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바이는 셰이크 라시드, 그의 장남 셰이크 막툼, 그리고 막툼의 동생 셰이크 모하메드라는 영특한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다.
- 1960년대 말의 두바이 크릭 모습.「아브라」라고 불리는 목선으로 크릭 반대편으로 손님을 실어 날랐다. 오늘날에는 디젤엔진으로 움직이는 아브라가 운행된다.
1833년 바니 야스族을 구성하고 있던 小부족 중 알 부 팔라사族 800여 명이 아부다비에서 분리 독립하여 두바이 쪽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들을 이끌었던 인물이 알 막툼 가문의 「셰이크 막툼 빈 부티」였다. 이후 그의 동생 셰이크 사이드가 지도자 지위를 승계했는데, 그는 부족들 간의 분쟁을 조율하여 두바이가 아라비아 반도의 중요한 항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이런 일들을 계기로 알 막툼家는 두바이 부족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두바이는 진주 양식으로 급속 성장했다. 그러나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 침체와 양식 진주 개발로 침체기를 맞게 된다. 이런 침체기에 등장하여 두바이 산업화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 現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의 아버지 셰이크 라시드였다.
두바이의 본격적인 개발은 셰이크 라시드 때부터 시작됐다. 셰이크 라시드는 국왕 취임 직후인 1958년부터 두바이를 세계적인 물류 거점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한 원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배가 많이 드나들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두바이 크릭을 중심으로 두바이의 겉모습부터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1959년 셰이크 라시드는 퇴적물로 인해 수심이 낮아진 두바이 크릭 준설작업을 시작해 대형 선박이 통행할 수 있게 했다.
두바이의國父, 셰이크 라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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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두바이 번영의 초석을 다진 셰이크 라시드. |
셰이크 라시드는 모든 발전 계획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기 위해 1961년 「두바이 자치제」를 설립했다. 두바이 자치제는 공공 보건, 도시 건설 계획·전기·전화·식수·하수 시스템 건설 등 도시 발전 계획을 마련하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1965년에는 상공회의소를 설립해 정부에 경제자문을 하도록 했다. 상공회의소는 무역이나 행정에 불필요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 상업규제를 최소한으로 함으로써 해외 자본 유치가 쉽도록 제도적인 개선을 해 나갔다. 셰이크 라시드는 공정하고 질서가 잡힌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1963년 두바이 국립은행을 설립해 금융산업 부흥에도 힘을 기울였다.
셰이크 라시드 이전에는 두바이에 콘크리트 주택이 없었으며, 주민들은 야자 잎으로 만든 집에서 대가족 형태로 거주했다. 인구는 1만 명 정도였으며, 도시 면적은 3.2km2에 불과했다. 셰이크 라시드가 등장함으로써 두바이는 현대 도시다운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 말 두바이 크릭이 정비된 후 셰이크 라시드는 항구 건설에 도전했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두바이에 당시 中東에서 가장 큰 항구를 건설하겠다고 하자 부족의 지도자들이 『물동량에 비해 항구가 너무 크지 않느냐』며 걱정했다. 그러나 셰이크 라시드는 두바이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물류의 요충지라는 것을 간파하고 항구 건설을 밀어붙였다. 1972년 크릭 앞 바다에 라시드 항구가 문을 열면서 두바이는 아라비아海의 중심港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셰이크 라시드의 업적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바이 크릭을 가로지르는 알 막툼 다리 건설이었다. 1963년 다리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이 두바이 크릭을 멀리 돌아다니던 불편이 해소되었다.
1966년 두바이에서 석유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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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총리와 면담하는 셰이크 막툼(셰이크 라시드의 장남). 그는 아버지의 원대한 비전을 이어받아 착실히 수행한 후 동생 셰이크 모하메드에게 물려주었다. |
1966년 두바이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셰이크 라시드가 구상하고 있던 두바이 발전 계획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셰이크 라시드는 『언젠가 석유는 고갈된다』면서 『우리는 석유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두바이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바이가 물류·산업·금융·관광의 중심지가 되어야 했다. 셰이크 라시드는 석유를 팔아 번 돈을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72년 라시드港 완공에 이어 셰이크 라시드는 곧바로 두바이 남쪽 지역에 두 번째 항구인 제벨알리港 건설에 나섰다. 사막의 모래를 파내고 정박 시설을 67개나 갖춘 세계 최대 인공항을 건설한 것이다.
셰이크 라시드는 1985년에는 中東 최대의 자유무역지대를 조성했다. 이 자유무역지대에 수많은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어 두바이는 中東·유럽·아프리카·아시아·舊소련 지역에 상품을 배송하기 위한 거점지역이 됐다. 두바이가 中東을 벗어나 세계의 물류 허브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셰이크 라시드는 UAE(아랍에미리트연합) 탄생과 결속에 큰 역할을 했다. 1968년 영국은 아라비아 해안 일대에 부족연맹체 형태로 살고 있던 토후국 지도자들에게 1971년까지 아라비아灣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통보했다. 트루셜 스테이츠는 19세기에 영국과 아라비아灣의 아랍 부족장들과 휴전협정에 의해 구성된 아랍에미리트의 옛 이름이다. 아라비아灣 지역의 분쟁과 해적들의 창궐로 인도로 가는 해상로가 위험해지자 영국은 아라비아에 접한 토후국들과 안전협정을 맺어 해상로를 확보했다. 이 협정에 따라 영국이 아라비아海 일대의 해안을 관리했으며, 각 토후국의 국내 지배권은 토후국 군주가 각자 행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영국이 철수를 결정하자 토후국 중 가장 큰 두바이와 아부다비 지도자들이 1968년 2월 동맹을 위한 조약에 서명했고, 이어 나머지 토후국들도 참여해 1971년 12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탄생했다.
셰이크 라시드 死後 네 아들이 권력 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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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건설 초기 단계의 모습. |
셰이크 라시드는 UAE의 부통령이자 총리에 올라 UAE의 결속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은 그는 「두바이의 國父」로 불린다.
1981년 셰이크 라시드가 뇌졸중으로 병석에 눕자, 그의 네 아들은 아버지가 추진하던 두바이 프로젝트를 하나씩 맡아 차질 없이 진행했다. 1990년 10월 셰이크 라시드가 사망하고, 첫째 아들 셰이크 막툼이 두바이 국왕에 올랐다.
아버지 시대부터 정치적 실권을 행사해 왔던 셰이크 막툼은 왕위에 오르자 탁월한 리더십으로 아버지의 위업을 달성해 나갔다. 그는 두바이 국제공항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공공 도서관, 현대식 공원, 각종 스포츠 시설 등 사회 간접시설을 더욱 확충했다. 그는 서민들의 삶의 질에 관심이 많아 수많은 서민주택을 건설했다.
그는 국왕 재임 시절 동생인 셰이크 모하메드를 王世弟(왕세자)로 책봉하고 주요 프로젝트를 맡겨 왔다. 2006년 1월 셰이크 막툼이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자 王世弟인 셰이크 모하메드가 두바이 국왕에 올랐다. 그의 정식 직함은 「UAE의 부통령이자 총리이며 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에서 「셰이크」란 지도자(Ruller)란 뜻이다.
現 국왕 셰이크 모하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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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들 모하메드(現 두바이 국왕)를 안고 있는 셰이크 라시드. 라시드는「두바이의 國父」로 불린다. |
셰이크 모하메드는 두바이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1966년 영국에 건너가 사관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는 승마와 사격, 매 사냥을 특히 좋아했다. 승마는 수준급이어서 각종 국제 승마대회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1968년 11월 두바이 경찰청장을 맡으면서 최초로 공직활동을 시작했다. 1971년 UAE 연방이 출범하자 22세의 나이로 장군에 승진한 뒤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에 올랐다.
1995년 셰이크 모하메드는 王世弟로 지명되자 수많은 국가 건설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고, 1996년 3월 「21세기 두바이 경제개발 계획」을 발표했다. 핵심요지는 두바이가 석유의존 경제구조에서 100% 탈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981년 항공운항 편수를 무제한 허용하는 「오픈 스카이」 정책을 펼쳐 두바이가 물류·관광 허브로 도약할 수 있게 했고, 1985년 10월 에미레이트항공을 출범시켰다. 또 각종 관세 장벽과 규제를 철폐했고, 금융규제를 없애 두바이를 세계적인 금융 허브로 만들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관광 진흥을 위해 「두바이 쇼핑페스티벌」이란 아이디어로 세계의 부자들을 끌어 모으는 한편, 이를 홍보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상금이 걸린 PGA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 ATP 테니스 오픈 등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를 두바이에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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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를 하는 셰이크 모하메드. 스포츠狂인 그는 각종 승마대회에 선수로 출전했다. |
셰이크 모하메드도 승마를 비롯한 스포츠狂이지만 그의 딸 셰이카 마이타 모하메드 라시드 알 막툼 공주도 못 말리는 스포츠狂이다. 그녀는 작년 12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가라테 종목에 출전해 은메달을 수상했다. 최근 현지 교민들에 의하면 마이타 공주는 태권도를 배우고 싶어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인공섬이나, 두바이랜드 같은 하드웨어적인 프로젝트들 외에 인터넷 시티, 미디어 시티, 지식마을 조성 사업 등 소프트웨어적인 프로젝트도 발 빠르게 추진해 다가오는 정보화와 지식경제 시대에 대응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꿈꾸었던 것 중 아직 10분의 1밖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역사가 쓰여지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만들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역사를 썼다』며 『남의 뒤를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창의적으로 주도할 것인가. 우리는 기꺼이 선각자의 길을 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일을 현실로 만드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은 국민들의 절대적 신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신임은 지난 170여 년간 두바이를 다스려 온 알 막툼 王族들이 두바이에 쏟은 열정과 애정의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