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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년 1월호

[대한민국 2030] 한국 종교의 어제, 오늘, 내일

불교, 개신교, 가톨릭
3대 메이저 종교가 중심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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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柄朝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 1947년 경북 영주 출생.
⊙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문학사), 同 대학원 철학과 철학박사.
⊙ 동국대 중앙도서관장·사회교육원장·부총장 역임. 現 (사)한국불교연구원장.
⊙ 저서: <불교와 인도고전> <한국불교사상사> <실크로드와 한국불교>
    <문명의 충돌,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리의 미래에 관한 엄밀한 과학적 인식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미래는 늘 예기치 않았던 심리적·사회적 상관관계의 요인들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상한다는 것은 知的(지적) 모험이다. 그러나 ‘현재’가 과거의 집합이라면, 똑같은 논리로서 ‘미래’를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모든 종교는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다. 末世(말세)에 대한 경고라든지, 유토피아의 출현에 대한 기대 등은 그 단적인 예이지만, 사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관념적이고 선언적이다. 특히 과학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종교와 미래종교는 말세에 대한 접근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의 예언자적 기능과 더불어 정신문화적 바탕 또한 중요한 요소의 하나다. 오늘날 종교의 정신문화적인 영향력이 대폭 감소했지만, 이는 여전히 종교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의 종교가 가진 현실인식과 문제의식의 바탕 위에서 2030년 한국의 종교들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까 하는 문제를 그려볼 수 있다.
 
  인류의 미래는 불확실한 두 가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보다 진보된 생활과 향상된 정신문화를 누린다는 긍정성이다. 그 뒷받침이 되는 힘은 과학과 이성(logos)이다. 동시에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전쟁·공해·환경·생명복제 등의 부정적 면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역시 ‘과학’이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한 위협적 가능성은 불발로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두운 그림자의 상념을 부여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확실한 점은 이성의 復權(복권), 양심의 회복,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이 인류가 가진 어두운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하는 점이다.
 

  지난 2000년 동안 종교는 이러한 인간성 회복에 대한 문제를 논의해 왔고,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기여해 온 것도 사실이다. 이 세상의 종교치고 심성의 순화나 사회정화를 강조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문화의 방황은 여전히 거듭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한’ 가르침을 외치는 종교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 종교를 제대로 믿지 않는 인간들의 문제인가?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것처럼 느껴지는 종교가 오늘날 또 다시 절실히 필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 특정 종교가 지배적 위치 차지 못해
 
  대부분의 현대국가들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종교 이데올로기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설득력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미래는 종교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적 가치 규범이 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국가들은 자기들 전통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영역을 사회적 질서로서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지배종교는 改新敎(개신교)이고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은 가톨릭 국가다. 동남아와 일본은 불교 국가다. 명문화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다른 나라들의 國敎(국교)는 살아 있다.
 
  그러나 한국은 특정종교가 지배적 위치에 있지 못하다. 이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국론분열을 야기하는 치명적 약점일 수도 있다. 최근의 종교 편향에 대한 불교계의 반발은 그 상징적 사건이다. 더구나 종교의 가치관은 ‘절대신념 체계’이기 때문에 한번 갈등을 일으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내 것이 최선이면 상대방 것은 차선일 수밖에 없다. 사랑을 말하는 종교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연유다.
 
  일부에서는 종교 간의 대립을 완화시키는 방안으로 ‘多元(다원)종교’에 대한 가설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 종교의 특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따라서 多(다)종교 시대상황은 인정하면서도 그 진리성의 공유를 말하는 다원종교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예측은 성급하다.
 
  현대 한국의 종교는 敎勢(교세)로 보면 불교, 개신교, 가톨릭 등이 지배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외의 영향력 있는 종교로는 민족종교 성격이 강한 원불교, 천도교, 대종교, 증산교 등이 있다. 외국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온 이슬람은 여전히 한국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2030년의 한국 종교는 현재의 불교, 개신교, 가톨릭 세 개의 메이저 종교를 중심으로 발전해 갈 것으로 보인다.
 
 
  ◈ 가톨릭의 대약진
 
  종교인구 통계는 각 종교에서 제출한 자료보다는 인구 및 주택 센서스 집계가 신빙성이 높다. 서양종교와 동양종교를 같은 가치기준에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본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표 1>의 통계를 보면 지난 20년 동안 불교>개신교>가톨릭의 교세는 큰 변동이 없고, 가톨릭의 약진이 눈에 뜨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국민의 절반 정도가 종교인이고, 나머지는 無(무)종교인이거나 특정 종교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는 잠재적 종교인이다.
 
  종교는 보수적 집단이기 때문에 교세의 급격한 변화 가능성은 낮다. 현재까지의 통계 변동을 보면 불교는 완만한 상승세, 개신교는 완만한 하강세, 가톨릭은 급격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먼저 상승세의 가톨릭은 장례의례를 통한 발전세라고 분석할 수 있다. 가톨릭이 우리의 전통 제사의식에 관대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정서적 반발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또 완벽한 장례 시스템의 가동은 임종간호에서부터 영결식 이후까지 망자와 가족들을 안도시키고 있다. 따라서 특정종교에 귀의하지 않았던 이들도 자신들의 臨終(임종)을 가톨릭 식으로 치르는 일이 허다하다.
 
  한편 완만한 하향 곡선을 나타내고 있는 개신교는 몇 가지의 둔화요인을 갖고 있다. 첫째는 사회사업을 통한 선교의 한계점이다. 1950년대나 60년대의 빈곤퇴치라는 슬로건은 더 이상 한국인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 또 사회복지의 대부분은 국가의 몫이 되었다는 것도 기독교의 선교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둘째로는 個(개) 교회 중심적 운영체제다. 전체 기독정신의 창달이라기보다는 소속 교회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신자들의 이기적 祈福(기복)심리가 문제다. 셋째로는 물량적·배금적 풍조의 만연이다. 교회는 대형화되고, 집회 또한 대규모로 발전한다. 내면의 자유추구라든지 神(신)이나 영혼과의 교감 등은 점점 옅어지고, 열렬한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교인들만의 집단을 이루는 배타성이다. 같은 교인끼리 식사하고, 같은 교인의 가게만 찾고, 같은 교인들의 모임만 강조하다 보면 개신교는 다양한 한국사회 속에서 혼자만의 아성에 안주하는 ‘섬’의 신세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2007년 11월 9일 한국의 7대 종교 대표들이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바르고 깨끗한 선거실현 대 국민 호소문’을 발표하고 있다.

 
  ◈ 진리 구현이냐, 사회 구제냐?
 
2008년 3월 23일 새벽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2008 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에 참가한 신도들이 기도하고 있다.

  불교의 상승세는 자연적 요인이 많다. 불교는 노년층의 지지 세력이 높고 청소년층의 기반이 취약하다. 이는 불교의 위축을 가져오리라는 우려도 있지만, 오히려 장·노년층이 자연스럽게 불교를 가까이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잠재적 종교인, 우호적 종교인의 숫자는 불교가 가장 높다는 점도 자연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민족종교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종교는 원불교다. 천도교는 敎領(교령)의 월북사태로 상처를 입었고, 다른 민족종교들은 내분으로 분열 위기에 몰린 바 있다. 그에 비해 원불교는 꾸준히 상승세를 지속해 왔다.
 
  교역자들의 헌신과 신자 층의 모범적 신앙사례도 원불교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다만 불교의 개혁 세력을 자처했던 創宗(창종) 당시의 이상을 그대로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불교와는 다른 색채임을 강조하는 圓敎(원교)로서 再(재)창종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내부의 결단을 촉구하는 부분이다.
 
  종교는 언제나 양면성을 갖고 있다. 자신들이 표방하는 진리에 안주하면서 바람직스럽지 못한 현실을 개선해가려는 노력이다. 동시에 그 고원한 진리의 세계에 안주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이를테면 문화적 소외, 가난, 차별 등을 완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완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두 가지 면 중에서 어느 한쪽에 악센트를 주는 일이 자연스럽다. 스위스 종교학자 프리들리는 종교를 硬性(경성)과 軟性(연성)으로 분리했다. 대체로 경성 종교인 기독교, 이슬람 등은 後者(후자)의 성향이 강하고 연성종교인 불교, 유교의 경우는 前者(전자)에 치중한다고 분석했다.
 
  시대적으로 보면 고대와 중세사회에 이르기까지는 종교의 진리 구현적 면모가 확연하다. 당시의 종교는 그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 있을 뿐 아니라 사회발전의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세에 이르면서 종교의 진리적 선언은 급격히 퇴색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사회구제가 진리 구현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세를 풍미했던 해방신학이나 민중불교의 사상적 맥락이 종교적 변환을 상징한다. 절대가치를 표방하는 종교가 진리적 선언에 집착하면 종교적 갈등과 대결은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발상이 배타성과 종교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현대인들은 이 소모적 논쟁에 냉담하다.
 

 
  ◈ 異宗敎의 共同善 추구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미래의 종교를 ‘세속화와 일반인의 무관심’으로 꼽은 바 있다. 어느 종교가 훌륭하냐의 문제는 더 이상 진리성 제고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리성 여부에 상관없이 세계의 종교들은 2000년 이상을 지탱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종교 평가 기준은 그들이 표방하는 진리의 세계에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서 있느냐 하는 質的(질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진리적 선언만을 至高(지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종교에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가 결여되어 있다. 즉 사회가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언제나 이 사회를 구제해야 한다는 선각자의 망상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회가 종교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2030년의 종교는 이 불안정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현실적 요청에 부딪치게 된다.
 
  이미 금세기 들어서 異宗敎(이종교)의 共同善(공동선) 추구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火葬(화장)의 정착을 위한 가톨릭·불교의 共同力(공동력)이라든지, NGO(비정부기구) 운동을 상설화해 가는 개신교, 가톨릭, 불교 등의 움직임이 그 예다. 종교가 調伏(조복: 항복) 받아야 할 대상은 이웃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이기적 심성, 타락한 자세, 조직적 악의 횡포 등이다.
 
  종교가 추구해온 유토피아는 2000년 동안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 이상향은 허구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종교회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성취하지 못한 꿈이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종교의 필요성을 말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이제 2030년의 종교는 그 방향키를 ‘사회구제’로 수정해 나갈 수밖에 없다.
 
  동양종교인 불교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가진 부분은 사회사업 분야다. 이것을 불교적 전통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불교는 노인문제, 결손가정 자제들의 문제 등이 야기되지 않았던 동양적 사회구조 속에서 성장해온 종교였기 때문이다. 불교가 사회사업에 냉담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은 서구적 편견에 불과하다. 다만 앞으로의 불교발전은 사회사업 쪽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하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동시에 사회사업 쪽에 역점을 두고 교세를 신장시켜온 개신교와 가톨릭의 경우는 질적인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궁핍을 해소하려는 하드웨어적인 사회사업은 이제 정부의 몫이지 교회의 역할은 아니다. 교회는 직업교육·정신교육·여가선용·실버문화 등 소프트웨어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의 간극 좁아져
 
  전통적으로 모든 종교는 성직자 그룹에 의해 운영, 유지되어 왔다. 聖職(성직)이라는 개념은 그 종교의 수호자였을 뿐 아니라 사회의 엘리트 그룹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종교 가운데 성직자 개념이 희박한 종교로는 이슬람과 힌두교가 있다. 가톨릭의 사제, 불교의 승려, 개신교의 목사 등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성직자다.
 
  물론 가톨릭의 평신도회, 불교의 전국신도회, 개신교의 장로회 등은 일반 신자들의 연합모임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단운영 참여는 지극히 형식적이거나 미미한 수준이다. 교단 내부의 갈등은 주로 성직자끼리의 다툼과, 성직 대 평신도의 불화 등으로 야기되고 있다. 따라서 이 갈등을 극복해야 건전한 종교문화의 육성이 가능하다.
 
  미래사회에서는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 간의 종속적 관계가 사라지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회의 다변화가 가속되면서 성직자 그룹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선교나 학술적 업무, 행정 지원 등은 신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성직과 일반 신자라는 장벽이 서서히 사라지는 추세다.
 
  미래의 종교운동을 성직자와 일반 신자로 나누어 분석한다면, 그들은 서로 상이한 사상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일반 신자의 경우는 종교의 원리를 탐구함과 동시에 그 종교적 진리를 다변화된 사회 속에 전개할 수 있는 실천의지를 구현해야 한다. 성직자의 경우에는 수도와 절제 기풍의 확립이다. 즉 청정한 戒行(계행), 고양된 내면세계의 顯現(현현) 등이 급선무다.
 
  이 양자의 의지가 사회적 양심의 보루로서 집합, 전개되어야 한다. 종교가 가진 사회적 기능은 성직자나 일반 신자 양자 어느 한쪽만의 노력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종교는 결코 현실 안주적이어서는 안 된다. 또 非(비)현실적인 관념의 허상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성직자 등은 일반 신자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야 한다. 즉 청정한 수도의 기풍을 간직한 모범적 그룹이어야 한다. 성직자와 일반신자들이 서로의 위상에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미래 종교의 모습이리라 예상한다.
 
 
  ◈ 종교에 대한 사회적 평가
 
  종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여태까지 없던 새로운 교리 체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 아니라 재해석과 현실적 응용을 도모해야 한다. 우리가 앓고 있는 현재의 상황들, 이를테면 보수와 혁신, 지역감정, 경제적 불평등, 남북대결 등의 諸(제) 문제에 대한 현실적 대안 마련에 종교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는 종교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시행, 발표했다. 2008년 11월 23~27일까지 글로벌 리서치에 의뢰해서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였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는 방안을 찾기 위해 시행된 이번 조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세 종교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통계다.
 
  먼저 종교단체(가톨릭성당, 개신교회, 불교사찰)에 대한 신뢰도는 가톨릭, 불교, 개신교라는 결과가 나왔다. 응답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가톨릭 성당은 35.2%, 불교사찰은 31.1%, 개신교회는 18% 순이었다. 신뢰하는 종교기관이 없다는 응답도 15.7%였다.
 
  한편 호감을 가지고 있는 종교는 불교 31.5%, 가톨릭 29.8%, 개신교 20.6% 순이었다. 연령별로 보면 20대와 60대는 불교에 대한 지지율이 높고, 10대, 20대의 경우는 개신교, 30대, 40대, 50대는 가톨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다.
 
  이번 조사에서 절반 가량은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신앙인이었는데 그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호감도를 물은 결과 가톨릭은 84.7%, 개신교는 79.2%, 불교는 64.4%만이 자기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無(무) 종교인들의 경우는 불교에 가장 호감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불교(31%), 가톨릭(27.3%), 개신교(12%) 순이었다.
 
  불교가 최대 종단이면서도 불교인 스스로에게 가장 낮게 평가된 이유는 불교지도자들의 신뢰결핍 등 종단의 불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가톨릭이 모든 항목에서 가장 신뢰 받는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회변화와 시국에 적절히 대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또 여러 설문조사에서 가장 낮은 호감도를 보인 개신교는 성장 위주의 선교정책이 가장 개선해야 할 문제라는 대답이 많았다. 응답자들은 한국 개신교가 신뢰를 얻기 위해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교인과 교회지도자들의 언행일치(42%), 이웃종교에 대한 관용(25.8%), 사회봉사(11.9%), 재정사용의 투명화(11.5%), 교회의 성장제일주의(4.5%) 등을 꼽았다.
 
  이 통계와 분석표는 어느 특정 종교에만 국한되는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불교, 가톨릭, 개신교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평가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사회의 종교는 이 사회적 평가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 대응결과가 미래 종교의 판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고 본다.
 
석가탄신일을 사흘 앞둔 2008년 5월 9일 부산 서대신동 내원정사에서 어머니와 딸이 경내에 즐비하게 매달린 연등 아래서 기도하고 있다.

 
  ◈ 한국은 종교전쟁의 無風지대?
 
  외형적으로만 말한다면 한국의 종교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여 왔다. 한국에서의 기독교勢(세) 성장은 서방세계의 입장에서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그 성공의 열쇠를 찾는 종교·사회적 연구도 성행하고 있다.
 
  불교의 교세 신장 또한 괄목할 만한 현상이다. 과거의 山中(산중)불교라는 이미지를 벗으면서 서서히 현대사회 속에 적응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종교의 외형적 성장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의 윤리 결핍이라는 문제를 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국종교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敎學的(교학적) 기반이 미약하다. 열렬한 신자만 있을 뿐 철저한 자기 성찰의 수도적 자세가 부족하다.
 
  둘째, 독선과 자기 도취가 강하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헌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배척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 간의 갈등은 무지와 편견의 소산이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제국주의적 발상으로 이 땅의 다종교 현실을 ‘평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또 자격이 의심되는 성직자의 양산은 종교적 진리와 권위를 폄하시킨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셋째, 내면의 가치보다는 외형적 허장성세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결과 종교 또한 물량적 배금주의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 종교는 모두 내면적인 고민을 안고 있다. 불교는 사찰의 세속화 경향, 종단의 不和(불화), 청소년 불교인구의 감소 등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 그 내면적 원인은 집요한 문중 의식과 宗權(종권) 다툼, 제도적 모순, 재산권 문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개신교는 個(개)교회 주의, 배타적 선교성, 종교집회의 대형화 등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다. 특히 제사의식 등 전통적인 한국의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한국적 정체성을 의심 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가톨릭의 경우는 권위주의의 청산, 성직자의 감소추세, 평신도와의 원만한 관계정립 등이 숙제로 등장하고 있다. 바티칸의 끊임없는 자기 혁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위주의 미사집전, 폐쇄적 교단운영, 평신도들의 참여제한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다.
 
 
  ◈ 이기적 기복신앙에 휩싸여
 
  한국사회는 과거에도 종교전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어도 치명적인 종교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다. 고구려에서의 도교와 불교 갈등은 보덕화상 등 고구려 불교를 대표했던 인물들의 신라 망명을 초래했다. 麗末鮮初(여말선초)의 拓佛(척불)정책은 불교 문화재의 망실뿐 아니라 불교이념의 단절을 불러일으켰다. 승려들을 사회의 천민으로 격하한다든지, 사대문 출입을 금하는 등의 폐쇄적 정책은 護敎(호교)·護法(호법)이란 반작용을 야기했다. 최근에 개원한 ‘훼불전시관’은 破佛(파불)·毁佛(훼불) 등 이 시대의 종교 갈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한국이 종교전쟁의 무풍지역이리라는 생각은 안이한 발상일 수도 있다. 만약 한국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는 핵폭탄보다 더한 위력으로 이 나라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릴 것이다. 따라서 종교 간의 자성뿐만 아니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고려해야 한다.
 
  세계의 종교전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단계를 밟아 진행된다.
 
  첫째, 종교 성직자들의 상호비방이다. 특히 가십성 기사들을 일반화시켜 전체 성직자들에 대한 모독으로 발전시켜나간다. 둘째, 상호종교의 외형성 비교다. 신자나 건물, 집회의 참석 숫자 등을 놓고 비교 우위에 젖는 감성적 대리만족의 단계이다. 셋째, 상호종교의 진리성에 대한 우월성 논쟁이다. 전문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기보다는 감성적이기 때문에 이 논쟁 또한 허황한 자기주장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넷째, 나의 종교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상대 종교에 대한 적개심과 동일시되는 단계다. 공존의 질서보다는 천하통일을 꿈꾸는 일방적 과대망상이다.
 
  다섯째, 종교적 가치는 세속의 규범을 초월한다는 맹신적 사고의 범람이다. 모든 가치기준을 특정 종교의 논리로서 판단할 때는 이 논리에 반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을 지극히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하게 된다.
 
  종교인구가 전체국민의 절반을 넘지만,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는 지극히 비종교적이다. 한국 종교는 너나없이 이기적 기복신앙에 휩싸여 있다. 종교가 來世(내세)에 대한 희구라기보다는 현세 이익적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할 수 있다. 이 점은 모든 종교가 猛省(맹성)을 할 대목이다. 종교가 잘못 가르쳤거나, 또는 우리가 잘못 이해한 탓이다.
 
  종교적 가치를 수용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이중적이다. 즉 관념으로서는 그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천 의지는 박약하기 그지없다. 이점에서 성직자를 포함한 종교인들의 僞善(위선)도 큰 몫을 한다. 일요일 오전에만 기독교인이고, 토요일 오후에만 불교인인 이율배반을 극복해야 한다.
 
2008년 8월 27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범불교 집회를 연 전국 사찰의 승려와 신도들이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정책을 시정하라’고 요구하며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 사회정의 실현의 구심점 되어야
 
  다음으로는 종교 간의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대화는 토론과 달리 전제와 조건, 결론이 필요 없는 형식이다. 서로의 수도자적 경험을 나누고, 共同善(공동선)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경건한 자세가 필요하다.
 
  현대 종교의 문제점은 ‘수도자의 상실’이다. 사회에 대한 교화활동 또한 그 종교의 세 늘리기, 땅 넓히기로 생각하는 한 원만한 성취는 기대하기 힘들다. 2030년의 종교는 그 진리성에 대한 전근대적인 논쟁보다 오히려 공동선을 지향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종교가 자기개혁을 바탕으로 사회의 그늘진 곳을 지키는 공동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미래 종교의 핵심이다. 종교는 오랫동안 안일의 타성에 젖어있었다. 앞으로는 사회 속에 종교를 용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가 사회의 구심점이던 고대사회 속에서 종교는 절대적 가치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종교의 우주적 상상력은 이제 과학의 몫이 되었다. 知的(지적) 권위는 대학이 앗아갔다. 따라서 미래 종교의 남은 몫은 도덕적 청정성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정의 실현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의 부정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한국 종교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인격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탁월한 실천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종교의 자기정화 의지가 사회전체로 확산될 수 있는 연결고리와 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가는 길이다. 건전한 종교의지의 확산과 知的(지적)의식 고양 등은 미래 종교를 창조적으로 가꿀 수 있는 원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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