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락이란 무엇인가?
● 단락 쓰기 실제
● 단락 쓰기 연습
▣ 단락이란 무엇인가?● 단락 쓰기 실제
● 단락 쓰기 연습
다음 예를 살펴보면서 단락 구성 원리를 익혀 보도록 하자.
우리는 무책임한 말로 인해 사회에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최근 동북 아시아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본 정치 인사들의 역사 망언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의 무성의하고 무책임한 말 한 마디로 전쟁의 피해를 입은 우리 국민들은 커다란 분노를 느꼈고, 한일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는 위험까지 초래했다. 망언을 한 인사들은 망언 자체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의 발언이 사회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고려했어야 한다. 또한 최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대중 매체의 언어 폭력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에 노출되어 있는 어린이들은 그것에서 언어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리말을 올바르게 구사해야 할 어린이들이 대중 매체로 인하여 저질스럽고 폭력적인 언어를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우려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자들은 프로그램의 흥미성만 추구하지 말고, 사람들의 특히 어린이들의 올바른 언어 생활 확립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사용해야 할 그들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윗글은 하나의 단락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야 할까? 윗글은 형식적으로는 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내용적으로는 두 단락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단락에는 하나의 중심 생각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윗글은 ‘무책임한 말은 사회 혼란을 초래한다.’는 중심 생각과 ‘대중 매체는 어린이들의 언어 폭력과 사회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중심 생각이 들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두 개의 중심 생각을 토대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무책임한 말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중심 문장)
● 일본 정치 인사의 망언은 국내·외적인 논란을 초래했다. (뒷받침 문장 1)
● 대중 매체의 무분별한 언어 사용은 어린이의 언어 폭력을 조장한다. (뒷받침 문장 2)
▣ 단락 쓰기 실제
[1] 다음 제시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제·논지·논거를 설정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실제 단락 쓰기를 해 보시오.
형(荊)나라 소왕(昭王) 때, 석저(石渚)라는 선비가 있었다. 사람됨이 공정하고 사사로운 정(情)이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왕이 치안관으로 일을 보게 했다. 어느 날 길에서 사람이 죽은 사건이 생기자, 석저는 범인의 뒤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인이 자기 아버지였다. 석저는 그대로 수레를 돌려 왕궁으로 나아갔다.
“살인범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제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자식된 도리로 차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범인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것으로 불가(不可)한 일입니다. 법을 범한 이상 벌을 받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입니다.”
석저는 이렇게 말하고 형틀에 엎드려 왕에게 죽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뒤를 쫓았으나 잡지 못한 것뿐이니 어찌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맡은 일에 충실하도록 하라.” 하지만 석저는 사양하며 말하기를,
“아비에게 정을 주지 않으면 효자라고 할 수 없고, 임금을 섬기며 법을 굽힌다면 충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지만, 감히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이 신하의 도리입니다.” 하고 형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여씨춘추(呂氏春秋)』
● 논제 : 서로 다른 가치(법과 효, 혹은 공과 사)가 충돌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적절한가?
● 논지 : 상황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 논거 : ① 석저의 죽음은 극단적인 갈등 해결 방식이다.
② 석저의 선택은 불효이며, 불충이기에 더 큰 죄이다.
[단락 쓰기 예시 1]
효(인륜)와 법 질서를 함께 지킨 석저의 선택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자기를 버리는 결단을 통해 해법이 나온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전해 준다. (석저의 죽음이 지니는 가치 일부 인정) 그러나 석저가 목숨을 버린 행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반론 = 논지) 그 행위는 돌이킴이 불가능한 극단의 길이며, 어찌 보면 더 큰 불충이 되고 불효가 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근거) 이런 점에서 법과 효, 혹은 공과 사와 같이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는 석저와 같은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좀 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응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논지 제시)
[단락 쓰기 예시 2]
법과 효 혹은 공과 사와 같이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는 석저와 같은 극단적인 방식이 아닌, 다른 좀 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응 방식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논지) 효(인륜)와 법 질서를 함께 지킨 석저의 선택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면은 있지만(석저의 행위 일부 인정), 석저가 목숨을 버린 행위는 돌이킴이 불가능한 극단의 길이며, 어찌 보면 더 큰 불충이 되고 불효가 될 수도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논거)
[2] 다음 제시문에 대해 아래와 같이 논제·논지·논거를 설정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실제 단락 쓰기를 해 보시오.
사이버 공간은 빅뱅에 견줄 만한 기하급수적인 힘으로 현재 우리 눈앞에서 폭발하고 있다. 우주론자들은 우주의 물질 공간이 약 150억 년 전에 무에서 폭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데, 사이버 공간도 역시 무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공간, 새로운 영역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 서로 연결된 전 지구적 컴퓨터 네트워크 공간은 이전과 다른 영역으로 팽창하고 있다. 물질 공간처럼, 이 새로운 사이버 공간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매일 수천 개에 달하는 새로운 노드 혹은 ‘사이트’들이 인터넷과 관련 네트워크에 추가되고 있으며, 이러한 새 노드를 통해서 사이버 공간의 전체 영역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모든 사이트들은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웹의 복잡한 미로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1998년 중반 현재, 정기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의 수는 1억 명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다음 10년 동안에는 10억 명에 근접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3억 페이지가 등록되어 있는 월드 와이드 웹은 최근 들어 하루에 백만 페이지씩 성장하고 있다. 무에서 시작한 지 약 30년 만에 사이버 공간은 인간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영토’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우 중대한 의미에서 새로운 디지털 공간은 물리학이 탐구해 온 공간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사이버 세계는 물질의 소립자나 힘이 아니라 비트와 바이트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 패킷은 사이버 공간의 존재론적 토대이며, 전 지구적 현상이 ‘출현하는’ 근원이 된다. 사이버 공간은 물질의 소립자나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한 마디로 혁명적인 공간이다. 사이버 공간은 존재론적으로 물리적 현상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리학 법칙의 적용을 받지 않으며 그러한 법칙의 한계에 의해 제한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의 중요성을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실리콘 칩은 우리를 형이상학적 통로로 이끈다. 한 웹 사이트에서 다른 웹 사이트로 여행하는 나의 ‘운동’은 어떠한 역학 방정식으로도 설명될 수 없고, 내가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은 어떠한 물리적 미터법으로도 측정할 수 없다. 여기에서 ‘공간’의 개념 자체는 지금까지 거의 이해된 바 없는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사이버 공간은 물리학적 과학 기술의 부산물이다. 실리콘 칩, 광섬유, 액정 화면, 원격 통신 위성, 심지어는 인터넷에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까지, 이 모두가 과학의 부산물이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이 물리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실재관에 얽매이지 않는다.
소위 ‘과학의 시대’에 우리들은 철저히 물리적인 공간의 개념에 길들여져서, 사이버 공간을 진정한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사이버 공간에 ‘들어갔을 때’, 나의 몸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지만, ‘나’는 자체적인 논리와 지형을 가지고 있는 또다른 세계로 송신된다. 분명히 그것은 내가 물질 세계에서 경험하는 그 어떤 것과도 다른 종류의 지형이지만, 그것이 물질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물질성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이다. 나는 거기에 있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을 순전히 물리주의적인 세계상에서 거부당한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을 부분적으로나마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버 공간은 정신을 위한, 특히 상상력을 위한, 새로운 영역이 되었다.
● 논제 : 사이버 공간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과 상상 세계를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논지 : 사이버 세계 역시 영혼의 자유나 상상의 세계를 확장하기보다 이를 제한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 논거 1 : 사이버 세계에 몰입했다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의 소외, 무력감 및 자아 상실 가능성이 있다.
● 논거 2 : 사이버 세계 역시 폭력 및 익명성의 폐해가 존재한다.
● 논거 3 : 물질주의의 폐해가 사이버 공간에 침투하고 있다.
[단락 쓰기 예시 1]
사이버 공간은 실재하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일 수는 없다.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이며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동물이다. 상상과 정보와 지식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 속에서 현대인들은 점차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고, 소외되어 간다. (논거 1) 집안에 편안하게 앉아 버튼만 누르면 되는 편리하고도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한 다양한 정보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인간은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직접적인 대화나 정보 전달자로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익명성에 의해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한 대화를 하며 불신감을 쌓아 가게 되는 것이다. 공간은 존재하고 다양한 의견과 정보는 실재하지만 정작 그 속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논거 2) 물질 세계의 거대화로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것을 사이버 공간 속에서 잃어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터넷상의 넘치는 광고와 각종 형태의 이익 추구 (논거 3)는 결코 사이버 공간이 물질 세계의 부정적 측면을 보완해 줄 혁명적이고 긍정적인 공간만은 아님을 보여 준다. (논지)
[단락 쓰기 예시 2]
사이버 공간이 인간의 잃어버린 영혼과 상상력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다. 사이버 공간은 상실된 인간의 꿈을 회복시키고 상상을 확장하기보다는 이를 제한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논지) 사이버 공간에 몰입했을 때 잊혀졌던 현실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현실 세계와 사이버 공간의 괴리감에서 오는 무력감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논거 1) 또한 사이버 세계 역시 현실 세계와는 동일한 폭력이 존재한다. 폭력적인 게임, 폭력적인 언어 등 익명성을 토대로 한 무분별한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바로 사이버 세계이다. (논거 2) 뿐만 아니라 사이버 세계는 현실 세계의 물질주의적 폐해에 그대로 노출된다. 인터넷상의 각종 광고와 스팸 메일 등이 그 예이다. (논거 3) 이처럼 사이버 공간은 인간이 현재보다 더 많이 영혼에 상처를 주며 상상력을 변질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논지)
▣ 단락 쓰기 연습
다음 논지와 논거를 바탕으로 단락 쓰기를 해 보시오.
● 논지 : 바람직한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인 유기체적 관계이다.
● 논거 1 : 사회를 우선하는 관점은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 논거 2 : 개인을 우선하는 관점은 질서 파괴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
● 논거 3 : 이 세상의 모든 존재적 실체는 개별적으로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다른 개별적 존재와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전체를 이루고 있다.
[예시답안]
개인과 사회는 상호 보완적인 유기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양자 중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만을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 관점은 개인의 존엄성을 파괴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예를 우리는 파시즘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개인만을 우선시하는 관점은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를 자유라는 명목하에 무차별적으로 인정하게 되어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실존적 실체는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존재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듯 개인과 사회는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유기체적 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