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金東吉] 23세 청년의 전쟁과 사랑

학생회 간부였기 때문에 목총으로 학교를 지키려고 했으나 교수의 권유로 피신
서해에서 풍랑 만나 죽을 뻔
피란지 부산에서 꽃핀 사랑… 하지만 열매는 맺지 못해

金東吉   

  • 기사목록
  • 프린트
金東吉
⊙ 1928년 출생. 평양고보·연희大 영문과 졸업.
⊙ 연세大 사학과 교수·부총장, 통일국민당 최고위원, 제14代 국회의원 역임.
⊙ 現 태평양시대위원회 이사장.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새벽부터 쾅쾅 하는 소리가 북에서 계속 들려 왔지만 예사로 여기고 있었다. 38선 쪽에서 포성(砲聲)이 들려오는 일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그날 아침 자고 일어난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어서 그것이 결코 놀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좀 다르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대포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날 오후 2시부터 종로 YMCA에서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함석헌 선생의 강의가 있었다. 물론 성서(聖書)가 중심이었지만 함 선생은 강의 중에 논어, 맹자, 노자, 장자는 물론 영시, 한시도 쏟아내 대학생이던 우리를 매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때 선생의 춘추는 50세밖에 안됐지만, 바지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은 선생을 우리는 노인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 모임에는 옛날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하시던 유영모 선생도 매번 나오셨다. 가끔 함 선생의 강의 전에 몇 말씀 하시는 때도 있었다. 유 선생 가르침은 쉽고도 어려워서, 열심히 들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 어른은 다소 ‘기인(奇人)’이었다. 그날 강의가 끝나고 10여 명이 함 선생을 모시고 작은 방에 둘러앉았다. 모두가 근심스런 표정이었다. 함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포소리가 자꾸 커지는 걸 보니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다.”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걱정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60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이튿날은 월요일. 함 선생께서 11시부터 연희대학교의 노천극장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신앙강좌를 3번에 나눠 하시게 돼 있었는데, 그날이 첫날이었다. 많은 학생이 모여 있었다. 나는 학생 대의원들에 의해 이미 학도대장(총학생회장)에 선출된 몸이라 그 강연회의 사회를 맡은 관계로 단 위에 서서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함석헌 선생을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이때 내가 함 선생을 ‘종교시인’이라고 불렀던 것이 기억난다.
 
  이미 인민군의 미그기가 서울 상공을 날아다니는데, 그 요란한 소리가 날 때마다 학생들이 모두 하늘의 비행기를 쳐다보니까 함 선생께서 “날아가는 비행기에 관심을 가져 뭘 할 거냐?”고 우리를 꾸짖기도 하셨다. 그 강연은 수요일과 금요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었는데, 그날 강연이 첫 번째인 동시에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부터 나와 내 동지들은 인민군의 남침에도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비장하고도 ‘어리석은 결심’을 하고 학교 창고에서 목총(木銃)이 여러 개 있는 것을 찾아내, 그걸 들고 학관(學館)의 아래 위층을 지킨다고 자리를 잡고 있었으니!
 
  26일에는 의정부·미아리에서 견디다 못해 후퇴한 국군 병사들이 캠퍼스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한강을 향해 고달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어떤 친구가 와서 일러 주었다. 서울의 북쪽은 이미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고. 전세(戰勢)가 절망적이라고 느껴졌다.
 
 
  “김군, 일단 2~3일 피했다가 돌아오게”
 
피난 중에도 교육열은 대단하여 천막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1951년 부산).

  27일 새벽이었다. 엄청난 폭음이 한강 쪽에서 들려왔다. 무슨 큰일이 난 것이 분명하였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우리 공병대가 한강에 하나뿐인 한강철교를 폭파함으로써 인민군의 진격을 일단 막아보려 한 것이었다. 날이 되니 벌써 붉은 완장을 두른 놈들이 교정의 여기저기에 나타나 괴성을 지르고 다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이 확실했다.
 
  박상래 교수가 나를 찾아와, “김군, 아무래도 2~3일 한강을 건너가 있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아” 하면서 학교 회계로부터 타 온 돈뭉치 4개를 내게 건네줬다.
 
  “어서 떠나!”
 
  1950년 6월의 우리는 지극히 순진하고 순수한 젊은이들이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대개 나처럼 북에 살면서 김일성에게 당할 만큼 당한 사람들, ‘공산당’이라면 치가 떨리는 그런 의식구조의 청년들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언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믿고 사는 터라 만일 박 교수가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지 않았다면 우리 몇 사람은 연희대 교정 어디에서 놈들에게 맞아 죽은 지 오래일 것이다.
 
  이근섭을 비롯한 몇몇 동지와 잠시 난을 피하겠다는 심정으로 한강을 향해 떠났으나 한강은 이미 폭파되어 건널 수 없다고 하여 서강에서 쪽배인 나룻배 하나를 얻어 타고 겨우 한강을 건너가 거기서부터는 걷기 시작하였는데, 안양쯤 가니까 긴긴 여름 해도 저물고 있었다. 모닥불 옆에 누워 자기도 하고 수원까지 가서 청년의용군에 들어가 며칠 지내기도 했는데 거기서 단장격인 김두한씨를 만났다. 얼굴에는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좀 남아 있었고, 문자 그대로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였다.
 
  우리는 남하하는 기차를 얻어 타고 이럭저럭 대전까지 가 여러 날 선화동에 있던 선화 교회에 머물면서, 거기서 합류한 장기원 선생의 따님 장혜원씨 가족을 만났다. 혜원씨의 풍금 반주에 맞춰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맘이 늘 편안하다. 구주의 뜻 준행하면 참 기쁜 복, 내 것일세”라며 찬송가를 부르고 또 부르던 일이 생각난다. 이미 미군 사령부가 대전에 설치돼 원일한 선생이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전세가 급박하여 대전에서도 후퇴해야 할 것이 명백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철학과에 다니던 최영래가 있었다.
 
  그는 경주 최씨로 우리에게 경주에 있는 자기 집에 가자고 간청하여, 불국사 가까이 있던 철도호텔(오늘의 관광호텔)에 가서 여러 날을 머물렀다. 최영래의 삼촌이 그 당시 철도국에서 일했는데 그 호텔의 책임자여서 이승만 대통령이 묵으셨다는 그 방에서 자기도 했다. 바로 옆에 불국사와 계곡의 아름다움을 수시로 감상하기도 했다.
 
  치열한 전투는 날마다 계속되고, 우리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임시수도가 마련된 부산으로 떠나게 됐다.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 모두 부산에 내려왔는지, 조그마한 항구도시는 피란민으로 들끓고 있었다. 먹을 것이 없고 잠자리도 구하기 어려운 처량한 세월이었다. 광복동의 절에서도 며칠 잤고, 부산 YMCA 빈 교실의 책상 위에서도 자면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인천으로
 
  다행히도 피란을 와 있던 대원기업의 심상준씨가 해운대 해변에서 미군 군사물자 하역작업을 하는데 통역이 필요하다고 해 나이 23세에 미군과 우리 노무자들 사이에서 통역도 하고, 영어로 서류도 작성하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다. 해운대 어느 농가에 하숙하며 일하게 되어 일단 숙식문제는 해결되었고, 돈도 조금씩 모아 서울로 돌아갈 여비 정도는 마련했다.
 
  낙동강으로 밀려 내려오는 인민군을 격퇴하기가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져서 부산에서도 위태롭던 한때가 있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한국군과 UN군은 그 일을 해냈고, 백선엽 장군은 그때부터 한국전의 영웅이되었다. 그해 8·15광복절이 돌아왔을 때 즈음에는 전세가 많이 호전돼 대구, 부산을 적군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당시 해운대는 정말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바닷가의 조그만 온천마을이었다. 요사이 해운대에 가는 사람은 그날의 해운대, 1950년의 해운대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에는 여관이 1~2개, 온천탕이 한 곳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통조림 중에는 잼이 있었는데, 내 친구 이근섭이 그 깡통에 든 잼을 깨끗이 먹는다고 혀로 핥다가 피가 나기도 했으니 그 시절의 궁상스런 생활은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럭저럭 살림은 자리가 잡히고 인천상륙의 소식도 들려와 서울에 두고 온 식구들의 안부가 걱정되어 곧 서울에 가고 싶었지만, 그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강을 건너는 데도 ‘도강증’이 있어야 하는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후배 중에 김영준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세상 일에 우리보다 훨씬 밝은 친구였다. 하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님, 경찰 경비정 하나가 10월 초에 인천으로 간다는데, 그걸 좀 얻어 타면 어떨까요? 민간인도 몇 사람 태운답니다.”
 
  그가 어떤 수단을 써서 나와 친구 이근섭이 탈 수 있게 주선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내 생일이 10월 2일인데 그때쯤 부산 영도의 작은 부두에서 겨우 10여 명 탈 수 있는 작은 경비정을 타고 초저녁에 영도를 떠나 인천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런 배의 별명이 ‘똑딱선’이었다. ‘똑딱똑딱’ 하면서 “내배는 떠나간다”였다.
 
  그날 밤이 왜 그런지 매우 음침하게 느껴졌다. 우리 세 사람 외에도 경찰관과 몇 사람이 더 동승했는데, 그중에는 장안의 괴짜로 알려진 방수영씨가 있었다. 그는 향린원이라는 고아원을 경영하기도 했고, 훨씬 뒤에는 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는 신발을 발명했다는 둥 별난 소리를 하기도 했다.
 
  9·28수복으로 서울을 탈환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서해에 접한 전라도, 충청도에서는 인민군이 도사리고 있던 때였다. 10월 초, 경찰 경비정은 인민군에 피격될 것이 두려워 해안선을 멀리 떠나 항해하는 중이었는데 밤이 되면서 바닷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그 작은 경비정 하나가 뜻하지 않은 폭풍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경창파에 일엽편주’가 어떻게 그 격랑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도가 매우 심해 동승한 사람 중에 멀미 때문에 토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바닷물이 경비정 안으로 밀려 들어와 모두가 바가지로 퍼내야만 했다.
 
  한번 상상해 보자. 바다에서 파선(破船)돼 인명과 재물을 창파에 모두 잃은 경우는 인류의 역사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의 운명 선상에 떠오를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을 것 아닌가. ‘이젠 죽었구나!’ 일종의 절망감이 우리를 엄습하였다. 내 친구 이근섭과 함께 바람이 조금 잠잠해진 틈을 타서 몇 평 안 되는 갑판 위에 올라가 하늘을 봤다. 하얀 마스트(돛대)는 캄캄한 하늘에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고, 나는 그 순간 세 번이나 파선하여 일주야를 바다의 깊음에서 헤매다 살아났다는 위대한 복음의 전도자 바울을 생각하며 그 갑판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제게 할 일이 남아 있으면 저를 살려 주세요.”
 
  대학을 아직 졸업하지 못한 스물세 살 청년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일까. 먼동이 트기 전에 풍랑은 조금씩 잠들기 시작했다. 밤새 지치고 지친 우리는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경비정은 파도를 헤치노라 ‘뙤뚝뙤뚝’ 하면서도, 미국에서 사들인 지 얼마 안되는 신형의 새 배인지라 엔진만은 튼튼하여 밤새 ‘똑딱똑딱’ 하기를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무사히 인천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선장 격인 해경의 경위쯤 되는 이가 우리에게 일러 주었다.
 
  “지난밤에 엔진이 꺼졌으면 배는 전복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다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나의 체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인천 앞바다였다. 태양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고, 인천 앞바다를 꽉 메운 크고 작은 선박들을 바라보며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이 앞섰다. 간단한 조사를 받고 이근섭과 나는 육지에 올라와, 100일 동안 전혀 소식을 모르던 서울의 집을 찾아가는데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방위군에 편입되어
 
  신촌 집이 무사하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연희고지’의 전투가 치열했다고 이미 들은 바 있었으니 캠퍼스 근처에 자리 잡은 우리의 집들이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없었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무사하리라고 기대할 근거 또한 희박하였다. 정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인천시내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깨져 있었고, 무엇을 얻어 타고 인천을 벗어나 노량진을 거쳐 마포까지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내 친구 이근섭이 살아 있다면 물어보기라도 하련만.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이미 10년이나 되었다. 어쨌건 100일 전화(戰禍)에 500년 도읍지는 잿더미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두 집의 식구들은 모두 무사하고, 재회의 기쁨은 그간의 모든 고생과 시련을 말끔히 잊을 수 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뭘 먹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막연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문과의 최재서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였다. 강의실에 학생은 이근섭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최 교수는 남산 기슭 적산 가옥인 일본인 집에 살고 계셨는데, 우릴 보고 학교의 강의실까지 오지 말고 자택으로 와서 강의를 받으라고 했다. 아마도 건강이 좋지 않아 그런 제안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최 교수는 <타임>지를 뒤적이면서 “중공군이 밀려올 모양이다”며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교수 집에서 하는 강의도 두서너 번으로 끝이 나고, 서울의 분위기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6·25 때 “서울을 사수할 터이니 안심하라”는 대통령의 믿음직한 목소리를 그대로 믿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적치(敵治) 90일에 죽을 고생을 한 서울시민은 이젠 정부의 무슨 약속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서둘러 피란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 초순에 소집영장이 날아왔다. 소집일은 12월 19일, 집합장소는 창경원(창경궁). 이근섭과 나는 함께 그날 제시간에 창경원에 갔는데, 거기서 소대가 편성되어 행군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부산. 국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곁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군사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 같다. 첫날 밤을 장호원국민학교 강당에서 보냈다. 여관이 있었을 리 없고, 개인 집에 나뉘어 묵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잠은 초등학교 강당이나 극장에서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천을 지나 장호원이었고, 충주를 지나 수안보 온천장에서 하루 자면서 오랜만에 목욕할 수 있었다. 문경새재를 이화령 방면으로 넘었고 산기슭에 인민군 탱크가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서 상주에 도착했다. 그해 크리스마스를 상주에서 맞이했는데, 내 친구 이근섭은 고무신을 신은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행군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다리를 절면서 목적지까지 갔다. 일찍 떠나서 하루에 70리를 걸어야 했던 날도 있었으니, 문자 그대로 강행군이었다.
 
  1950년 겨울은 비길 데 없이 추운 겨울이었다. 군위를 거쳐 경산에 다다랐을 때는 밤이 늦었는데, 방위군에 편입된 우리는 그 시골의 극장,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거적을 깔고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아침·점심·저녁에 주는 것은 주먹밥 한 덩어리, 반찬은 없고, 소금 맛밖에 나지 않는 시래깃국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병이 나서 대열에서 탈락하는 대원들도 없지 않았다. 청도에 들렀다가 밀양에 가서는 방위군의 분대들이 통합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이럭저럭 흩어지고 말았는데, 밀양에서 이미 미군 기관에서 일하던 이삼현과 UPI의 기자가 돼 있던 최기전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피란지 부산에서 교사 생활
 
  이럭저럭 부산역에 기차를 타고 도착해서는 초량동 46번지 큰 적산가옥을 가진 후배 주관중 집에 기거하며 일자리를 찾았다. 다행히 부산진역 구내에 텐트를 치고, 사무실을 차린 미 제5공군의 ‘공군대학’이라는 정보수집기관에 취직돼 포로들을 신문하여 얻은 정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인민군과 중공군 출신 포로들은 대개 거제도에 수용돼 있었는데, 우리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가서 포로를 인터뷰해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돌아오면 우리는 ‘조사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번역을 해야만 했으므로, 당시 포로들의 사정이나 심정은 다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나 할까.
 
  그 당시, 미군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병역이 면제되는 것이었지만, 길거리에서 징집관들에게 붙잡혀 입대가 강요되는 경우는 일단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나도 이근섭과 함께 그런 식으로 붙잡혀 영도에서 통영으로 수송되었고, 통영에서 LST(상륙용 주정)를 타고 제주도 모슬포의 훈련소 장정 대기소에 가게 됐다. 거기서 열병에도 걸리고 고생이 많았지만, 부산까지 1·4후퇴 때 따로 피란 오신 어머님이 아들 면회를 오셨다. 나는 미군 제5공군에서 연락이 있어 정식입대를 하기 전에 옛날 직장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후배인 백영찬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그는 뒤에 미국으로 가서 안정된 살림을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연희대학에서 나를 가르친 김선기 교수의 주선으로 부산에 피란 와 보수동 창고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던 이세정 교장의 진명여자중·고등학교의 영어교사로 직장을 옮기게 됐다. 창고 속에 휘장을 치고 반을 갈라 놓았으니 옆 교실에서 수업하는 내용을 다 들으면서 내 수업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내 나이 24세, 한창 젊은 나이에 가르치는 정열도 있었고, 사랑하는 정열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모두 꿈이요.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I’ll have you to remember.
  And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Your love will live in my heart.
  And so kiss me my sweet
  And so let us part.
  And when I grow too old to dream
  Your kiss will live in my heart.〉
 
  <나 너무 늙어 꿈도 사라지고 그날 되어도
  나 변함없이 그대를 기억하고 있으리
  나 너무 늙어 꿈도 사라진 그날 되어도
  그대 사랑 내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있으니
  키스해 주오, 내 사랑이여
  그리고 우리는 헤어집시다.
  이 다음 나 너무 늙어 꿈마저 잃어도
  그대 키스 내 가슴에 여전히 살아 있으리>
 
 
  전장에서 핀 사랑
 
  나는 일 년쯤 진명에서 가르치고, 이환신 목사가 부산에서 YMCA연합회의 총무로 부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연합회의 출판부 간사가 되어 <청년>이라는 월간지를 발간하기 위해 글을 쓰는 일을 시작하였다. 용두동의 사무실에 출근하면서 당대의 명사들, 신흥후, 홍병선, 이호빈, 박에스더 같은 인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피란지 부산 영도의 연희대학교 가교사에서 졸업장을 받았을 뿐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았다. 사랑은 있었지만 열매는 맺지 못했다. 1953년 7월에 휴전이 성립되어 서울 사람들이 많이 서울로 돌아갔다. 나보다 먼저 서울에 돌아간 윤남경이 부산에 있던 나에게 편지를 한 장 보냈다. 중앙청 앞길에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이 들었다는 소식이었다. 가을이 깊었고, 삶이 서글프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답장도 한 번 못하고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다. 박목월이 시를 쓰고, 김성태가 곡을 붙였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지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신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 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나는 가을이 깊어가고 중앙청 앞에 은행나무 잎이 물들면 그를 떠올렸고, 그를 그리워했다. 나무 열매 없이 피었다 진 가엾은 꽃이라고나 할까. 나는 오세훈 시장이 그 길의 은행나무를 모두 뽑아버린 것을 크게 나무랐다. 물론 서울시민을 생각하고 “그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꾸짖은 것이지만, 은행나무가 사라져서 내 꿈도 사라져버린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또 한 번 서울 시장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부탁은 오직 하나, 600년 도읍지인 한양의 체통을 되살려 달라는 한 가지 부탁이 있을 뿐이다. 전쟁과 사랑은 무관한 것 같지만 나는 그 전쟁 중에 사랑에 빠졌던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60년이 지난 오늘 그날을 돌이켜보며 감상에 젖는다. 23세의 청년이 이제 83세의 노인이 되어 이제 이 붓을 놓으려 한다.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은 우리의 군함 천안함을 두 동강 내고 서해에서 아직도 저 발광을 하지만 우리는 태극기를 지켰고, 대한민국을 살렸다. 앞으로도 이 겨레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