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회 및 시위 발생 건수 미국의 3.5배, 경범죄처벌법 위반 적발 건수 일본의 44배
⊙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평균 정도만 되어도 1인당 GDP 27% 증가
全相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1958년 대구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 사회학 석·박사.
⊙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미국 워싱턴주립대 교환교수 역임.
⊙ 現 한국미래학회장.
⊙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평균 정도만 되어도 1인당 GDP 27% 증가
全相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 1958년 대구 출생.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미국 브라운대 사회학 석·박사.
⊙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미국 워싱턴주립대 교환교수 역임.
⊙ 現 한국미래학회장.
- 신바람 나는 응원전으로 한국인의 단결력을 보여 주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광화문 모습.
4만 달러 시대로 가는 마지막 길목에서 현재 우리의 자본 축적이 취약한 것은 아니다. 언필칭 세계 10위권의 경제大國(대국) 아닌가. 경제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우리는 세계적인 정보화 강국 아닌가. 인력과 인재의 측면에서 확연히 비관적인 것도 아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에다가 도처에 영재가 넘쳐나는 곳이 대한민국 이다.
그렇다면 선진국 도약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은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無形(무형)의 형태임이 분명하다.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와 사회, 문화영역 등에 걸쳐 있는 한 나라의 소프트파워(soft power) 혹은 소프트웨어(software)를 의미한다.
경제발전은 결코 생산요소를 중심으로 하는 물질적 자원에 의해서만 가늠되는 것이 아니다. 동일한 경제적 조건하에서도 산출과 성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기업 차원에서도 그렇고 조직 차원에서도 그러하며 국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상기해 보라. 당시 전국 3만300여 행정 里洞(이・동)에 똑같은 양의 시멘트가 무상으로 지급됐지만 리더십과 마을 주민들의 상호협력 정도에 따라 지역발전의 결과는 판이하게 나타나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1960년대 우리나라의 고도 경제성장기에 있어 국가적 차원의 성공적 리더십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른바 제3세계에 속하는 나라들 가운데 국가가 경제성장을 적극 주도한 경우도 드물었거니와 그것을 성공으로 이끈 사례는 더욱 더 흔치 않다.
사회자본의 확충
어떤 의미에서 대한민국은 1948년 건국과 더불어 ‘계획국가’의 모습을 드러냈다. 근대 국민국가의 제도적 틀을 갖추자마자 농지개혁에 착수했으며, 문맹퇴치와 국민교육도 체계적으로 실시됐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나 국가주도 공공계획이 사라진 바로 그 시점에 우리나라는 IMF 경제위기를 맞았고, 그것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이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압축성장기 한국의 경험은 정치적 리더십과 같은 非(비)가시적, 혹은 비물질적 요소가 경제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증명하고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GDP 4만 달러로 가는 시대를 여전히 국가가 선도할 수는 없다. 그것은 경제발전의 성숙화 과정에서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참여와 자율을 전제로 하는 민주화 시대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양상이다.
이제는 경제발전을 위한 무형의 요소 가운데 사회구성원 모두가 함께 연관되어 있는 이른바 사회자본(social capital)에 눈을 돌려야 한다. 사회자본은 사회적 공동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무형자산으로 일반적으로 규범, 신뢰, 협력, 참여 등을 포함한다. 사회자본은 사회통합을 직접 창출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한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는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만약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평균 정도만 되어도 1인당 GDP가 27% 증가한다는 예상도 나와 있다(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 2009). 신뢰 수준도 대체로 낮은 데다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 추세다.
한국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 수준이 55점 정도라면 대통령이나 사법부, 정부, 국가 등 국가기관에 대한 그것은 그 이하이며, 신뢰가 그 이상으로 높게 나타나는 영역은 내 가족이나 내 직장, 내 학교 등 ‘내집단(ingroup)’뿐이다(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2007). 말하자면 사회적 총자본은 적고 분파적 사회자본만 풍성한 모습이다.
굳이 이런 수치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사회자본 수준이 매우 낮다는 사실은 보통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체감하는 바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1950~60년대의 ‘헝그리 사회’(hungry society)로부터 벗어나는 대가로 최근에 들어와 미증유의 ‘앵그리 사회’(angry society)에 진입해 있다. 모두가 이른바 ‘루저’(loser) 의식에 사로잡힌 채 萬人(만인)이 서로 불신하고 적대하는 상태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집회 및 시위 발생 건수가 미국의 3.5배인 나라, 경범죄처벌법 위반 적발 건수가 일본의 44배에 이르는 나라, 청소년 다섯 명 가운데 하나가 감옥에서 10년 살더라도 10억원을 받게 된다면 부패를 저지르겠다고 대답하는 나라,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 전기톱과 해머를 들고 다니는 나라에서 어떻게 국민소득 4만 달러 고지에 도달하는 경제적 기적을 기대하겠는가. 설령 그런 경제적 기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가 닮고 싶어 하는 선진국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보다 중요한 과제는 이와 같은 현실의 진단이 아니라, 그것의 해결과 극복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것은 사회통합의 증진과 사회자본의 확충에 있다. 이를 위한 가장 상식적이고도 보편적인 처방은 法治(법치)주의의 확립과 복지체제의 실현이다.
이 점에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민주주의의 법치적 기반은 허약하기 짝이 없고 사회구성원 전체를 위한 최소한의 생활안전망도 허술하다. 선진국치고 법치주의가 흔들리거나 사회복지의 근간이 부실한 나라는 없다. 그것은 선진국의 기본이다.
1인당 GDP 4만 달러 시대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기 위해 법치주의나 복지체제는 기본 요건이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것은 보다 적극적이고 동태적인 차원에서의 사회 활력이다. 사회구성원들이 합심하여 목표 달성에 자발적으로 매진하는 일종의 국민적 사기가 요구되는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에 의하면 세계화 시대에 애국의 무대는 일상의 생활공간이다. 과거처럼 전쟁터에서, 산업체에서, 교육현장에서만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到處(도처)에서 無時(무시)로 일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프리드먼은 ‘집에서의 국가건설’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사회에서 발원한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이 사회자본으로서의 사회 활력 창출에 얼마나 기여해 왔는지, 혹은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은 사회자본의 제도적 기초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공적 근대화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동력은 시민사회 개념이나 사회운동 이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한국인의 강점은 ‘신바람’이었다. 배짱이 통하고 기분이 좋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에 헌신하는 태도가 한국사회 특유의 활력이자 저력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와 같은 활성적 사회자본이 우리 주변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헝그리 사회에서 앵그리 사회로 변모한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온 나라에 가득 차 있는 怒氣(노기)와 분노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눔과 베풂에 익숙해야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자조적 표현이 말하듯 시민사회 조직은 사회적 활력을 결집하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우리나라 사회운동은 민주화 과정에서 지나치게 정치화되고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일반 국민의 정서나 기대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제는 ‘사회저변형 시민운동’을 통해 한국의 시민사회가 거듭나야 한다. 누군가 멍석을 깔아주면 그 위에서 신바람 나게 일했던 과거 새마을 운동의 추억을 되살려도 좋을 것이다.
선진국 사회로 가는 또 하나의 조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다. 선진국 사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존 사회체제의 유지와 재생산에 부단히 성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베풂과 나눔의 정신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봉건제를 거친 서구사회 특유의 역사적 전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조선왕조 500년의 장수 비결을 생각해 볼 일이다. 한국의 전통적 지배계급 역시 베풂과 나눔의 일에 결코 나태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결코 인격이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이롭고 유리한 합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현대사에서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상류사회는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누는 일에 대단히 인색한 편이었다.
문제는 베풂과 나눔에 인색할 경우 언젠가는 가진 것을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뺏기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체제가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발전하려면 상류층은 먼저 많이 베풀고, 나머지 사회구성원은 그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함으로써 보다 많은 나눔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미래지향적 선순환 구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