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최초로 지린성(吉林省) 영구 거주증 받은 ‘옌지의 영웅’
다른 도시들로부터 “건물 그냥 줄 테니 백화점 하나 열어 달라” 요청 받기도
다른 도시들로부터 “건물 그냥 줄 테니 백화점 하나 열어 달라” 요청 받기도
- 정영채 성보그룹 회장.
그린카드는 고급관리자, 과학기술 전문가 등 외국인에게 비자 면제와 같은 다양한 혜택을 주는 영구 거주증이다. ‘이것만 내밀면 중국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카드를 받는 외국인은 부러움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일흔을 넘겨 주름진 얼굴의 정 회장이 이날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1992년 처음 옌볜에 온 이후 14년 동안 격변의 현장에서 겪었던 수많은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시공 계약 과정에서 사기를 당해 수억 원의 손해를 봤고, 파이프와 전기선 등 건설 자재가 모두 불량품으로 납품돼 몇 번을 다시 주문해야 했다. 인민폐 150만 위안을 빼돌려 달아난 직원을 용서했고, 조선족들에게 ‘미친 한국×’이란 이야기를 들어 가며 건물을 완공해냈다.
2009년 현재, 옌볜의 조선족 동포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곧 짐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건물 공사에 훼방을 놓기 일쑤였던 그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공한 옌볜 성보백화점은 매년 對韓(대한) 무역액 10억 위안(한화 2000억원)을 자랑하며 중국 최대의 한국 상품 집산지로 자리 잡았다.
가난에 고통받던 상인들은 어느새 수억 원의 재산을 보유한 ‘옌볜 부자’가 됐고, 정 회장은 지난 4월 선양(瀋陽)에 제2 성보백화점을 건립해 운영을 시작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혈혈단신으로 승부를 건 지 17년째, 정 회장은 어느새 옌볜 조선족의 ‘代父(대부)’가 돼 있었다.
옌볜 땅 처음 보자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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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채 회장은 2006년 외국인 최초로 지린성 영구 거주증(그린카드)을 받았다. |
정영채 회장은 1933년 목포에서 태어나 자랐다. 6·25 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1년 군 제대 후 충남 서산에서 시작한 양화점은 꾸준히 성장했고, 1985년 정 회장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공장을 차리고 본격적인 모피사업을 시작했다.
1988년 올림픽 이후 회사는 모피 붐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대로변에 건축면적 1만3000㎡ 건물을 지었고, 진도 모피에 무스탕을 공급해 많은 돈을 벌었다. 독립한 직원들이 회사 주변에 세운 공장만 10개가 넘었다.
한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정 회장은 중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1992년, 회사를 방문한 중국인들의 소개로 톈진(天津)을 방문한 그는 차원이 다른 규모의 시장과 사업 가능성에 감동했다. 이후 베이징(北京) 등 주요 지역의 의류산업체를 둘러본 그는 옌볜 지역에 정착을 결심했다. 정영채 회장은 1992년 처음 방문했던 옌볜의 풍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산도 들판도 우리나라와 같았어요. 논에서 한창 자라는 벼도 우리 것과 똑같았습니다. 우리말을 쓰고, 우리와 같은 생김새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죠. 마치 꿈결에나 찾아 헤매던 고향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나의 여생을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하리라’고요.”
그가 처음 생각한 아이템은 모피였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현지에 공장을 차려 해외 수출기지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의 주머니엔 두둑한 자금이 있었고, 작은 양화점을 피혁회사로 키운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계획은 수정됐다. 일자로 늘어선 칸막이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과 1960년대 한국을 떠올리는 낙후된 공장, 이 모든 것이 정 회장의 눈에는 ‘황금 시장’으로 보였다. 그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 산업이 먼저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때 만난 사람이 조선족 金成順(김성순) 이사다.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장(牧丹江) 출신인 그녀는 어려웠던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학업에 열중해 공산당학교 교수직을 역임하던 엘리트였다.
오랫동안 교직에 있어 사업을 전혀 몰랐던 김 이사는 “심부름이나 시키면 아는 데까지 도와주겠다”며 정 회장과 사업을 시작했다. 정 회장은 “첫 전화통화부터 인상이 좋았다”며 “어렵게 살아온 과정이 비슷해 많은 공감대가 있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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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시 성보백화점 내부. 각종 한국 상품들로 가득하다. |
두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이념에 상처를 받은 공통점이 있었다. 정 회장은 어린 시절 남로당 출신의 형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전쟁 후에도 ‘좌익 출신 형’을 둔 이유로 말 못할 차별을 당했다.
“사업이 커지다 보면 이곳저곳 도울 곳도 많고, 여러 성격의 단체에 가입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그런데 정부와 연결된 단체에 가입하려면 최종 단계에서 자꾸 취소가 되는 겁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님 때문이었어요.”
정 회장은 “군대도 만기 전역했고, 단 한 번도 내 나라 조국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면서 “장학재단 하나 설립하려 해도 사람들이 방해를 해 실패했다”고 토로했다.
“충남 서산에서 사업이 좀 되던 시절이었어요. 함께 일하던 知人(지인)들과 돈을 모아 인근 학교에 학자금을 주고 학용품과 무료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했죠. 그런데 하루는 경찰서에서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묻더군요. ‘이 그룹의 의도가 뭐냐’고요.”
김성순 이사는 문화대혁명 당시 옌볜인민출판사 편집부장이었던 아버지를 잃었다. 직장을 다니는 오빠들과 몸져 누운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키웠다. 엄동설한에도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녀야 했을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어야 했다. 김 이사의 말이다.
“소학교 3학년 시절이었어요. 하루는 친구들이 반동분자 재판한다며 구경하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따라갔는데, 저희 아버지더군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울며 고함쳤지만, 어머니는 그저 눈물만 흘리더군요. ‘자본가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홍위병에게 잡힌 아버지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죠.”
서로 다른 나라에서 각기 다른 이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업 동업자에서 인생의 동반자로 바뀌었다. 현재 성보그룹은 정 회장이 55%의 자본금을, 김 이사가 45%를 보유한 韓中(한중) 합작기업이다.
화합과 나눔의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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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채 회장(가운데)과 김성순 이사(오른쪽)가 백화점 내 한 상점을 방문해 상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정영채 회장은 옌볜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강조했다.
“여기 와서 사업을 시작하니 한국인들은 조선족을 절대 믿지 말라고 하고,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은 단물만 빨아 먹고 떠난다고 하더군요. 서로 싸우고 사기당하고…, 정말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창업 당시 기업의 핵심 이념을 ‘화합과 나눔’으로 정했죠.”
성보그룹이 진출한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구호가 있다. 바로 “화합으로 부를 창출하며 나눔과 기쁨을 함께하는 세상”이다. 정영채 회장은 “이 구호대로 했더니 성공은 저절로 오게 되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물론 시행착오를 많이 해야 합니다. 손해도 좀 볼 수 있어요. 하지만 한 번 실망했다고 무조건 떠날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부터 돌아봐야 해요.”
정 회장은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중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선 중국 직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하고, 중국인 사업 파트너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도 빨리 바꿔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사업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백화점 위치를 제팡(解放)로 350호로 정한 후, 계약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가격이 3배까지 올랐다.
“제가 시작하기 전에 한국인 50명이 와서 계약했다가 다 포기하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비슷하겠거니 하면서 겁을 주는 거죠. 1㎡ 당 760위안이던 임대료가 계약하러 가니까 2200위안을 달라고 하더군요.”
―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일단 계약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있었어요. 확신을 가지고 덤비니까 저쪽에서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잔금 지불할 땐 1800위안으로 내려주더군요. 그래도 여기저기서 곧 실패할 거라며 말이 많았어요.”
1995년 회사 초창기 시절, 출납 담당이 은행에서 150만 위안을 훔쳐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회사는 공안국에 신고했고, 다음날 시 정부에서 이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정영채 회장은 당시 회의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환율로 한화 1억원이 넘는 돈이었는데, 옌지(延吉)시 역사상 가장 큰 현금도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시장과 부시장, 공안국 관계자들이 긴급대책회의를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직원은 잡히면 총살이라고 하더군요. 신고를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같이 징역 몇 년 살고 반성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이곳에 와서 사업을 하는 목적과는 너무 다른 결과였습니다.”
출납직원 도주사건
한창 총살에 대한 논의가 오가던 중, 정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발언했다.
“저는 이번 사건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150만 위안이 큰돈이긴 하지만 생명과 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은 또 벌 수 있습니다. 사형은 안됩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범인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며 펄쩍 뛰었다. 외자기업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수사본부를 차리고 본격적인 수사를 해 범인을 잡아 처벌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날 회사로 돌아온 정 회장은 도주한 직원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붙잡히면 사형을 당하니 연락이 되면 돈 가지고 멀리 도망가라고 일러 주라”고 했다.
결국 직원은 전액을 가지고 돌아와 자수했고, 정 회장은 수사본부에 가서 “풀어만 주면 회사 직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겠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결국 그는 집행유예 3년으로 풀려났지만, 사건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다시 회사로 오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정 회장은 옌볜에 ‘한국에서 온 참 좋은 사람’으로 알려졌다. 조선족 동포를 끔찍이 아낀다는 소문이 여기저기 퍼져 나갔고, 성보백화점에서 장사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다.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자, 정 회장은 한국 사업을 모두 철수하고 옌볜에 모든 여력을 집중했다.
현재 옌지시 중심가에 자리 잡은 성보백화점은 3080㎡ 부지(건물면적 2만2000㎡)에 5층 규모의 한국 상품 백화점과, 10층 규모의 호텔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올해 4월 문을 연 선양지점은 5300㎡ 부지(건물면적 3만㎡)에 백화점을 건설해 운영 중이다.
직원 수는 총 160명, 업주와 판매사원까지 합치면 2000명으로 늘어난다. 고용 효과와 판매 효과는 지역 시장 경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 옌볜대의 任范松(임범송) 중문과 교수는 “성보는 옌볜 최고의 민족기업”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성보백화점이 선양에 진출한다고 하니 지린성 부성장이 직접 선양까지 갔어요. ‘지린성에서 키운 기업이니 랴오닝성(遼寧省)에 가면 당신들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키우라’는 이야기를 하러 말입니다. 그만큼 성보가 조선족들의 어깨를 펴 줬습니다.”
‘부자의 꿈’ 이룬 조선족들 속속 나타나
함께 자리한 길림신문사의 吳基活(오기활) 대외부장의 말이다.
“옌지 성보가 너무 잘되니 각 성에서 와 달라고 난리입니다. 장쑤성(江蘇省)에선 자기네 성에도 백화점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죠,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시에선 5층 건물을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헤이룽장성 무단장에서도 백화점 하나만 더 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보에서 부자의 꿈을 이룬 조선족들이 속속 늘어났다. 한국산 이불을 중국 전역에 공급하는 安麗潁(안여영) 사장은 “한국인들이 처음엔 조선족 보따리장수라며 무시했지만, 지금은 ‘외국인 바이어’라며 모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땐 공항에서 벽에 붙어 손을 들어 올리고 검색을 당하는 일도 있었어요. 대구 서문시장에 옷감을 보러 갔는데 ‘안 살 거면 만지지도 말라’는 비아냥도 들었죠. 그래서 홧김에 옆집으로 가 그날 1억원치 현금으로 계약하고 컨테이너로 물건을 실어 왔습니다. 그 사람, 다시는 조선족이라고 무시 안 할 겁니다.”
한국산 주방용품을 판매하는 林春玉(임춘옥) 사장은 일본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상인 여러 명이 사업 아이템 시찰 겸 관광을 목적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어요. 한 도자기 판매점에 들렀는데, 상품이 너무 좋은 겁니다.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하니, 일본인 주인이 망설이는 거예요.”
― 왜 그랬습니까.
“물건이 없다는 거죠. 이렇게 많이 사려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겁니다.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계약서를 쓰다가 도저히 안되겠다며,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하대요. 그래서 주변 구경을 하고 오니 그때야 계약서와 물건을 내놓더라고요. 나갔다 오라고 한 이유를 물으니까, ‘손이 떨려 사인을 할 수 없어 그랬다’고 합니다.”
임 사장 일행은 일본 여행 중 20피트 컨테이너 5대 분량의 상품을 계약했다. 그들이 다녀간 곳에선 그들을 ‘중국에서 온 큰손’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귀국을 하니 일본 영사가 선양에서 성보백화점까지 직접 찾아와 정 회장과 상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단다.
정 회장은 더 이상 개인적인 욕심이 없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들이 성보백화점을 통해 부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다.
“모두가 ‘옌볜은 안된다’고 할 때 저는 ‘옌볜이기 때문에 된다’고 했죠. 이제 그 방식을 선양에 접목시키려고 해요.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그저 옌지의 성보인들처럼 선양의 성보인들도 부자가 됐으면 합니다. 그게 다입니다. 저는 내 나라 한국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기 위해 이렇게 일을 해 왔습니다.”
▣ 정영채 회장이 말하는 중국 사업 성공 5계명
ㆍ중국에 뼈를 묻겠다고 각오하라. 한 1년 돈 벌고 돌아갈 생각이라면 오지 않는 게 낫다.
ㆍ파트너가 중요하다. 중국에 온 이상 한국인 혼자선 중국인을 이길 수 없다. 동업자 선택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라.
ㆍ기다려라. 단기 수익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씩 해결해 나가라.
ㆍ‘관시(關係)’는 만남이 아니라 감동이다. 식사 한 번 했다고 관시가 맺어진 것이 아니다. 상대를 감동시켜라.
ㆍ중국인 직원을 인격적으로 믿고 대하라. 작은 것을 잃을지언정 큰 것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