신분으로 방송국을 세우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와중에 6·25를 맞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고 이옥경 KBS 초대 아나운서)를 찾아, 다짜고짜 피란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부엌일을 하던 사람에게 우선 밥을 한 솥 지으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여수, 순천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가족을 다 잡아넣을 거라고 생각했다. 피란을 간다기에, 당연히 깊은 산중으로 도망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길을 걸으려면 발이 아플 것 같아서, 납작한 플랫 슈즈로 갈아 신었다. 중요한 물건을 챙기라고 하기에, 미국 유학을 갈 때 형부가 해 준 보석 몇 개를 가방에 넣었다. 화장대 위에 놓인 화장품을 손으로 싹 쓸어담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20대(代) 초반의 아가씨에게 중요한 물건은 이런 것들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6·25전쟁 때 패물과 화장품 몇 개를 들고, 갖은 멋을 부린 채 피란을 가게 된 셈이다.
 
  피란 준비를 지시하고 나갔던 아버지는 한 시간이 지나 트럭을 한 대 구해 왔다. 시간이 짧아, 밥이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베 보자기를 꺼내더니, 설익을 밥을 쏟아붓고 무짠지 몇 개를 꽉꽉 묶어 트럭에 실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 10여 명을 태우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공무원 가족을 부산으로 이송하는 기차가 곧 서울역에서 떠난다고 했다. 서울역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기차 안은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으로 가득 찼고, 자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이 계속됐다. 아버지는 우리를 기차에 태우고는, 황급히 기차에서 내렸다.
 
  “먼저 떠나라. 나는 이동 방송을 하면서 부산으로 갈게. 내 걱정은 하지 마. 서로 붙어서 꼭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해.”
 
  온 가족이 함께 떠나는 줄 알았던 나는 플랫폼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때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웃음을 지으며, 씩씩하게 손을 흔들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
 
  아버지는 이후 방송국에 남아서 기계를 트럭에 싣고, 전쟁 상황을 사람들에게 전하며 한참 뒤에야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에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동 방송국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서울로 환도(還都)시킨 뒤인 1954년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전쟁 통에 제대로 드시지도 못한 채 몸을 혹사한 탓에 암에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군이 온다는데 그 사람들 우리 편 맞지?”
 
  기차는 서서히 서울역을 출발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느린 속도로 정거장을 지났다. 가족이 시장기를 느끼자, 어머니는 베 보자기를 풀었다. 급히 피란을 온 턱에 수저와 물을 챙기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이미 출발한 뒤였다. 우리 가족은 손가락으로 설익은 밥을 집어 요기를 하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정거장에서 아이스캔디를 사먹으며 물 보충을 했다.
 
  정확히 몇 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산에 도착하니 벌써 해가 져 어둑했다. 가족 10여 명이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버지가 얘기한 관사로 찾아갔다. 그곳에 살고 있던 공무원 과장은 우리에게 자기 집의 절반을 내줬다. 그렇게 피란 생활이 시작됐다.
 
  나는 어린 시절에 풍족하게 자랐다. 194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도 넉넉한 형편 덕분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자산가였는데, 슬하에 자식이 어머니뿐이었다. 덕분에 우리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만주에서 자라, 일본에서 유학을 했다. 전쟁이 나기 전에 요즘처럼 최신식으로 살았던 터라, 나에게 피란 생활은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베개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베고 잤는데, 다음 날이면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풍족하게 살았던 지난 23년은 말 그대로 ‘과거’일 뿐이었다.
 
  부산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제법 글깨나 읽었다는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부산의 다방에 모여, 매일 자욱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세상을 한탄했다. 학생들은 학교 마당에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했다. 해가 지고 나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라디오를 통해 전시(戰時) 상황을 전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중공군이 마산에까지 쳐들어왔대.”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몰라서 물어? 다 죽는 거지. 부산 앞바다에 뛰어드는 일만 남은 거야. 휴.”
 
  그제야 전쟁, 죽음, 피란이 실감났다. 중공군의 모습을 보는 날에는 부산 앞바다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미군이 부산항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사람들은 또다시 웅성거렸다.
 
  “미군이 온대. 우리를 도우러 오는 거지? 그 사람들 우리 편인 거는 맞지?”
 
  그도 그럴 것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는 미국, 영국 사람들이 못된 사람이라는 식(式)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나는 미국 유학을 한 덕분에 미국 사람들에 익숙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시민들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미군이 부산 광복동에 있는 부산항으로 오던 날이 기억난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막내 여동생 광자의 손을 잡고 부산항으로 나갔다. 미군을 환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동생 광자는 유달리 머리가 노랗고 얼굴이 하얀 편이었다. 언뜻 보면 서양 아이처럼 보였다.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던 미군들이 내려서 한 번씩 내 동생을 쳐다보고 지나갔다. 혹시 서양 아이인가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때 미군은 우리에게 구세주였다. 피란민들에게 시레이션을 무료로 나눠줬고, 구제품도 나눠줬다. 구제품엔 예쁜 여성용 털코트까지 섞여 있어서 참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부산육군병원에서 자원봉사
 
  부산의 한 학교에 부산육군병원이 임시로 세워졌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영어를 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육군병원에 가보니 처참한 광경뿐이었다. 학교 계단 위에 카트가 있었는데, 그 위에 부상병들이 팔다리에 붕대를 감고 줄줄이 누워 있었다. 통증에 신음하는 군인들, 눈을 게슴츠레 뜬 꺼져가는 생명들, 일손이 달리는 탓에 발을 동동 구르는 의사와 간호원들….
 
  나는 난생처음으로 디자이너가 된 것을 후회했다.
 
  ‘미국에서 의학 공부를 할 걸 잘못했다. 내가 의사였다면 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응급 수술을 하기 위해서 약품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모르핀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군 부대에 가서 얻어와야 했는데, 이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신음하며 죽어가는 군인들을 도울 길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터였다. 나는 무작정 미군 부대를 찾아갔다.
 
  “플리~즈.”
 
  나는 미군 부대 담당자에게 모르핀을 나눠달라고 사정사정했다. 말이 좀 안 통한다 싶으면 울면서 매달렸다. 내가 모르핀을 구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까짓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눈물이 먹혔는지, 아니면 동양 여자가 영어를 하는 것이 신기했는지는 모르겠다. 미군은 내가 찾아갈 때마다 약품을 나눠줬다. 내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그토록 애걸복걸했던 기억이 없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이다.
 
  미군은 나중에 민사처 병원을 열었다. 군인이 아니라, 피란 중에 다친 민간인을 고쳐주는 임시병원이다. 미군이 세웠고, 병원장은 닥터 조라는 한국인이 맡았다.
 
  그때 부산에는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함흥 사람이 제일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6·25전쟁이 터지고 나서 피란을 떠났으니, 겨울이 돼서야 도착하곤 했다.
 
  민사처 병원은 피란민이 도착하면 사람들의 옷을 벗기고 샤워실에 넣은 다음에, DDT를 쐈다. DDT는 인체에 유해(有害)하다고 해서 지금은 금지된 약품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DDT를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이 투성이였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후 병원 측은 피란민에게 샤워를 시키고, 옷을 갈아입혀 진찰을 했다.
 
  하루는 이곳에 갔다가, 서울의 내 의상실에서 일하던 기술자 한 명을 만났다. 전쟁 통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서로 반가워했다. 그 기술자는 긴 피란길에 폐병을 앓아, 민사처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한번은 아홉 살짜리 꼬마가 이북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동상에 걸려서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때마침 모르핀이 다 떨어졌다. 닥터 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다리를 그냥 절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꼬마가 죽었는지, 두 다리가 절단된 채로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전쟁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가혹하게 만드는지 눈물이 난다.
 
 
  피란지에서 영화배우 최은희씨 만나
 
  부산은 어느새 많은 사람에게 제2의 고향이 되고 있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피란 생활에 자리가 잡혔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내가 해 온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산 광복동에 ‘노라노’라는 간판의 의상실을 열었다. 전쟁 통에 무슨 의상실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일상을 찾아갔다.
 
  광복동의 ‘황가 댄스홀’은 잊을 수가 없다. 이곳에서 댄서들이 옷을 입고 쇼를 열었는데, 극장 안에 발디딜 틈이 없었다. 전쟁 중에 희망이 없으니까, 그렇게 춤추는 사람들을 보고,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나마 위안을 삼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전쟁 중에도 낭만은 있었던 것이다.
 
  부산의 유일한 의상실 운영자였던 나는 이 쇼의 무대 의상을 주로 맡았다. 무대 의상은 화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담뱃갑 속에 있는 은종이와 깡통을 오려 스팽글을 만들고, 색색깔로 안감을 사다가 무용수들의 옷을 만들었다. 민사처 병원에서 만났던 기술자의 폐병이 나은 덕분에, 그는 나와 함께 이 일을 했다.
 
  전쟁 통이어서 그럴까. 나는 밤을 새워가며 미친 듯이 일했다. 일을 하면, 우리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배우 최은희씨와의 만남도 이때 이뤄졌다. 최은희씨가 내게 의상을 해 달라고 찾아왔다. 이후 휴전이 되고 난 후에 꽤 오랫동안 최은희씨의 영화 의상을 담당했다.
 
  한번은 대구에서 쇼가 이뤄지는데, 거기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의상을 담당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열심히 만들어줬는데, 대금 지급을 안 했다. 직접 수금을 해야겠다 싶어서, 배우들이 있다는 대구 여관방으로 찾아갔다. 그랬더니 웬걸, 배우들이 방값을 못 내서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돈을 받으러 갔던 나는 짠한 마음이 들어 부산으로 돌아와 내가 갖고 있던 라디오를 팔아 이들에게 보내줬다. 그때 여관방에 인질로 잡혀 있던 배우 나애심씨의 눈빛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환도 이후 세상 달라져
 
  지긋지긋했던 전쟁은 끝났다. 부산에 머물던 가족은 귀경하기로 했다.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오는데, 신당동 집은 더 이상 예전같이 따스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집터와 집 골격만 남아 있었고, 문짝이며 집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군인들이 문짝이며, 모든 것을 가져다가 불을 땠다고 했다. 첫날 잠을 자는데, 수백 마리의 벼룩떼가 마루 위를 뛰고 있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벼룩떼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 부탁해서 DDT 폭탄을 터뜨려 간신히 벼룩떼를 없앴다.
 
  도둑은 밤낮없이 들락거렸다. 먹고살 것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옆집 담장을 넘는 도둑과 눈이 마주친 적도 있다.
 
  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세습에 이용할 요량으로 공산주의를 내세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친북(親北)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다. 6·25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鄭蕙然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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