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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년 1월호

이명박의 大長征 537일 - 지도자의 상상력이 나라를 바꾼다! [2]

[독점 入手] 李明博 캠프가 기록한 원고지 1만2000장 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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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한나라당 李明博 대통령 후보 캠프
정리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사진 : 李五峰 月刊朝鮮 객원 사진 기자
李炳勳 前 조선일보 사진부장
  [2007. 1. 1] 한나라당 신년인사회
 
  2007년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한 해
 
  『정말 지난 한 해 어려운 한 해를 우리 국민들이 보낸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국민 중에는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에 뛰어든 서병길 소방관, 세계에 이름을 떨친 김연아 선수, 수영의 박태환 선수, 혼혈아면서 희망을 준 하인즈 워드, 또 어려운 가운데 3000억 달러의 수출을 달성한 우리의 작은 기업, 큰 기업, 기업인과 일꾼들… 그 분들이 있어서 그래도 한 해를 보낼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제 2007년 한 해는 정말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제 당이 단합하고 화합하고, 그럼으로써 국민에게 신뢰를 받고, 수권할 수 있는 정당으로서 우리는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사랑받는 당으로 만들어야 될 것 같습니다.
 
  지난 한 해는 우리 朴槿惠 前 대표를 위시해서 또 강재섭 대표와 당직자 여러분께서 수고를 많이 해서 우리 당을 잘 이끌어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저도 정권을 다시 찾아오는 데 밑거름이 되고 화합하는 데 앞설 것이고 또 아름다운 모든 경선, 경쟁을 통해서 최종 승리하는 당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2007. 1. 2] 金泳三 前 대통령 면담
 
  金泳三: 금년이 우리나라에 아주 중요한 해입니다. 金大中·盧武鉉 두 사람이 이상하게 끌고와서 국민들의 정신을 혼돈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바로잡아야 합니다. 특히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해요.
 
  『한미관계가 소원해졌죠. 안보도 그렇지만 경제도 그렇고. 기본인데』
 
  金泳三: 한미동맹은 우리나라 생존의 기본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을 봐도 그렇구요.
 
  『우리 경제가 참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3만 달러 시대니 하는 것은 껍데기다. 의미 없다」는 소리를 합니다』
 
 
  [2007. 1. 2 15:35] 金大中 前 대통령 면담
 
  김대중: 보도를 보니까 인기가 아주 높던데 축하합니다.
 
  『마지막 국무회의 때 청계천이 복원되면 초청하겠다고 했는데 그때 몸이 불편하셔서… 따뜻해지면 한번 오시죠』
 
  김대중: 요즘 간혹 차로 한 번씩 돕니다. 밤 정경이 굉장합디다.
 
  『일본에서 청계천 야경관광단이 생겨서 찾아옵니다』
 
  김대중: 저는 서울시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盧武鉉 정부 이후에는 안 했습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8개월 했습니다. TV에서 볼 때보다 건강이 좋아지신 거 같습니다』
 
  김대중: 그때보다 나아졌어요. 예전에는 집안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다녔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2007. 1. 4] 노숙인 방한복 나눠 주기 행사 참석
 
  李 前 시장은 조계종이 운영하는 노숙인시설 「보현의 집」을 찾아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배식하고 방한복을 입혀 주는 시간을 가졌다.
 
  보현의 집은 조계종에서 운영하는 자활전문쉼터로 500명의 노숙인들이 머물고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李 前 시장이 만든 프로그램인 「서울시 일자리 갖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李 前 시장은 오후 6시30분경 방문해 원장 지거스님과 함께 앞치마를 두르고 식사를 배식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방한복을 입혀 주며 격려했다. 그는 『언젠가는 여러분이 노숙인들에게 이런 옷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7. 1. 5] 고대교우회 100주년 기념식서 공로상 수상
 
 
  [2007. 1. 8] 민주동지회 신년회
 
  안보와 경제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저는 1992년에 기업을 떠났습니다. 그 당시에 노사분쟁이 있던 현대자동차가 오늘도 더 강력한 민주노총 산하의 노조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우리 경제가 이 어려움에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며칠 전에 중국에서 31년 만에 부인을 만난 납북 어부를 우리 정부는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위기 속에 방치해 버렸습니다. 국가는 그 신분을 떠나서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안보를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와 안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양면이 지금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저는 이 위기를 보면서 이 시대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분의 고하 없이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진정한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고 여기 계신 민주동지회 회원들의 목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교육받고,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얻고, 문화적 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뒷받침되는 경제국가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유일한 희망이 저는 정권교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은 역사적인 갈림길에 있는 2007년을 앞두고, 온 국민이 정권교체를 바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앞으로 1년 더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많은 국민들이, 하루하루가 지겹다고 합니다. 그래도 「금년 연말 대선이 있어서, 정권교체의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견디고 있다」고 모든 국민이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정권교체는 국민의 열망일 뿐만 아니라, 한나라당의 염원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金泳三 대통령께서 물러나실 때 국가부채가 53조원이었습니다. 두 정권을 거치면서 부채가 300조원이 넘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 무려 6배의 국가 부채를 만들어 놓은 살림살이를 지금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더라도 정권교체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7. 1. 8] 조계사총무원장 지관 스님 예방
 
 
  [2007. 1. 9] 서울 강동갑 당원협의회 신년하례회
 
  나라 살림을 그저 되는 대로 했습니다
 
  『이번 大選은 안보문제, 경제문제, 어쩌면 좌우 이념의 문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이 임기를 마쳤을 때 대한민국 부채가 53조원이었어요. 지금 현재 한 300조원이 되었습니다.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살림을 그저 되는 대로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과 10년 사이에. 국가 부채가 6배로 늘어났습니다. 이 빚을 누가 갚아야 돼요. 우리의 아들딸들이 다 갚아야 됩니다. 지금 300조원이 넘는 빚은 원금과 이자를 다 갚으려면 이 다음 대통령은 일할 수 있는 재정이 없어요. 이렇게 나라를 마음대로 살림살이를 살고 말았습니다.…
 
  세금은 늘어났죠. 국가 부채는 계속 늘어났죠. 금년 남은 1년 동안 또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겠어요. 무슨 일을 저질러서 부채를 늘릴지 모르겠어요. 일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빚이 무서운지 몰라요, 여기 주부들도 계시지만 가정살림도 그럴 거예요. 빚이 늘어나면 잠이 오겠어요. 그런데 이 정권은 빚이 300조원이 넘어 태산같이 늘어나도 잠도 잘 자고 할 말은 또 다 해요. 그러면 좀 미안한 마음이라도 먹고 있으면 우리가 덜 미울 텐데, 그래도 뭐 뻥뻥 할 말 다 해요.
 
  저는 그걸 보면서, 제가 만일 그런 일을 맡았다면, 뭐 그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겠지만, 국민들한테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들 거예요. 이것이 오늘의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권 한 번 더 잡기 위해서 정계개편을 한다든지 별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이 사람들이 이러다 안 되니까 이 국민 모두는 정권 교체를 큰 희망으로 삼고 있는 거예요.…
 
  이 정권을 잡더라도, 10년간 저질러 놓은 일을 5년 동안에 바로잡는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 거예요. 뭐 이제 우리 보수,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저 민주노총이 일어나고, 좌파가 일어나고, 반미세력이 일어나고, 별별 반대파가 다 일어날 거예요. 이걸 장악해 가지고 이 나라를 끌고가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그 걱정이 또 태산이에요.…
 
 
  [2007. 1. 10] 대구경북신년교례회
 
 
  [2007. 1. 13] 한나라당 강원도당 신년인사회
 
 
  [2007. 1. 16] 서울신기술창업센터 방문
 
 
  [2007. 1. 18] 경남 거제 대우해양조선 방문
 
  노사화합이 조선 세계 1등의 결정적인 이유
 
  『1990년대 한창 노사분규가 심할 때 이곳에 왔었습니다. 그때는 해군제독 하시던 분이 사장이었는데, 노사분규가 너무 심해서 정부에서는 대우조선 같은 곳 한 곳을 폐쇄해서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까지 했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산업 중 가장 발전했는데 노사분규 없어진 게 결정적인 이유라고 봐요. 세계 1등이 되었잖아요. 조선은 대한민국 1등이 세계 1등 아니에요? 조선을 처음 시작할 때 대한민국에서 조선소는 힘들다고 봤거든요. 일본이 원체 앞서 가니까. 일본은 기술 수준 높지, 중국은 인건비 싸지. …
 
  지금 우리도 인건비가 얼마나 올랐어요. 그런데도 경쟁력 있는 것을 보면 굉장한 거예요. 기술도 향상되었지만 설계기술, 제조기술은 말할 것도 없지만 노사분규 없어진 게, 노사화합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을 거예요.
 
  현대자동차는 내가 있을 때도 노사분규가 심했는데 지금도 똑같이 하니까, 참, 자동차 산업은 걱정이에요. 그게 해결이 안 되면 자동차 산업 미래도 없다고 봐요. 그래서 대표적인 데 한번 와 보고 싶었어요. 노사화합으로 세계 일류 기업이 되었으니까』
 
 
  [2007. 2. 22] 과학과 예술이 만나는 은하도시 포럼 토론회 참석
 
  『저는 기업인 시절 세계를 다니면서 과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구상했던 국제과학비즈니스 도시를 실현하는 방안에 대해 더욱 많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지난해에는 유럽과 일본의 국립과학연구소와 과학도시를 방문했습니다.
 
  유럽 20개국이 공동 출자해 만든 유럽입자 물리연구소 CERN과, 독일의 국립 중이온 연구소 GSI에서는 세계의 석학들이 밤낮을 잊고 좀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 쯔쿠바에서는 과학 인프라가 국가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되고 있음을 직접 보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초과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연구와 기업화를 연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과학비즈니스 도시는 기존의 혁신도시나 기업도시와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서, 과학이 예술뿐만 아니라 비즈니스와 만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입니다.
 
  과거에는 국제곡물시장, 국제금융시장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글로벌 경제시대와 첨단기술경쟁시대에는 첨단기술시장, R&D(연구개발)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시장을 선점하는 국가가 21세기에 앞서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국제 과학 비즈니스 도시는 기초 과학과 미래 과학의 인프라를 갖춘 지식 경영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경제 침체 10년의 빈곤한 시대를 닫고 다가올 희망의 10년 안에 국민소득 4만 달러의 선진 시대로 안내할 견인차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자체가 新성장엔진으로서, 국운 융성의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2007. 1. 23] 부산밝은미래시민포럼 한반도 대운하 심포지엄
 
  한반도 대운하는 자연과 환경을 살리는 작품
 
  『저는 낙동강과 관련해 부산·경남시민들에게 가장 깊은 관심이 수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질을 나쁘게 하면서 운하를 만든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수질을 나쁘게 하면서 우리가 운하를 왜 만들겠습니까? 제가 독일을 가보고 네덜란드를 가봤습니다만, 모두 2급수 수질을 유지하면서 운하 바로 앞에 큰 물고기가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경제와 자연이 함께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아마 한반도 대운하는 자연과 환경과 문화와 모든 것들이 함께 하는 융합되는 그런 작품으로 나오지 않겠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親환경적 운하를 만들 것이라는 것보다 더 앞서서 오히려 오늘날 파괴된 환경을 복원하는 차원의 운하 건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2007. 1. 25] 盧武鉉 대통령 기자회견과 관련된 기자회견
 
  ―盧대통령이 오늘 기자회견에서 「경제를 잘 아는 것과 경제정책을 잘 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는데요.
 
  『2007년 새해에 우리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마 그런 게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대통령께서 「남은 임기 동안 민생에 전념하겠다」는 그런 말씀을 국민들이 듣고 싶어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동영 의장이 「이명박의 경제정책은 소수만을 위한 경제정책이 아니냐」 하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이번 정권이 서민을 위한다고 했지만, 서민이 가장 어려운 상태가 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경제가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 그러시는 것 같아요. 저는 서민을 위한 경제를 한다고 해서 서민을 더 어렵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저는 실물경제를 했던 사람이고, 또 제가 서민 출신으로서 서민을 위한 경제정책을 누구보다 더 마음으로 더 정성껏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7. 1. 30] 충남 탕정 삼성전자 LCD 총괄 산업단지 방문
 
  경제의 시작도 기업이고, 경제의 중심도 기업입니다
 
2007년 1월30일 탕정삼성전자를 방문한 李明博 당선자.

  『지금 경제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경제의 중심이 기업이란 게 인식이 잘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의 시작도 기업이고, 경제의 중심도 기업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미래 희망도 기업입니다. 특히 첨단 기술 분야에서 세계와 경쟁하면서 계속 1등을 유지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인데 사회적 분위기가 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삼성 LCD가 충남 탕정에 와서, 과거 포도밭을 이렇게 발전시켰습니다. 「탕정벽해」가 된 것 같습니다. 그것도 불과 짧은 시기에 세상을 바꿔놨습니다. 여기에서 세계 최첨단 제품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1위가 세계 1위입니다. 말은 쉬운 것 같아도, 기업하시는 분들이 전력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
 
  기업이 국가경제에 많이 기여하고, 고용을 창출하고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아마 삼성 LCD가 이곳에 들어옴으로써 국가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역에 기여하는 것도 클 것입니다. 가능하면 앞으로도 향후 10년, 20년 계속 세계 1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희 회장도 20년 후가 걱정이라고 했는데, 오늘 1등 하는 사람은 내일 1등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다음 세대 공장도 60만 평을 확보하셨다고 했는데, 기술투자를 해외보다는 국내에 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기업 입장에서 볼 때 경쟁력을 생각해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거예요. 이 부분이 아마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해외에 가서 투자하는 정도의 뒷받침을 정부가 기업에 해야 하고… 가능하면 첨단과학기술 분야, 가능하면 국내 투자하면 좋겠습니다. 부탁하고 싶습니다』
 
 
  [2007. 1. 30] 윤봉길 의사 기념단체 신년교례회 참석
 
  『윤봉길 의사가 거사하기 전에 그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문구에,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놓으라」고 했습니다. 25세의 청년 윤봉길은 의거에 앞서 상하이 홍구 공원을 둘러보며 어린 아들에게 남겼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 나라 경제를 걱정하는 사람, 농촌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로써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만 매헌 윤봉길 의사와 같이 그 애국하고 애농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애국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기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모든 것을 던져서 나라를 사랑하고, 농촌을 사랑했던 윤봉길 의사님을 생각하면서 이 시대에 나라 사랑하는 마음, 농촌 사랑하는 마음을 한 번 더 가다듬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 일에 함께 하겠습니다』
 
 
  [2007. 2. 1] 가톨릭 대구교구 이문희 대주교 예방
 
  『저는 가톨릭과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제가 이태원 재래시장에서 환경미화원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군대에 자원입대했는데, 거기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쫓겨났어요. 당시 용산구에서 무료 환자로 시립병원에 넣어 줬어요. 그런데 무료환자라고 어찌나 괄세하는지, 그래서 저는 뛰쳐나왔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가톨릭 병원에 가게 되었어요. 거기 들어가서 입원했더니 수녀가 간호사고 의사분이 계신데, 수녀님이 무료 환자고 돈 내는 환자고 구분 없이 치료해 주시는 거예요. 나는 그때 착각했다구요. 이 수녀님이 나를 좋아하는 줄 알고. 어찌나 친절히 대해 주시는지…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병이 반은 나았더라구요』
 
  이문희 대주교: 다 잘 되어서 국민들이 혼란이 없어야 될 텐데.
 
  『그래야죠. 제 생각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는 정치인들이 그걸 감안해서 더 잘해야죠』
 
  이문희 대주교: 정치인이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무리한 거예요. 남을 위해 정치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는 자기를 위해 하니까요. 종교인들은 마음을 비우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빨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연초에 정진석 추기경님을 뵈러 갔는데, 기자들 다 물리치시고, 본인이 최근에 쓰신 책이라고 하면서 「모세」 책을 주시더라구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분석했다고. 바쁘더라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2007. 2. 1] 경북 김천시 직지사 방문
 
  직지사에 도착한 李 前 시장은 대웅전과 박정희 前 대통령 내외와 朴 前 대통령 부모의 영정과 위패가 있는 명부전을 참배하고 성웅 주지스님과 녹원 큰 스님을 만났다. 성웅스님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시고자 하는데, 그 뜻을 꼭 이루시기 바란다』고 덕담을 했고, 李 前 시장은 『직지사에 꼭 오고 싶었는데, 많이 늦었다. 직지사에 와서 녹원 큰스님 등 여러 스님들을 뵙게 되어 매우 기쁘다』고 인사를 드렸다.
 
  녹원 큰스님은 『여름에 청계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봤다』며 『한반도 대운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청계천을 보니까 나는 믿는다. 깔끔하게 잘 해달라』고 당부했다.
 
 
  [2007. 2. 8]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 돈 오버도퍼 교수 대담
 
  李 前 시장은 오버도퍼 교수와 6者회담 전망 등 외교 현안에 대해 1시간 10분간 대화를 나눴다.
 
  오버도퍼: 이번 6者회담을 위해서 중국이 상당한 영향을 행사했다고 본다. 중국은 현재 북한에 불만족하고 있고, 어쩌면 북한의 완전한 붕괴는 중국이 바라지 않겠지만 중국은 다양하게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에 대한 무기 부속품 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중국·한국 모두 이런 측면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이후 식량과 비료 공급을 중단했다.
 
  그리고 시장님께서 남북관계에 대한 계획을 언급하신 외신기자회견 보도를 관심 있게 보았다. 「핵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목표에 한국과 미국 등의 국가들이 동참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한다. 그러나 북한의 선군정치적 특성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핵폐기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북핵문제를 위해 한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나?
 
  『한반도에서 핵을 무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남북 통일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어쩌면 북한이 핵을 갖고 있는 동안에 통일은 힘들 것이다. 그래서 동결이 아니고 폐기로 가야 한다. 미국·중국·한국 3者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면 나는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金正日에게 핵을 포기하는 것이 핵을 가지는 것보다 북한에 더 낫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나는 기업에 있을 때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을 만난 일이 있다. 그때 미국이 리비아에 대해 경제 봉쇄했다. 결국 영국의 협상 역할에 힘입어 리비아가 핵을 포기하고 개방했다. 우리도 金正日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고 동시에 북한을 개방할 수 있도록 목표를 삼는 것이 좋다』
 
 
  [2007. 2. 12] 경북도당간담회
 
  이회창은 검증 부족이 아니라 공작과 음모 때문에 패배했다
 
  『당이 화목해야 된다, 단합해야 한다는 것은 저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이 이회창 후보를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진 것 같은 착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흠이 있는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착각했어요. 김대업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2000만원을 다방에서 받았다」 이렇게 했고, 「이회창 후보가 미국 갈 때 20만 달러를 받았다」고 열린당의 설훈 의원이 주장을 했습니다. 또 무슨 가양건설로부터 돈을 몇십 억을 받았다, 이 4가지 사항이 선거가 끝나고 보니까 이것은 모두 공작이었습니다. 음모이고 공작이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했던 설훈 의원도 구속이 되었고, 그렇게 말했던 김대업도 구속이 되었고 모두가 다 구속되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회창 후보를 검증을 제대로 안 한 것이 아니고, 완벽한 후보를 우리가 지켜 주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의 방송과 언론과 모든 것이 공작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한나라당 의원, 한나라당 당원들조차 「이게 무슨 문제가 있지 않을까」 계속 떠드니까, 계속 반복해서 떠드니까 「이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의 후보를 철석같이 믿고, 그런 공작을 미처 막지 못했던 저희 당에 아쉽고 방어하지 못했던 후보 자신에게 아쉬움이 있고 그렇습니다.
 
  물론 어떤 후보든 우리가 大選에 승리하기 위해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李明博 후보만 받는 것이 아니고 모든 후보가 받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완벽한 후보를 내겠다는 그런 절차는 밟는 것이 좋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7. 2. 15] 강원도 당원 간담회
 
 
  [2007. 2. 21] 윌리엄 페리 前 美 국방장관 일행 면담
 
  北核-전시작전통제권 이양 수정 여부 검토하겠다
 
  페리: 우리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계기는 미국의 미래가 동북아시아 지역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미국의 안정과 안보는 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안보, 특히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안보에 달려 있다. 이런 안정과 안보를 해칠 수 있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가 북핵이고, 두 번째는 한미동맹의 와해이다.
 
  『미국이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를 도와준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한미관계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맙기 때문에 잘 지내야 한다는 감성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한미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좋고, 미국의 국익에 좋기 때문에 한미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틸럴리: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문제는 청사진이 있어야 하고, 시간에 쫓겨서 하면 안 되고, 어떤 조건이 충족되느냐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예를 들어서 북핵문제의 진전 상황과 연계해 고려할 문제다. 한국 정부가 당장 전작권을 환수하더라도 추가비용이 전혀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적지 않은 경제적 부담이 한국에 가해질 수밖에 없다. 한미 양국의 중장기적인 동맹 청사진이 우선 갖춰지고, 그 다음 전작권 이양문제가 논의되는 것이 순서다.
 
  『(전작권 이양 논의는) 장기적인 전략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본다. 한국 정부가 먼저 제안하기도 했고, 미국이 심도 있는 전략적 고려 없이 수용하기도 했다. 한국 국민들은 그러한 점을 우려하고 있다. 앞으로 많은 변수가 놓여 있고, 이를 고려하여 전작권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북한 핵문제, 남북관계의 향방 등에 따라 작통권 이양을 그대로 추진할지, 계획을 수정할지 판단이 설 것이다. 한미 양국은 융통성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양국의 차기 정권이 고려해야 할 것은 작통권 분리를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한미 서로의 안보 이익을 위해 도움이 되는가이다.
 
  당장은 미국이 이라크, 이란 등 中東(중동)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동아시아 문제에 과거나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동북아는 앞으로도 미국에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어야 하니까 힘든 점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막강한 「하드 파워」를 이용하는 것보다 「소프트 파워」를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은 「소프트 파워」가 더 강하지 않은가. 미국이 「소프트 파워」를 잘만 활용하면 「하드 파워」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2007. 2. 21]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출산·건강가정운동 후원의 밤 참석
 
  『저는 딸 셋, 아들 하나 있습니다. 아들 낳기 위해 더 낳은 것은 아니고요. 낳다 보니 넷을 낳았습니다. 제가 자녀 넷을 낳을 때는 둘 이상 셋째 부터는 의료보험도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불과 10년 전 이야기인데, 10년 지난 뒤 아이 모자라서 많이 낳자고 합니다. 한치 앞도 못 내다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출산 장려하는 일을 여성단체협의회가 주장하는 것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교육을 시키고,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면 누구나 아이를 낳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우고, 학교교육이 어떻게 하면 사교육비가 적게 들고, 행복한 나라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이도 말고 적게도 말고 둘셋씩 낳으라고 했는데 우리 딸들은 둘씩 다 낳았습니다. 여섯이 되었습니다. 졸망졸망 말도 못 하는 손자 손녀를 딸 셋이 둘씩 낳았는데, 이제 둘을 달성했으니 하나씩 더 낳으면 어떨까 설득하려고 합니다. 저 자신 모범을 보이면서 장려하려고 합니다. 앞장서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2007. 2. 22] 전국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 2007 정기총회
 
  『지난 4년간 중앙정부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려면 중앙정부는 권한과 사람을 넘겨주고 작아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 공무원이 늘어나서 1년에 약 5조원 가까운 임금이 더 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4년간 지방자치 한다고 하면서 중앙정부 조직은 말할 수 없이 커져버렸습니다. 아마 다음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지방자치를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7. 2. 26] 한나라당 사무처 격려 방문
 
 
  [2007. 2. 27] 통섭정경연구원 창립식 참석
 
  웃으면서 눈을 크게 뜰 재주는 없습니다
 
  『어디 행사에 가면 저를 보고 자꾸 웃으라고 해요. 웃으면 또 한쪽에서는 눈 좀 크게 뜨라고 난리예요. 웃으면서 눈 크게 뜰 재주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밖에 못 할 재주밖에 없는데 사람들은 둘을 요구합니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할 수 없지만 하나씩 하고 부족한 것은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하면 되지 않겠는가.…
 
  서울시장으로서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하지만 저의 힘은 10% 정도이고 90%는 함께 한 공직자, 협조한 시민, 이해당사자들이 반대하는 데 협조해 주신 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청계천 복원할 때 22만 명이 결사반대하는데 야당시장이 힘도 없고 해서 설득하는 데 4000번 정도 만나니까 반대자도 찬성자로 돌아서더라구요. 결국은 많은 사람들의 힘에 의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혼자 힘으로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통섭」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썼지만 그 뜻은 간단한 것 같습니다. 각자 개성을 살리면서 모두 힘을 모아서 서로 부족한 것은 남이 메워 주고 강점을 빌려쓰고 하면 국민이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이만섭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현승일, 우리 친구가 하는 일은 뭐든지 옳다고 생각해서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 나가겠다고 생각합니다. 참여해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07. 2. 28] 청계천상인들과의 오찬 대화
 
  청계천에 많은 물이 흘러도 상인들 장사가 안 되면 안 돼
 
  『오랜만이네… 반가운 얼굴이 많구만…』
 
  상인: 더 미남 되셨습니다
 
  『오늘은 넥타이 매고 멀쩡하게 왔네… 허허』
 
  상인: 시장님 뵙는다고 양복 빌려입고 왔습니다.
 
  『여기가 그 때 왔던 그 집이지』
 
  상인: 그 집입니다 세 번째입니다. 머리도 많이 길었습니다.
 
  (청계천 상인들은 청계천 복원에 반대하면서 삭발 투쟁을 했었다)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상인: 시장님 덕분에 머리 한번 시원하게 깎아 봤습니다. 사실 강하게 반대했지만 저희들도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엔 원망을 많이했는데 지금은 옛날에 저희가 한 행위들을 많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지. 아무리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흘러도 상인들이 장사가 안 되면 안 되지』
 
  상인: 저희가 반대했던 이유는 그 전의 사람들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빨리 못 끝내고 하다가 떠나면 이러다 청계천 상권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국책사업이 그동안 그랬어요. 한다고 해 놓고 안 되거나 시간 끌고… 나도 사실 그게 걱정이었어요』
 
  상인: 믿음을 줬기 때문에 우리도 협조한 거죠. 제일 반대했던 사람으로서 세 가지가 생각납니다. 「끈질긴 설득력」, 「넓은 포용력」, 「하겠다는 강한 신념」, 이 세 가지가 시장님에게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 덕으로 상인들끼리 친해졌고, 그러다보니 행정적 지원이 있을 때 우리도 발전한다는 가교를 세워 주셔서 사실 존경합니다. 처음에는 심하게 반대했는데 떠나시고 나니까 뵙고 싶고 해서 한번 모시자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서울시 떠난 뒤에 노조 간부들이 감사패를 들고 왔더라구요. 또 환경미화원들이 25개 구청 노조위원장들이 다 모여서 감사패를 얼마나 크게 만들었는지…. 청계천 공사할 때는 공사 중에도 소리 나고 하면 안 되니까 다이아몬드소어 공법을 가져와서 소리를 좀 덜 나게 하고 먼지 덜 나게, 옛날 브레이크 들이대고 지하철 하듯이 하면 엉망이지』
 
  상인: 시골에 가면 제일 뿌듯한 게, 고향 어르신들이 「구경 좀 시켜 달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관심이 더 많더라구요.
 
  상인: 밤에 오면 놀라더라구요. 야경이 정말 섬세하게 잘 되어서 프랑스에서 온 조각가를 데리고 갔더니 「정말 잘 되었다. 이렇게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 하더라구요.
 
2007년 3월2일 제주 민속5일장에서.

 
  [2007. 3. 5] 보은·옥천·영동 당원협의회 당직자 간담회
 
  40일간 군화를 못 벗고 당재 터널을 뚫었습니다
 
  『오늘 옥천·보은·영동 둘러보니까, 정말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조금 전 사회자가 말했듯이, 20代 초반 어린 나이에 제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와서,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늦게 대학에 들어가고, 사실은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서 그 당시에 정주영 회장이 경영했던 작은 건설회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종업원이 98명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대학생을 뽑는데 제가, 다른 운동권 학생들이 전부 정치로 갈 때 저는 기업으로 가겠다고 해서 현대건설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중앙정보부에서 못 가게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저의 편지를 받아보고, 「그 학생 일하게 해 주고 일 하는 동안에 나쁜 짓하는지 좋은 짓 하는지 정보부가 잘 지켜보면 될 거 아니냐」고 지시해 현대건설에 입사했습니다. 현대건설에 들어가자마자 외국 가서 일했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했습니다. 이쪽 옥천 구간에 와서 당재 터널을 만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때 함께 일했던 많은 분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준공날짜를 맞추기 위해서 함께 일했던 직원, 간부들이 40일간 신발을 벗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입은 옷 그대로 군화를 40일간 벗지 못하고 입은 채로 신은 채로 잠을 자고, 한 2~3시간 자면서 무너지면 또 뚫고 무너지면 또 뚫고. 사람이 죽고 하는, 정말 영원히 잊지 못할 난공사 구간, 그때를 생각합니다. 40일 만에 일을 끝내고 신발을 벗었을 때 발이 허옇게 팅팅 불어서 갈라졌습니다. 죽은 사람 물에서 건졌을 때 보듯이 이게 내 다리인가 싶더라구요.
 
  그렇게 해서 이 나라가 산업화되었습니다. 옥천에 올 때마다 당재 터널을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합니다. 그런 시대가 있어서 오늘날 이만큼 나라가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던 현대건설이 커져 자동차·조선이 생겨서 세계적인 그룹이 되고, 98명이던 회사가 제가 나올 때 16만8000명의 종업원으로 발전했습니다』
 
 
  [2007. 3. 5] 진천·음성·괴산·증평지구 당원간담회
 
  盧대통령은 말로써 세월을 보냈고 빚만 태산같이 만들었습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에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고 실천하는 정치가 구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盧武鉉 정권이 「농촌을 잘되게 만든다」고 해 놓고 잘 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서민을 잘살게 한다」고 했지만 결국 잘살게 하지 못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은 풍성했습니다.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서민은, 농촌은 점점 더 못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딸기밭에 갔는데 성공적으로 가꾸어서 고소득을 올리는 농촌도 있지만 대부분 빚만 늘어나고, 나라는 나라대로 돈을 쓰고, 개인은 개인대로 빚이 늘어나는 그런 정책을 썼습니다. 차기 정권에는 정말 서민이 잘사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말만이 아니고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살아야 농촌이 살고 서민이 살고 일자리가 생기는데, 경제가 아무나 한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경제는 말로 살리는 게 아닙니다. 아마 말로 살린다고 했으면 盧武鉉 대통령이 가장 잘 살렸을 거예요. 盧武鉉 대통령은 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말로써 세월을 보냈고 빚만 태산같이 만들었습니다.
 
  국민이 걱정하는 대로 우리 당은 절대 깨어지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결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뒤져서 「검증을 하자, 뭘 하자」 하더라도 저는 검증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라도 검증을 받고 당당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검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내가 검증을 요구하고, 상대는 나를 검증하고, 이러다 보면 당은 싸우고 깨어집니다. 국민은 태산 같은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검증은 저 하나만 받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아 당이 화합하는 기여할 것이고, 상대가 뭐라고 하더라도 참고 견뎌서 부딪쳐 소리나지 않도록, 웃으면서 답변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당이 절대 깨어지지 않는다. 한나라당 후보가 모두 훌륭하기 때문에 당을 깨고 나갈 후보는 아무도 없다」 저는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2007. 3. 8] 국책자문위원회 대선필승대회 및 정책 세미나
 
 
  [2007. 3. 8] 한나라당 전남당직자와의 간담회
 
  저는 말을 하려고 나온 게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하려고 나왔습니다
 
  『저는 대학 다닐 때 「군사정권,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학생운동을 했었습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할 때 「돈 몇 푼 받고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인 평가를 하고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고 국교를 열어야 한다」는 반대 운동을 하다가 교도소 생활도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친구들이 기성 정치인을 따라가 함께 정치할 때 저는 일자리를 찾아갔습니다. 정주영 회장이라는 걸출한 기업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90여 명 회사가 종업원이 천 명, 만 명, 십만 명 되는 그때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일자리가 소원이었고, 월급받고 출퇴근하는 일자리를 구하고 싶다는 저의 소원을 이루고, 많은 사람의 보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일의 한가운데서 일했습니다. 온세계를 다니며 배우고 경쟁하며 세계 방방곡곡, 열사의 사막에서 동토의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동남아에서 구라파에서 미국에서 온 세계 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공한 세계적인 모범국가가 되었습니다.
 
  어떤 정책도 경제 살리기보다 더 중요한 정책은 지금 없습니다. 지역적 통합이 되지 못하고 지역적 차이가 다소간 있습니다. 그러나 호남이 잘 살면 다 극복할 수 있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잘사는데, 호남에서 아이를 교육시키고 문화생활할 수 있다면 무슨 지역감정이 있겠습니까. 지역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래서 경제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경제가 잘 되는 것은 지역경제가 잘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제를 아무나 말로 살릴 수 있습니까? 「일자리 만들어야 한다」, 「통합시켜야 한다」,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말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로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실천할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아무리 꿈이 좋아도 현실화할 수 없으면 백일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밤새도록 기와집 지었다 말았다 밤새도록 꿈을 꾸었는데 그것은 꿈이 됩니다. 저는 말을 하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행동하고 실천하려고 나왔습니다』
 
 
  [2007. 3. 13] 李明博 출판기념회
 
  가난과 어머니가 내 인생의 소중한 스승
 
2007년 3월13일 출판기념회에서 어머니 관련 글과 사진들을 살펴보는 李明博 당선자.

  『오늘 이 자리는 제 책의 출판을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어머니」와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두 권의 책을 내어 놓았습니다.
 
  「어머니」는 바로 제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제 가슴속 깊은 곳에 간직해 온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는 잘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들의 일생을 지탱시켜 온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은 저의 정책 탐사 이야기입니다. 현장에서 확인하고 다듬은 저의 생각입니다. 이 땅 구석구석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약속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두 권의 책을 여러분 앞에 내어놨습니다. 솔직한 모습이고 꾸밈없는 생각으로 적었습니다. 부끄러움도 자랑도 아닌, 우리 모두의 희망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난을 부끄러워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어렵더라도 남을 도와야 한다」고 늘 어머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제 인생에 있어서 가난과 어머니는 저의 가장 소중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희망과 사랑과, 바른 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고난의 한가운데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절망의 벼랑 끝에서 다시 희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땅의 어머니들께 약속을 드립니다. 당신들의 자식과 그 자식들의 자식을 위하여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현장에서 살아 왔습니다. 현장은 땀 흘려 일하는 진실한 곳입니다. 춥고 바람 불고 비오지만, 서로 믿고 돕고 함께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꿈꾸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의 현장은 가난한 시골 바닷가였습니다. 일을 찾아 헤맨 길거리였고, 고된 작업장이었습니다. 기업과 함께 한 산업 현장이었고, 세계의 시장이었습니다. 또한 국회였고, 서울특별시였습니다.
 
  제 삶의 현장에서 만난 많은 분들을 기억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사는 분들, 제게 실용의 가치와 포용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저를 야간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도록 주선해 주신 중학교 선생님, 노동자 시절, 대학 시험 공부하라고 책을 주신 청계천 헌책방 주인 아저씨, 대학 다닐 수 있게 환경미화원으로 고용해 주신 이태원의 재래 시장 상인들, 모두 고맙습니다. 당신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겠습니다.
 
  제 인생 자체가 현장에서 길을 찾아온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현장은 대한민국號입니다. 바른 항로를 찾아내고 쾌속 항진하기 위한 길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그 길은 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문명의 장벽을 넘어서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 역사의 고비를 넘어서 미래로 가는 길, 선진 통일 국가로 가는 길입니다.
 
  대립과 갈등의 길이 아니라, 화합과 상생의 길입니다. 간섭과 규제의 길이 아니라, 법치에 기초한 자율의 길입니다. 닫힌 고립주의가 아니라, 열린 글로벌리즘의 길입니다. 그 길을 찾아 내겠습니다.
 
  「이대로 가면 4~6년 내에 큰 혼란이 온다」는 최근에 경륜 있는 한 기업인이 한국 경제를 향해 던진 경고의 말입니다. 정말 이대로는 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고 유능한 선장을 찾아야 합니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야 합니다. 낡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서 정치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실용을 중시하고 시장이 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잘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투자의욕을 꺾으니 일자리가 줄어들고, 경기가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편 갈라 다투면서 생산성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신뢰감이나 자신감이 사라지고, 투자는 점점 위축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투자하고 일할 의욕을 살려내야 합니다. 「기본은 국가가 책임질 테니, 개인과 기업은 마음껏 뛰어라!」 리더는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7% 성장, 4만 달러 시대, 7대 경제 강국은 우리의 꿈이자 목표입니다.
 
  「747」을 우리 경제 10년의 목표로 삼아서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2007. 3. 14] 문경·예천 당원 간담회
 
  앞으로 별 일이 다 있을 겁니다
 
  『제 이름이 원래 족보에 이상경으로 되어 있어요. 어머니가 꿈에 보름달을 치마에 안았는데 밝았다고 해서, 밝을 「명」 넓을 「박」이라고 했는데 얼마전에 인터넷을 보니까 명치유신의 「명」과 이등박문의 「박」을 붙여서 명박이라고 했다고 주장했어요. 조금 있더니 그래서 「이명박의 어머니는 일본 여자다」. 이렇게 나오더라구요. 우리 어머니가 대구 반야월 출신인데, 그렇게 나오더라구요.
 
  우리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면 내가 참지 못하거든요. 가난했지만 정말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운 어머니인데, 어머니 욕되게 하는 것은 참지 못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명박 아버지는 조총련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걸 보면서 참 정치라는 것을 이렇게 하는구나, 정치가 발전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 있다. 끌어내리기 작전, 서로 경쟁해서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고 끌어내리기만 해요. 「낙동강, 한강 연결한다」고 하고, 「호남 운하 만든다」고 하면, 「이런 문제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봐야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내 놓고 실망입니다. 대운하 주변은 IT나 문화 단지가 들어와서 벨트로 죽 연결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안 된다. 되지도 않을 것을 한다」고 비판해요. 앞으로도 별일이 다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은 정치보다 더 앞서나가고 있기 때문에 다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보고 꿋꿋이 나갈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문경·예천 당직자 여러분께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미래를 향해 가야 하고, 「과거는 어려웠지만 미래는 잘 살아야겠다」, 「우리 자식들은 잘 살아야겠다」, 「우리 꿈을 이루기 위해 이번 선거에서 이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정권을 잡은 다음에 꼭 국민이 원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정권만 잡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金大中·盧武鉉이 정권 잡았지만, 정권 잡으면 잡은 사람 목표는 달성되었지만, 국민의 목표는 된 게 없다. 정권을 잡는 것과 더불어 국민을 향해 국민이 바라는 것을 달성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봅니다』
 
 
  [2007. 3. 15] 군위·의성·청송 방문
 
  『제가 요즘 전국을 많이 다녀봅니다. 농촌이 참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지어 가지고 아이를 키워 가지고 대학을 보내고, 힘들게 사는데, 대학을 나와 봤자 요즘 또 일자리를 제대로 구할 수 없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참 어렵죠. 제 고향이 포항 영일군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농사를 짓던 분이시니까, 삼형제가 농사를 짓다가 너무 농토는 적고 셋이 하기 힘드니까 아버지는 포항에 나와서 일을 하셨고, 저희 어머니는 대구 옆에 반야월, 지금은 대구시가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반야월이 경산 쪽인데, 어머니 고향이 그 쪽이십니다. 저는 포항에서 야간상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길에 앉아서 좌판에서 장사를 하고 살았습니다.
 
  야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좌판에 앉아서 장사하는 게 도저히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그냥 간다는 게 서울로, 정말 낯선 곳에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 올라가서 살았습니다. 가서 뭘 하겠습니까.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달동네 무허가 판자촌에 가서 방을 얻어 가지고, 거기는 경상도·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방 하나에 몇 사람씩 낯선 사람들끼리 들어가 방값을 나눠 살 때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공사현장에 가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처절한 가난 속에서 어려운 가정에 살면서, 저희 아버님·어머님이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어 하시던 모습, 나 자신이 객지에 나와서 정말 낯선 곳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살면서, 그래도 사람들의 도움으로 서울에 살면서 제가 대학도 갈 수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저를 환경미화원으로 써주었습니다. 그때는 청소원이었는데 이름이 바뀌었어요.
 
  시장이 열리기 전에 쓰레기를 리어카에 실어다가 새벽에 시장이 열리기 전에 갖다 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하루에 세 탕, 명절 때는 많아서 7탕, 8탕 버리면서 그 어려운, 재래시장 상인들이 저를 도와주어 4년간 대학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소망을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왜 그 쪽에 사는 사람은 잘 살고 우리는 못 살까, 저는 무허가 판자촌에 살 때 왜 「저 사람들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살까」, 「저 사람들은 학교 다니는데 왜 나는 못 다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다 잘 사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게 첫 번째 소원이고, 두 번째 소원은 「우리가 좀 따뜻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 잘 살고 따뜻한 사회가 되면 우리나라가 비록 조그만 나라지만 경제가 잘 되어서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 저는 이렇게 경제대국을 만드는 게 소원입니다.
 
  우리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하는데, 우리 한나라당이 지금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했듯이 뭡니까. 한나라당은 정권을 교체해야 하고 그러려면 후보가 된 사람은 모두가 다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고 해야 합니다. 우리 박근혜 前 대표도 당이 어려울 때 당을 살린 훌륭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 손학규 前 지사도 경기도 지사하면서 매우 성공적으로 일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가 뜻을 모아가지고 정말 아름다운 경선을 통해 후보를 뽑고, 후보가 되면 다른 사람은 적극적으로 밀어서, 우리 국민들이 기대하는 정권교체를 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우리는 다소 과열되어서 조금 뭐하지만, 그러나 우리 한나라당 당직자 여러분이 중심을 잡아 줘야 합니다.
 
  제가 포항에 살 때 우리 옆집에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옆집에 거지가 산 게 아니라, 단칸방에 칸을 막아 놓고 여기는 우리가 살고 칸막이 옆에는 거지가 살았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지만, 저희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아이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고 새 옷 한번 입혀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옆집의 거지는 매일 아침 밥을 먹더라구요. 깡통 차고 휙 돌아오면 밥을 얻어오더라구요. 나하고 동갑인 거지 친구는 밥을 먹을 때마다 문을 열어놓고 먹었어요. 나는 밥도 못 먹는데. 나는 그 놈이 부자인 줄 알았어요.
 
  제가 40년 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나이 60이 다 되어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거지같이 살아요. 그 친구가 나를 붙들고 눈물 흘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뭔지 아십니까. 「어렸을 때 우리 부모는 배가 고프면 깡통 들고 얻어 먹였고, 옷이 없으면 옷을 얻어다 입혔다. 당신 부모는 열심히 살면서 못 벌면 굶고, 벌면 번 만큼 죽을 끓여 먹이고, 옷이 없으면 꿰매 입혔다. 우리는 얻어 먹이는 것으로 키웠고, 당신네 부모는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런 부모 밑에 자란 너희는 오늘날 다 부자가 되고, 우리는 아직도 그렇게 산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이기는 법, 서러움을 이기는 법, 약속을 지키는 법, 이것을 우리 부모로부터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저는 이 나라를 진정한 부자의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다 잘 사는 사회, 왜 저 사람은 잘 사는데 나는 못 사나, 왜 저 사람은 학교 가는데 왜 우리 집 자식은 공부 못 시키나. 이런 서러움이 없는 나라, 모두가 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이 꿈을 이뤄보자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편견을 버려야 돼요. 누구는 사돈의 팔촌이고, 나는 사촌이고, 동창이고, 고향사람이고 이런 생각을 가지고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건질 수 없습니다』
 
 
  [2007. 3. 15] 경북도당 영천시 당원협의회 주요당직자 간담회
 
  『제가 포항에서 동지상고 야간을 다닐 때인데 그 학교에서 대학에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대학 가는 사람이 없으니까 제가 전교 수석을 했어요. 왜 수석을 한 줄 알아요?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고 모두 공부를 안 해요. 대학 갈 사람 없으니까, 1등 해도 일자리가 없으니까, 하나마나니까 안 하는데, 나는 등록금 면제 받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야간학교 다닐 때 제가 참 뭐 하겠어요. 낮에 뭐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는 국화빵 굽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야간학교 다닐 때 둘이서 구우면 수입이 적으니까 별도로 하라고 해가지고, 포항여고 들어가는 입구 코너에서 뻥튀기 장사를 했어요. 어머니와 자식하고 둘 다 빵 굽는다고 하면 남 보기 뭐하니까 좀 다른 거 하라고 뻥튀기 장사 시킨 것 같아요. 커서 생각하니 그래요.
 
  모자 간에 빵 굽는다고 하면 소문이 어떻게 나겠어요. 뻥튀기 장사를 여학교 앞에서 했어요. 얼마나 부끄러웠겠어요. 그래도 그 자리가 좋다고 생각해서 시킨 것 같아요. 고향이 가까우니까 이야기하는 거예요. 창피하지만 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밀짚모자 만드는 데 가서 챙이 큰 모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이걸 눌러쓰면 여학생들이 못 쳐다볼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생각 끝에, 뻥튀기 장사하다가 여학생들이 등교할 때 숨어 있죠. 오후에는 계속 숨어 있으니까 장사가 돼요? 그래서 밀짚모자를 쓴 거예요. 일부러 주문해서, 그걸 눌러쓰고 있으면 얼굴을 못 보니까 계속할 수 있는 거예요. 사실 내 얼굴 쳐다보는 여학생은 없었어요.
 
  그런데도 그렇게 부끄럽더라구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까 손님이 왔는지 안 왔는지 그걸 몰라요. 여러분 그 심정 알겠어요? 어느 날 아침에 머리를 누가 주먹으로 콱 쥐어박는 거예요. 깜짝 놀라 일어섰더니 우리 엄마가 와 있더라구요.
 
  이때쯤 되면 자리가 잡혔나 싶어서 빵 굽던 것을 중지해 놓고 날 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자기 엄마가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르고 계속 고개 숙이고 있으니까 화가 난 거예요. 나를 쳐다보더니 하시는 말씀이 「니가 장사를 하려면 물건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눈을 마주해야지, 손님이 왔는지 갔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장사를 하느냐」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 말에 승복하겠더라구요.
 
  그런데 그 다음 말이 무섭게, 딱 눈을 요즘 애들 말로 꼴쳐 보시더니 제 가슴에 손을 대면서 「얘야, 니가 왜 부끄러워 하느냐. 자기가 살려고 남들은 속이기도 하고 구걸도 하고 사기도 치는데 너는 그렇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데, 니가 왜 부끄러워하느냐. 너는 당당해야 한다」고 「니가 노력해서 니가 살아가는데 왜 부끄러워 하느냐」고, 어머니가 막내아들 뻥튀기 장사시켜 놓고 그렇게 큰 소리 할 입장도 아닌데 , 웬만한 어머니 같으면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제 꼬락서니 보면서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어머니는 돌아서서 혼자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자식 앞에서는 엄격하게 하신 거예요. 저는 그렇게 자랐습니다. 그때는 그 어머니 말이 옳은지 그른지 고사하고 누가 듣나 싶어 부끄러워하고 그랬습니다.
 
  학교 졸업하자마자 수석 졸업생이, 말하자면 주·야간 통틀어 전교 수석인데 졸업식도 안 하고 서울로 도망가 버렸어요. 교장선생님이 「수석한 사람이 있어야 재단이사장 상을 받는다」고 하셔서 「졸업식 때 오겠다」고 처음으로 거짓말하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2등 한 학생한테 대신 받으라고 말하고 계속 길에 앉아 장사하는 꼬락서니가 창피해서 서울로 갔어요. 서울에 오면 누가 있어요. 서울 가면 덜 부끄러울 거라 싶어 간 거예요. 뭘 해도 먹고 살 거라고 간 거예요. 대구에 가려고 사실 마음먹었는데 대구만 가도 아는 사람 있을 것 같아서 서울로 바로 가버렸어요. 눈물이 범벅이 되어서 3등 기차 타고 갈 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떻게 갈 수 있었는지 용해요. 그래서 간 곳이 서울 달동네였어요.
 
  갈 데가 어디 있어요. 산비탈 달동네 무허가 판자촌에 들어가서 결국은 경상도·전라도에서 올라온 낯선 사람들끼리 방을 얻어 사는 거예요. 거기서 뭘 했겠어요. 인력시장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 가서 줄을 서 있으면 현장 공사판에 필요한 잡부들을 데려가는데, 거기 못 따라가면 공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집세는 올라가죠. 한 달에 열흘도 일 못 하니 수입이 별로 없죠. 달동네에서 다른 달동네 험한 데로 옮겨다니는 거예요. 그렇게 살 때 내 소망이 뭔가. 다른 게 없어요. 대단한 소망이 아니었어요.
 
  매일 새벽 5시에 나가면 「오늘 공칠까 안 칠까」, 이게 불안한 거예요. 일할 수 있을까, 없을까. 일당을 벌까, 못 벌까. 그때 소원이 「월급이 아무리 적더라도 한 달 일하고 월급받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출퇴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게 소망이었어요. 일자리가 소망이었어요.
 
  월급받는 일자리, 아침에 눈만 뜨면 출근할 수 있는 것, 이게 소망이었어요. 그것만 있으면 나는 행복해질 것 같았어요. 수없이 죽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견디고 참아 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래요. 「니가 야간학교 졸업해서는 월급쟁이 일자리는 절대 못 얻는다. 대학 다니면서 중퇴라도 해야 일자리 얻는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결심했어요. 내 친구들은 모두 대학 다니고 있는데 늦게… 청계천 가보신 분이 있나요?
 
  옛날 청계천 지저분할 때 헌책 파는 고물상이 있어서 거기 가면 싸게 책을 구할 수 있다고, 거기 가서 대학 가는 책을 주섬주섬 얻어다가… 그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 거기서 헌책 얻어다가 공부해서 될 것 같지 않으니까. 내가 살던 합숙소 그 아래 웬만큼 잘 사는 동네에 할머니 한 분이 계셨어요. 그 할머니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안동과 포항이 거리가 먼데, 그때만 해도 경북이라고 하면 다 고향사람이라고 했어요. 안동할머니가 맨날 산보 가다가 그 달동네 지나가다가 「고향학생, 고향학생」 하면서, 그래도 공부할 놈은 제대로 하라고 해서 용기를 주고 해서 고려大 경영학과에 합격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합격을 했어요. 합격하고 나니까 입학금을 구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태원 많이 들어보셨죠? 옛날은 미군부대 있고, 외곽의 한 데였습니다. 거기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재래시장 상인들이 제가 입학금 없어 학교 못 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 분들이 청소부 일자리를 줬어요. 요즘 말하면 환경미화원이에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시장 열리기 전에 쓰레기 치워서 한강변에 버리는 거예요. 하루에 세 탕 네 탕… 명절 때 되면 왜 이렇게 쓰레기가 많은지, 그래도 그 덕분에 4년간, 그 분들이 일자리 줬고, 등록금 모자라면 보태줘서 대학 4년을 다닐 수 있었거든요.
 
  요즘 어떤지 알아요? 이명박이의 애가 여기저기 있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장난이 아니에요 나중에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왜 있다 있다 하느냐 좀 데리고 와라. 아무개 어디 산다 하면 되는데 계속 있다 있다. 재산이 많다. 재산 많았으면 좋겠어요. 많으면 좀 많이 나눠 주겠어요.
 
  내가 정치판에서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내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군대를 갔는데 전방으로 보냈어요, 26개월 만기제대하고 나왔는데, 요즘 우리 아이가 군대 안 갔다고, 우리 당의 부산 국회의원이 나를 찾아와서 그래요. 「아이고 지금이라도 보내야지 큰일났다. 이회창씨 아들 봐라」 그래요. 그래서 내가 「군대 또 보내나」 그런데 아직도 (인터넷에) 떠 있습니다. 「이명박 아들 군대 안 갔다」고.
 
  이런 정치판에서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가난한 시절에 노동판에 살면서 한강변에 빠져죽고 싶었던 그런 심정보다 지금이 낫잖아요』
 
 
  [2007. 3. 16] 한나라당 횡성·홍천 주요당직자 간담회
 
  『제가 사실은 드라마에 두 번 나왔습니다. 현대건설에 회장으로 있을 때 「야망의 세월」이라는 kbs 주말 드라마로 한 1년 방영됐습니다. 제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겁니다. 유인촌씨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집사람은 전인화, 내가 좋아했던 여자친구로는 황신혜가 나왔습니다. 제가 집사람과 결혼하고 나서는 그 여자친구를 한 번도 안 만났어요.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계속 만나는 것으로 나오더라구요. 그것 하나만 사실과 달랐어요.
 
  사람들이 그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집 사람에게 전화를 했어요. 아주 부지런한 것 같아요. 결혼 후 여자친구를 만나는 장면만 나오면 밤중에 전화해서 「사모님, 참 머리 아프시겠습니다」 한다는 거예요. 우리 집사람이 전화 오면 「아닙니다. 그 여자 만나는 게 아니고, 드라마니까 그렇습니다」 계속 그렇게 설명했답니다.
 
  저는 밖에서 일하느라 드라마를 못 봤죠. 제가 어느 토요일에 밤 11시 넘어 집에 들어갔더니, 우리 집사람이 뾰로통해서 방에서 나오지도 않더라구요. 그 다음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데 밥 준비도 안 하고 있더라구요.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죠. 전날 밤 「야망의 세월」에서 유인촌이 또 황신혜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답니다. 집 사람이 그걸 보고 제가 여자친구를 만나고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었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인데.
 
  요즘엔 mbc에서 「영웅시대」라는 드라마가 나왔습니다. mbc에서 하다가 중간에 끊어버렸습니다. 유동근씨가 제 역으로 나왔습니다. 유동근씨는 그 역을 하려고 15kg을 뺐다고 해요. 옛날 KBS서 할 때 부인인 전인화씨가 나와서 이번엔 자기가 꼭 하려고. 그 두 드라마덕에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친숙하게 느낍니다. 특히 우리 교민들은 비디오로 다 봐서 외국 가면 제가 더 유명해요. 저는 정말 드라마같이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대단하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새벽 1시에 개표가 끝나고 당일날 새벽 재래시장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새벽같이 청소원 옷 입고 나와서 같이 치우자고 했더니 이 분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같이 청소 끝내고 전부 해장국을 먹는데 내 사정을 모르죠. 어느 80대 후반의 할아버지 한 분이 식사하는데 뛰어들어 왔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시장에서 일하던 그 젊은이 아니냐」 하면서, 아마 거기 있을 때 시장에서 가게를 보시던 분이었던 것 같아요.
 
  내 이름을 기억해서 출마한 사람이 맞는지 긴가민가 하다가 뛰어나와서 얼굴을 보더니 「그때 그 얼굴」이라고 하세요. 아마 눈이 작아서 알아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많은 청소원들 앞에 제가 환경미화원을 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폭로가 되었습니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해도 되겠죠. 제가 서울시장이 되어서 첫달 봉급부터 환경미화원을 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의 아이들을 위한 기금으로 보냈습니다. 자동으로 이체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왜 그랬느냐면 제가 그 당시 청소할 때는 반짝이 옷이 없었어요. 반사되는 옷이 없었어요. 그래서 자동차가 달리다가 가까이 와야 사람을 알아보는 거예요. 그래서 들이받아 사고 나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아무도 모르게 월급을 보냈는데 나중에 기자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제가 먹고 살 것은 있기 때문에 봉급을 4년간 돌려 줬습니다.
 
  제가 서울시 환경미화원의 代父(대부)입니다. 환경미화원 노조가 파업하더라도 내가 「전부 돌아가세요」 하면 다 돌아갔습니다. 제 말이라면…. 나중에 내가 서울시를 떠난 다음에 그 기금이 어디서 왔다는 것을 알고 감사패를 가지고 왔습니다.
 
  가난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도 지도자를 잘 만나면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가난한 가정이지만 아버지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정직하게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격려를 보내는 그 가정은 희망이 있는 것이죠.
 
  家長(가장)이 술이나 먹고 행패나 부리면 미래가 없어지는거죠. 좋은 아버지 만난다? 좋은 기업인을 만난다? 좋은 총장·좋은 지도자를 만난다? 이것으로 가난이나 어려움을 벗을 수 있고 어떠한 것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원도가 어렵다? 거지같이 살았던 그런 나라가 밥 먹고 입는 걱정을 벗어났습니다. 이만큼 된 것도 우리나라에 한때 「하면 된다.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그런 지도자를 만났다면 지금쯤 국민소득이 3만 달러, 4만 달러 되는 나라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07. 3. 23] 마산지구당 간담회
 
2006년 12월 풀빵을 굽고 있는 李明博 당선자.

  『아침에 김해에 갔었는데 요즘 지역을 다녀보니까 어떤 데 가면 전부 반가운 표정을 짓는데 어떤 곳은 눈도 못 마주치고 어색한 분들이 있는데, 왜그런가 했더니 위원장한테 달렸더라구요. 위원장이 반갑게 대하면 반갑고, 위원장이 서먹하면 서먹한 것 같아요. 우리 위원장은 누구 편이고 어느 편에 섰고, 요즘 말하는 것을 보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래서 그럴 필요 없다고. 당직자들은 모든 후보대상자들을 반갑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 같은 당이기 때문에, 누가 결정되든 당원 모두 하나되어 앞으로 갈 것인데 너무 어색하고, 원수도 아니잖아요. 전부 한편인데, 그 점에서 우리는 하나다. 모두 다 함께 하고 앞으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때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우리가 대통령을 뽑는데, 기업의 간부 뽑는 것만큼의 기준 없이 뽑을 수 있겠습니까. 큰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 엄격해요. 사장의 사돈의 8촌이다, 친구 아들, 젊을 때 신세진 사람 아들이다, 이렇게 뽑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렇게 하는 회사는 크는 것을 못 봤어요. 세계적 기업이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이 뭐냐. 시험을 치든 면접하든 이름은 다 가리는 거예요. 사람 보고 면접해서 뽑으면, 이 사람 좋다고 해서 뽑으면 나중에 이름이 나오는 거예요.
 
  엄격하게 신입사원·간부사원을 뽑기 시작하면서, 삼성그룹이 나오고 LG가 나오고 발전한 거예요. 하물며 대통령을 뽑는데 그 전의 관계, 누구하고 친하다, 어느 후보의 부인하고 나하고 동창이다, 누구의 친구다, 이런 식으로 해서 인연을 맺어가지고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다고 하면, 중소기업 간부 뽑는 것보다 더 못한 선택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2007. 3. 23] 마산 향교 방문
 
  李 前 시장은 마산향교를 방문해, 전시실을 둘러보고, 대성전에 들러 문묘에 제배(고개숙여 깊이 인사)한 뒤, 명륜당에서 사자 성어를 붓으로 썼다.
 
  먼저 방명록에 「修己以安人」이라고 쓰고 『예절을 지켜서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글을 적었으며, 이어 붓으로 한지에 「修己安人」을 쓴 뒤 『논어에 나오는 말씀으로 나를 잘 수양하고 되돌아보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2007. 3. 29] 전북당직자 정책간담회
 
  서울시 5兆 빚 가운데 3兆를 갚았습니다
 
  『새만금 하나도 된 게 없어요. 8000억원이면 될 새만금을 지금 2조원 투자하고도 앞으로 더 들어가야 해요. 그 돈을 전북 발전에 썼으면 어떻게 됐겠어요? 10년 늦어진 바람에 돈이 당초 계획보다 2조원 더 들어가야 해요. 10년 늦어지니까 전북도 발전이 늦어지는 것이죠. 지금 열심히 해도 10년 안에는 전북 도민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지금 상태로 봐서는 걱정이 태산이에요. 물만 막아놨지 허허벌판이에요. 땅도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물이 빠지면 겨우 보일까 말까, 하거든요. 그걸 제대로 땅을 만들어서 거기다 뭘 세워서 도민이 일자리 얻고, 도민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려면, 만일 이런 식으로 하면 앞으로 10년, 20년 지나도 될 게 없을 것 같아요.
 
  도민들께서 「이거 안 되겠다. 李明博 前 서울시장이 하면 어떻게 될까」, 「아이구 한나라당 후보지만, 차라리 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저를 많이 지지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새만금을 제가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하면 할수록 걱정이 태산이에요. 저도 말로만 하면 돼요. 선거 앞두고 「여러분 걱정마세요. 특별법 통과하고 뭐하고 뭐하고」 이렇게 말하면 기분은 좋겠죠. 그러나 저는 이제까지 말하면 틀림없이 약속을 지켰어요. 역대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서 약속한 공약을 100% 수행하고 떠난 사람 저밖에 없어요.
 
  서울시장 할 때 첫 연도에 무엇하고, 연도별 계획을 다 세웠어요. 서울시장 하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가지 않고, 정치부 기자들을 만나지 않고, 3년간 그렇게 할 테니 여러분 나하고 일하자고 했습니다. 3년간 국회의원, 정치부 기자 만난 적 없습니다. 「정치 안 할 거냐」고 했지만 공무원과 약속 지켰습니다. 서울시 5조원 빚을 3조원 갚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빚 줄이고 나간 시장 저밖에 없어요.
 
  여러분 지금 집집마다 2000만원 빚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저는 5조원 중 예산 절감해서 3조원 갚고 나왔습니다. 전임시장이 빚 줄였는데 태산같이 늘릴 배짱 있는 후임 시장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일 안 한 게 아니에요. 약속하면 지켜야 해요. 새만금 갔다 와서 몇 가지 지적했습니다만 이것 이것 되지 않으면 앞으로 10년, 20년 지나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 지사도 깜짝 놀랐어요. 저는 약속하면 지킵니다. 그래서 어디 다니면서 「무엇 하겠습니다」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새 저는 「전북·전남, 어디 가서 무얼 하겠다」 점검하고 있습니다. 이 일, 정말 앞으로 5년 동안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니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전라북도, 충북 북쪽 지역, 강원도 서남지역, 이쪽이 전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지역을 지금 다니고 있습니다. 「충북 북부 지역이 낙후되어 있으니까 대책 세워 달라」 강원도 서남부에서도 또 그런 말씀하십니다. 전북의 인구 줄어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인구가 줄 수밖에 없죠. 자제분 키워서 어디서 전라북도에 일자리 얻어서 있겠습니까. 충청도로 가든지 하니까 인구가 줄 수밖에 없죠. 어떻게 해야겠어요? 졸업해서 좋은 일자리 얻어서 살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문화가 있죠. 역사·환경·교육, 다 갖춰졌는데 일자리가 없어요. 그런데 역대 보면 깊은 관심을 가진 정치인이 별로 없었어요. 행복하게 살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 50대, 60대, 그래야 건강해져요.
 
  나이 50넘어서 일자리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오래 살잖아요. 아이들 눈치, 부인 눈치. 여자들은 친구 만나기 바쁜데, 남자들은 갈 데가 없어요. 그럼 기가 죽어요. 병이 나는 거예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교육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없는 집 아이가 제대로 좋은 학교 가서 성공할 기회가 별로 없어요. 처음부터 과외해서… 요즘 같은 교육제도 같으면 저는 틀렸어요. 저는 야간상업학교 나와서 서울서 노동자 하다가 청계천에서 헌책 갖고 공부해서 고려대 경영학과 들어갔거든요. 요즘 어떻게 들어가겠어요? 요즘 교육은 그렇게 되어있지 않아요. 바꿔 보자는 거예요. 여러 가지 바꿀 일이 많습니다.
 
  제 서울 사무실 뒤에 인사동이 있습니다. 방송국 인터뷰를 끝내고 나니까 사람들이 사인해 달라고 몰려들었어요. 국화빵 굽는 부부가 나를 멍히 쳐다보고 있어요. 눈이 마주친 순간 걸어가서 제가 국화빵을 구웠어요. 사람들이 보니까 두 부부보다 내가 낫거든. 두 부부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서. 뒤집는 게 시원치 않아요. 사인하러 온 사람들에게, 8개 1000원어치 사는 사람만 사인해 주기로 했어요(웃음). 사인 받으려고 사람들이 빵 굽는 데 다 둘러쌌어요. 두 부부가 반죽을 시원치 않게 해서 떡같이 되는 거예요. 바삭하게 하는 재료를 내가 알아요. 그것 하나만 넣으면 바삭하게 되는 거예요. 귀에 대고 내일부터 반죽을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대답이 없어요. 알고 보니 청각장애인이에요.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1000원 주면서 「빵 안 가지고 갈 테니 사인해 달라」는 거예요. 나는 「이 두 분이 동정 구하려고 국화빵 장사하는 게 아니다. 빵 꼭 사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좌판 장사할 때 거지 취급받는 게 제일 싫었어요. 내가 한 시간 장사하는 동안 몇 백 명이 사간 거예요. 그러니까 반죽도 떨어지고 그렇게 된 거죠. 왜 그렇게 했느냐.
 
  옛날 좌판 장사할 때 어른들이 저한테 와서 그래요. 「부모는 뭐하느냐」고 물어봐요. 불쌍하니까.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형편이 되었으면 길에 나왔겠어요? 학교 다닐 때 아버지 직업을 「상업」이라고 썼어요. 그런데 어른들이 위로한다고, 「부모는 뭐하지, 이름은 뭐지, 몇 학년이지? 열심히 해 성공할거야」 하셨어요. 그 분들은 나를 격려한 것 같지만 난 수모를 당한 것 같아요.
 
  저는 재래시장에 가려면 가슴이 철렁해요. 가게도 아니고 좌판 놓고 장사할 때 가끔 높은 사람이 와요. 「장사 잘 됩니까」하고 물어요. 그러면 속으로 「오지도 말라, 재수 없다」… 그런데 내가 지금 재래시장에 가잖아요. 미안해서 몇 사람만 오고, 오지 말라고 해도 다 따라와요. 카메라맨들이 「들어보라」고 그래요. 사진 찍는다고. 그럼 제가 어떻게 하느냐. 「내가 손 댄 것은 다 사라」고 그래요. 재래시장 갔다 오면 차 트렁크가 가득 차요』
 
 
  [2007. 3. 30] 부산 북구·강서 갑 당원간담회
 
  『저는 요 근래 국민들이 원하는 서민정책을, 과연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실천할 수 있겠는가 이걸 점검하고 있습니다. 저는 득표를 위해 헛소리 하고 좋은 말을 하고, 남을 해치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정책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정치인 중의 하나가 싱가포르의 이광요 수상입니다. 이광요 수상은 기업하는 사람이 오면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만나자고 해요.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데, 하시는 말씀이, 「국가의 지도자는 비전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전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저는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고 기업하는 사람이었는데, 기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잘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실천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꿈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책, 이야기할 수 있지만 부산경제 살릴 수 있다고 하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며칠 전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적했습니다.
 
  「한국 경제는 우수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고, 아주 우수한 근로자도 있고, 또 우수한 세계적인 기업도 대한민국에 다 있는데 어떻게 해서 경제가 4% 성장도 못 되는데 그것에 만족하고 사는 이미 노년기에 들어갔다. 참 안타깝다. 이제 盧武鉉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행동하는 지도자가 나오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박태준 회장께서 제가 내놓은 「747」, 7% 성장, 4만 달러 소득, 7대 강국에 대해 「경험 있는, 실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면 6~7% 성장 문제 없다. 왜 불가능하다고 하느냐」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경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실패한 경험도 경험을 안 해본 사람보다 낫습니다.
 
  가정이 위기일 때 家長이 일어나 아이들에게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열심히 살자」 하고 나와야 돼요. 그리고 家長은 하다못해 노동판에 가서 노동을 해서라도 가족을 먹여살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울산에 현대조선소를 만들 때 부도 위기가 왔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저보고 「우리가 죽는 소리 하면 종업원이 다 도망갈 테니 우리 둘만 알자. 당신은 서울 가서 돈 구하고, 나는 현장에서 일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럴 때 위기를 이기는 거예요. 부도 위기를 맞았을 때 기업의 CEO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앞으로 4만 달러 소득을 10년 안에 만들려면 부산이 수도권과 같은 경제권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부산을 중심으로 한 광역경제권이 나와야 합니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부산시민들이 자존심을 가지고 긍지를 갖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힘이 모아져서 일이 만들어집니다.
 
  지도자는 국민에게 꿈을 주고 국민을 하나로 만들 때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0년 안에 4만 달러 소득 만들고, 7대 강국 되면 지역감정이 없어져요. 양극화도 없어져요. 그래야 통일할 수 있어요. 남북통일도 감당할 능력이 있게 됩니다. 해내야 됩니다. 야당 10년에 한나라당을 떠나지 않고 지켜 주신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감사 드립니다. 어깨 펴고 잘 사는 시대를 만들어보자는 긍지를 갖고 힘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2007. 3. 31] 재래시장 상인 연합회(회장: 차수길) 조찬 모임
 
 
  [2007. 3. 31] 부산 범어사 방문
 
 
  [2007. 4. 3] 충남 아산당원간담회
 
  대한민국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당내외에서 검증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저는 검증하는 것은 매우 좋다고 봅니다. 그러나 근거 없는 것을 가지고 모략하는 것은 자해 행위나 똑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폭로가 많습니다. 막판에 하면 해명도 못 하고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만, 저는 뭐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주 자신 있습니다.
 
  공직자 생활을 한 게 아니고 기업인으로서 일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의 기준, 우리가 지켜야 될 도덕적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김대업式이 이제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폭로했다가 그냥 아니면 말고 그런 식의 수법을 자꾸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 예비하는 방법, 당이라든가 공식기구에서 그런 무책임한 것은 예방할 수 있는 장치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저는 국민의 의식을 철저하게 믿습니다. 저쪽은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아마 그런 전략 같습니다. 「자꾸 하다 보면 뭐가 있겠지」 하는 것 같습니다. 가까운 목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李시장 젊을 때 누구나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데, 실수해서 만약 애가 있다면 먼저 밝히라」고, 그래서 목사님에게 「저는 어릴 때부터 그런 기준은 철저히 하면서 부모 밑에 자랐습니다」하고 웃으면서 얘기했어요.
 
  제가 그래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놀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사람 같으면 그런 소리 들을 게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없는 이야기로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국민들이 많이 있어서, 저 나름대로는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할 때는 치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경선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본선에 갔을 때 우리의 힘이 됩니다. 아무튼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저 자신부터 잘 하도록 하겠습니다』
 
 
  [2007. 4. 4] 유상곤 서산시장 후보 사무실 개소식 및 서산당직자 간담회
 
  『서산은, 젊었을 때도 아니죠. 현대그룹 회장을 할 때 중동에 있는 장비를 모두 가져와서 서산 간척을 계획 세우고 시작했던 주인공입니다. 당시 서산간척을 위해 자주 왔었습니다. 그렇게 했다가, 제가 끝을 내 놓고, 용도를 결정짓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FTA가 체결되면서 농민들이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상처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피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지 않더라도, 내일은 반드시 시장이 열리기 때문에 우리가 피하고만 있어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농민은 약하고 당장은 이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정부는 FTA를 통해 피해를 입는 사람에게 철저한 지원을 하고, 이번 기회에 앞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체질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낙농업을 하시는 분들이 상처가 크시겠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장, 직접 당사자인 농민, 모든 시민들이 힘을 함께 모으면, 우리는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한 일도 우리가 극복했습니다』
 
 
  [2007. 4. 4] 장항산업단지 방문
 
  <장항산업단지 대정부투쟁 비상대책투쟁위원회 농성 천막을 방문하여>
 
  『나는 매우 현실적이고 가능한 이야기만 하려고 해요, 일 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당선되면 해 주겠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못해요. 18년간 저건 되고 이건 안 되었으니 여기 입장에서는 억울하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공약에 넣어 주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못 합니다. 약속을 하면 지켜야 하기 때문에. 경제성을 따져봐야 합니다. 비대위와 여러분이 새로운 안을 만들 때 경제성을 따져서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느냐를 따져서 가장 유익한, 현실적인 안을 만들고, 바로 또 착공해서 되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계속 연구해서 현실적인 안을 만들어 보세요. 안이 나오면 착공하고 실행이 되어야지 국가적으로 얼마나 손해예요. 어떤 계획을 세우면 그게 착공해서 현실화 할 수 있는 계획이 되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논리로 할 게 아니라 경제논리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 와서 여러분에게 이 다음에 해 주겠다고 약속 안 하고 가는 게 미안하지만 내 의견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거예요』
 
 
  [2007. 4. 5] 울산 지역 기자간담회
 
  ―국회의원, 심지어 시의원까지 특정 후보에 줄 서는 모습입니다.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실 생각이신지?
 
  『누가 줄을 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구의원이나 시의원 할 것 없이, 누가 줄 서라고 해서 줄 설 정도는 아니고요. 선거직으로 뽑힌 사람들은 국민의 여론을 감안해서 본인들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줄 서기다 아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의원들에 대한 좀, 표현을 직접 하기 뭐하지만, 그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경선가도, 본선 국면에서 현대, 정몽준 의원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정몽준 의원은 우리가 기업에 있을 때 함께 일한 경험이 있고요. 의원 생활도 함께 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국회에서, 행사장에서 만날 수 있고 그것은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지금 정몽준 의원께서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제가 전혀 모르겠고요. 한나라당도 지금 현재로서는 정몽준 의원 거취에 대해 방침을 갖고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지금 거기에 관련되어서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 이르다고 봅니다.
 
  경선과 결부시켜서 이야기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보고요. 정몽준 의원에 대한 문제는 천천히,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고, 그 다음으로 이제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가 될 것이니까 지금은 그 이야기를 하기엔 조금 이른 감이 있고, 정몽준 의원이나, 한나라당 뜻이 나와 있지 않아서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서청원 前 대표가 어제 박근혜 후보 진영 합류 의사를 밝혔는데.
 
  『서청원 前 대표가 한때 당에 있으면서 어려움도 겪고 했습니다. 경륜 있는 정치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치적 진로는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니까 언급을 할 수 없습니다. 아주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보고 있지요』
 
 
  [2007. 4. 5. 10:30] 한나라당 울산광역시당 당원협의회 주요당직자 간담회
 
  「한방에 간다」가 한나라당에 들어와 혼란을 일으킵니다
 
  『2002년 기록을 보니까, 이회창 후보가, 지금쯤이에요, 2002년 4월쯤에. 어디서 연설한 게 있더라고요. 「12가지의 네거티브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더라고요. 그때도 굉장히 했던 모양이죠? 그런데 12가지 네거티브 있다고 하는데 나보다는 적어요. 나는 뭐라더라? 가득 있다고.…
 
  그때를 보니까 그래도 한나라당 내에서 네거티브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상대가 네거티브를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 우리는 경계선이 불분명해요. 요지간에는 「한 방에 간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말이 바깥에서 돌다가 잘못되면 한나라당에 들어와서 혼란이 일어나거든요. 걱정하죠.
 
  「한나라당은 결국 하나가 되고 화합하고 단합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박근혜 대표는 당이 어려울 때 당을 위해서 일했고, 그만한 소양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孫鶴圭 의원도 참 괜찮은 사람인데 그만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더 말할 것도 없게 되었는데, 결국은 서로 과열되고 경쟁하지만 아름다운 경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경선 끝나면 하나가 되어서 서로 밀고 당기고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와서 국민들이 바라는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2007. 4. 6] 한국교육비전포럼 창립준비위원회 참석 축사
 
  『우리 교육부가 30년 동안 대학입시 제도를 갖고 있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교육부가 손을 떼었다면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초기에 대학을 자율에 맡겼더라면 좀 혼선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마 지금쯤 우리 대학은 굉장한 경쟁력을 가졌을 것이고, 또 훌륭한 인재를 길러내는 기관으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7. 4. 6] 한나라당 충북도당 주요당직자 워크숍
 
  아칸소 시민 자격으로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
 
  『클린턴이 부시 아버지와 大選에서 붙었을 때, 「이 멍청아, 문제는 경제야」 이 말 한마디를 가지고 선거를 뒤집었습니다.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끝냈을 때 미국경제가 어려웠고, 실업률이 높았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었을 때, 민주당의 클린턴이 이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제가 기업에 있을 때입니다. 아칸소 주지사인 클린턴이 기업인을 이끌고 대한민국에 왔었습니다. 아칸소에 대한민국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주지사가 왔습니다. 여러분도 당시에는 아칸소라는 州를 들어본 일 없을 겁니다. 거기는 쌀농사가 主인 아주 시골입니다. 리틀록이라는 데가 수도인데, 도시 이름을 들어본 일도 없을 겁니다. 형편없이 작은 도시입니다. 거기 州지사가 그 시골의 기업인들을 데리고 대한민국 서울에 왔습니다.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리셉션을 한다고, 대한민국 기업인들을 초청했습니다.
 
  대한민국 기업이 일단 아칸소라는 州를 들어본 일 없어서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침 그 시간에 제가 인터컨티넨털 호텔에 다른 모임이 있어서 갔는데, 클린턴이 초청하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시간이 조금 있어서 정말 우연히, 시간이 한 20분 있어서 들렀습니다. 옆방에서 클린턴을 주지사가 하는 리셉션에 갔더니, 기업인 ceo가 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클린턴을 보러 누가 기업의 ceo가 왔겠습니까. 부장 아니면 기껏해야 이사들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 회장이 왔다니까 클린턴이 눈을 번쩍 떴어요. 저를 붙들고 오라고 말이지, 이 사람은 이제 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20분간 저와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옆방으로 갔습니다.
 
  그 이후에 클린턴 주지사가 돌아갔는데, 연락이 왔어요. 리틀록이라는 아칸소의 州 도시, 서울이죠. 거기 시장이 클린턴 주지사의 명을 받고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주지사가 돌아간 지 한 달도 안 되었을 때였어요. 아칸소 리틀록의 시장과 일행들이 클린턴이 서명한, 리틀록 아칸소의 명예 대사 임명장과 명예시민권을 들고 왔어요. 그런데 얼마 있다 보니까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가 되었어요. 깜짝 놀랐어요. 안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조금 전에 말씀하신 바로 그 이야기, 아버지 부시가 이라크에서 이긴 이후 영웅이 되었지만, 전후 실업률이 높아지고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이 멍청이들아 문제는 경제야」 이 말 한마디에, 뜻밖에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취임식에 초대가 왔습니다.
 
  나는 아칸소 시민이니까, 그 초청장을 받아서 거기 가서 저는 대우를 참 잘 받았습니다. 누가 그럴 줄 알았습니까? 20분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가지고, 제가 클린턴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인연입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아마 서민들이, 「이 바보야, 열린당·민주당 떠들지 마라. 경제야! 그래서 일자리도 만들어내고, 통일하려면 통일 비용도 만들어내고 해야지」 하는 겁니다』
 
 
  [2007. 4. 6] 헌정회 모임
 
  국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상황
 
  『저는 헌정회가 헌법정신을 지키면서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중심 세력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많은 충돌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이 다시 국가정체성을 찾아가는 상황이라고 보고, 그 큰 갈림길이 금년 12월19일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이미 세계에서 가장 뚜렷하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결과가 뚜렷이 나타난 본보기라고 생각하는데, 새삼스럽게 이념 갈등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이 저렇게 나라를 형편없이 만들고도 큰 소리 치는 것을 보면 우리가 대북관계에 있어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고, 지난 번 미국 페리 前 국방장관을 만났더니 「2·13 합의가 되고 4월13일 되면 60일이 되어 핵 폐기에 들어가는 날짜가 되는데, 북한에 관한 한 어떤 합의도 이행되기 전까지는 휴지와 똑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합의를 하더라도 이행되지 않으면 휴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행 여부를 봐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이번 합의를 어떻게 이행하느냐를 면밀히 검토해야 합니다.
 
  이걸 계기로 남북정상회담을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저는 북한 문제는 정권적 차원에서 밀실합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국민의 합의 없이 투명하지 않은 어떤 정상회담도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번 정상회담을 하려면 「무슨 어젠다를 가지고 어떻게 협상하겠다」는 그런 투명한 회담이 되어야 합니다. 다행히 지난 10년 동안 우리 국민들이 국가정체성을 걱정하고 있고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지 한나라당이 국민이 열망하는 정권교체와 관련, 다소 심려를 끼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우리가 정권교체 기회를 놓친다면 되돌이킬 수 없는 큰 역사적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이 걱정하는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2007. 4. 18] 4·25 보궐선거 호남지역 지원 유세
 
  <무안군 지도읍 장터에서 지원 유세>
 
  『한나라당이 전남에서 기여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제 일하는 사람의 시대가 왔습니다. 군수 등 지역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일꾼이 되어서 지역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정치의 시대는 가고 일하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저도 일하러 나왔습니다. 대한민국을 발전시키고 균형발전시키기 위해 나왔습니다. 잘 되는 곳은 그냥 둬도 잘 됩니다. 잘 안 되는 곳을 잘 되게 해야 합니다』
 
 
  [2007. 4. 18] 영산강 뱃길 살리기 탐사
 
  『영산강을 살리는 것이 전남 어느 사업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뱃길을 살리기 이전에 물길을, 수질을 살려야겠어요. 뱃길보다 수질이 더 급해요. 수질이 살아야 기업이 들어올 수 있고 여러 가지 사업을 할 수 있는데 아주 시급합니다.
 
  원래 전남·광주 도민들, 시민들께서 영산강 뱃길을 살려보자는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마침 한반도 대운하를, 경부·호남·북한까지 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영산강은 죽어 있는 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을 맑게 하는 것과 동시에 뱃길을 트자는 것입니다. 전남 도민들의 바람이고, 또 생산적으로 도움이 되고 관광명소로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 또 앞으로 영산강이 이어져 금강까지 가는 그래서 경부운하와 만나는, 그러한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산강 뱃길을 살리는 것이 아마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7. 4. 18] 영산강 운하와 지역경제 토론회 참석
 
  전남의 젖줄, 영산강
 
  『뭘 해 보겠다고 할 때 저는 참 기분이 좋습니다. 미래를 향해서 무엇인가 해 보겠다는 그 모임에 가면, 저는 절로 신이 납니다. 오늘 영산강 뱃길을 열어 보자는 강한 뜻을 가진 김갑렬 회장이 오늘 배를 타고 사포나루터까지 죽 배를 타고 봤습니다.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보기엔 좋은데, 냄새는 형편없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경관… 가는 곳마다 저기는 어떤 곳이고 무엇이고 하면서, 역사를 더듬어 갔습니다만, 우리가 그 탐사선에서 흙을 퍼냈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커먼 강바닥을 팠습니다만, 팔수록 더 썩은 강바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상류는 냄새가 좀 적게 났습니다만, 하류 영산강 둑 어귀에서는 사실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영산강은 우리 전남인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인의 긍지와 문화와 역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산강이 썩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발만 동동 구르면서 이래선 안 되는데, 이래선 안되는데 하면서, 세월은 흘러가고 강은 다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업에 있을 때 全세계를 다니면서 일을 보면서, 아프리카에서, 구라파에서, 미국에서 세계를 다니면서 일을 해 봤습니다. 그런데 역시, 강과 바다를 잘 이용하는 나라가 모두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강과 바다를 그냥 팽개쳐 버리고, 강에 오염된 생활 폐수를 집어넣고, 물이 썩든 말든 그렇게 하는 대륙이나 나라들은 다 후진국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류비가 적게 든다」, 「경제적으로 대단하다」 하기 이전에, 21세기 지구 최대의 적인 지구 온난화의 원인인 이산화탄소의 발생을 막는 최대의 유일한 방법이 운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250대 10t 대형 트럭이 고속도로를 다니는 것을, 2500t 바지선 한 대가 해결합니다. 경제적·환경적으로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소 非경제적이더라도 환경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지구의 온난화를 막기 위해서 이산화탄소 발생을 막는 교토의정서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있습니다.
 
  구라파는 매우 현명했습니다. 일찍이 200년 전부터 운하를 만들기 시작했고, 독일은 아직도 더 많은 운하를 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땠습니까? 우리는 강이 있었지만, 기껏 농사를 더 짓기 위해서 땅을 더 만들기 위한 정리는 했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그 중요한 강에 생활폐수가 흘러 들어가고, 농사를 지은 모든 물이 흘러들어가고, 거기에 공업용수나 물을 쓰기 위해 다시 돈을 들여 맑게 하는, 이런 악순환이었습니다. 강을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강을 슬기롭게 이용했습니다.
 
  아마 영산강도, 저 나주에서 광주까지 배가 다녔을 겁니다. 나루터가 남아 있습니다. 낙동강도 부산포에서 대구 왜관을 통해서 안동까지 들어가는 나루터가 있었습니다. 옛 선조들은 강을 잘 이용했습니다. 정작 대한민국 근대사에 와서 보면, 한강을 위시한 5대 강은 산업화되면서 폐수처리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작위로 더러운 물을 그쪽으로 쏟아부었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서 하수 처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돈이 듭니다. 그나마 영산강은 아직 더 썩어 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계천 복원을 할 때였습니다. 거기는 썩은 물이 흘렀습니다. 건기에는 말라 버렸습니다. 메탄가스가 가끔 폭발했습니다. 왜, 덮었기 때문에. 산업화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빨리 지나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저는 청계천 복원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게 하고, 환경이 복원되고, 600년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모든 서울시민들에게, 정말 훌륭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그 계획을, 산업화에 익숙해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자동차가 하루 18만 대 다니는 길을 왜 막느냐」 이렇게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자동차의 속도가 늦어진다고 반발이 심했습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공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때야 깜짝 놀라며 충격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동차 18만 대가 다니면서 가스를 뿜어 대던 그때가 좋았던 게 아니다. 옛날로 돌아간 청계천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경제적으로만 계산할 수 없는 수많은 혜택을 준다는 것을 우리 시민들은 깨달았습니다.
 
  우리 시민들이 깨닫기 전에 온 세계가 먼저 깨달았습니다. 청계천 복원의 값어치는 선진국들이 먼저 알았습니다. 대한민국 수도 한가운데 청계천이 복원되는 충격을 보면서,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타임스」지를 위시한 세계 언론들이 「청계천을 배워야 한다」고 글을 썼습니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서서히, 어떤 代價를 치르더라도 환경을 복원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시골 군, 면에서 「청계천 봐라. 덮었던 것도 걷어 내는데 왜 새로 덮으려고 하느냐」. 이런 운동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에서 2000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다녀갔습니다. 옛날에는 「강둑을 덮어라, 그 위에 주차장을 만들어 달라」 이렇게 했던 바로 그 분들이 「안 된다. 이제는 덮었던 콘크리트를 걷어 내자」고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영산강에도 해당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오늘 영산강을 따라갔습니다. 뱃길을 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포나루 60km까지는 유람선이 다닐 수 있고 화물선도 다닐 수 있습니다. 다 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저 위를 준설작업을 하고, 우리가 조금만 손을 보면, 항상 똑같은 수위를 유지하면서 배가 다니는 뱃길을 열 수 있습니다. 그 뱃길이 맑은 물로 변한 뒤에 배가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이 상태로 배가 다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물을 살려서 뱃길로 가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문화·관광, 거기에 따라서 발전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자원이 어디서 나옵니까. 「J 프로젝트」 맑은 물을 공급하지 않고 J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기업이 들어오려면 썩은 공업 용수를 가지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지역에 제철소를 지으려다가 이 물을 가지고는 공업용수를 쓸 수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겼던 기억이 납니다. 이것은 생활입니다. 인간의 생활이나 문화·기업, 어떤 것도 영산강의 맑은 물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광주까지 배가 올라가면 저는 2단계 더 올라가서 경부운하와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또 어렵다고 합니다. 「아, 그게 되겠느냐?」, 「그게 되겠느냐?」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해본 일도 없는 사람은, 구경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혼자 못 하면 되는데 남이 하는 것을 자꾸 못 하게 합니다. 저는 청계천 복원 사업을 할 때 경험했습니다. 안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못 하면 못 하지 왜 남이 하는 것까지 못 하게 하는지 몰라요. 그래도 했더니, 반대했던 사람들이 다 없어져 버렸어요.
 
  그렇습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영산강을 다시 살리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영산강 수질을 살리고, 뱃길을 살리는 거 정말 쉬울 것 같아요. 왜, 반대자가 없으니까. 광주, 전라도 사시는 분 중에 그 두 가지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영산강 살리고 뱃길 트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얼마나 쉽겠어요?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게 어렵지만, 일하는 것은 쉽습니다. 인류의 과학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데 뱃길 뚫고 물 맑게 하는 거 뭐가 어렵겠어요,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제가 두바이에 갔었어요, 中東 많은 나라 중에서 기름이 제일 적게 나는 나라에요. 거기에 21세기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서 기름이 펑펑 쏟아지는 나라보다 더 발전해 버렸어요, 그 지도자,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 왕세자 10년 동안에 일하는 것을 다 참고하고 경험을 쌓아 가지고, 왕이 딱 되더니 5년 만에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 버렸어요, 놀랍습니다. 우리에 비하면 불리한 점이 많습니다. 나라 크기도 인구도 조그맣습니다. 우리의 인천공항이 세계 10대 공항으로 날리고 있습니다. 작년에 2500만 명이 그 공항을 통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두바이는 조그마한 사막에 공항을 지어놓았는데 작년에 2800만 명이 다녀갔어요, 2015년, 지금부터 한 7년 후에는 1억2000만 명이 다녀가서 세계 최고의, 미국 애틀랜타에 8000만 명 다니는 것보다 훨씬 큰 공항을 지어서 사람들이 다니게 만들어놨습니다.
 
  생각할 수 있겠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불가능하다. 이 사막에 그렇게 공항을 크게 지어 누가 갈 거냐」 합니다. 관광객이 대한민국에 1년에 600만 명이 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2015년에 1억만 명의 관광객이 오는 계획을 세워서 거기에 맞는 호텔을 짓고 관광지를, 바다를 메워서 그냥 새로운 섬을 만들어서 인공위성에서 보면 나라는 작은데 그게 보여요, 희한해요. 그것도 자기 돈으로 하는 게 아니고, 온 세계가 경쟁적으로 돈을 갖다 넣고 있는 거예요. 난리가 났어요.
 
  지도자의 상상력!
 
  제가 그 분을 만났어요. 그 분이 만나자마자 제게 「당신은 녹색자연을 살린 사람」이라고 해요. 그건 타임스지 표지에서 저를 두고 한 말입니다. 「녹색의 사나이」 그런데 갑자기 「당신을 만나고 싶었다」는 거예요. 나는 「참 이상하다. 어떻게 청계천을 어디서 듣고 왔는가」 했더니 외국잡지를 본 것 같아요. 나에게 「그것을 어떻게 상상했고, 그것을 할 때 반대자는 없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도 마라.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한다고, 정말 어리석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 했더니, 사람들이 자기한테는 「미친놈」이라고 했다는 거예요, 사막에서 이런 일을 한다고, 그런데 왕이 아이디어만 내는 게 아니라 「언제까지 해라」, 「이걸 몇 월 며칠까지 해라」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했어요. 정말 미친 일이지. 그랬더니 한 장관은 왕이 365일 만에, 1년 만에 끝내라고 했는데 자기는 딱 364일 만에 끝냈다고 보고했답니다. 하루를 단축했다는 겁니다.
 
  리더에 따라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청계천 복원 3년 만에 끝내겠다」고 발표했다가, 「2년 2개월 만에 끝낸다」고 하니까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2년 걸렸습니다. 인간이 하는 것은 기계와 다릅니다. 기계는 용량이 있어요, 몇 마력짜리. 그래서 플러스, 마이너스 하고 그것보다 무리하면 고장나 버려요. 태초에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이 무한한 능력을 주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게을러서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역사는 이루어지는 거예요』
 
 
  [2007. 4. 20] 보궐선거 지원 유세(가평·동두천·청평)
 
  지역 유세를 마친 후 李 前 시장은 장애인의 날을 맞아 가평 꽃동네에 들러 꽃동네 원생들을 격려한 뒤 점심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꽃동네에 있을 것』 이라며, 『저희들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해서 좋은 나라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란다』고 격려했다.
 
 
  [2007. 5. 2] 보궐선거 관련 기자회견
 
  『저는 오늘 오직 두려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습니다. 선거에서도 졌지만 그보다도 스스로에게 졌습니다. 우리는 국민의 뜻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저 자신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국민과 당원들께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드린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라도 국민의 뜻을 받들고 당을 철저히 개혁해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호소하는 당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르더라도 오직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기 쇄신을 계속해야 합니다.
 
  당이 부패와 비리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집권 세력보다 더욱 유능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권교체의 명분이 있습니다. 개혁은 결코 선택이 아닙니다. 민심의 명령이며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저는 앞으로 국민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하겠습니다. 국민의 열망을 받들어 변화와 개혁, 그리고 경제 살리기에 앞장서겠습니다. 이재오 최고위원을 몇 차례 만나, 당의 개혁과 화합에 함께 힘써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설사 부당한 비방이 있더라도 선한 마음으로 대하자고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2007년 4월10일 셰이크 모하메드 두바이 통치자를 만나고 있는 李明博 당선자.

 
  [2007. 5. 4] 한나라당 경선 후보 및 당 대표 등 회동
 
  <비공개 회동 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앞으로 잘 하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앞으로는 서로 비난하고 이렇게 하는 것 없고, 앞으로 실무자들이 자주 만나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 좋지 않겠느냐. 또 네거티브를 한다던가, 당의 조직 차원에서, 당의 대표가, 대표 책임 하에 현안 문제를 다루고, 앞으로 과거를 넘어서 국민들에게… 앞으로 잘 해 달라」 그렇게 합의를 했어요.
 
  「부패를 척결한다. 앞으로 국민이 볼 때 비리에 대한 것은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적극 처리를 하고, 그것은 당규에 의해서 처리하고 법적인 문제까지 있으면 고발하고, 당이 깨끗한 것을 보이자」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제가 강조했어요. 강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볼 때 깨끗한 당으로 보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렇게 하겠다, 합의가 되었고 양쪽이 다 좋다고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 문제 외에는 다른 것은 앞으로 서로 오해가 없도록 하자, 서로 네거티브를 한다든지 서로 비난한다든지 하는 것은 하지 않고, 서로 조심해서 하자…』
 
 
  [2007. 5. 8]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 방문
 
  이 요양센터는 李 前 시장이 서울 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2005년 9월에 개관했다.
 
 
  [2007. 5. 9] 한나라당 천안 갑을 당원협의회
 
  아침에 「오늘 무슨 소리 들어도 참아야지」 다짐
 
2007년 5월10일 大選 출마 선언을 하는 李明博 당선자.

  『누구 말마따나, 누구 좋으라고 우리가 분열하겠습니까? 잠시 경쟁하다 보면, 또 뒤 따라 오는 사람은 앞의 사람을 조금 자극적으로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늘 웃음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왜,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잠시 듣기 싫은 소리 하고 잠시 내 발목을 잡고 잠시 억울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일일이 답변하다 보면 나중에 힘을 합쳐야 할 때 못 합치면 얼마나 후회스럽겠습니까. 저는 끝까지 웃으면서, 소이부답하면서 「웃음으로 하나가 되어야지」 하는 심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가 있을지라도 넘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우리끼리 싸우고 하는 거 다 없애 버리고, 저는 한나라당에 들어와서 정치해 보니까 걸핏하면 싸울까 봐 걱정이에요. 저는 아침에 눈 뜨면, 「오늘 무슨 소리를 들어도 참아야지」 이렇게 하고 나와요. 기분 같으면 억울하니까, 해명을 하고 싶고 「그게 아니다, 억울하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싸움이 된단 말예요. 그러면 나는 좀 해명이 될지 모르지만, 국민들이 볼 때 「한나라당이 싸운다」 이렇게 되니까,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꼭 그래요.
 
  「오늘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무슨 소리를 들어도 참아야지」
 
  오늘도 참고 있습니다.
 
  저녁에 잘 때는 내가 오늘 아침에 한 약속을 지켰는지, 혹시 내가 또 못 참고 누구를 만나서 말을 잘 못했는지, 늘 저녁에 가면 반성을 합니다』
 
 
  [2007. 5. 11] 판문점 방문
 
  『DMZ(비무장지대)를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북의 청소년들이 스포츠를 함께 한다든지, 문화·예술 공연을 함께 한다든지 하는 장소로 활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양쪽의 젊은 사람들이 와서 묵을 수 있는 유스호스텔을 짓고 축구장·공연장·옥외 공연장·실내공연장 등을 짓고 싶습니다. 우리가 남북을 왔다갔다 하는 데 어렵고 많은 비용이 듭니다. 쉽게 주말마다 와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요즘 북한 주민들이 조그마한 자영업을 할 수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가내에서 만든 농산품, 공산품들을 물물교환할 수 있는 오일장 같은 그런 것을 해서, 자연스럽게 서로 주민들이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거창한 어떤 계획보다 바로 출발할 수 있는, 긴장이 완화되는 그 속도에 맞춰서 초보적인 출발을 할 수 있는 일들을 했으면 좋겠다고 평소에 생각했는데, 역시 여기 와서 보니까 너무 긴장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제 출마 선언을 하고 극도로 긴장된 이 지역에 와서 안보를 살피고, 이제 말씀드린 대로 그것을 뛰어 넘는 평화와 번영의 출발점을 만들자는 소망을 담아서 오늘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2007. 5. 14] 한나라당 서울시당 당원교육
 
  『두바이의 지도자도 처음에는 국민들로부터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거대한 꿈을 현실로 옮기면서 국민들은 그가 말하는 어떤 것도, 이뤄진다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중국도 미래 원자재를 구하기 위해서 후진타오, 원자바오가 온 세계를 다니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자기가 만든 당의 지도자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세계를 향해 나가야 할 대한민국이 우리끼리 싸우느라고 시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것 잘 못되는 것 아니냐. 큰일 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이 시대 한나라당이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이 얼마나 큰데 누가 함부로 당을 깨겠습니까?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합니까?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각입니다. 저는 하늘이 두 쪽 나도 한나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을 떠나서는 어떤 것도 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7. 5. 16] 강릉 당원 간담회
 
  『金大中·盧武鉉 정권은 그렇게 가르고 자르고 니 편 내 편 가르고 등지고 원한지게 했습니다. 이제 자기네들 편끼리 싸우는 거 보세요. 그건 뭐냐. 전부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당원 여러분께서 아주 홀가분한 생각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생각하시면, 정말 국민이 신나는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2007. 5. 17] 태백중앙병원 방문
 
  李후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재해 전문병원인 태백중앙병원을 방문해 진폐증 환자들을 격려했다.
 
  환자들을 만나 손을 잡고 『자식이 몇 명이세요』, 『지금 어디 살아요?』, 『자주 오지요?』 라며 대화를 나누었고, 『젊을 때 자식 키우느라 다들 고생해서 자식들은 잘 되었는데 몸이 이렇게 아파서…』 라며 안타까워했다.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감정이 격해진 듯 이상우(58)씨 손을 잡았을 때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죠. 병이 금방 발병한 게 아니라 오랜 세월 일하는 과정에서 깊어졌으니까…』 라며 안타까워했다.
 
  병원 방문을 마치고 나오며 왜 눈시울을 붉혔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어머니 생각이 나서… 부모님이 젊을 때 고생해서 자식들을 키우셨잖아요. 우리 어머니도 그래서 빨리 돌아가셨어요. 고생을 너무 해 가지고… 어르신들 보니까 생각이 나네…』 라고 말을 흐렸다.
 
 
  [2007. 5. 17. 16:30] 강원도 신동읍지역 주요 당직자 간담회
 
  나의 꿈
 
  『오늘 진폐증을 앓는 환자가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갔습니다. 젊어서 20년, 30년 일하고 진폐증 환자가 되어서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을 봤습니다. 진폐증은 낫지 않는다고 해요. 합병증을 그저 조금 늦춰서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치료라고 합니다. 젊은 시절에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서 탄광에 가서 20년, 30년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고, 자식들 공부시키고, 아버지·어머니는 진폐증 환자가 되어서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년 1월부터 3월까지 벌써 30명 돌아가시고 1년에 60~70명 돌아가신다는 이야기 들으면서, 오늘 그 환자들을 둘러보면서 제 과거를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정말 가난에 찌들어서 밥 세 끼도 먹지 못 하고, 아침 저녁으로 술찌꺼기를 가지고 죽을 끓여 먹이던 부모님, 저를 중학교밖에 못 보낸 어머니, 그래도 손발이 닳도록 밤낮 가리지 않고 머리에 이고 온 동네 다니면서 장사를 하시고 길에서 좌판 벌이고 장사하셨습니다.
 
  저는 어려서 좌판 장사하고 서울에 와서 노동자가 되었지만 늦게나마 대학을 다녔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생 자기집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늘 남의 집 셋방살이를 하셨는데 한 번도 새 옷 입으신 것을 못 봤습니다. 늘 헌옷을…. 그래서 어렸을 때 「내가 돈을 벌어 첫 월급 타면 우리 어머니 새옷을 한 벌 사드려야지」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학 졸업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어머니가 달동네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일생동안 자식 키우기 위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힘들어 하시는 아버지·어머니들을 보면 꼭 저희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조금만 더 사셨으면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 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늘 갖습니다. 오늘 가 봤더니 탄광에서 일생 일하면서 고생 끝에 자식들을 키웠는데 자식들은 살 만하게 되었는데 아버지·어머니는 진폐증 환자가 되어서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병을 가지고 누워서, 호흡이 힘들어 숨을 쉬기 위해 코에 끼어넣고 사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가슴이 메이고 옛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왜 정치를 하는가. 그 처절한 가난 속에서 오늘 저는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제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 저의 부모와 같이 어렵게 사셨던 분들이 오늘도 이곳저곳에 계십니다. 그 분들이 다 잘사는 나라 만들 수 없을까. 시골 도시, 농민·어민·탄광 할 것 없이 우리 국민이 모두가 다 잘사는 나라 될 수 없을까. 정선·강릉·태백·서울 어디에 살더라도 우리가 다 잘 살 수 없을까. 농사를 짓고도 자식 키우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만들 수 없을까. 고기가 잡히지 않아 힘든 어민들도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젊은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학교 졸업하고 좋은 일자리 얻을 수 있을까. 나이 드신 분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50대, 60대, 70대까지 할 수 있을까. 이게 저의 꿈입니다.
 
  병든 사람들, 독거노인들, 외롭게 사시는 어른들이 따뜻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없을까. 이것은 우리의 꿈이고 저의 꿈입니다. 저는 이 꿈을 현실로 이루려고 합니다. 꼭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정치에 나섰습니다』
 
 
  [2007. 5. 19] 부산 여성 당직자들과 오찬
 
 
  [2007. 5. 22] 네덜란드 대사 및 운하 관계 전문가 면담
 
  李후보는 안국포럼 사무실에서 주한 네덜란드 대사(한스 하인스브룩)와 네덜란드 정부 교통수로공공재부 관계자(욜케 브롤스마, 아르얀 히드라), 운하 전문가(빌헬무스 클롬프, 단 릭스) 등을 만나 한반도대운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후 이들과 함께 취재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네덜란드 정부 관계자와 운하 전문가들은 2007년 5월19, 20일 이틀 동안 한반대운하 내륙구간을 탐사한 바 있다.
 
 
  [2007. 5. 23] 경기도 시군구의회의원 한마음체육대회 참석
 
  이날 한 방송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홍준표 의원의 경선 출마 선언과 관련된 질문을 받은 이명박 예비 후보는 『본인이 결심한 것이고 저는 본인의 결심을 존중하는 입장이죠. 본인이 많은 의욕과 능력이 있다고 인정합니다』고 답했다.
 
 
  [2007. 5. 31] 제주도당원 교육
 
  金大中·盧武鉉 정권 때 분배가 더 나빠졌습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직후 큰 북을 메고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李明博 당선자.

  『해방 이후 여러 정권이 있었지만 여러 정권마다 최소한의 경제성장률이 7.5%가 됩니다. 어느 정권이 들어왔든 7% 이상의 성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간 두 정권은 4% 성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두 정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겠다. 분배하겠다」는 것을 가장 크게 내세웠습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한테 돌아오는 게 많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의 군사정권, 독재정권을 비난하지만, 그 정권은 분배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통계를 내보면 그 정권들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난 10년간 두 정권보다 분배가 훨씬 많이 되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격차도 그때가 오히려 적었어요.
 
  없는 사람 잘 살게 하겠다고 했는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격차가 지난 10년간 가장 크게 벌어졌고, 분배가 가장 적게 된 정권이 지난 두 정권이에요. 놀라운 사실이에요. 그 사실은 무엇을 결과적으로 말하느냐면 경제가 잘되어야 없는 사람에게 나눠 줄 것도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나눠 주려고 해봐야 나눠 줄 게 없어요. 결국 말만 하고 실제 일해 본 경험이 없고 이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으면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정권은 나라 살림은 못 살아도 선거 때 선거 전략을 세워서 선거 공작을 하는 것은 굉장히 발달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보세요. 엉망진창 같아도 자기네끼리 싸우는 것 같아도 본선에 가면 벅찬 선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나 나가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게 문제예요. 어떤 사람은 그래요. 「왜 한나라당은 민심은 이런데 당심은 어떠냐」, 이런 이야기합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국민의 여론과 당심은 같이 갈 것이다.
 
  만일 여론과 달리 간다면 그건 당이 아니죠. 당이 국민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당원이 바로 국민인 것이에요. 우리가 당대표를 뽑는다고 하면 당심을 가지고 뽑아도 되는 거예요. 나라 살림을 살 사람을 뽑으려면 국민이 바라는 사람, 본선에서 이길 사람, 그보다 더 중요한 나라경제를 살릴 사람을 뽑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2007. 5. 31]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2007년도 편집 보도국장 세미나
 
  『개인이나 조직이나 언론과 멀리하고 살 수 없는 시대입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더라도 언론과 전혀 무관하게 지낼 수 없는, 시대에 사는 게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했으니까 그 당시에는 언론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또 제가 대학에 다닐 때, 한참 운동권일 때 신문에 거의 매일 나다시피 하고 그럴 때, 어디 시골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분이 이명박 학생에게 사과를 한 상자 보내고 싶은데 신문에 용산이라고 가끔 나니까,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명박 앞」 이라고 해서 보냈는데 그것이 배달이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언론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체국에 있는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그 당시에, 기자들에게 물어봤다고 그래요. 「운동권 학생 이명박이가 사는 데가 어디냐」고 알아봐서 결국 그게 배달이 되었어요. 처음으로 언론의 덕을 본 첫 케이스입니다.
 
  기업에 들어가서는 직접적으로 언론과 많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할 때도 있고, 이렇게 할 수 있나 할 때도 있고 그래도 언론이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정치를 하다 보니까 언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좋고 나쁘고 나에게 유리하고 불리하고에 관계없이 언론은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갖습니다.
 
  개인적으로 봐서는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저런 신문사 없어졌으면 좋겠다. 저럴 수 있느냐」 그런 순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개인의 이해이고, 결과적으로 보면 언론은 존재해야 하고, 특히 민주사회에서 이것은 존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은 보도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보도 자유에 따른 책임과 권한이 물론 있겠죠. 근본적인 것은, 「어느 누구도 언론의 보도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그것이 침해받기 시작하면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편집인들 앞이라서 접대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원고도 준비해 왔습니다만, 원고를 덮고 평소의 나름대로의 생각을 기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오해 없이 그냥 들어 주시면 좋겠고, 또 그러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옵니다. 이 변화의 핵심은 결국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송과 통신의 융합, 방송과 언론의 융합, 이런 여러 가지 관점에서 저는 법이 再조정되어야 한다,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통합된 법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방송법·통신법·신문법, 전부 따로 있는 법을 가지고 과연 앞으로 빠른 속도의 융합에 기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관점에서, 저는 미래 통합된 하나의 법을 미리 구상해야 될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을 위해서 명칭을 어떻게 붙이든 간에 저는 「21세기 미디어 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해서, 지금부터 융합에 관련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7. 6. 1] 인천시당 李明博 대통령 예비후보와의 만남
 
  잘난 국민이 못난 지도자 만나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시절 저도 일자리 없었지만, 저희 부모가 당당한 일자리 있었으면 나 같은 자식들이 고생을 안 해도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세상 만들 수 없을까. 서울에 살든 인천에 살든, 저 호남에 살든 경상도에 살든, 어디서 살든, 지방에서 올라오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서 자식 낳고 살아 가는 세상 만들 수 없을까. 이게 저의 소원입니다. 그런 세상 만들어 한번 보고 싶은 것이 저의 욕심이기도 하고, 저의 목표이기도 하고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를 해보니까, 정치는 또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제가 요즘 대한민국이 이렇게 어려운 때, 세계를 다녀 보면 다 잘살고, 다 난리예요. 중국이고 베트남이고 일본이고 다 좋은데 우리는 왜 그러냐. 딱 이유 하나가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그 외에 이유가 있을 게 없습니다. 잘난 국민 속에 못난 지도자가 있어서 잘난 국민이 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때가 어떤 때인데 임기 말에 기자실 폐쇄시키겠다, 어쩌겠다, 그걸 가지고 싸우고 있어요. 기가 찬 거예요. 그게 싸울 일이에요? 이 중요한 시기에 그런 것을 가지고 대통령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정도의, 정말 안타까운 지도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힘든 겁니다』
 
 
  [2007. 6. 9] 한나라당 경기도당 당원 등반대회
 
  『저는 요즘 해괴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제 노무현 대통령께서 명예박사를 받는 좋은 자리에서 왜 저에게 시비를 겁니까? 왜 건건이 시비를 겁니까? 나라 경제를 살리고 높은 세금을 줄여 보자는데 왜 그걸 가지고 시비를 붙습니까? 일주일 전에는 북쪽에서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남북 간에 먹구름이 낀다고요? 말이 됩니까? 먹구름 걷어 내려고 하는데, 먹구름 낀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협박당해서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갈 길은 멀리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힘을 모으고 단합해서 한걸음 한걸음 고지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승리를 막기 위해서 북쪽에서도 현직 대통령도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한나라당의 승리를 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방심하면 되지 않습니다. 우린 한순간도 긴장을 늦춰선 안 됩니다. 긴장하고 단합하고 화합해서 반드시 승리를 해야 합니다』
 
 
  [2007. 6. 12] 경남 사천 한나라당원 대상 특강
 
  『세상이 잘되려면, 나라가 잘되려면, 서로 나라를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경쟁해야지,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는 사람, 일 못 하게 만들려고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끌어내리고, 이건 옳은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일 잘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만들어서, 대한민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2007. 6. 13] 李明博 예비후보 경남선대위 발대식
 
  청와대와 열린당은 제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2002년도에 여러분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우리는 멀지 않는 지난날을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회창 후보가 네거티브에 음해와 모략에 허덕일 때, 우리는 혹시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우리 후보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정말 뭐가 있기는 있는가 보다, 있겠지, 있으니까 저렇게 방송에서 떠들겠지,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왜 졌습니까?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후보보다 못했습니까? 우리가 조직이 적었습니까? 숫자가 적었습니까?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후보를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방송에서 떠들고 상대가 떠들고 모략하고 음해를 해도 이래서는 안 된다, 이렇게 주먹을 불끈 쥐고 우리 후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2007년 12월19일을 맞이하면서 2002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했는지. 그때 내가 위촉장 받고 받은 만큼 얼마나 헌신적으로 했는지, 각자가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위촉장 주고받는 그런 형식적인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여러분과 저와의 반드시 지켜야 할 마음의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약속? 위촉장?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위촉장을 받음으로써 마음으로 다짐을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약속을 해야 합니다. 어려울 때, 위기가 올 때 우리는 더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각오가 여러분 되어 있습니까?
 
  제가 서울에서 지금 연락을 받았습니다(李후보가 신문기사 내용을 읽음).
 
  「우리당의 이명박 죽이기 플랜 확인」
 
  「고위관계자 전략회의서 李검증 집중공략 결정 파문」
 
  이제까지 이명박 죽이기가 설마설마 하던 것이 오늘 확인이 되었다고 보도가 나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번 본선 경쟁자로 박근혜 전 대표를 택했다, 이명박 시장을 죽이기로 해서 본선에서 하려던 때 이른 네거티브를 이번 경선을 앞두고 총공세를 펴기로 범여권에서 결의를 했다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범여권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 후보를, 이명박이 아닌 박근혜 대표로 하기로 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李후보 신문기사 읽음)
 
  「李 前 시장의 고공행진이 심상치 않고, 더 방관했다가는 범여권의 시나리오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커 … 이번 기회를 당겨서 하기로 결의하였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음해다, 음모다. 노무현 대통령이 나와서 나를 공격하더니, 그 앞에는 김정일 북한 정권이 공격하더니, 안팎에서 당내에서 당 밖에서 총공세가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래도 설마설마했습니다. 「한나라당 후보가 이명박이 된다면 이길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경선후보가 못 되도록 온갖 음해를 꾸미고 있습니다.
 
  어제 김혁규 의원이 「15번 옮기면서 부인이 부동산 투기한 의혹이 있다, 밝혀라」 해서 내가 고발하겠다고 했더니, 「나는 부동산 투기했다고 한 적이 없다. 그냥 15번 이사한 것을 밝히라고 했다」 해요. 이것이 경남의 전 지사의 발언이에요.
 
  저는 오늘의 이 음모가 청와대와 결탁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모르지만, 여기에도 결탁되었다는 확증은 없다고 했어요. 조짐이 보입니다. 제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어떤 음해 속에서도 국민을 향해서 국민을 위해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열린우리당과 범여권의 어떠한 조직적 음해, 무책임한 폭로, 그래서 여론을 조작해서 저를 경선후보가 되지 않고 「이명박이만 후보 안 되면 이길 수 있다」는 그런 음모, 그런 잘못된 계획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할 것입니다!』
 
 
  [2007. 6. 14]「비핵·개방·3000 구상」 기자회견
 
 
  [2007. 6. 14. 18:30] 재경대구경북도민회 이사회 및 정기총회 참석
 
  제가 열을 좀 받아서 목이 쉬었습니다
 
  『제가 지금 요즘 열을 좀 받아가지고 목이 좀 쉬었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신문을 읽다 보니까 범여권에서 본선에 가서 한번 붙어 보려고 했던 저를 경선에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경선을 통과하면 이명박을 이길 수가 없다, 아예 경선에 후보가 안 되도록 만들자, 이런 작전을 썼다는 것이 어제 보도가 되었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남의 경선에 뛰어들어요? 본선에서 경쟁을 해야지 남의 당 경선에 뛰어들어 가지고 이 후보가 되면 좋겠다, 이 후보를 떨어뜨리겠다, 과거 우리 건국 이래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제가 항의를 했더니,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하라」 이렇게 연락이 왔어요. 제가 사과할 게 있습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어렵게 자랐지만, 그래도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저는 바르게 사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30년간 기업을 하는 동안에 뭐가 있을 거라고 난리입니다. 지금, 저는 우리 고향 분들에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할 만한 어떤 도덕적 결격 사유 없이 살아왔습니다.
 
  오늘날 범여권에서 하는 이 역경을 딛고 제가 분명히 승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고향 마당에 와서 마이크 잡고 오래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지난 세월 걱정해 주시고 협력해 주신 여러분, 앞일에도 걱정해 주시고 협력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마지막 부탁은 우리 홍준표 의원도 잘 봐주십시오. 제 후배입니다. 고맙습니다』
 
 
  [2007. 6. 14] 여의도 사무실 직원 조회
 
  左派정권을 몸으로 막겠다는 굳은 의지로 여기에 모셨습니다
 
  『오늘이 경선 67일 전입니다. 경선도 얼마 남지 않았고, 본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여의도에 사무실을 옮기고, 이제 저도 기호가 1번으로 결정된 다음에, 오늘 정식으로 첫 출근하는 날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여의도 캠프에 같이 출퇴근하는 출발하는 날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신고를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여러분이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일을 하시다가 용산빌딩에 와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데 아직도 자리가 제대로 안 잡히고, 효율적으로 협력하는 데 아마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모여서 일하는 뚜렷한 목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좌파 정권이 다시 집권하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전력을 다해 막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더 이상 현 정권이 연장해 가는 것은 우리 국민도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들이 5000만 국민을 대신해서 막아야 합니다.
 
  여러 가지 세력들이 한나라당의 집권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하는 작태가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그러한 여러 가지 음모·음해 이런 것들로, 아마 저를 죽이면 정권을 연장할 수 있다는 그런 방침을 가지고 이 사람들이 음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죽어서 오히려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면 좋죠. 그러나 좌파 정권이 5년 더 연장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기업이 투자하겠습니까? 기업은 다 해외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국민들도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기 때문에 떠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희망이 없는 내일을 보면서 수수방관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명박이 사는 것이 바로 좌파 무능 정권을 금년 연말로써 물러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권력을 잡기 위해 모인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말씀드린 대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그 희망을 실현시켜야 될 책임이 이 시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어떤 대가를 받고 모인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모든 면에서 희생을 하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아마 그렇다면 이 자리에 모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시대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시대의 소명을 분명히 깨닫고 이 시대의 소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여러분과 저는 몸도 마음도 함께 해서, 이 일을 우리 앞에 주어진 역경을 딛고, 우리는 승리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승리가 바로 대한민국의 승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2007. 6. 18]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나들섬 구상 발표
 
 
  [2007. 6. 20] 청년실업 극복을 위한 일자리 창출방안 토론회
 
 
  [2007. 6. 21] 박종웅 의원 등 민주계 인사 李明博 예비 후보 지지 선언 참석
 
  나라 경제가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 섰습니다
 
  『오늘, 어려운 시절에 대한민국 민주화의 정통성이라고 할까, 중심에 서 계셨던 대선배님들이 이 자리에 모이셨습니다.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 내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것이 세계 드문 경우라고 합니다. 민주화를 오늘 세계에 자랑할 만한 위치가지 만들어 주신 선배님들에게 우선 공적을 치하 드리고 싶고, 또 오늘 이 자리에 모이셔서 저를 지지해 주는 이런 모임을 갖게 되어서 저는 정말 감동스럽게 생각을 하고 매우 고맙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그 암울했던 시절에도 희망을 갖고 선배님들께서 해오셨던 그 정신을 제가 이어받아서, 오늘 이 나라가 「좌냐 우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나라 경제가 다시 살아나느냐 죽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서민들은 정말 IMF 때보다 더 어려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정권이 「부자를 어렵게 만들고 서민을 잘살게 하겠다」고 했지만, 부자도 어려움을 당하고 서민은 더더욱 살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대한민국 경제를 살려서 서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그런 생각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약하고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서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이 땅에 태어나 아이들을 키우고 교육을 하고 일자리 주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러한 나라를 만들고 싶은 욕심에서,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자리에 서신 선배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함께 나간다면 저는 그 일을 꼭, 어떤 역경 속에서도 꼭 그 일을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자리에 계신 선배님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07. 6. 22] 충남도당 당원 교육
 
  아무 일 안 하면 그릇 깰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주부가 낮에 일하고 퇴근해서 집에 가서 일하다가 낮에 일 생각하다 보면 그릇에 손 데기도 하고 칼로 손 베기도 합니다. 「야, 이 아주머니가 정신 나갔느냐」 욕하려면 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낮에 가족을 위해 일하고 밤에 자식들 위해서 부엌에서 일하다가 졸다가 그릇도 깨고 손도 델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귀하게 자라면 그릇 깨질 일도 없고 손 벨 일도 없습니다.
 
  저는 일생 살면서 그릇을 깨는 실수도 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 아무도 모르게 손을 데이는 실수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대통령이 되지 못할 만한 그런 결격사유를 가지고 이 자리에 서 있지는 않습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특히 충남의 당원동지 여러분, 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행복도시 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반대를 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행정부를 두 토막 내 가지고 해놓으면, 나라를 운영하기 힘들고 그게 충남에도 실질적인 도움을 못 주니 그거 만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저 사람은 옛날에 반대했으니까 행복도시 되돌아 가버리지 않겠느냐, 이런 걱정하시는 분들 많습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많습니다. 저는 실물경제를 해본 사람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신문을 보고 놀랐습니다. 행복도시 들어오면 서울에서 1만400명의 공무원이 옮겨 갑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에서 발표하기를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기차표를 할인해 주는 제도 만들어준다는 거예요.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사람 특별수당 준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 공주에 근무하면서 점심이나 먹고 서울에서 출퇴근 하라는 얘깁니까?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주말에 노니까 금요일 저녁에 서울 다 가버리고 주말에 텅텅 비는 도시를 만들 겁니까? 무엇이 일어날까 저는 아는 거예요. 이래선 안 되겠다, 그 지역에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래서 교육도 새롭게 만들어지고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보다 그쪽으로 이사하는 게 낫겠다, 이렇게 만들어야 충청도에 도움이 되는 거예요.
 
  그래야 행복도시도 살아나는 겁니다. 이걸 정치적으로 행복도시로 반대하느니 찬성하느니. 제가 초기에 반대를 했지만,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사람도 저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해요.
 
  이미 결정된 사항을 살리기 위해서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더 보태서 제대로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제대로 된 작품이 되지,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저 거짓말하지 않고, 누가 나를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남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한나라당이 화합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의 적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나라당 정권을 막으려는 외부에 연합된 세력이 있습니다. 북한이 한나라당 집권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이 막강한 힘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본선에 가면 나오는 거예요. 한나라당만 똘똘 뭉치는 게 아니고 충청도에서 정치하시는 분도 우리하고 힘을 합하고, 여러 곳에서 정권교체를 원하는 분이 힘을 다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는 거예요』
 
 
  [2007. 6. 23] 대구 기계부품연구원 방문
 
 
  [2007. 6. 23. 10:00] 창원시 상하수도사업소 대산 정수장 방문
 
 
  [2007. 6. 23. 14:00] 대구 당원 교육장 강연(EXCO)
 
  우리는 盧武鉉의 눈물 한 방울에 속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서민이 잘사는 세상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번 선거 때 자갈치시장 아주머니가 하소연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콧잔등이 시큰하더라구요. 거기 속았지 않습니까, 우리 전부. 우리가 거기에 모두 속아가지고, 또 우리 이회창 후보,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선거 때 흠 있는 사람으로 아주 그냥 만들어 버렸어요. 선거가 끝나고 보니까, 미국 갈 때 20만 달러 줬다는 사람, 감옥 갔죠? 어느 건설회사가 15억 줬다는 사람, 어쩔 수 없이 준 것으로 장부 만들었다고 해서 처벌 받았죠. 다방에서 돈 주고 면제받았다 했던 그 김대업이 엉터리라고 다 나타났잖아요. 선거가 다 끝난 다음에 상대후보가 대통령된 다음에 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서민이 잘사는 세상 되었습니까, 중소기업이 잘사는 세상 되었습니까, 생계형 자영업 잘되고 있습니까? 재래시장 상인들 장사 잘되고 있습니까, 농촌이 잘되고 있습니까? 부자를 괴롭혀서 서민을 잘살게 하겠다고 했는데, 부자를 괴롭혀 봤자 부자는 부자고 없는 사람은 점점 더 못 사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부동산을 잡자고 하면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고. 그건 왜 그렇습니까? 경험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살림을 살아본 일이 없어요. 말만 그럴싸하게 했습니다. 그 말에 다 속았습니다. 서민을 위한다고 눈물 한 방울 뚝뚝 흘리는데 다 넘어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화려한 말로 국민을 현혹하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는 그 말씀을 우리 당원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2007. 6. 25] 충북도당 당원교육(청주시민회관)
 
 
  [2007. 6. 26] 한나라당 고문들과의 식사
 
  후보 간의 비방·윤리委 제소 중단하겠습니다
 
2007년 5월17일 강원 태백중앙병원에 입원한 진폐환자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는 李明博 당선자.

  『무척 바쁘실 텐데, 날짜를 자꾸 변경시키고 시간도 변경시켜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우선 이렇게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당이 보시기에 심려를 끼쳐 드린 것 같고, 앞으로 우리 당의 승리를 위해서 나가는 길에 제가 모시고 자문도 받고 여러 가지 해야 될 일도 있고 해서 모셨습니다.
 
  어제 저녁에 사실은 저희가 당에서 검증위위원장, 윤리위위원장 모두 함께, 당직자들과 후보들이 저녁을 같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제 처음으로 당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후보들도 서로 화합하고, 「외부에서 공격을 받을 때는 누가 공격을 받든지 함께 힘을 모아 대적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와서 모두가 후보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럴 때 당내에서 같이 협조하지 않으면 국민들이 볼 때 나쁜 인상을 주게 되고, 우리 당의 정권교체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 후보들이 다 합의했습니다.
 
  후보 간에는 어쩌면 그러지 않을 수 있지만 후보를 보좌하고 있는 보좌진에서 지나치게 충성경쟁을 한다고 하면 이것이 자꾸 언론에 잘못 비치고 하니까, 후보들이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책임이 있지 않느냐, 저 자신부터 후보 간에 서로 비방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중지하겠다. 나 자신도 그렇게 하도록 앞장서겠다는 이야기를 제가 어제 저녁에 했습니다. 제 생각에 어제 처음으로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단합하는 모습이 있었고, 오늘 아침 신문에도 웃는 모습으로, 요 근래 처음인 것 같습니다
 
  조금 전 박희태 위원장과 몇 분이 모여서 어제 저녁 그러한 모임을 가졌으니까, 후속조치로 당 윤리위원회에서 일단 우리가 제소한 것은 전부 취하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박희태 위원장을 위시해서 모두가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 그것이 또 국민들 보기에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일단 저희 캠프에서는 상대 후보 캠프에 제소된 모든 것들을 취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선 보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그 약속을 지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경선 기간에 경쟁은 하지만 국민들이 볼 때 화합하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나가는, 어렵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 길로 가겠다는 말씀을 보고 드리고, 저희도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2007. 6. 29] 전쟁기념관 서해교전 전사자 명비 참배
 
  북한이 赤化통일 유지하는 한 안보의식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李후보는 헌화 및 묵념 후 방명록에 「대한민국은 님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지금 다시 국민들 사이에 경제·안보 이 두 가지가 피할 수 없는 사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정신력으로 안보를 지켜야 합니다. 안보는 기본적으로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더 중요한 것은 안보 의식이겠죠. 요 근래 다행스럽게도 그런 안보의식이 다시 논의되고 있어요. 우리가 지구상 유일하게 분단된 나라이고, 북한이 적화통일을 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한 우리가 안보의식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적화통일 하지 않겠다」, 「평화로 가자」, 이게 아니고 그 사람들 노동규약 전문에 보면 적화통일 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또 모든 총부리가 남으로 향해 있고』
 
 
  [2007. 6. 30] 강원도당 당원교육(춘천 문화예술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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