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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년 1월호

소설가 李淸의 밀착취재 - 인간 李明博

朴正熙의 판단력과 집념+鄭周永의 뚝심+「운명은 내 편」이라는 자신감

李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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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 참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들었어요. 웬만한 사람은 인생이 망가지거나 꿈이 왜소해져서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게 됩니다. 李明博은 고통스런 경험을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시켰습니다』
  필자는 李明博 당선자가 최초의 회고록 「신화는 없다」(1995년 출간)를 집필할 당시 조언을 위해 참여했던 몇몇 멤버들 중 한 사람이었으므로, 李당선자의 내면을 비교적 투명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그 후에도 그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 인연으로 이런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 초 서초동 법조타운의 영포빌딩에 있는 「한국사회문제연구소」. 현대건설 회장에서 물러나 먼 길을 가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던 李明博씨가 만든 개인 연구실이었다. 입구에는 「6·3동지회」라는 간판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요즘 기준으로 「캠프」라고 하기에는 엉성한, 그야말로 李明博의 발판 만들기 前哨(전초)기지쯤 됐다.
 
  지방의 한 대학에 나가 강의하면서 이 연구소에 발을 걸치고 있던 B박사는 그 무렵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가까운 사람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저 사람이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건지 속내를 털어놓지 않아요. 「세상을 한번 먹자. 그러니 고생스럽더라도 (대학을) 버리고 내게 와서 큰 그림을 그려 보자」고 하든지, 아니면 「피차 허황한 꿈 버리고 학교 일에나 충실하라」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고 그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니 도대체 내가 뭘 믿고 저 사람을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결국 李明博씨를 떠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한 해 동안 李明博 후보는 태어난 이후 가장 어려운 전쟁을 치렀다. 그 와중에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들에게 겉치레의 『고맙다』는 인사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남발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정치판에 끌어들이는 일에는 서툰 편이었다.
 
  현대건설에서 오랜 기간 李당선자를 지켜보았던 임원 출신 A씨는 『李당선자는 「내 마음만 그러면 되지 꼭 표현을 해야 하나」 하며 겉으로 표현을 잘 못한다. 그 때문에 상대방은 李당선자를 「냉정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삐칠 때가 있다』고 했다.
 
  정치인으로 나서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우리 힘을 모아 세상을 먹읍시다』 하고 포부를 털어놓거나 술잔을 부딪치며 『세상은 우리 것』이라고 기세 올리는 허장성세를 부릴 줄 모르는 「정치의 아마추어」라는 얘기였다.
 
  이것이 李당선자의 장점이라는 분석이 있다. 허장성세를 부리지는 않으나 대세의 흐름을 자기 쪽으로 돌리는 지혜와 대세의 흐름을 타는 감각은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李당선자만의 장점이자 타고난 능력이라는 지적이다.
 
 
  『나는 사흘간 물속에 처박아 두었다가 꺼내도 다시 숨을 쉰다』
 
  취재를 위해 李당선자와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았던 사람들 중 李당선자가 27년간 몸담았던 현대건설의 前 임원 A씨와 李당선자가 현대건설을 떠나 정계에 몸담은 이후 그를 도왔던 정치인 M씨, 서울 신사동의 소망교회 신도 K씨, 李당선자의 외가 쪽 먼 인척(李후보 어머니 성씨와 같은 채씨)으로 대구에서 섬유업을 하는 C씨, 그리고 한나라당 경선 때 李당선자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경선 뒤 한나라당 大選 후보로 확정된 후에도 李당선자의 비서실 부실장 역을 맡았던 주호영 의원 등을 인터뷰했다.
 
  이 중에서 주호영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모두 「절대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이분들과의 인터뷰 이외에는 李당선자의 회고록 「신화는 없다」와 「절망이라지만 내게는 희망이 보인다」를 참고했고, 필자가 개인적으로 듣고 보았던 일을 일부 삽입했다.
 
  「타고난」 것부터 따지자면 먼저 신체 조건을 살피는 것이 순서다. 李당선자는 신체적으로 남과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병약하고 섬세하며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첫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아주 강골이다.
 
  현대건설에서 그를 「상사」로 모시고 있었던 사람들은 『현대건설이 어떤 회사인가. 병약하거나 심약한 사람은 사장·회장 자리에 단 하루도 앉아 있을 수 없는 회사다』고 한다.
 
  그는 자칭 「통뼈」이다. 언젠가 『나는 사흘간 물속에 처박아 두었다가 꺼내도 다시 숨을 쉰다』고 했는데 이 말은 강한 정신력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지만, 그의 강한 정신력은 「통뼈」인 강한 신체에서 나온다는 것이 정설이다.
 
대학 시절의 李明博 후보(오른쪽에서 두 번째).

 
  「운명은 내 편」이라는 자신감
 
동지商高 야간부시절

  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잔기침을 한다. 젊었을 때 얻은 병, 「기관지 확장증」 때문이다. 기관지라는 장기는 한 번 다치면 평생 회복하기 어렵다는 것이 의학계의 상식이다. 이런 지병을 달고 다니면서 그는 평생을 살아왔다.
 
  어떤 사람들(경쟁 진영)은 『기관지 확장증으로 군대도 못 간 사람이 그 몸으로 (고려大 상과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매일 술을 마시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 사람들은 「李明博 당선자」의 다른 의혹을 파헤치는 데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
 
  그는 지금도 기관지가 시원치 않으나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통령 후보 경선대회와 그 후의 본선인 大選까지 장장 1년여에 걸친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러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후보 경선 때 잠시 떠올랐던 이 「의혹」은 의혹으로서의 동력을 상실하고 곧 사라져 버렸다.
 
  비슷한 사례가 있다. 현대건설 회장 재임時 그는 B형 간염을 앓았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국민들 중 3분의 1이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이고, 그중 상당수는 간암이나 간경화로 전이된다고 한다. B형 간염 바이러스 보균자와 간염 환자는 다르다. 李후보는 간염 바이러스를 보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肝(간)의 염증, 즉 간염을 일으킨 환자였다.
 
  간염 증세의 가장 큰 특징은 몸이 죽도록 얻어맞은 것처럼 피곤하다는 것이다. 눈꺼풀이 마치 무엇으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무겁고, 시도 때도 없이 잠이 온다. 한마디로 병든 닭 같다.
 
6·3사태로 재판정에 선 李明博(오른쪽에서 세 번째).

  현대건설 회장은 하루에 여러 차례 외국 발주자들과 회의 또는 상담을 해야 한다. 李明博 회장은 회의를 하다가 눈꺼풀이 붙으려고 하면 화장실로 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 내고 다시 회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中東의 건설 현장에서 돌발사태가 발생하면 현장 책임자들은 전화로 이 사실을 알리고 회장의 지시를 받는다.
 
  그런데 中東에서 일과시간에 전화를 하면 한국에서는 한밤중이다. 자다가 일어나 中東 현장의 전화를 받은 李회장은 평상시의 목소리로 가다듬어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후 다시 잠을 청했다. 『회장이 자다가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면 뜨거운 사막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같은 이유에서 간염으로 오는 피로증을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그는 노력했다. 「인간 李明博」은 불사신이 아니라 그저 남보다 많이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간암 치료에 일인자로 꼽혔던 서울대학병원의 「肝박사」 김정룡 박사가 치료를 맡았다. 『쉬어야 한다』는 金박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李당선자는 찬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런 식으로 몸을 돌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1년이 흘렀다. 李당선자의 肝을 검사하던 金박사는 깜짝 놀랐다. 李당선자의 혈액에서 B형 간염 항체가 발견된 것이다. 肝이 스스로 바이러스를 극복하고 자체적으로 대항할 면역성을 길러 냈다는 신호다. 이런 사람은 보균자 10만 명 중 1명이 나올까 말까 하다고 한다. 기적이었다.
 
 
  팔이 길어 기성복 안 맞아
 
고려大 재학 시절.

  이렇게 되면 사람은 보통 건방진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통뼈」라는 자만심, 「나는 神(신)이 돌보아 주신다」는 오만에 빠지기 쉽다. 오랜 세월 李당선자를 옆에서 지켜본 前 현대건설 임원 A씨는 『李당선자는 적어도 「운명은 내 편」이라는 생각, 웬만한 질병은 나를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다』고 전했다.
 
  李당선자의 신체적 특징을 하나 더 들자면 팔이 길다는 점이다. 팔이 길어 기성복은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양복은 물론이고 와이셔츠를 맞춰 입어야 한다. 이런 불균형 또는 비대칭 현상은 신체의 다른 부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예컨대 눈), 이런 사소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李당선자는 강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인 강한 의지를 가지고 결함을 극복해 온 사람이다.
 
  『사람 됨됨이를 보려면 술을 마셔 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李당선자는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酒量(주량)은 요즘 폭탄주 2~3잔 정도지만 술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 현대건설에 있을 때는 마실 기회가 많았고, 많이 마셨다. 『술에 지지 않았다』고 A씨는 기억한다.
 
  『현대건설에 입사하기 전 젊을 때 참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들었어요. 웬만한 사람은 그런 고생의 터널을 거쳐 오는 동안 인생이 망가지거나 꿈이 왜소해져서 그저 먹고사는 일에만 급급한 인간이 됩니다. 그중 극히 일부만 고생과 배고픔의 경험을 발전의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능력을 타고납니다.
 
  그런데 이분이 현대건설에 들어왔는데, 건설회사라는 것이 수천 개의 현장이 있으나 현장마다 사정이 다 다르고, 부딪히는 상황이 전부 달라요. 밤을 새워 돌관공사를 해야 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현장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제조업처럼 上下 위계질서 속에서 폼 잡고 있어서는 안 되죠. 특출한 카리스마 없이는 지휘할 수 없습니다.
 
  술은 그 중요한 수단입니다. 鄭周永(정주영) 회장 자신이 하급 직원들과 극장에 가고 술을 마시면서 스스럼없이 어울렸잖아요. 「李당선자가 신입사원일 때, 鄭회장이 신입사원들과 함께 마셨는데 이튿날 아침까지 버틴 사람은 鄭회장과 李당선자 두 사람뿐이었다」는 얘기는 과장되지 않은 현대건설의 면목을 보여 주는 삽화였습니다.
 
  술 자체를 즐겨 마시지는 않았으나 불가피한 자리가 생기면 피하지 않았어요. 결국 건강을 해쳤지요. 간염은 피로에서 오는 병이거든요』
 
 
  노래는 아마추어 수준
 
태국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현대건설 신입사원 李明博.

  술자리는 대개 노래로 이어진다. 음주·가무는 일체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술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지 아리송할 정도로 이 두 가지는 밀착되어 있다.
 
  李당선자는 노래를 잘 부른다.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말고 유행가 이야기다. 말할 때는 목소리가 가늘어서 여성적인 음색인데 노래를 부를 때는 제법 굵은 음량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무대에서의 동작이나 노래 솜씨는 『촌스럽다』는 것이 그의 노래를 감상해 본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
 
  춤이건 노래건 언제 한가하게 제대로 배울 시간이 없었으면서도 현대건설 시절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 위해, 혹은 접대하기 위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으나 어설픈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현대건설 사장이던 시절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유행했다. 李당선자가 이 노래를 좋아했다. 테이프를 사다가 이동하는 차 속에서 맹연습을 했다. 그 덕택에 한때 이 노래는 鄭周永 회장의 「가는 세월」, 「이거야 정말」과 함께 현대건설의 「社歌(사가)」처럼 불렸다. 그러나 李당선자는 맹연습에도 불구하고 「잘 부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술 뒤에는 「노래」만 따라붙는 것이 아니다. 굳이 단계를 따지자면 노래는 2차이고 3차는 따로 있다. 그러나 李당선자에게 「3차」는 의미가 없었다고 「어제의 현대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李당선자의 상사이자 고용주였던 鄭周永 회장의 혈기 넘치는 라이프스타일과 무성했던 소문들, 그리고 한나라당 후보 경선 와중에 불거져 나왔던 이른바 「X파일」을 염두에 두고 「그럼 李당선자는 어떠했을까」, A씨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A씨는 되물었다.
 
  『李선생은 여자 싫어합니까?』
 
  『아니, 좋아합니다. 아주 많이』
 
  얼떨결에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쪽에서도 솔직한 얘기가 돌아왔다.
 
 
  「사장의 품위 지켰다」
 
1981년 신입사원 환영식에서 鄭周永 회장(왼쪽)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李明博 현대건설 사장.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A씨는 『도대체 창조주가 남자의 본능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도덕적으로 절제를 강요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불평을 깔고 李당선자 이야기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그는 神도 아니었고 분별 없는 인간은 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오너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전문경영인은 그 나름의 품위를 지켜야 하고 인간적인 덕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속내는 알 수 없지만, 품위를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좋아하면 그 자리에 있지 못하지요』
 
  ―그럼 李당선자, 아니 李明博 사장, 또는 회장은 술자리에서나 다른 私席(사석)에서 절제를 잘했습니까?
 
  『많이 모시고 다녔는데,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술자리에서 몸가짐이 흐트러지는 것을 본 일이 없어요. 남자들의 술자리라는 것이 워낙 그런 것이어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음담패설이 오가는 것은 당연한 풍경입니다.
 
  李당선자는 옆에 앉은 여자들에게 「왜 이런 곳에서 일하느냐. 열심히 살아라」 격려해 주고, 팁을 두둑하게 주는 편이었어요. 그 이상 관심을 갖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모르지요. 아주 친한 친구들끼리 어울릴 때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지 어떤지는』
 
  술자리도 公的인 것이 있고 私的인 것이 있다. 公的인 자리는 대개 위아래 사람들에게 노출되게 마련이다. 이런 자리에서 李당선자는 『현대건설 최고경영자의 품위를 칼같이 지켰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신변잡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인간」의 내면으로 옮겨 가야 할 차례다.
 
  李당선자의 「인간」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이 현대건설 시절의 「샐러리맨 神話(신화)」의 진실 또는 본질이다. 그는 현대건설에서 27년간 재직하면서 현대가 중소기업에서 국내 제일, 나아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오너인 鄭周永 회장과 함께 二人三脚(이인삼각)으로 기관차 역할을 했다. 입사 12년 만에 이사가 됐고, 15년 만에 사장이 됐으며, 이어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 명실공히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우상이었고, 「神話」였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혹시 鄭周永 회장이 시키는 일을 목숨 아끼지 않고 해내는 「예스맨」, 즉 충직한 기계였나? A씨는 『그 반대였다』고 했다.
 
  『큰 기업을 일으키고 키운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이 갖지 못한 특징이 있게 마련입니다. 鄭周永 회장의 여러 가지 특별한 능력 중에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까다롭고 뛰어난 면이 있었어요.
 
  鄭회장은 발군의 실력을 가진 李明博, 이병규(문화일보 사장) 두 李씨를 발탁하여 평생 신뢰하고 중책을 맡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열심히 일하여 鄭회장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지요.
 
  두 李씨가 鄭회장의 신뢰를 얻은 것이 비단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아닙니다. 현대그룹의 사장단만 수십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모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 「예스맨」이었기 때문일까? 엄밀히 말하면 오너를 제외한 전문경영인 모두 예스맨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너의 취향은 변덕스럽게 변합니다. 예스맨이나 열심히 일하는 사장은 잠시 신뢰를 받을 수 있으나 지속적으로 전폭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아니지요. 오히려 두 李씨는 鄭회장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옳은 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A씨는 『鄭회장과 李당선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수직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다』고 했다.
 
 
  독특한 샐러리맨 철학
 
鄭周永 회장과 윷놀이.

  『물론 여기에는 다른 기업과 차별되는, 의전과 격식보다 실질과 결과를 중시하는 현대그룹만의 독특한 기업문화와 鄭周永 회장의 파격적인 성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李당선자가 지닌 독특한 샐러리맨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철학이란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내 회사」라는 주인의식이었다. 진짜 주인인 鄭회장이 李당선자에게 그런 의식으로 일할 수 있게 허용하는 동안 李당선자는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 「현대」라는 거함이 대양으로 항해하는 데 키잡이 노릇을 했다. 그리고 鄭회장이 「여기는 내 회사이니 흥하든 망하든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정치판에 나섰을 때, 李당선자는 세상 사람들의 예측을 깨고 鄭회장과 결별했다.
 
  건설회사를 비하해서 부를 때 「노가다」라고 한다. 조금 점잖게 표현할 때는 「토목쟁이」 또는 「불도저」라고 한다. 이들 말 속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우직하고 권위주의적인 스타일을 비꼬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기에 정치적 역사성을 덧입히면 「개발독재 시절의 경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비난과 극복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李明博은 「불도저」가 아니라 「햄릿」
 
현대건설 과장이던 29세 때 친구의 약혼식장에서(왼쪽에서 네 번째).

  李明博 당선자에게 「현대 神話」는 영웅담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경쟁 상대에게 「노가다」라고 평가절하하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단서가 됐다.
 
  과연 그는 「불도저」인가? 주호영 의원은 李당선자에게 따라다니는 그런 이미지를 『건설회사 경영인이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일축했다.
 
  『나도 처음에는 李당선자가 남의 말 듣지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인 줄 알았어요. 사실은 반대였습니다.
 
  가끔 언론에서 李당선자를 「햄릿型」이라고 하는데 이게 오히려 「불도저」보다는 더 사실에 가까운 인물평일 겁니다. 李당선자는 계획을 세우는 단계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치밀합니다. 편견과 선입관을 배제하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은 상태에서 조사하고 연구합니다. 그런 다음 일단 결정을 하면 전력을 다해 추진하는 형입니다.
 
  李당선자가 계획한 일들이 성공하는 것은 덮어놓고 밀어붙이는 불도저式 추진력 때문이 아니라 계획이 치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시장 재임 때 반대자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청계천 복원공사와 서울의 교통체계 개편 등이 그런 예입니다』
 
  A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李당선자는 답답할 정도로 결정이 늦을 때가 있었습니다. 결코 후다닥 하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심사숙고하는 단계에서는 아주 치밀했지요.
 
  당시 현대건설은 남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추진해 성공시킨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길이 없으면 찾고, 그래도 없으면 만들어라」는 현대건설의 기업정신을 잘 나타내는 사례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무모하게 덤벼 억척같은 완력으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과 판단이 만들어 낸 성공이었어요.
 
  추진하는 겉모습만 보고 그 前단계인 심사숙고와 치밀한 계획이 노출되지 않으니 밖에서는 현대가 무모하게 일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죠. 이것이 현대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된 게 사실입니다. 李당선자에 대한 이미지도 현대의 이미지와 겹쳐 잘못 만들어진 것이지요』
 
  주호영 의원은 「개발독재」라는 말은 정치적 선동술이 만들어 낸 잘못된 이미지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했다.
 
 
  청계천과 서울市 교통체계 개편
 
  『「개발독재」라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다양한 가치와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 이를 조정하지 않고 하나의 가치만을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을 말합니다. 李당선자가 그런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런 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사고와 행동 양식을 가진다고 보는 것은 큰 잘못이지요.
 
  청계천 복원을 단순한 토목공사로 보는 사람은 눈이 없거나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서울 도심을 관통하는 청계천을 복원하자니 주변에 있던 20만 명의 상인들이 반대했고, 그 외에 무수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李당선자는 이것을 해결하고 청계천 복원을 성공적으로 이룩했습니다. 토목기술이나 우직한 추진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서울시의 교통체계를 개편한 것도 그래요. 공무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교통체계 개편인데 온갖 利權(이권)이 걸려 있고 무수한 이익이 충돌하는 갈등의 온상이기 때문입니다. 역대 시장들이 모두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李당선자는 해냈습니다.
 
  지하철 노조의 파업을 없앤 것도 갈등을 조정할 줄 아는 李당선자 특유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개발독재式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악의적인 修辭(수사)일 뿐입니다』
 
  청계천 복원사업을 단순한 토목공사로 비하하는 데 대해서는 주호영 의원과 A씨 모두 목소리를 높여 반론을 폈다.
 
  『李당선자에게 「토목쟁이」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토목에 대한 모독입니다. 토목을 하찮은 기술 정도로 비하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 탓입니다. 토목, 건축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그 시대 최첨단 과학의 집약이었습니다. 피라미드와 석굴암 속에는 그 시대의 최고 기술과 철학이 녹아들어 있어요.
 
  복원한 청계천이 그저 도심을 흐르는 냇물 정도로만 보입니까? 멀리 동두천에서 내리는 비의 양과 그것이 몇 시간 뒤에 미칠 영향까지 자동으로 측정하는 센서가 있어 이 시대 최첨단 과학의 집약이고, 서울의 문화지도를 바꾸는 예술적 영감의 산물입니다』(주호영 의원)
 
 
  『김유찬은 잘못된 세태의 소산』
 
1996년 4·11 총선에서 국회의원(종로)에 당선된 후 부인 김윤옥씨와 얼싸안고 환호하는 李明博 후보.

  『청계천 복원사업을 별것 아닌 것처럼 평가절하하는 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기존 정치인들 얘깁니다. 수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으나 李당선자는 이 사업의 긍정적 결과를 보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李당선자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입니다. 심사숙고하여 일단 결정을 내리면 과감하게 성사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입니다. 입으로만 떠들면 그만이던 기존 정치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특징을 지녔는데 기존의 정치하는 사람들은 李당선자의 이런 특징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은…』(A씨)
 
  李明博 당선자가 명석하고 뛰어난 추진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라는 데는 대부분 사람들이 동의한다.
 
  그러나 정치, 그중에서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수천만 명의 사람을 다루는 고도의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국회의원 선거 때 도움을 받았던 한 부하 직원을 「제대로 거느리지 못하고」 배신을 당하여 국회의원을 중도에 그만두기도 했고, 大選이 있는 2007년 다시 그 망령이 되살아나 어려움을 겪었다. 바로 김유찬에 얽힌 이야기다. 이를 두고 李明博 당선자의 인간관리 능력에 대한 한계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다.
 
  A씨는 『그것은 李당선자의 문제가 아닌 세태의 문제』라고 했다.
 
  『朴대통령 시절만 해도 정치인이 여야를 넘나들며 정치생명을 이어 가거나 이득을 얻는 것은 상상하지 못했어요. 정치판에도 의리가 있었던 겁니다. 全斗煥(전두환)이 쿠데타로 상관을 짓밟고 일어선 이후 세상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YS가 3당 합당으로 정권을 잡자 가치관에 대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정치판에 일반화된 것입니다.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김유찬 같은 인물이 탄생하고 등장합니다. 앞으로도 돈이나 다른 이득 때문에 정당을 버리거나 동지를 배반하고 팔아먹는 일이 예삿일로 발생할 겁니다. 만약 李당선자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이 27년간 몸담았던 현대 쪽에서 여럿 나온다면 그건 李당선자의 잘못으로 귀착돼야지요. 그러나 김유찬 사건은 잘못된 세태 탓입니다』
 
  李당선자의 선거 캠프에 있었던 M씨의 생각은 약간 달랐다.
 
  『李당선자는 합리적이지 않은 관행이나 행태에 대해 이를 용납하지 못했어요. 선거를 한다는 것은 不法(불법)의 바다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보통 정치인들이 알면서 눈감고 넘어갈 일도 李당선자는 이해하지 못했고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부하가 선거를 이용해 개인적으로 낭비한 지출(예를 들면 술값)까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 때문에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겼지만, 같은 일이 지금 벌어져도 李당선자는 그렇게 행동할 것으로 봅니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 때는 김유찬이 등장하더니 본선인 대통령선거가 李明博후보의 일방적인 독주로 막을 올리자 준비된 「한 방」 김경준이 등장했다. 김경준의 「한 방」도 검찰에 의해 「헛방」으로 판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은 개운치 못하다. 李당선자가 애당초 김경준 같은 사람과 동업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저런 타입의 사람들을 측근에 두지 않을까」 하는 불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3년 넘게 교회 앞에서 교통정리』
 
  李당선자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망교회의 장로이다. 형인 李相得 국회부의장은 같은 교회의 「은퇴 장로」이다. 어머니 채씨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母胎(모태)신앙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李당선자 역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문제는 한국의 改新敎(개신교)가 교리상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못하는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납치사건에서 본 것처럼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방식이 공격적이기도 해서 非종교인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李당선자는 서울시장 재임시에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말로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소망교회 신도 K씨는 『기독교는 공산주의와도 공존해 왔습니다. 배타적이라는 것은 唯一神(유일신) 신앙에 대한 非신앙인들의 과잉반응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미 우리나라는 李承晩(이승만), 金泳三(김영삼)과 같은 개신교 대통령들이 거쳐 갔으나 그들이 종교적 편향성으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장로님은 국회의원 시절, 집사로서 3년이 넘도록 교회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해냈습니다. 남을 위해, 공동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그분의 정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朴正熙+鄭周永+李御寧」
 
  서양에서는 정치인의 자질로서 유머 감각을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李明博 후보 X 파일」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서 별의별 유령들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숨겨놓은 여자와 자식」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 애가 평양에도 있다는구먼』
 
  유머는 위기를 넘기는 수단도 되고 때로는 위기를 낳는 발화점도 된다. 경선 때 그가 어느 道(도)를 방문하자 지사가 농담으로 이런 말을 했다.
 
  『옛날 같으면 지방 내려오시면 官妓(관기)라도 넣어드려야 할 일인데…』
 
  물론 유머를 한 것인데 위험한 순간이었다. 언론이 거두절미하고 이 문장을 잘게 썰어서 보도하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판이었다. 이런 위기 앞에서 李당선자는 같은 농담으로 받았다.
 
  『어제 웬 여자가 왔던데 지사님이 보낸 사람 아니었습니까?』
 
  상상력도 정치인의 중요한 자질이다. 1970년대 중반 李당선자가 현대건설 사장 재임時 건설업단체의 기관지 편집을 맡아 했던 L씨는 잡지에서 건설업의 당면 과제를 놓고 몇 번 현대건설 사장을 좌담회에 초청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조달청장, 건설부의 주무국장 등 행정부의 책임 있는 사람과 업계에서 한 두 사람 초청해 좌담회를 열어 보면 李明博 사장이 단연 발군이었다. 그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고, 국제적인 감각까지 동원해 해결책을 내놓는 데 비상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鄭周永 회장을 잘 모시기만 하면 현대건설 사장이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는 朴正熙의 판단력과 집념에 鄭周永의 뚝심, 그리고 李御寧(이어령)의 감수성을 두루 갖춘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敵이 있다면 그 자신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17代 대통령으로 대한민국號의 선장이 된 李明博 당선자가 싸워야 할 가장 어려운 敵은 내부에 있는 敵」이라는 말은 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자잘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큰 욕망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무수히 보아 왔고, 이 점에서 「인간 李明博」도 예외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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