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진국들이 대한민국에 원하는 것은 돈과 물자, 식량이 아니라
단시일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역사와 경험이다
朴大元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 1947년 경북 포항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페루 국립공과대 명예박사, 알제리 피아레대학교 명예박사.
⊙ 경력: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제8대 총재, 駐 알제리대사관 대사, 현(現) KOICA 이사장.
“당신들은 150년은 지나야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단시일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역사와 경험이다
朴大元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 1947년 경북 포항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페루 국립공과대 명예박사, 알제리 피아레대학교 명예박사.
⊙ 경력: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제8대 총재, 駐 알제리대사관 대사, 현(現) KOICA 이사장.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식민종주국이었던 유럽 사람들은 이 같은 말로 열악한 환경을 딛고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아프리카인들의 의욕을 꺾어 놓았다. 당시 아프리카인들은 누구도 이 말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미국과 유럽은 최소한 100년에서 200년 동안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을 차분히 밟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지난해 11월 24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자 아프리카 국가들은 “한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됐다”며 놀라워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을 찾는 아프리카의 국가지도자에서부터 장·차관에 이르기까지 최고위급 정부 관계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최근 이렇게 말한다.
“한국이 잘산다는 얘기를 반신반의(半信半疑)하던 많은 사람이 한국이 DAC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잘사는 나라가 됐구나’라고 감탄한다.”
아프리카를 비롯, 아시아와 중남미의 수많은 개발도상국은 한때 유럽인들로부터 자신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한국을 배우고 싶어한다. 이미 19세기 말에 근대화를 이룬 서방 선진국보다 본인들과 같이 출발했지만, 불과 1~2세대만에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를 모델로 삼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워싱턴컨센서스
누군가가 따라 배우고 싶은 모델이 된다는 것은 참고할 만한 표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산업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표준을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누구든 따라 배울 수 있고 참고할 수 있는 표준이 존재했기에, 생산성의 폭발적인 증대와 우수한 제품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교육의 확대와 여가 시간의 확보 등 인류의 삶의 질 향상도 이룰 수 있었다.
세계가 따를 수 있도록 표준을 만드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초강대국의 위치에 올라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해 왔다. 산업혁명 시대 영국, 20세기 미국이 그랬다. 1990년대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신(新)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이 ‘워싱턴컨센서스’로 명명되며 글로벌 스탠더드로 자리매김했다.
워싱턴컨센서스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미국 국제경제연구소(現 피터페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 박사다. 그는 열 가지 정도의 정책적 규범으로 워싱턴컨센서스를 설명했다. 금융자유화, 무역자유화, 외국인투자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재정 및 통화긴축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미국과 영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고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도 경제지표상의 발전을 이뤘지만, 부작용 또한 적지 않았다.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돼 전(全)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고 간 월스트리트 발(發) 금융위기는 워싱턴컨센서스에는 거의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베이징컨센서스
워싱턴컨센서스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던 2004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고문이자 중국 칭화대(淸華大) 겸직교수인 조슈아 쿠퍼 라모(Joshua Cooper Ramo)는 ‘베이징컨센서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개혁개방 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중국의 경제발전 모델을 개념화한 베이징컨센서스는 ‘권위주의적 정권하에서의 시장경제 발전’을 일컫는다.
전 분야의 자유화와 세계시장과의 일체화를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려는 워싱턴컨센서스와 달리, 베이징컨센서스는 정치·경제적 자유화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시장경제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경제발전을 모색한다. 실제로 중국은 개발도상국, 특히 아프리카 현지 시장 진출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06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3차 중국·아프리카협력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아프리카 53개국 정상 가운데 무려 48개 국가의 정상이 중국을 찾았다. 베이징컨센서스가 실체 없는 개념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워싱턴컨센서스가 금융위기 전에도 문제점과 부작용을 노출했던 것처럼 베이징컨센서스도 적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우선 아프리카 현지 주민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중국의 노동력과 저렴한 제품이 쏟아져 들어오자 많은 현지인이 일자리를 잃고 영세 수공업자들은 시장을 잃고 있다. 노동시장이 교란되고 산업기반이 무너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또 자유화나 민주화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 탓에 서방국가와 현지 반(反)체제 인사들로부터는 권위주의 정권을 지원한다는 비난도 받는다. 중국의 아프리카 자원 확보와 시장 진출 성과는 놀랍지만 이 같은 문제점이 쌓여 나간다면 21세기형 식민주의 논란은 더욱 격화될 것이다. 그럴 경우 중국은 석유와 각종 광물자원, 광활한 시장을 잠시 얻을 수는 있겠지만 존경과 공감이라는 소프트파워의 핵심요소는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의료진과 시설이 세계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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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중국 내몽골에서열린 황사방지 제막식 행사. |
워싱턴이든, 베이징이든, 유럽이든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세력은 이처럼 변화하고 발전하고 쇠락하기 마련이다. 공통점은 어떠한 글로벌 스탠더드도 이전의 표준을 배우고 모방한 후 혁신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패턴을 따랐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다. 다만 철저한 학습이 바탕을 이뤄야 하고 남들이 따라 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 막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아직 전 분야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하는 입장에 서기는 어렵다. 아직까지는 앞선 선진국들의 경험과 노하우, 규범 가운데 따라 배워야 할 것이 많다.
그럼에도 국내에만 시선을 두지 말고 해외로 눈을 돌리면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기술과 능력이 개발도상국에서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방한한 페루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은 의료 분야 무상원조 확대를 특별히 요청했다. 페루는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로부터 원조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 우리나라에 병원시설 개설과 신규 병원 건설 확대 등을 특별히 강조해 요청한 것은 그동안 우리가 지어 준 병원시설의 높은 수준 때문이다. 헌신적인 한국 의료봉사단원들의 노력이 금상첨화의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뛰어난 수준의 인력과 시설이 페루에서 “한국 의료진과 시설이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이끌어낸 것이다.
최근 수많은 외국인이 의료관광을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 이 같은 평가가 페루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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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라오스 비엔티안주 문군및 폰홍군에서 열린 관개수리 사업착공식 장면. 왼쪽 두 번째가 박대원 총재. |
친한파 네트워크 구성
의료뿐이 아니다. 축산, 컴퓨터, 농업개발 등 우리 봉사단원들이 활동 중인 거의 모든 분야가 미국과 일본, 유럽 각국의 원조기관과 봉사단원이 모여 있는 개발도상국 현지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 국가는 우리나라의 수준을 높게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실력과 기술을 잘 따라 배워서 한국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한다. 개발도상국 곳곳에 들어서 있는 우리나라의 직업훈련원이 대표적인 예다.
무상원조로 건설되는 직업훈련원은 현지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봉사단원이나 전문가가 파견돼 강사로 활동한다. 우리의 경험과 노하우, 지식이 전달되고 우리의 기자재가 활용된다. 우리가 건설한 대학이나 직업훈련원 외에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곳곳의 대학과 관청에는 퇴직한 고급 기술·관리 인력이 개발도상국 인재들을 가르치고 있다.
해외로 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경기도 성남시 KOICA 연수센터에서는 한 해 4000~5000명의 개발도상국 공무원, 전문가가 각종 분야의 장단기 교육을 받고 돌아간다. 국장·과장급의 실무진이 대다수지만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도 다수이고, 이들이 귀국해 국가지도자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실무진도 불과 십수 년 뒤에는 한 국가를 이끌어 가는 핵심역량이 된다.
현지에서 동창회를 결성해 대표적인 ‘친한파(親韓派)’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이들이 배우는 우리나라의 표준이 각 개발도상국의 표준이 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력을 개발도상국에 파견하고 개발도상국 인재를 초청하면서 자국의 표준을 수출해 왔던 기존 선진국의 패턴을 우리도 하고 있는 것이다.
고기 잡는 법
그렇다고 우리가 기존 선진국의 패턴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 선진국의 원조가 고기를 던져 주는 데 그쳤다면 우리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현금이나 물자를 그대로 제공하는 원조는 거의 하지 않는 대신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는 데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지에서 그와 같은 원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돈과 물자, 식량이 아니라 단시일 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역사와 경험이다. 단지 경제성장만을 이루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정책을 가능토록 한 민주적 정치, 행정제도를 확립하는 데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부패 척결과 치안 확보를 통한 사회 안정까지 이뤘다.
대외원조 분야에서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고, 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프리카는 150년은 걸려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고기를 주는 데 그치는 원조와 “우리처럼 하면 한 세대만에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원조 가운데 무엇이 ‘모두가 함께 잘사는 지구촌’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지는 묻지 않아도 명백할 것이다.
한국형 원조모델 확립
다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와 경험을 설명해 주는 데 그쳐서는 표준이 될 수 없다. 어느 나라든 참고하고 따라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규범과 틀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개발도상국에 전파하는 재원도 필요하다. 원조의 질과 양 모두 개선돼야 한다. 개발도상국에 알리는 데만 그쳐서도 안된다. 기존의 선진국들도 수용할 수 있는 표준이 돼야 진정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李明博) 정부는 출범 이후 국가브랜드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국격과 국가브랜드 가치 제고(提高)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또 ‘배려하는 나라’, ‘사랑 받는 나라’의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전 인류가 지구촌 가족이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가는 지금, ‘함께 잘사는 지구촌 건설’이라는 목표보다 더 절실하면서도 희망적인 목표는 없을 것이다.
한국형 원조모델을 세계적인 표준으로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이야말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