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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8월호

柳基善 AIT소프트 사장

“대기업 위주 마케팅으로 중국 소프트웨어 시장 파고들어”

金正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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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제작으로 출발, 인사관리 물류관리 프로그램 개발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중국의 속도(中速)’에 맞춰야
유기선 AIT소프트 사장.
  2001년 2월 어느 날, 베이징(北京) 도심의 한 벤치에 앉은 柳基善(유기선) 사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빈털터리 신세에 몇 없던 직원마저 떠나버렸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내와 자녀까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힘으로 중국에서 IT산업으로 성공하겠다던 그의 꿈은 창업 6개월 만에 찬 겨울바람에 날리는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가고 있었다.
 
  유 사장은 ‘행운의 날’이라 불리는 2000년 8월 8일, ERP(全社的 자원관리) 시스템 개발을 목표로 직원 7명과 함께 회사를 창업했다. 자본금은 15만 달러(당시 한화 약 1억6000만원). 한 전자기업과 자동차기업의 ERP 구축을 계약해 비전이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기술적 문제로 시스템 구축에 실패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됐다. 두 번의 실패는 곧바로 계약 취소로 이어졌다. 6개월 동안 일이 단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자본금은 어느새 증발했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그는 매일 술로 밤을 지새웠다. ‘차이나 드림’은커녕 만신창이 신세가 된 그는 결심했다.
 
  ‘중국에서 시작했으면 중국에서 끝을 본다. 한국엔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시작하자. 쉬운 것부터 도전하자.’
 
  2009년 7월 현재, 그의 회사 ‘AIT소프트’는 직원 100명에 R&D(연구개발) 자회사까지 둔 强小(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2001년 年(연) 3억원(한화)에 불과하던 매출액은 60억원 규모로 불어났고, 삼성, 현대, LG, SK, 포스코, 롯데, 두산, 대한항공 등 국내 대기업 중국 현지 법인들이 AIT소프트에서 개발한 인사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무조건 대기업하고만 거래”
 
  “김 기자, 지금 보니 사용하는 노트북이 ‘레노버’네요. 그 회사 기술지원 부문 인터넷 홈페이지를 저희가 제작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중, 유기선 사장이 필자의 노트북 상표를 보고 꺼낸 말이다. 레노버(롄샹·聯想)는 중국 최대의 PC 기업으로, 2006년 미국 IBM의 PC사업부를 인수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모았다. 유 사장이 내놓은 회사 소개 파일엔 한국 대기업은 물론 레노버, 하이얼 등 중국 대표기업과 소니, HP, IBM, 오라클, 지멘스 등 세계 유명 IT 기업들의 로고가 보였다. 모두 AIT와 파트너십 또는 고객관계를 유지하는 회사들이다.
 
  유기선 사장은 AIT의 성공 요인을 묻는 말에 ‘대기업 고객 확보를 통한 브랜드 가치 성장’을 꼽았다.
 
  “무조건 대기업하고만 일을 했습니다. 중소기업은 연락이 와도 계약을 안 했어요. 중소기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죠.”
 
  유 사장은 소프트웨어 시장의 경우 대부분 비전문가가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품질과 서비스는 물론 브랜드 파워까지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사관리 시스템을 구매하는 대기업 인사담당자가 프로그램의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따져서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품을 설명할 때 ‘삼성, LG, 현대에서 사용한다’고 말하면 일단 신뢰가 갈 수밖에 없어요.”
 
  ― 처음부터 대기업과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예전 직장 선배와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죠. 첫 프로젝트는 제 첫 직장인 LG와 시작했습니다.”
 
  유 사장은 1964년 김천 출생으로, 고려대 통계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LG생활건강에 입사했다. 화장품 영업을 담당했던 그는 1996년 LG그룹에서 개최하는 ‘스킬올림픽’에 출전했다. 전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그룹 내 200여 개 영업팀이 경쟁한 이 대회는 유 사장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중국 항저우(杭州)에 파견돼 1년 동안 TF팀을 이끈 그는 ‘국소우위 전략을 통한 중국 시장 선점 및 활성화’란 주제로 도전해 대상을 수상했고, 수상 직후인 1997년 1월 1일 베이징 영업책임자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맡은 역할은 각 지방을 다니면서 대리점을 개설하는 업무였다. 칭다오(靑島)에서 하얼빈(哈爾濱)에 이르는 북부 지역을 담당했다. 유 사장의 말이다.
 
  “원래 ‘상 받으면 망한다’고 그러잖아요. 처음엔 좋았는데, 1999년부터 일이 잘 안 풀렸습니다. 반품은 자꾸 들어오고, 매출 목표도 줄었죠. 영업도 잘 안됐습니다.”
 
 
  창업 6개월 만에 모든 것 잃어
 
유기선 사장이 회사 창문에 걸린 ‘2010년까지 상장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결국 본사에서 문책성 발령이 내려졌다. 서울로 복귀하라는 것. 유 사장은 중국에 대한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지금 서울 가서 뭐 하겠나’라는 생각에 복귀 대신 사표를 냈다.
 
  “사표 쓸 때가 2000년 6월이었습니다. 그만두고 나서 배수의 진을 쳤죠. 창업 준비를 위해 중국에 있던 아내와 아들을 모두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가장 큰 실수였어요. 힘들수록 가족은 더 가까이 둬야 하는데 말입니다.”
 
  LG를 그만둔 지 두 달 후, 가족까지 귀국시키고 창업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ERP 프로그램을 들여와 중소기업에 재판매하는 영업을 했는데, 무엇보다 유 사장 본인부터 IT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었다.
 
  “화장품이나 IT제품이나 영업의 본질은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패착이었습니다. 화장품은 실물이 있으니 고객에게 뭔가 보여주면서 설명이라도 할 수 있죠. 그런데 ERP 시스템은 실물이 없으니 보여주기가 애매한 겁니다.”
 
  결국 회사는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몇 개 추진하던 프로젝트도 기술력 부족으로 중지됐고, 잔금을 못 받아 회사 운영 자체가 어려웠다. 6개월 동안 자본금을 모두 잃고, 직원 7명 중 6명이 회사를 떠났다.
 
  “밑바닥까지 가니까 잃을 게 없더군요. 다시 각오를 다졌습니다. 가족 없인 더 어렵겠단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간 가족들을 다시 베이징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어려운 ERP 영업은 접고, 쉬운 것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바로 홈페이지 구축이었죠.”
 
  첫 프로젝트는 재생 스티로폼으로 액자를 만드는 소규모 회사의 홈페이지 구축이었다. 학교 선배인 회사 대표가 “놀면 뭐하냐, 홈페이지나 하나 제작하라”며 준 일이었다. 비용은 인민폐 5000위안, 당시 환율로 한화 60만원 정도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슬슬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회사 브랜드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것은 프로젝트를 따 오는 것이었다.
 
  “예전 직장인 LG에 다시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출장 나온 선배와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선배가 만신창이가 된 제 모습을 보곤 ‘너 밥은 먹고사냐’면서 도움을 줬습니다.”
 
 
  홈페이지 제작사업 성공
 
유기선 사장(왼쪽)의 AIT는 지난 7월 7일 중국 3대 국영 소프트웨어 인프라 기업인 랑차오와 인사관리시스템 E-매니저 3.0에 대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유 사장이 옛 직장 선배로부터 얻어낸 프로젝트는 ‘LG화학 홈페이지 中文(중문)화 작업’이었다. 그의 ‘대기업 전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LG화학 홈페이지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중국 곳곳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LG전자, LG산전, LG일용화학을 거쳐 LG그룹사 중문 웹사이트 유지·보수건까지 수주했습니다. 이렇게 LG그룹사 일을 도맡아 하자 포스코, 대한항공과 같은 다른 대기업들의 프로젝트도 들어오기 시작했죠. 지금 중국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의 중문 홈페이지 중 AIT의 손을 안 거친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LG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긴 했지만, 결국 다 잃으니 LG밖에 없더군요.”
 
  도메인 주소도 그의 전략에 큰 도움이 됐다. 대기업의 경우 ‘○○○.com.cn’과 같은 중국 도메인을 미리 확보해 도메인을 무료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홈페이지 프로젝트를 따내는 방식이었다.
 
  2002년, 홈페이지 제작 및 운영을 통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유 사장은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첫 과제는 ‘i-DRP’란 이름의 물류관리 시스템이었다. 판매와 주문, 재고, 마케팅 비용 등 물류관리 전반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판매 원가를 감소시켜 주는 프로그램이다.
 
  “솔직히 기술력도 없고, 경험도 없었습니다. 거의 첫 수주업체인 LG생활건강 본사에서 나온 프로젝트 매니저(PM)에게 배우다시피 하면서 만들었어요.”
 
  우여곡절 끝에 개발한 i-DRP는 AIT와 유기선 사장에게 자신감을 가져다 주었다. 물류관리 시스템 개발에 성공한 AIT는 ‘E-매니저 PR’이란 인사관리 시스템에 도전했다.
 
  중국에 진출한 대기업들이 한국에서 쓰던 인사관리 시스템을 그대로 쓸 수 없다는 생각에서 개발해낸 이 시스템은 중국인 직원이 대부분인 재중 한국기업의 인사, 급여, 근태, 평가, 교육 등 현지에 꼭 맞는 서비스로 큰 호응을 얻었다. 현재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70% 이상이 이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대기업 시장 개척에 나서
 
  AIT의 대표 상품으로 자리 잡은 E-매니저 시스템도 철저하게 대기업 중심 전략을 펼치고 있다. 유 사장은 “배가 고파도 끝까지 중소기업 고객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대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면서 “‘E-매니저를 쓰는 기업은 곧 세계적인 기업’이란 이미지를 심기 위해 브랜드 관리에 더욱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AIT는 사실상 한국 대기업들이 키워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기업들에게 돈 받고, 교육을 받아 가며 제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아무 것도 없었던 저희가 야단맞고 배우면서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직원들이 중소기업 프로젝트도 하자고 했지만 끝내 거절했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 하라’고 말입니다.”
 
  존폐 위기를 기적적으로 넘긴 후에도 어려움은 여전했다. 첫 난관은 E-매니저 2.0을 개발하면서 시작됐다. 지주회사를 기준으로 개발한 신버전 제품이 막상 공장에 배급된 후 적용이 잘 되지 않은 것이다.
 
  “지주회사는 전체 직원은 몇 명 안되는데 인사 담당자만 6~7명 있습니다. 그 환경에 맞게 2.0 버전을 개발했죠. 그런데 공장은 300~400명 직원에 인사 담당은 고작 한두 명입니다. 너무 높은 버전으로 개발돼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죠.”
 
  개발 도중 돌발변수가 많아 프로젝트 마무리가 지연되는 경우가 잦았다. 수금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자금 사정이 크게 어려워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스(SARS)까지 찾아왔다. 지방에 파견됐던 직원들이 사업장을 두고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한 3개월 동안 직원 봉급을 못 줬습니다. 회사는 커져서 인건비는 늘어나는데 악재가 겹치니까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했죠. 돈이 들어오면 1차로 신입사원, 2차로 과장 이하, 3차로 부장급…, 이런 식으로 해결해 나갔죠.”
 
  수차례 위기를 이겨낸 유 사장은 중국 대기업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실상 독점이나 다름없는 한국 기업의 인사관리 시스템 시장에선 더 이상 성장의 기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중국 3대 SI(소프트웨어 인프라) 업체 중 하나인 랑차오(浪潮)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랑차오의 대형 ERP가 중국 각 기업에 보내질 때, AIT의 E-매니저가 함께 제공되는 내용이었다. 중국 기업들이 외국의 시스템을 잘 사용하지 않는 현실에서, 랑차오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한 중국 우회진출 전략을 추진한 셈이다.
 
 
  “중국의 속도(中速)에 맞춰라”
 
AIT소프트 직원들. 왼쪽부터 유미란 과장, 류샤 관리부장, 왕위안 디자인부장, 최영순 사원.

  유 사장은 성격이 급하고 말도 거친 편이다. 직원들에게 지시를 한 후, 시간 안에 일을 못 끝내면 어김없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는 잠시도 전화기를 놓지 못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인터뷰가 몇 번이고 중단됐을 정도다.
 
  유 사장은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성격은 급해도 절대 조급해 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한국인 성격이 급한 편이잖아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최근 중국에 진출한 후배분들을 보면 빨리 결과를 내려고 하는데, 쉽게 되지 않습니다. 세부적인 일을 할 땐 급하게 진행하더라도, 장기적 비전은 조금 여유를 두고 기다릴 필요가 있어요. 저라고 고속성장 안 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중국은 일단 ‘高速(고속)’이 아니라 ‘中速(중속)’입니다. ‘중국의 속도’에 맞출 필요가 있어요. 중국에선 오래 기다릴 줄 아는 자가 결국 성공합니다.”
 
  유 사장은 한국 기업의 월등한 기술력도 때론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 시장에 맞지 않는 너무 앞선 기술을 가져왔다 실패한 사례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시장의 눈높이와 시점에 맞는 제품을 공급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T는 계열사를 포함한 120명 직원 중 한국인은 유기선 사장이 유일하다. 조선족 직원도 10% 정도다.
 
  AIT 사무실엔 오전 8시30분 출근 시각이 되면 음악이 들려온다. 점심시간 퇴근 때도 마찬가지다.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다. 야근이 빈번한 업계지만, 유 사장은 가급적이면 6시 정시 퇴근을 강조한다. 주말도 충분히 쉬라고 한단다. 개발자들이 기술력만 키우고 일만 열심히 하는 것보단 문화생활을 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이유다.
 
  “고객과 만났을 때 회사 기술 이야기 30분 하는 것보다 시사나 문화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교양을 키워야 해요. 얼마 전 全(전) 직원에게 책을 사서 몇 차례 돌린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두 달에 한 번씩 책을 선물할 계획이에요. 기술은 계속 빠른 속도로 진보하게 마련이고 그에 맞는 새로운 인력들이 계속 키워집니다.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다양한 교양과 지식을 갖춰야 해요. 죽어라고 일만 해선 남는 게 없습니다. 매일 밤새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직원을 가족같이 대한다
 
  유 사장은 직원들에게 “개발업무는 5년 이상 하지 마라”고 강조한다. “업무 프로세스만 전문화하면 개발은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다”며 “개발에만 전념하기보단 컨설팅 전문가가 돼라”고 교육한다.
 
  AIT는 젊다. 유기선 사장을 제외하고 가장 나이가 많은 직원이 37세다. 대부분 20~30대로 활기가 넘친다. 왕위안(王沅) 디자인부장은 “AIT에서 일하는 동안 ‘도전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중국인들보단 한국인들이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생각하는 것을 느낍니다. 회사 경영 방식도 일관성이 있고, 목표에 대한 추진력도 강합니다. 다만 중국 문화를 잘 몰라 고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중국 시장과 문화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한 후 도전한다면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류샤(劉霞) 관리부장은 AIT의 성공 요인을 ‘유기선 사장의 추진력’이라고 분석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고,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는 의식을 전 직원과 함께 공유했다고 한다. 조선족인 兪美蘭(유미란) 과장은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진짜 가족같이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해서 직원을 뽑을 때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광고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가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회사들이 많아요. 입에 발린 이야기만 하고, 못 지킬 약속을 하는 경영인들이 많습니다. 중국은 한 번 신용을 잃으면 끝입니다. 믿음 없인 직원들이 따르지 않아요. 하지만 유기선 사장은 저희를 끝까지 믿고 맡깁니다. 중국인 직원들에겐 그만큼 큰 힘이 됩니다.”
 

  ▣ 유기선 사장이 제안하는 중국 성공 비결
 
  ㆍ‘중국의 속도’에 맞춰라. 중국은 기다리는 사람이 성공한다.
 
  ㆍ중국인 직원을 전방위 전문가로 키워라.
 
  ㆍ‘관시’와 돈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원칙으로 해결하라.
 
  ㆍ목표를 확실히 잡고 한 우물을 파라.
 
  ㆍ가족과 떨어지지 마라. 힘들 때 의지할 곳은 가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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