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광역시 중구 장수마을에 자리한 뿌리공원. 빼어난 자연 환경 속에 각종 복지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해가 저물면 새들도 둥지로 귀환하듯이, 농부도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퇴근을 해도 서둘러 귀가하지 않는다. 가급적 연구실에 머물기를 일상의 習(습)으로 삼는다.
여기에는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 무엇보다 연구행위 자체에서 보람과 樂(낙)을 얻기 때문이다. 술꾼들이 좀 더 오래 술집에 붙어있고 싶어하듯이, 그들은 집 대신 연구실에 머물며 꿈을 향해 정진한다.
그들이 스스로 연구실에 남는 이유는 첫째, 과학자는 고도의 전문성과 적성을 요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밥벌이 대책 삼아 억지로 매달릴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따라서 자발적·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다른 이유 하나는 극심한 경쟁이다. 연구성과를 내기 위한 연구원 집단 내부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하다. SK에너지 수석연구원 朴哲熙(박철희·46·공학) 박사의 얘기는 이렇다.
“연구원들의 경우, 다른 직종과 달리 자기의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억지로 하는 경우는 드물 겁니다. 일 자체에 불만은 없을 거라는 얘기죠. 그러나 연구원의 수명은 짧습니다. 기술개발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이죠. 끊임없는 자발적인 연구와 공부를 통해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죽죽 처질 수 있거든요. 방심하다가 나이 50쯤 되면 밀릴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老後(노후)의 불확실성도 커지게 되죠. 부지런히 연구에 매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철희 박사는 바이오 연료 개발을 연구 과제로 삼고 있다. 풀이나 나무 같은 식물에서 기존의 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액체 연료를 얻기 위한 연구다. 이는 석유 枯渴(고갈)에 대한 대응책이자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연구다. 미국은 내년부터 상용화를 앞두고 있지만, 국내 연구는 이제 초기 단계다.
박철희 박사는 혼자 기숙사에 산다. 주말부부다. 그의 출근시각은 아침 8시30분, 퇴근시각은 5시30분이지만 시간에 맞춰 퇴근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의 동료들 모두가 그렇다. 밤 8시고 9시고 늦게까지 남아 연구활동을 계속한다. 업무 외에 자기역량 강화를 위해 시간을 빈틈없이 활용한다. 기숙사에까지 밀린 일거리를 들고 가는 날도 많다. 결국 그는 잠자는 시간 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와 자기계발에 투여한다. 그는 “이게 대덕단지 연구원들의 일상”이라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술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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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희 SK에너지 수석연구원. |
한마디로 ‘일벌레’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여가 없는 삶이란 지속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도 말하길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처럼 가련하다” 하지 않았던가. 박철희 박사는 일에 몰입된 자신의 삶을 자랑스러워 한다.
“일본의 쓰쿠바 연구단지에서 3년간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덕단지가 말하자면 쓰쿠바 연구단지를 모델로 했다 할 수 있는데, 쓰쿠바에 비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교통·문화·교육 환경 등 인프라가 잘돼 있거든요. 야산을 비롯한 녹지대가 많아 아주 쾌적합니다. 연구원들 중엔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저도 한때 산을 타고 산책 같은 출퇴근을 했어요. 체육 시설도 잘돼 있어서 제가 주로 운동으로 여가를 즐깁니다. 술·담배는 안 하지만 탁구나 기계체조, 心身術(심신술) 같은 수련을 하면서 여가를 보냅니다.”
연구원들의 흡연율은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술은 다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성과확산실장 鄭興采(정흥채·44세·공학) 박사는 “과학자들은 술을 많이 즐긴다”라고 말한다. 정 박사의 말이다.
“연구원들은 실적에 대한 긴장감과 압박감을 심하게 받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외로움을 달랩니다. 과거의 연구는 혼자서 했지만 지금은 融合(융합)의 시대입니다. 술을 나누며 동료들과 마음을 털어놓거나 연구 관련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소중합니다. 조직의 몰입도를 높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까요.”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허전함을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채운다. 골프를 친다. 주거지를 시골로 옮겨 거기에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을 즐긴다. 와인과 커피도 마니아 수준이다.
“대덕의 여건은 아주 괜찮습니다. 전국 어디에 가도 아마 이런 곳은 다시 없을 겁니다. 연구하기 좋고 생활하기 좋은 곳이죠. 대전시엔 ‘예술의전당’ 같은 다양한 문화공간이 있어 수준 높은 공연이나 전시가 많이 펼쳐집니다.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문화를 누릴 수 있죠. KTX로 서울도 한나절 생활권에 들어 왔습니다. 특구 내 학교들의 교육 수준도 톱클래스예요.”
“서울보다 만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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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영 정보통신연구진흥원 기술가치평가팀장. |
지난 날 대덕단지의 연구원들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여성 인력이 많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요즘은 똑똑한 여자들이 참 많다”는 게 이곳 연구원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여성적인 특질이 지닌 장점들이 두드러진다는 얘기다. 특구에서는 실력으로 말할 뿐 남녀의 구분 같은 건 의미도 없으며, 따라서 성차별 같은 폐단도 없다고 한다.
지식경제부 산하기관인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의 전체 연구원 중 17%는 여성이다. 이곳의 한상영(여·42) 기술가치평가팀장은 여성 연구원들의 강점을 ‘꼼꼼함’에서 찾는다. 한 팀장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김은정(35) 연구원은 “남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일반직이 아닌 전문직이라서 남녀 차이 같은 건 거의 부각되지 않습니다. 對人(대인) 관계에서 여성 연구원들이 남자들만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건 약점이겠지만, 친화력이라는 측면은 오히려 장점이겠죠. 여성 연구원들의 고민은 역시 육아 문제입니다. 제 경우 직장일이 힘들다고는 느껴보지 않았지만 아이 문제로는 고심이 있죠. 아이에게 투자할 것인가, 나에게 투자할 것인가, 그런 고민이 있습니다.”
연령대로 본 여성 연구원들의 인력 구조는 전형적인 M자형이다. 30대 중반 연령층의 인원이 현저하게 적다.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일의 대책을 찾지 못한 여성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대덕단지에 근무한 지 10년째인 한상영 팀장도 육아 때문에 심한 고충을 겪었다. 남편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통에 한 팀장 혼자서 세 자녀를 길러야 했다. 직장을 그만둘 생각까지 했지만 다행히 친정부모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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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연구원. |
“아이들에게 엄마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를 세뇌시키곤 합니다(웃음). 그래도 늘 미안해요. 애들이 어릴 적엔 감당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팀에서 성과도 내야지, 육아에 시달리지, 이중고였죠. 여성 연구원들의 경우 ‘직장에서 집으로 출근한다’고 할 정도로 자녀 양육에 부담을 느끼는 게 현실입니다. 이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해소해야 할 부분이겠죠. 단지 내에 탁아시설이 있긴 하지만 턱없이 부족해요.”
한상영 팀장은 자녀들이 어지간히 자란 요즘에는 어느 정도 여가를 누린다. 그녀가 보기에 대덕의 문화환경은 상당히 좋다. 서울 같은 역동성은 떨어지지만 자연환경이나 체육시설이 만족스럽다고 한다.
김은정 연구원도 ‘대덕에서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서울에서보다 만족도가 높다’는 소감을 피력한다. 그러나 불편도 많이 느낀다.
“서울에서보다 같은 비용으로 더 높은 만족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유성쪽은 마치 외국처럼 많은 점들이 좋죠. 그러나 대전 전체를 놓고 보면 문화나 商圈(상권)이 열악합니다. 특히 볼 만한 공연이나 대형 서점이 없어 아쉽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쉬운 건 육아 부담 때문에 여가를 누릴 짬이 없다는 점이죠.”
정권에 따라 연구의 유행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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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욱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대덕연구단지는 국내 유수의 테크노폴리스다. 연구원들의 연구와 생활에 큰 불편이 없는 인프라를 구축한 지구다. 국가 출연기관인 한국화학연구원의 선임연구원인 裵鍾昱(배종욱·40)공학박사는 “살기는 참 좋은 곳”이라고 말한다. 다만 문화공간이 부족하다고 본다. 맞벌이하는 아내와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하는 배 박사에겐 문화 향유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그러나 마땅히 즐길 만한 게 없다.
의료시설이 좋지 않은 것도 아쉽다. 그는 팀 동료들과 가끔 탁구나 배드민턴을 치는 것으로 여가를 즐긴다. 1주일에 한번 정도 회식을 하며 소주를 가볍게 마신다. 그러나 업무가 많아 여유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보통은 밤 10시가 넘어서야 연구실을 나와 기숙사로 돌아가 잠을 잔다. 어떻게 보면 건조한 일상이다. 그러나 그는 일이 재미있다.
“업무가 참 많습니다. 會議(회의)가 거듭되고 수행 과제도 많습니다. 과제 기획에, 감사에, 논문에, 실험까지, 일의 연속이지만 업무가 과중하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당연한 일상이라 여깁니다. 연구원들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요. 제가 공학도가 된 것은 다른 쪽에 재능이 없어 그리 된 것인데, 공부를 해보니까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재미냐 하면, 몰랐던 것을 알아내는 재미, 의심스러운 것들을 풀어내는 흥미가 그것들이죠. 더구나 남들의 共感(공감)을 살 때는 더욱 보람을 느낍니다.”
배 박사는 좋은 과학자라면 열정, 양심, 그리고 자신감, 이 셋을 갖춰야 한다고 본다. 이런 기준에서 대덕단지에 유능한 과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외국에 비해서는 적은 편이라고 한다. 그는 국내 과학기술계의 약점으로 응용과학에 비해 기초과학이 부실하다는 점을 꼽는다. 아울러 막대한 투자비에도 불구하고 실효성을 높이지 못하는 정책의 拙速(졸속) 역시 문제로 파악한다.
“정부는 과학자들의 모든 과제가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컨대 화학프로젝트 1만 개가 시작되면 그 가운데 하나만 성공하는 게 과학입니다. 게다가 의미 없는 논문이란 없습니다. 하나하나의 논문들이 모여 커다란 하나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연구 풍토를 주문하는 연구원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과거에 비해 투자도 많이 늘었고, 기반도 확충됐지만 과도한 실적주의 때문에 과학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鄭興采(정흥채) 박사는 “5년이고 10년이고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배려와 독려, 그리고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연구원들이 잘하고서도 욕을 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이오 쪽만 보더라도 전 세계에 뒤질 게 없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어요. 그러나 정부의 눈높이가 너무 높은 나머지 성과가 없다거나 더디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연구원들은 압박감을 느끼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구비도 깎이게 되는데 이는 결국은 사기 저하로 이어지죠.”
SK에너지의 박철희 박사는 기반은 잡혀 있지만 정치에 좌지우지되는 일부의 경향을 문제로 본다.“똑똑한 연구원들이 많지만 과연 그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인가를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은 적어도 국내가 아니라 전 세계와 경쟁한다는 소신을 갖고 연구에 임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로서의 가치관이나 철학은 없이 목소리 큰 일부 사람들이 뭔가를 독식하려는 풍조가 없지 않습니다. 立身揚名(입신양명)에 휘둘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죠. 정직하게 노력하는 인재들이 홀대 받는 풍토가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