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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08년 1월호

이명박의 大長征 537일 - 지도자의 상상력이 나라를 바꾼다! [1]

[독점 入手] 李明博 캠프가 기록한 원고지 1만2000장 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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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한나라당 李明博 대통령 후보 캠프
정리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
사진 : 李五峰 月刊朝鮮 객원 사진 기자
李炳勳 前 조선일보 사진부장
  <편집자 注 - 李明博 대통령 당선자가 2006년 6월30일 서울 시장 퇴임 후 17代 대통령 당선까지 걸린 기간은 537일이다. 李明博 당선자는 수많은 국민들을 만나고 국민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던졌다. 「BBK 의혹 攻防」으로 끝나버린 大選 선거운동 기간에도 李明博 前 시장은 자신이 펼칠 경제·사회정책의 얼개를 그렸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의혹폭로 공방에 묻혀버렸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대외 활동을 기록한 원고량은 200자 원고지로 1만2000여 장에 달한다. 대내 활동 및 해외 방문, 기록되지 않은 외부 활동을 포함한다면 李당선자가 서울 시장 퇴임 이후 얼마나 숨가쁘게 달려 왔는지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孫鶴圭 前 경기도 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에 대한 소회, 박근혜 前 대표와 경선 과정에서 벌였던 검증 공방에 대한 소회, 이회창 前 한나라당 총재의 大選 출마 선언에 대한 소회, BBK 의혹 사건에 대한 소회 등이 「날것」으로 실려 있다.
 
  이 기록을 읽어 보면, 그의 지나온 삶을 여과 없이 볼 수 있고,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 무엇인지를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다. 李당선자의 어투를 그대로 살려 게재했다>
 
 
  [2006. 8. 8] 자연농업연구소 농민 간담회
 
  「월급받는 일자리」가 내 꿈이었습니다
 
2007년 8월15일 청계천 태극기 나눠주기 행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저는 시골에서 농업하시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시골 작은 농토에서 다섯 형제가 다 먹고 살 수 없으니까 도시로 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뿌리가 농업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점점 줄어들어서 적은 규모이지만, 농업은 경제로만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정서적으로 모든 국민이 농업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혹자는 농업이 적은 규모여서 너무 많은 예산을 들이고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기업에 들어와 작은 일도 해 보고 큰 일도 해 봤습니다.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지만 그런 속에서 경쟁력 갖기 위해 더 노력해서 일어났습니다.
 
  농촌에서 서울 올라와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 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매일 아침 인력시장에 일하러 나가면 200명 중에 50명 일할 수도 있고, 30명 일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저는 야간상고 나와서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정처없이 올라와서 달동네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데 한 달에 열흘에서 열이틀 정도 밖에 일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월급이 아무리 적고 작업 조건이 아무리 나빠도 좋으니 월급받는 일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 현대는 종업원 98명이던 작은 건설회사였어요. 얼마나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지 몰라요. 들어가니 월급 나오잖아요. 소원이 풀린 거예요. 회사가 점심도 주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감사한 마음으로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죽었다 다시 태어나도 그만큼 열심히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을 했더니 병이 나지 않아요. 하루에 한 20시간씩 일한 것 같아요. 일 더 했다고 잔업 수당을 더 받아본 일도 없었어요. 종업원이 98명인 회사에 입사해서 제가 회사 그만둘 때 16만8000명이 되었어요.…
 
  어쩌면 농업의 앞이 깜깜하고 희망이 없어 보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 때문에 생명을 포기합니다. 포기했다가 다시 도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남들 절망할 때 절망하지 않은 것이 남들과 달랐고 지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농업이 100% 절망은 아니에요. 절망 속에서 희망 찾은 사람이 있어요. 제가 기업할 때 보면 불경기 속에서 자기 노력에 따라 경기를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농업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께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2만 달러, 3만 달러, 4만 달러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지도자 만나서 우수한 국민들의 힘을 합치면 10년 안에 4만 달러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농사가 활기를 띨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잘 살면 아무리 비싸도 좋은 것을 먹겠다고 하거든요. 돈을 좀더 지불하더라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그것에 목표를 맞춰서 농업 하면 지금은 어렵지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겠지만 길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2006. 8. 10] 청주 농수산물 시장, 상인 간담회
 
  기업하고 장사하는 분 보면 힘이 솟습니다
 
  『상인분들에게 불편을 드린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방 중소도시 다니면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앉아서 듣는 것보다 좋겠다고 생각해서 왔습니다. 욕을 조금 먹을 셈 치고 왔습니다. 많은 사람 다니고 기자 다니면, 장사 안 되는 분께서 보시면 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왔는데,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갑니다.
 
  저는 사실 기업하시고 장사하시는 분 보면 힘이 솟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나 장사가 되나 안 되나 관심이 갑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 「이 집 장사 되나 안 되나」 본능적으로 생각합니다. 가게에 들어가면 이 가게 물건이 좋은지 값이 좋은지, 이전에 장사 되는가 안 되는가 생각하거든요. 요즘 50대, 60대만 되면 일자리 떠나는 불안 속에 살기 때문에 어느 계층도 편안한 사람이 없어요.
 
  장사 안 되고, 젊은 사람은 일자리 없고, 50대만 되면 떠나야 하고 모든 국민이 스트레스에 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눈만 뜨면 기분 좋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경기가 살아나서 상인, 농민, 활기 살아나서 유통시장도 싼 값에 좋은 물건 소비자에게 공급하고….
 
  제가 가락시장의 생선 파는 수산시장에 가보면 칼질해서 생선 머리 자르고 해서 냄새가 하도 많이 나서 이것을 어떻게 할까 아무리 연구해도 아이디어가 안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냄새 없습니다. 생선 토막 자르면 통 속으로 쏙 하고 빠져나가서 다른 코너에 나가서 처리합니다. 그러니까 소매로 물건 사시는 분이 더 많아졌어요. 야채는 냄새가 덜 나잖아요. 생선 냄새가 전체에 영향을 주니까. 그래서 돈을 좀 많이 들여서 했습니다. 정부가 할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재래시장 500m 안에는 마트가 설 수 없습니다. 제도적으로. 조금 어쩌면 시장 경제에 안 맞지만, 강자와 약자 입장에서 보면 불공정하다는 원리가 있는데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정부는 강자는 자기 힘으로 살게 지원할 필요 없고 간섭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약자를 도와줄 것이냐,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정부가 강자를 간섭하다 보면 약자도 도와주지 못하게 됩니다. 시장경제에서는 경쟁에서 이긴 사람만 살아나는데, 진 사람, 근본적으로 경쟁 못 하는 사람을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 정부가 배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길바닥에서 장사하다가 가게 들어서 하다가, 노동자 하다가 조그마한 기업에 들어갔는데 그 기업이 재벌이 되어서 저는 노점상, 구멍가게, 대기업 심정을 아는 입장입니다. 저같이 그런 경험을 다 한 사람이 흔치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서울시장 떠난 지 한 달 넘었기 때문에 백수가 되었습니다.
 
  직업을 하나 얻기는 얻어야 하는데, 얻어보려고 열심히 쫓아다니는데, 더운 날씨에 시장, 도의원이 나와 주셔서 함께 해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힘이 닿는다면 수도권보다 약한 지방, 비교우위에서 약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2006. 8. 10] 경남 산청향교 방문, 남명 조식 선생 사당 방문
 
 
  [2006. 8. 21] 충북 오창단지 방문
 
  종업원 거느린 기업인이 애국자입니다
 
2006년 9월23일 뉴라이트신노동연합 출범식에서 權容睦 대표와 함께.

  『잘 되는 중소기업보다 잘 못되어서 문 닫기 직전인 기업들을 몇 개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왔습니다. 첫 방문지인데, 와 보니까 중소기업만이 아니고 LG 같은 큰 기업도 와 있네요, 저는 중소기업을 보려고 왔습니다.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해요. 요즘 대한민국에서 기업하는 사람들의 의욕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우리가 창업할 때는 무모할 정도로 투자를 하고 그랬는데 요즘 노사관계·인건비 관계·제도적 관계, 여러 가지 분위기가 기업하시는 분에게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창업해서 종업원 두 사람만 있어도 애국자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업하는 사람이 존경받아야 하고, 불편 없도록 웬만하면 한국에서 기업하는 것이 좋도록 의욕, 분위기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치하는 사람들이 눈만 뜨면 중소기업 지원,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든다고 오랫동안 말했어요. 제가 기업에 있을 때도 듣고, 국회의원이 돼서도 듣고, 공직자 4년 동안도 듣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싱가포르에 가면 이광요 수상이 5분짜리 비디오를 보여 줍니다. 비디오에 처음 나오는 것이 「싱가포르는 親(친)기업국가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인상적입니다. 한 나라 수상이, 일개 외국 기업인을 앉혀 놓고 비디오 틀어 주는데 그 비디오 제목이 그거예요.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요. 저는 지금 도울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들을 수는 있으니까 참고해 주시면, 저는 항상 기업인 입장이에요. 내가 27년 기업 하고, 親기업적인 사고를 하고, 저는 서울시장 4년 동안 기업경영 마인드로 했는데, 기업경영의 효율성과 행정 공익의 접목 시험이 비교적 효과적으로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기업하시는 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2006. 9. 13] 안철수 연구소 방문
 
 
  [2006. 9. 18] 원불교 종법사 면담
 
 
  [2006. 9. 23] 뉴라이트 신노동연합 출범식 참석
 
  사용자와 노동자가 함께 가야 합니다
 
  사회자: 현대엔진 회장의 자격으로 권용목 대표를 해고했던 분이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때는 해고했지만 오늘은 축사하러 와 계십니다. 새로운 인연으로 출발하시는 李明博 前 서울시장님 모시고 축사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살길은 사용자와 노동자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이 새로운 뉴라이트 新(신)노동, 이 운동이, 이 문화가 전국에 모든 산업사회에 빠른 시간 내에 퍼져나가면, 그것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젊은이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습니다 40~50대에 일자리를 떠나야 하는 불안감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로 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행동으로 나섰습니다. 정치도 행동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부도 행동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권용목 대표를, 이 들어오는 문 앞에서 오래간만에 마주했습니다. 저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권용목 대표도 저를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뜻을 모으고 마음을 모으고 이 운동에, 뉴라이트 전국연합에 新노동운동을 하겠다는 이 운동에 적극 힘을 실어 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놀면서 편안하게 하면서 행복 찾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서 행복을 찾는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바로 그 길임을 오늘 권용목 대표의 선언 속에서 우리는 찾았습니다』
 
 
  [2006. 9. 28] 한반도선진화재단 축사
 
  『우선 축하합니다. 우리 박세일 박사님 축하드리고요, 잘 사는 나라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데, 아마 이 재단이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다가 열심히 살면서 1만 달러까지 만들었습니다만, 각 분야가 후진국 정도 수준에 머문 분야가 많습니다. 이제까지는 선진화되지 않은 시스템을 가지고도 살아왔지만, 앞으로 더 잘 살려면 우리 사회 각 분야가 선진화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더 잘살 수 있지 않나 생각하고요. 그 점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제 시기에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또 뜻을 같이하는 분들이 협력해서 이 나라를 선진화하는 데 크게 기여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6. 9. 29] 뉴라이트학부모연합 창립 축사
 
 
  [2006. 9. 30] 고향 포항 죽도시장 방문
 
  야간이지만 동지상고를 졸업한 것에 매우 감사합니다
 
  李明博 前 시장은 오전 6시 50분 포항 죽도시장을 둘러보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죽도시장 상인들과의 간담회를 마치고 포항공과대학으로 향했다. 박찬모 포항공대 총장은 『청계천이 복원된 것을 보고 「가능성 사고」를 갖고 일을 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李 前 시장의 방문을 환영하였다.
 
  『옛날 기업에 있을 때 세계에 나가 보면 땅덩어리 넓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부러웠습니다. 대한민국은 국토는 좁고 인구는 많고 무슨 희망이 있을까 했지만, 지금은 훌륭한 과학자 한 사람만 있으면 유전보다, 가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엔 포스코가 있어서 포항공대가 있다고 했지만, 지금은 포항공대 있어서 포스코 있다고 생각하고, 미래에 포항공대가 포항 발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에 크게 기여할 겁니다』
 
  李明博 前 시장은 이어 고향인 흥해읍 덕성리 선영을 참배했다.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가 모처럼 찾아오니까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만나는 분마다 반가운 사람들이고, 또 옛날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어서 옛날 생각이 나고, 제가 야간상업고등학교 졸업하고 떠날 때는 눈물로 떠났죠. 하지만 오늘 웃으면서 돌아오니까 감회가 새롭죠. 만나시는 분들이 다 너무나 진심으로 반겨 주고, 이런 감회를 처음 느껴 보는 것 같습니다. 요번 추석은 아주 보람 있는 것 같습니다』
 
  고향마을을 떠나 李明博 前 시장은 모교인 동지상업고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제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우리 동지고등학교가 그렇게 고마운 것을 못 느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비록 야간학교지만 동지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게 있다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 남들이 좌절하고 포기할 때, 저는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삶을 통해서 직장인이 되고, 기업에 들어가서 기업이 어려워져서 부도 직전까지 갔을 때, 다른 사람들, 특히 머리 좋은 사람들이 「퇴직금받을 수 있을 때 빨리 떠나야겠다」며 떠났을 때, 저는 내 집을 팔아서라도 회사를 살리고 싶은 심정으로 일했습니다. 결국 이후에 내가 소속된 회사는 작은 회사에서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떠나갔던 사람들은 자기 잘 하려고 떠났지만, 어려울 때 제 자리 지킨 사람들이 결국은 더 앞서가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내 자신보다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일하고자 합니다. 내가 사회로부터, 그리고 학교로부터 받은, 또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경륜, 지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서 일할 때가 되었다고 저는 감히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그런 삶을 통해서 저 자신이 행복하고, 사회가 행복하고, 이 나라가 행복해지는 일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李明博 前 시장은 영흥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영흥초 37회 졸업생 동기들과 선후배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눈물 흘리면서 고향 떠났던 그때를 제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는 어떻게 하든지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길바닥에서 장사를 했기 때문에, 계속 장사하기 창피해서 어떻게든 아는 사람 보지 않는 낯선 곳으로 가겠다고 열차 타고 서울 올라간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긴 세월 같지 않지만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웃는 얼굴로 고향 찾게 된 것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6. 9. 30] 포항공대 방문
 
 
  [2006. 10. 3] 청계천 걷기 행사 참여
 
  ─여론조사가 1등으로 나왔는데 기분 좋은가?(기자의 질문)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걸 가지고 일희일비할 것은 없고, 그저 열심히 해야죠. 지금은 국민들이 너무 어려운 때니까, 조금 전에 오다가 중간에 일부러 지하상가에 가 본 거예요. 거기가 옛날에 제일 장사가 안 되고 힘들었던 곳이에요. 그랬더니 환경이 좋아졌는데 장사는 지금 너무 안 된다고. 시골에서 오신 분들이 거의 「절망스럽다」 라고 표현을 해요. 이런 상황이니까 정치인들, 특히 대권후보라는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하는 것이 국민 정서에 안 맞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이죠. 국민 바닥의 정서가 지금 그런 것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저도 오늘 상가에 가 보고 절실히 느꼈어요』
 
  ―당내 「오픈프라이머리」(당원 외에 일반 국민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참석시키자) 에 대해서 어떤 입장인가?
 
  『경선의 당사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할 입장이 아니라고 보죠. 모든 것을 당에 다 맡겨야죠. 여당은 조용한데 한나라당만 이런 경선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국민들이 보기에 좋은 것은 아니에요. 우리끼리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서로 존중하고 서로 흠집 내는 것을 삼가는 것이 한나라당 승리를 위해서 좋다고 보고 그런 자세로 하려고 하죠』
 
 
  [2006. 10. 10] 청계천 복원 1주년 행사 참석
 
  2008년 3주년 기념식을 내가 주최하겠다
 
  『세월이 지나 벌써 1년이 되었고 시장직을 떠난 지 벌써 3개월 되었죠. 100일 되었는데 나오고부터 계속해서 바빠가지고 시장직을 계속 수행하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이 안 돼요. 우리가 1주년, 2주년을 보내고 내년 이맘때쯤 2007년 10월은 내가 되게 바빠야 될 때인데… (웃음). 그래도 2주년 기념은 만사를 제치고라도 참여하려고 합니다. 2008년 10월에 3주년 기념할 때는 내가 주최할 테니까(웃음)』
 
 
  [2006. 10. 11] 대구 서문시장 축제 참석
 
  재래시장은 그 도시의 文化공간입니다
 
  『저는 전국을 다니며 한국경제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정말 살기 힘들다고 합니다. 특히 대구에 근래 자주 오면서 우리 대구시민들께서 「대구 경제가 너무 어렵다, 대구가 앞으로 살길은 무엇인가, 대구의 희망은 무엇인가」,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래시장에 가보면 많은 분들이 한숨을 쉽니다. 저도 서울시장을 할 때 재래시장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70여 개의 재래시장의 환경을 개선했습니다. 저는 고향이 포항입니다.
 
  저희 어머니가 포항시장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저는 서울에 올라가서 노동자 생활을 거쳐서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저에게 환경미화원이라는 일자리를 줬습니다, 그 작은 재래시장에서 새벽 4시에 나와서 시장 열리기 전에 시장의 쓰레기를 한강변에 버리는 일을 4년 동안 하면서 저는 대학을 다녔습니다. 저희 부모는 포항 죽도시장에서 삶을 살았고, 저는 어려서부터 재래시장에서 부모님의 애환을 보며 자랐습니다,
 
  재래시장이 많은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시대 변화에 따른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재래시장이 살길이 있느냐」고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이야기하건데, 세상이 변화하고 더 좋은 세상이 오더라도 우리는 재래시장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도 외국에 가보셨을 겁니다. 저 런던이나, 파리에 가면 세계 모든 관광객을 대표적인 재래시장에 안내하고 거기에서 두세 시간 풀어놓고 만나자고 하면 대표적인 도시 재래시장에 전부 가서, 먹고, 마시고, 물건을 사고…. 그 재래시장이 그 도시의 문화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문화이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은 백화점보다는 재래시장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슈퍼마켓이 편리하고 백화점이 편리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와 도시의 문화를 알려면 재래시장에 가야 합니다,
 
  서문시장도 많은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계획에 의해서 잘 될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대구 경제가 좋아져야 대구 사람들이 서문시장을 찾을 것입니다. 역사를 가진 서문시장은 대구에 제한된 서문시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서문시장이 되어서 대구를 찾는 외지인이 서문시장을 꼭 한 번 거쳐 가도록 만든다면 서문시장이 부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서울의 경제만으로, 수도권의 경제만으로 대한민국이 살 수 없습니다. 앞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한 광역경제권이 다시 살아나서 대한민국 경제도 살리고, 한숨 쉬고 있는 재래시장도 살리고, 지금 걱정하고 있는 대구시민 얼굴에 화색이 돌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나아갑시다』
 
  [이명박 前 서울시장의 시장바구니]
 
  李 前 시장은 행사가 끝난 뒤 도라지를 파는 할머니로부터 안동 약도라지 1만원어치를 구입했다. 덤으로 많이 넣는 할머니에게 『너무 많이 넣지 말아요. 돈만큼만 줘요』 라고 했다.
 
  상인들은 『경제를 살려 주세요』, 『열심히 합시다』 라며 손을 맞잡았다. 이어 자두 5000원어치, 포장마차에서 찹쌀 호떡 등 6000원어치, 그리고 지난 해(2005년) 말 화제 피해를 입은 가게에서 티셔츠와 남방 각각 한 벌씩을 샀다. 총 8만8000원 어치 시장을 봤다. 李 前 시장을 만난 상인들은 『실제로 보니까 멋있으시네요』, 『열심히 합시다』, 『경제 좀 살려 주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2006년 12월17일 동두천 지역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2006. 10. 13] 윤봉길의사 추모음악회 리셉션 참석
 
 
  [2006. 10. 13] 무교동 「MB 팬클럽 연대」 회원들과 대화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자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李 前 시장은 서울 무교동 한 호프집에서 열린 MB 팬클럽 연대 모임 「강한 대한민국을 위한 MB연대 정기모임」에 오후 10시쯤 합류했다.
 
  『요즘 제가 지방을 다니면서 보통 새벽 1시에 도착합니다. 아침 7시에 조찬이 있어서 나오고 해서 목이 많이 쉬었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제 얼굴보다 실물이 좋다는 것도 다 아실 것이고. 유인촌이나 유동근씨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다 인정을 했어요. 자신 있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저는 대한민국의 권력을 잡자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경영자가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분명히 뜻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렇게 능력 있는 국민들로 세계 최고의 나라를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여러분의 책임이 아니고 지도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을 가지고 통치하는 시대도 지났습니다. 분열과 갈등으로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시대도 지나가야 합니다. 이념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젊은이에게 희망을 주고, 노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장애자에게 희망을 주고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을 부모님들이 자신 있게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갖고 키워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보면서 늘 부정적으로 세상을 생각하고 무엇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능하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류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우리는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온 세계를 다니면서 뜨거운 열사에서부터 동토의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온 세계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을 했습니다. 내가 가진 경험, 내가 가진 지혜, 내가 하겠다는 정열, 내가 도전하는 용기, 내가 가진 것 이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이 대한민국의 희망을, 꿈을 이룰 수 있다면 이 자리에 있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2006. 10. 20] 해남 재보궐선거 지원 유세 현장
 
  『팍팍 밀어줘 버릴텡게 좀 잘 해보라고잉』
 
  李 前 시장은 한나라당 설철호 후보 지원을 위해 전남 해남군 해남읍 매일시장을 찾아 시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상인들의 손을 맞잡았다. 생선 비린내 난다고 손사래 치는 상인들의 젖은 손을 덥석 잡으며, 설철호 후보에 대한 지지를 부탁했다. 李 前 시장은 직접 거리 유세를 위해 마이크를 잡지는 않았지만 『2번 후보 한번 밀어 주세요』, 『한 번도 안 찍어 봤죠, 이번에 한번 찍어 봐 주세요』 라며 상인들을 설득했다.
  이른 시간이라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은 많지 않았지만, 상인들의 반응은 최근 두 자리대로 오른 호남지역에서의 지지율을 반영하듯 긍정적이었다.
  상인들은 『반갑습니다』, 『멀리 오셨네요』, 『영광입니다』 하면서 李 前 시장을 반갑게 맞았고,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임영임(60)씨는 『경제를 살리는 李明博 시장님이시구만요』 하며 李 前 시장을 먼저 부르기도 했다.
  상인들은 『한나라당 체질을 바꿔 주세요』, 『팍팍 밀어줘 버릴텡께 좀 잘 해보라고잉』, 『긴장하십시오. 일 열심히 하시고요』, 『문이 열렸으니까 신경 좀 써주쇼잉』 하며 기대 섞인 고언을 했다.
 
 
  [2006. 11. 1] 강원지역 상공인 오찬간담회
 
 
  [2006. 11. 2] 영산강 학술 심포지엄
 
  우리는 江을 하수구로만 이용해 왔습니다
 
  『저는 「한반도의 강을 서로 연결해서 물길을 잇자」, 「민심이 물길 따라 가고 하나가 되고, 경제 효과보다 더 큰 대한민국 제2의 국운 융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라고 말해 왔습니다. 「영산강의 뱃길을 열자」는 계획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는 강과 바다를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만 달러까지 발전하는 과정에 강을 하수구로만 이용했습니다. 폐수 버리고 맑게 만들려고 돈 쓰고, 생산적으로 이용하지 못했습니다.
 
  구라파에 가 보면 강이 도로와 같이 연결되어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독일 7500km, 네덜란드는 국토가 남한의 40%밖에 되지 않지만 5300km로 도로보다 물길이 더 세세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운하로 인해 구라파는 균형 있게 발전했습니다. 하나가 되었습니다. 운하가 있어서 강이 연결되어 있어서 이미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고, 경제가 하나가 됐고 그것을 바탕으로 EU로 하나가 되었습니다다. 며칠 전에 다녀왔지만, 구라파 여행하면서 고적도 보고 경치도 봤습니다만, 조금만 관심 가져 보면 뱃길이 북해에서 흑해까지, 배를 타고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라인 강, 도나우 강, 마인강… 다 연결이 돼요. 170km 떨어져 있는 거리를 200년 전 조상들이 뱃길을 이었습니다. 근래 60년 전에 더 큰 운하 170km를 뚫어서 연결해서 북해 네덜란드에서 물건 실어서 그리스·터키로, 온 세계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바다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바닷가에 사시는 분도 산 속에 들어와서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21세기 해양시대, 특히 광주 전남이 해양 시대를 열어야 할 가장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꿈 꿔왔던 것이 현실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제 부산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호남으로, 신의주까지 사통발달 뱃길을 연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정서가 하나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검토한 전문가들의 토론과 연구가 결실을 맺고 뱃길 여는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가까이 왔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꿈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꿈이기도 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영산강 뱃길 여는 일이 먼저 착수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저도 이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적극 협조해서, 뱃길 열려서 지역 발전하고 사람 모여드는 살아 있는 지역으로 탈바꿈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좋은 성과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6. 11. 13] 한반도대운하 심포지엄
 
  운하를 뚫어 국운을 융성케 하겠습니다
 
  『2002년 청계천 복원을 구상하고 발표했을 때 많은 분들이 찬성보다는 반대를 했습니다. 기술적으로 어려울 것이고, 사회적 갈등 때문에 어려울 것이고, 교통 때문에 어려울 것이고, 22만 명의 이해를 달리하는 상인들이 있어 이 일은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주셨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 반대하던 사람의 논리를 저희가 귀담아 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의존했더라면 오늘날 청계천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은 불쑥 어느 날,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내놓은 즉흥적인 발상이 아닙니다. 1996년 7월 제15대 국회 본회의에서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발표를 했습니다. 운하는 미래 대한민국이 3만 달러, 4만 달러 소득의 경제로 발전하는 데 대비할 뿐만 아니라, 국운이 융성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권이든지,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라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꼭 10년 전에 발표했었습니다. 그것이 학자들의 손에 의해서, 민간 연구소에 의해서, 관심 있는 저 자신에 의해서, 오랫동안 검토가 되어온 것을 1만, 1만5000달러를 11년째 머뭇거리고 있는 대한민국 미래를 위해서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2006. 11. 15] 한국교총 간담회
 
  『중학교에 다닐 때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 어떻게든지 저를 고등학교에 보내보려고 부모님에게 고등학교를 꼭 보내달라고 했던 그 선생님 덕분에, 시골에서 야간상업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습니다. 단칸방에 다섯 번, 여섯 번 찾아오셔서 그 선생님 덕분에 야간상업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관악구 달동네에 살면서 제가 노동자 생활할 때였습니다.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으면 그래도 세상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노동자 생활에는 졸업장이 필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대학을 가려고 마음먹고 청계천 6가 고물상에 가서 책 구해서 시험을 치려고 할 때, 야간학교 졸업장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졸업장이 없었으면 대학도 갈 수 없었고, 아마 일당노동자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앞으로 이 나라 교육이 제자리를 찾고 교육이 살기 위해서 이 나라가 어떤 형태로 가야 할까, 어떤 지도자가 되는 것이 좋겠는가,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또 여러분이 지나치게 정치에 편승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2007년은 위기와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그것은 교육 분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2006. 12. 1] 전북 익산 양계농장 방문(조류독감 피해 지역)
 
  李 前 시장은 전북 익산 성당면 장선리에 있는 양계농장을 방문하였다. 11월19일과 27일에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한 농가로부터 반경 10km 이내인 경계지역에 위치한 농장에 도착한 李 前 시장은 방역복으로 갈아입고 양계장에 직접 들어가 닭 사육 현장을 살펴보았다.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해 양계농가의 걱정이 크고, 닭고기 소비가 줄어 더욱 힘들어 하고 있어서 직접 이곳에 와서 상황을 확인하고자 방문했습니다. 철저한 방역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걱정이 없고, 위험지역 밖으로 전혀 방출되지 않으므로 누구나 닭고기를 안심하고 먹어도 된다는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국민들께서 닭고기를 평상시에 먹는 만큼 걱정 말고 드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농촌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장방문 후 이동 중에 방역 초소 근무 중인 군인·경찰, 그리고 공무원들을 격려하고, 익산 시내에서 닭볶음탕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익산시청 종합상황실을 방문해 공무원들을 격려하였다.
 
 
  [2006. 12. 5] 자유주의 연대 창립 2주년 기념식 참석
 
 
  [2006. 12. 13] 당원간담회
 
  모든 것을 던져야 左派에서 정권을 빼앗아 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2007년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매우 힘들지만 그래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은 2007년이라는 민족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기가 있고, 그 시기에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루 하루 보내면서 시간이 빨리 가기를, 대한민국 대부분 사람이 빨리 가기를, 이것은 바로 국민이 정권 교체해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인해서 한나라당에 거는 기대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달성해야 할 우리의 뜻이기도 하고 국민의 뜻이기도 합니다. 정권 교체하는 것이 매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간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보수 정당이 진보적 좌파 정당에 정권을 빼앗길 때, 설마설마 하다가 빼앗겼습니다. 투표하는 날까지 설마 빼앗길까 하다가 두 번의 정권을 진보적 좌파에 빼앗겼습니다.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진보 좌파에서 정권을 다시 찾아오기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던질 각오하지 않으면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당은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힘을 모아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한나라당이 변했구나」, 「화합을 했구나」, 「한나라당이 저렇다면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이런 기대를 줘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당에서 후보가 더 나올지 모르지만 후보자들은 선의의 경쟁자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협력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협력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해서 아주 아름다운 경선을 통해서 후보를 뽑아야 합니다.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서 똑같은 마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2006. 12. 19]「MB와의 데이트」 현장 중계
 
  공동묘지에서 한 프러포즈
 
부인 김윤옥 여사와 함께.

  김솔아: 오늘이 65번째 생신, 36번째 결혼기념일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사모님께 아침 장미꽃을 드리셨는지, 공동묘지에서 프러포즈하신 사연이 궁금합니다.
 
  『내가 학생운동 할 때 교도소에서 나온 지 한 달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는 제대로 장례를 못 치렀습니다. 장지를 임시로 빌려서 가매장을 했어요. 언젠가 장지를 옮겨서 제대로 하겠다고 형제들이 약속했거든요. 집사람하고 데이트하다가 결혼해도 되겠다고 생각해서 차에 태우고 무조건 야외로 나갔어요. 공동묘지 밑에 차를 세우고 거기 있으라고 하고 나만 올라갔어요.
 
  그런데 저녁이 되니까 조용하잖아요. 내가 어머니께 보고를 했어요. 「결혼할 사람 만났으니까 같이 온 여성과 하겠다」고 보고한 거예요. 그런데 그 소리가 밤이니까 들린 거예요. 제가 내려오니까 심각하게 서 있더라고요. 나중에 보니까 만일 그 말을 듣지 못했으면 저를 이상한 남자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밑에서 듣고 이해를 한 거예요. 간접 프러포즈가 된 것이지. 거기에 더 감동받은 것 같아요』
 
  ―결혼하자고 직접 말씀 안 하셨어요?
 
  『나도 심각해졌고, 결혼할 상대도 심각해졌죠. 그 날은 이야기 없이 헤어졌는데, 그걸 계기로 이야기가 되었죠. 작전이 좋았어, 내가(웃음)』
 
  ―서울시장이 되셨다가 백수가 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나는 일생을, 특이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죠. 노숙자나 거지보다 못한 삶을 살기도 하고, 노동자도 되어 보고, 노동자 관리하는 경영자도 되어 보고, 학생운동도 하고, 다양한 삶을 살았어요. 이런 다양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고 보죠. 중·고등학교 시절 어려웠을 때가 늘 연상되죠. 그때 상황보다는 나은 거죠. 주로 생활을 국내보다 해외에서 경험 많이 하고, 일류기업 CEO들과 경쟁하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를 만날 기회가 많았어요.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를 처음 지을 때 미국 웨스팅하우스에서 기술을 가져오는데, 나하고 둘이서 협상하는데, 나는 젊은 30代 중반 사장이고, 상대방은 수석부사장이에요. 아침부터 시작해서 점심 굶고 저녁 굶고 협상을 계속 했어요.
 
  그 사람은 커피만 마셔도 힘이 나는데, 난 속이 쓰려서, 나중에는 커피 떨어졌다고 하고 보리차를 달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나는 힘이 나고, 그 사람은 커피를 못 마시니까 오히려 조바심을 내더라고. 그래서 「네고(협상)」해서 성공했던 기억이 나요. 협상이 끝나고 한강다리 넘어서 집에 거의 다 가는데 그때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렸어요. 그래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경찰이 애국적인 일을 했다고 백차(경찰차)로 집에까지 데려다 줬어요. 그런 좋은 경찰도 있었어요. 젊은 경찰인데, 내가 애국적인 일을 했다고. 난 그 사람과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협상을 했으니까. 보리차 전략으로 이겼죠』
 
  ―어려울 때마다 李시장님을 일으켜 세우고 견디게 한 원동력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가난했지만 용기를 불어넣어 줬어요.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노력하고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좋아질 수 있다는 기대를 줬어요. 내가 어렸을 때, 여러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양조장 술 찌꺼기 가지고 죽을 끓여 먹으면 어릴 때 얼굴이 붉어져요. 선생님들이 술 마신 줄 알고 불량학생 취급하면 난 울고 집으로 돌아오잖아요. 대부분의 어머니는 그런 모습 보면 사실 본인도 가슴이 아프고 눈물을 흘리잖아요. 내가 못 먹여서 그렇다고.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모습 보이지 않고,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꼭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늘 격려해 줬어요.
 
  보통 어머니는 본인이 못 해주고 그런 일 당하면 얼싸안고 울고 그러는데, 우리 어머니는 혼자 울었을지는 몰라도 자식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늘 격려해 줬어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머니를 만난 거죠. 못 배우고 가난하신 어머니셨지만. 슬픈 사연이지…』
 
  ―제가 스무 살인데, 李시장님은 스무 살 때 뭘 하시고,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난 스무 살 때 노동자였어요. 청계천 7, 8가 인력시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사람들이 편리한 쪽으로 가요. 사기를 치며 사는 사람, 쓰리꾼,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살기 힘들면 그런 쪽으로 휩쓸리기도 하는 거예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지켰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환경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자기를 지킬 수 있고,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자기를 못 지킬 수 있어요. 의지가 중요한 거죠. 스무 살엔 자기 의지를,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한 거죠. 환경을 탓하지 않을 수 없지만, 환경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봐요』
 
  ―어릴 때 꿈이 詩人(시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은,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감성적이라고 해요. 알려진 것과 내 실제하고는 너무 다른 거예요. 다른 데는 감성 없고 터프하고 돌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는 감성적으로 자랐고, 지금도 감성적이에요.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법을 배운 거지요. 많은 사람과 일할 때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할 것인가, 후천적으로 배운 거지요. 35세에 수만 명 일하는 그룹의 CEO가 되었으니까. 거기는 감성적으로 하면 안 되잖아요. 합리적으로 일해야 하죠. 그래서 외부에서 나를 볼 때 감성적인 면을 못 찾은 거죠. 하지만 나랑 오래 같이 일해 보면 알아요. 공무원들도 한 4년 같이 일하니까 나보고 감성적이라고 하죠. 내가 떠날 때 눈물 글썽인 공무원이 수백 명이 되었어요.
 
  내가 어렸을 때는 노트에 詩(시)를 썼어요. 그런데 그 노트를 지금 찾지 못해요. 詩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잘 쓸 수 있는지 없는지 능력 발견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도 내가 나중에 CEO가 되어서 詩 낭송회 멤버였어요. 1년에 한 번씩 낭송회에 참여하고 그랬어요. 해변에서 열리는 詩人여름학교에 바빠도 참여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나는 한국 詩人, 문인들을 대부분 알죠. 그 분들도 날 잘 알고요. 지금도 1년에 한 번 정도 詩 낭송하고』
 
  ―어떻게 생일이 결혼기념일과 같게 됐나요.
 
  『어른들은 결혼날 잡으려면 날짜도 보고 하는데… 내 생일이 12월19일이니까 집사람에게 그 날 결혼하면 안 잊어버리지 않겠느냐. 그래서, 어른들이 잡아 준 날에 하지 말고, 12월19일에 하기로 하자. 어른들에게 생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둘이 합의하에 한 거예요. 잘 한 것 같아요. 생일 되면 와이프가 나 챙기고, 난 와이프 챙기고』
 
 
  [2006. 12. 21] 철원 백골부대 방문
 
  강원도 철원의 백골부대에서는 특별한 족구 경기가 벌어졌다. 각 팀에 6명, 내로라하는 족구 선수들로만 선발된 정예멤버의 경기에 낯선 선수가 한 명 끼어 있었다. 李 前 시장이었다.
 
  방문팀과 중대팀으로 나누어 15점 3세트 경기를 했다. 1세트 15:13, 2세트 18:16, 3세트 15:11로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치열한 경기가 한 시간가량 계속됐다.
 
  결국 경기는 중대팀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李 前 시장은 현란한 발공격과 상대를 교란시키는 함성, 심지어 머리까지 아낌없이 사용하는 공격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코트를 누볐다.
 
  함께 경기를 했던 장병들은 처음에는 「구멍」으로 간주하고 경기를 시작했는데 만만치 않은 실력에 놀랐다고 했다.
 
  李 前 시장은 백골부대를 방문해 휴전선 대치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GP에 근무 중인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수색부대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막내아들이 8사단 오뚜기 부대에서 보병으로 근무했는데, 처음에는 軍 생활에 만족한 것 같지 않은 편지가 와서 걱정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난 뒤 「오기를 잘 했다. 軍에 와서 국가라는 것을 생각하고 동료들과 함께 생활하는 방법을 배우고 큰 보람을 느낀다」는 편지를 받고 흐뭇했어요.
 
  비록 불편하고 힘든 점이 있지만 軍생활을 통해 국가를 생각하고 남과 더불어 생활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매우 소중한 시간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삶에 큰 보탬이 되는 기간이 될 겁니다』
 
2006년 12월21일 백골부대 수색중대 장병들과 족구 시합을 하는 李明博 당선자.

 
  [2006. 12. 31] 서울 반도체 공장 방문(경기도 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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