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중국 진출하여 물류사업에 도전, 무역과 수산물가공업으로 영역 확장
- 함홍만 북경극동국제물류 회장.
그런가 하면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중국에서 황급히 철수하는 유학생이나 기업인들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韓中(한중) 간을 오가는 그들을 따라서 움직이는 이삿짐 등 각종 物流(물류)의 量(양)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한중 간을 오가는 이삿짐의 60% 정도를 취급하는 회사가 북경극동국제물류유한공사(대표 함홍만 회장)다.
이 회사 咸弘萬 (함홍만) 회장이 중국에 발을 디딘 것은 한중 수교 2년 후인 1994년 10월. 1983년 부산에서 극동선박항공을 설립해 포워딩(수출입 물품을 그러모아 해운회사에 운송을 의뢰하는 사업-편집자 주)을 해 오던 그는 이 무렵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종래 허가제이던 포워딩업이 1988년 신고제로 전환되면서 업체가 난립,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함 회장은 해외로 수출되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많이 취급해 본 경험을 살려 베트남에서 무역업을 해 보려 했다. 하지만 기후, 음식, 문화 등이 너무 달랐다. 결국 석 달 동안 사업기회를 모색하다 귀국했다.
마침 함 회장 사무실 옆에는 중국 비자업무를 대행해 주는 여행사가 있었다. ‘중국에나 한번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서울∼톈진(天津) 간 비행기가 한 대 뜨던 시절이었다.
1994년 10월, 함 회장은 중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기후가 비슷했고, 조선족들이 있어 음식도 먹을 만했다. 물가도 상상도 못할 정도로 쌌다. ‘뭔가 한번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주일 만에 귀국한 그는 사업에 필요한 자료들을 싸 들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온 후, 사람을 구하고 사무실을 열었다. 이듬해 3월 국가공상국의 허가가 났다. 극동선박항공주식회사 북경사무소, 극동선박해운의 베이징(北京)지사 개념의 회사였다.
첫 거래에서 조선족에게 사기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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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국제물류 직원들이 한국으로 가는 이삿짐 화물을 트럭에 싣고 있다. |
첫 사업은 베트남에서 해 보려다가 접었던 무역업이었다. 1995년 5월, 첫 주문이 들어왔다. 하얼빈에 있는 조선족 사업가가 100만 위안어치의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주문한 것이다. 함 회장은 계약금 5만 위안만 받고 외상으로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상대방은 “며칠만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하루하루 대금 지급을 미루다 결국은 돈을 떼먹었다.
법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생각에서 변호사를 구해 소송을 해 봤지만, ‘중국인과 재판을 해서 외국인이 이기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함 회장의 말이다.
“중국에서 외상거래를 하면 안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죠. 중국 사람들 고유의 기질 때문인지 문화의 차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외상거래가 많은데, 외상거래를 하면 돈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중국 공부를 톡톡히 한 셈이죠. 駐中(주중)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상회 등에서 펴낸 ‘한국기업 사기사건 피해사례집’에 제가 당한 일이 소개되어 있을 정도니까요.”
함 회장은 당시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알거지가 돼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생계는 한국에서 미용실을 하는 아내가 꾸렸고, 그는 카드 돌려막기로 하루하루를 이어 갔다.
무역업에 실패한 후 그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물류 쪽으로 눈을 돌렸다. 물류시장은 중국에서 미개척지였다. 함 회장의 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택배업은 외국인 단독으로는 못합니다. 페덱스(FEDEX)나 DHL 같은 다국적 택배회사들도 합자법인의 형태로 중국에 진출해 있어요. 박람회나 전시회 관련 물품운송은 중국인들만 할 수 있어요. 외국인 물류회사는 항구까지만 운송할 수 있을 뿐 중국 내 운송은 못합니다. 만일 그걸 할 수 있다면, 떼돈을 벌었겠죠.”
사실상 중국인들만이 참여하는 독점시장이었다. 이런 제약 속에서 함 회장의 눈에 해외이삿짐 시장이 들어왔다. 그동안 사귄 재중 한국인들도 그에게 “해외 이삿짐을 전문적으로 취급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사실상 중국인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가격이 형성될 리 만무했다. 함 회장의 설명.
“물가나 인건비는 엄청 싼데 물류비는 미국보다 세 배쯤 비싼 거예요. 말도 안되는 얘기죠. 자기들이 독점하는 분야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값을 매기는 거죠.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렴한 가격과 서비스로 승부
다행히 화물운송업은 초기 자본이 그다지 많이 들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마침 당시 베이징에는 한국행을 원하는 조선족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 보다 쉽게 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임금을 따지지 않았다. 함 회장은 30명의 직원을 뽑는 한편, 대사관·관공서·대기업·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교민잡지에도 열심히 광고를 냈다.
사업 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말부터였다. 1992년 한·중 수교를 전후해 중국으로 건너왔던 외교관이나 상사주재원들이 후임자들과 교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운송업체들은 ‘큰 것’ 한 건당 7000~8000달러를 받았지만, 함 회장은 2500달러를 받았다. 가격 경쟁력 외에도 그의 무기는 더 있었다. 한국인이라 커뮤니케이션이 잘된다는 점, 그리고 한국에 있는 본사를 통해 ‘도어 투 도어(door to door)’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유학생들도 그의 고객이었다. 함 회장의 설명.
“요즘에는 중국 책값이 과거보다 많이 비싸졌지만, 그때는 정말 쌌어요. 가방만 들고 중국으로 유학 왔던 학생들이 귀국할 즈음에는 그동안 사들인 엄청난 책들 때문에 이삿짐 운송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어요.”
덕분에 하루에 일거리가 3~5건씩 들어왔다. 당시 이삿짐 한 건당 이윤이 50%에 달했다.
“돈이 들어오는 소리가 귀에 들리더군요. 자고 깨면 ‘오늘은 돈이 얼마나 들어올까’,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나 싶던 1996년경 그는 뜻밖의 곤욕을 치렀다. 문화재 반출 혐의로 조사를 받고 벌금을 문 것이다. 함 회장의 설명이다.
“한·중 수교 직후 한국에서는 중국 골동품 붐이 불었어요. 베이징에만 한국 골동품상이 300여 명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그들은 진짜 가짜 할 것 없이 골동품이나 공예품들을 한국으로 마구 실어 날랐습니다. 이런 와중에 ‘한국인들이 古代(고대) 문화재까지 반출해 간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물론 문화재를 반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非(비)문화재 확인을 받은 물품만 반출이 가능했지요. 그런데 중국인, 조선족 경쟁업체에서 우리 회사가 문화재를 밀반출하고 있다고 당국에 신고했어요. 중국국가문물국(한국의 문화재청)으로부터 분명히 비문화재라는 확인을 받았는데도 다른 직원이 나오더니 ‘문화재인 것 같다’고 하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군요. 덕분에 CCTV(중국중앙TV) 방송에 얼굴이 나가고, 벌금도 물고, 또 한번 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죠.”
어려움은 또 있었다. 한국에서 데려온 직원들이 어느 정도 중국 상황에 적응했다 싶으면 독립해 나가서 자기 회사를 차렸다.
“어제까지 직원이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나가 우리 회사 옆에 사무실을 내는 거예요. 그러고는 재직 중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서 우리 회사를 중상모략하고, 조선족 일꾼들을 빼가는 겁니다. 제가 중국에서 사업하는 지난 15년 동안 가장 어려웠던 일이 바로 데리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의 이탈이었습니다.”
함 회장은 “지금 우리 회사의 경쟁사가 두 개 정도 있는데, 모두 우리 회사에서 나간 사람들이 차린 회사”라면서 “창립 당시 직원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한 명인데, 그는 漢族(한족)”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의 사업운은 꺾이지 않았다. 1997년 말 닥친 外換(외환)위기는 그에게는 또 다른 기회가 됐다. 함 회장의 설명이다.
“기업 주재원·유학생·사업가들이 무더기로 보따리를 싸는 상황 속에서, 일이 하도 몰려들어 밤새워 일을 해도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때가 제게는 최대의 호황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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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홍만 회장과 극동국제물류 직원들. |
수산물 가공회사 등 설립
운송사업이 안정궤도에 접어들면서 함 회장은 사업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1996년에는 무역회사인 천진대원국제무역유한공사와 북경극동무역유한공사를, 2002년에는 수산물 가공회사인 청도설악수산을 설립했다. 2004년에는 한국에 있는 극동선박해운의 베이징 지사 개념이던 북경극동선박항공주식회사 북경사무소를 현지 법인인 북경극동국제물류유한공사로 전환했다. 이는 그가 사업의 중심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옮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 회장은 “극동국제물류의 작년 매출은 3400만 위안 가량인데, 올해에는 600만~700만 달러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이익률은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어 15% 정도라고. 이사 화물이 70%를 차지하고, 이삿짐 이외의 해상화물이 20%, 항공화물이 10% 정도를 차지한다. 직원 수는 베이징 본사 근무 직원이 24명이다. 함 회장과 부장 한 명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한족과 조선족들이다.
수산물 가공회사 설립
국내 언론에는 작년부터 글로벌 경제위기가 시작된 이래 “재중 한국기업인들의 야반도주가 늘었다”거나,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베이징 왕징(望京)거리에서 한국인들이 보따리를 싸고 있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현지에서 이삿짐 운송사업을 하는 함 회장은 이런 보도에 대해 “다소 과장된 것 같다”고 말한다.
“왕징거리에 살던 한국인이 8만~9만명인데,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1만명가량 줄었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이삿짐 이동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아요. 극동국제물류의 매출이 예년보다 늘기는 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성장세 때문인지, 중국에서 철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위안화 강세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무역회사인 대원국제무역과 극동무역은 작년에 370만 달러어치의 수출입(대행) 실적을 올렸다. 이익률은 극동국제물류와 마찬가지로 15%대. 함 회장은 “무역회사를 차린 것은 물류와 무역을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라면서 “올해에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위안화 환율 강세로 인해 수출이 다소 저조한 상태”라고 말했다. 대원국제무역의 직원 수는 35명, 베이징, 칭다오(靑島), 상하이(上海) 다롄(大連) 등지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함 회장의 사업 가운데 조금 뜻밖이다 싶은 것이 수산물 가공회사인 청도설악수산이다. 이 회사는 함 회장의 鄕愁(향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 고향이 강원도 고성군 거진입니다. 어린 시절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자랐죠. 지금도 고향에서는 형님과 동생이 수산물 건조업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래전부터 여유가 생기면 수산물 가공·유통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오다가 2002년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함 회장에 의하면, 청도설악수산은 작년에 약 4000만 위안의 판매를 올렸으며, 올해도 지난해 수준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순이익률은 30% 정도. 직원 수는 많을 때는 40명 정도였으나 근래 파트타임 직원을 많이 쓰면서 13명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청도설악수산은 중국 內需(내수)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는데, 주요 생산품을 보니 굴비와 자반고등어, 젓갈류다. 이런 한국적인 수산물이 중국인들에게 통할까? 함 회장의 말이다.
“매출의 70% 정도는 아직 조선족이나 재중 한인들을 상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해산물은 상류층이 먹는 음식’이라고 여기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인들은 음식을 깨끗하게 조리한다’고 알려져 있어 한국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을 상대로 한 매출이 계속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너가 직접 챙기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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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에 있는 칭다오설악수산 직원들이 수산물 가공작업을 하고 있다. |
중국에서 만난 다른 한국인 사업가들처럼 함홍만 회장도 회사의 구체적인 실적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중국 시장에 뛰어들어 열심히 사업을 개척해 온 데 대해서는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본인 스스로의 얘기처럼 아직 남들에게 내세우기에는 사업규모나 실적이 ‘왜소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15년 전 중국시장에 뛰어들어 물류·무역·수산물가공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온 그는 분명 ‘성공한’ 사업가다. 그에게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을 물어보았다.
그는 ‘철저한 확인 경영’을 첫 번째로 꼽았다. 그 이유로 그는 먼저 중국의 잦은 제도 변화를 들었다.
“중국은 기본적으로 외국인이 사업하기 힘든 나라입니다. 모든 제도가 自國民(자국민)에게는 유리하게, 외국인에게는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제도마저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나라입니다. 예컨대 작년까지만 해도 본국에서 사용하던 골프채를 중국으로 반입할 때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았는데, 올해부터는 골프채 한 개만 면세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국가에서 제도를 정해도 실제 적용 여부는 지방에 따라 다릅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오너가 수시로 챙기면서 대응하지 못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남에게 사업을 맡겨 놓고 자기는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골프나 치러 다니다가는 깡통 차는 경우가 많아요.”
함 회장은 ‘확인 경영’이 요구되는 또 다른 이유로 중국인들의 국민성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국민성 자체가 그다지 능동적이 아닙니다. 한번은 광저우(廣州)에서 베이징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어요. 당연히 베이징 직행편이려니 했는데, 타고 나서 보니 상하이를 경유하는 비행기였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항공권을 발매할 때에 프런트에서 당연히 그 사실을 알려줘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직행편인지, 다른 곳을 경유하는 비행기인지는 네가 물어봐야 한다. 네가 묻지 않는데 내가 그걸 먼저 말해 줄 필요는 없다’는 식입니다. 중국인들은 죽기 살기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컨테이너 물류작업을 할 때도 제가 직접 나가서 확인하지 않으면, 나중에 클레임이 들어옵니다. 클레임이 들어오면 그건 회사의 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현장에 나가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경각심을 일깨워 줘야 합니다.”
직원들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는 대신 함 회장은 직원들을 챙기는 데도 열심이다.
“별일이 없는 한 매월 9일 월급날이면 물류 창고에 나가 직원들에게 월급봉투를 직접 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격려해 줍니다. 또 결혼한 직원들을 포함해 모든 직원에게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에게 굉장히 엄하게 대하는 편이지만, 잘 따라 주고 있어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1년 정도 살아 보고 사업 시작하라”
그는 “중국으로 사업을 하러 나오는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중국 시장을 철저히 연구해야 합니다. 1년 정도 살아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가족과 함께 나오세요. 교민들 사이에는 ‘중국에 혼자 나와 있는 사람과는 가까이 하지도 말고 돈거래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 와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데, 가족과 떨어져 있다 보면 자연히 술이나 여자에 빠지기 쉽습니다. 저는 초기 3년 동안 혼자 중국에 나와 있었지만, 다른 한국인 사업가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나오기를 권합니다.”
함 회장은 재중강원도민회 초대회장(1998~2003년) 등을 지냈고, 지금은 재중한인회 수석부회장으로 있다. 그런 그에게 작년부터 국내 언론에서 곧잘 나오는 ‘중국인들이 嫌韓(혐한)감정’ 관련 보도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건 일부 철없는 중국 젊은이들이나 네티즌들 때문에 나오는 얘기인데,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만나는 중국인들도 ‘혐한감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한국인들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많아요. ‘한국인들은 참 열심히 산다’ ‘작은 나라인데도 올림픽 등 스포츠에서 거두는 성과를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가 중국인들 앞에서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