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한
종로학원 본원 강사·종로논술연구소 연구위원
▣ 작가소개종로학원 본원 강사·종로논술연구소 연구위원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정신 분석적 사회심리학자이며 저술가 중 한 사람.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세계의 참상과 인간의 광기에 충격을 받았고, 인간의 파괴 본능과 히스테리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를 얻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뮌헨 대학 등에서 탐구를 한 끝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게서 자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발견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결합하여 개인과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설명하는 사회심리학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러던 중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하여 광기의 시대가 시작되자, 1933년 미국으로 망명, 귀화하였다.
에리히 프롬의 관심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근대성과 자본주의적 삶의 소외 현상에 대한 비판, 자유 의지와 인본주의에 기반한 사회의 건설을 향한 연구로 집중된다. 또한 그는 한평생 근대인에게 있어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으며, 소외를 넘어선 인본주의적 공동체를 위해 보이지 않는 우리 마음 속의 적과 싸운 사람이었다.
▣ 책소개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는 『사랑의 기술』과 더불어 프롬의 후기 저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저작이다. 산업 사회가 절정에 있던 1976년에 발표된 이 책에서, 프롬은 현대 산업 사회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소유를 추구함으로써 무력감과 고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불행히도 소유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으며 이러한 추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산업화가 가져온 불행과 소외에서 인류가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유 모드’에서 ‘존재 모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기 위해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실존 양식에 대해 말하였다.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 사회의 병리를 치유하려는 프롬의 노력이 집약된 저작이다. 그가 주장한 내용은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적실성을 잃지 않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분출하는 벌거벗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프롬의 경고를 심각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원문읽기
소유 양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유 재산과 이윤, 권력을 그 존재 기반으로 삼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판단이 극도로 편향적이다. 획득하는 것, 소유하는 것, 이윤을 남기는 것은 산업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의 신성하고도 양도될 수 없는 권리이다. 재산의 근원이 무엇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소유 또한 재산 소유자에게 아무런 의무 사항도 부과하지 않는다. “내가 내 재산을 어디서 어떻게 벌었는가, 또 내가 그 재산을 갖고 무슨 일을 하는가 하는 것은 내 자신만의 문제일 뿐, 다른 누구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내가 법을 어기지 않는 한 내 권리는 제한받지 않으며 절대적이다.”라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종류의 재산을 ‘사유’ 재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영어에서 ‘사유’를 뜻하는 ‘private’란 말은 ‘빼앗다’란 뜻의 라틴어 ‘privare’에서 유래된 것이다.) 왜냐하면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일은 개인이나 다수의 사람들이 그 재산의 유일한 주인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재산의 사용이나 향락을 빼앗는 완전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사유 재산 제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범주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의 전체 역사를 생각해 볼 경우, 특히 경제가 삶의 주된 관심사가 아닌 유럽 이외의 문화권을 생각해 볼 경우에는 사실 사유 재산은 보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외적인 것이다. 사유 재산 이외에 순전히 자기 노동의 산물인 자기 창조 재산, 동료 인간을 도울 의무에 의해 제한되는 제한 재산, 노동 수단, 향락 대상을 구성하는 기능적 혹은 개인적 재산,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같이 공동 유대 정신에 따라 한 집단이 공유하는 공유 재산 등이 존재한다.
사회를 기능하게 하는 규준 또한 사회 구성원의 성격(사회적 성격)을 형성한다. 산업 사회에서 이런 규준은 재산을 획득하려는 욕망, 그것을 유지하려는 욕망, 그것을 증가시키려는, 즉 이윤을 창출하려는 욕망이다. 그리고 재산을 소유한 사람이 찬양받고 또 우월한 존재로 부러움을 산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 자본재의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즉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산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혹은 어떻게 그 욕망을 극복할 것인가? 또는 얘기할 만한 아무런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중략)
재산에 관한 논의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19세기에 성행했던 재산 집착의 중요한 형태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로 쇠퇴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는 소유한 물건은 무엇이나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돌보아지며 사용될 수 있을 때까지 사용되었다. 구매는 보존하기 위한 구매였고, 19세기의 모토는 옛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보존이 아니라 소비가 강조되며, 또 구매는 쓰고 내버리는 구매가 되었다. 구매한 물건이 자동차든 옷이든 기계든 얼마 동안 쓰고 나면, 사람들은 싫증이 나서 낡은 것을 처분하고 최신 모델을 사고 싶어 안달한다. ‘취득 → 잠정적 소유와 사용 → 내버림 (가능하다면 더 좋은 모델과의 유리한 교환) → 새로운 취득’, 이것이 소비자 구매의 악순환을 구성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모토는 새로운 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오늘날 소비자 구매 현상의 가장 충격적인 예는 자가용일 것이다. 우리 시대는 자동차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 경제가 자동차 생산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우리의 전 생활은 소비 시장의 호경기와 불경기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차는 기본적인 필수품처럼 보이지만 아직 차를 갖지 못한 사람들, 특히 사회주의 국가의 사람들에게 차는 기쁨의 상징이다. 그러나 확실히 자동차에 대한 애정은 깊고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잠깐 동안만 지속되는 연애 사건에 불과하다. 자동차 소유자들은 차를 자주 바꾼다. 2년만 지나면, 심지어 어떤 경우엔 1년만 지나면, 자동차 주인은 낡은 차에 싫증을 느껴 새 차를 잘 구입하기 위해 쇼핑을 시작한다.
쇼핑에서 구매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거래 과정은 그 자체가 하나의 게임처럼 보인다. 이 게임에서는 때로 속임수마저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좋은 거래 행위 자체가 궁극 목적(최신형 승용차) 못지않게 향락의 대상이 된다.
자동차 소유자들이 차와 어떤 재산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 차에 아주 짧은 관심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커다란 모순처럼 보인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인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 번째 요인은 차와 차주의 관계에는 비인격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차는 그 소유자가 사랑하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단지 지위의 상징, 권력의 연장 즉, 자아의 구성물일 뿐이다. 소유자는 자동차를 획득함으로써 실제로 한 조각의 새로운 자아를 획득한다. 두 번째 요인은 새 차를 6년 만에 한 번씩 사는 대신 2년 만에 한 번씩 삼으로써, 구매자는 획득의 스릴을 증가시킨다는 점이다. 새 차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일종의 능욕 행위이다. 그것은 지배감을 높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행위가 더 자주 일어날수록 스릴은 점점 더 커진다. 세 번째 요인은 차를 자주 산다는 것은 거래할 기회―교환에 의해 이윤을 남기는 기회를 더 자주 갖는 것 ― 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만족감이다. 네 번째 요인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새로운 자극을 경험해야 할 필요성이다. 낡은 자극은 아주 짧은 시간만 지나면 밋밋해지고 다 소진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예전에 자극을 논하면서 나는 능동적 자극과 수동적 자극을 구분하고서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시했다. “자극이 수동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것은 그 강도 혹은 종류에 있어서 더 자주 바뀌어야 한다. 자극이 능동적으로 되면 될수록, 그것은 자극성을 더 오래 유지하고 강도나 내용의 변화도 덜 요구한다.” 다섯째 요인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지난 1세기 반 동안 일어난 사회적 성격의 변화, 즉 축적적 성격에서 시장적 성격으로의 변화에 기인한다. 이 변화가 소유 지향성을 제거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상당히 수정하고 있다.
소유적 감정은 다른 관계, 예를 들면 의사, 치과 의사, 법률가, 사장, 노동자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은 내 의사, 내 치과 의사, 내 노동자 등의 말을 통해서 소유 감정을 표현한다. 다른 인간에 대한 소유적 태도는 차치하고라도 사람들은 수많은 물건, 심지어는 감정까지도 재산으로 경험한다. 건강이나 병을 예로 들어 보자. 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내 병, 내 수술, 내 치료, 내 식이 요법, 내 약이니 하면서 소유적 감정으로 이를 표현한다. 사람들은 분명 건강과 병을 재산으로 생각한다. (중략)
생존의 소유 양식의 본질은 사유 재산의 본질로부터 나온다. 이런 생존 양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재산을 취득한다는 것, 그리고 취득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것뿐이다. 소유 양식은 다른 모든 것을 제외시켜 버린다. 재산을 유지하거나 그것을 생산적으로 이용하려는 더 이상의 노력도 소유 양식에서는 요구되지 않는다. 붓다는 이러한 행동 양식을 갈망이라고 묘사했고 유대 교와 기독교는 탐욕이라 표현했다. 이러한 소유 양식은 모든 인간, 모든 사물을 죽어 버린 것, 타인의 권력에 복종된 것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은 주어 ‘나’(혹은 그, 우리, 너, 그들)와 목적어인 대상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 문장은 주어도 영원하고 목적어도 영원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는 영원한 것일까? 혹은 목적어 역시 영원한 것일까? 나는 죽게 될 것이고, 또 무언가는 소유하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목적어 또한 이와 같이 영원하지는 않다.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상실될 수도 있고, 그 가치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영원히 소유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파괴되지 않고 영속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실제로 - 나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대상을 가지고 소유, 지배한다는 것은 삶의 과정 중 순간적인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주어) 대상(목적어)을 소유한다.”는 진술은 대상의 소유를 통해서 ‘나’의 정의를 표현하고 있다. 주어인 ‘나 자신’이 아니라 ‘나는 내가 소유한 것’이 된다. 내 재산이나 나 자신과 나의 주체를 형성한다. “나는 나다.”는 진술 밑에 깔려 있는 생각은 “내가 X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이다.”는 것이다. 여기서 X는 내가 그것을 지배하고, 영구적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을 통해 나 자신을 관련시키는 모든 자연 대상이나 인간을 말한다.
소유 양식에 있어서는 나와 내가 가진 것 사이에 어떤 살아 있는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과 나는 물건이 되어 버린다. 나는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한다. 그러나 정반대의 관계 또한 존재한다. 즉 ‘그것은 나를 소유한다.’ 왜냐하면 나의 주체 의식, 즉 나의 정신이 내가 그것을 (그 밖에 될수록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근거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 양식은 주체와 대상 간의 살아 있는 생산적 과정에 의해 수립되는 것은 아니다. 소유 양식은 주체와 대상 둘 다를 물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때의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죽어 있는 관계이다.
존재 양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존재 양식보다는 소유 양식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다. 왜냐하면 소유가 우리 문화에서 지금까지 더 자주 경험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소유 양식을 정의하는 것보다 존재 양식을 정의하는 것을 더 어렵게 하는데, 인간 생존의 두 양식 간의 차이의 본질이 바로 그것이다.
소유는 물건을 대상으로 하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고 표현 가능하다. 존재는 경험을 대상으로 하는데, 인간 경험은 원칙적으로 표현 불가능하다.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페르소나(우리들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 우리가 드러내는 에고)이다. 왜냐하면 페르소나 그 자체가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 존재는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실제로 나에 관해, 내 성격에 대해, 삶에 대한 나의 총체적 지향에 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러한 통찰력 있는 지식은 나 자신의 심적 구조나 타인의 심적 구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총체적인 나, 나의 전 개성, 내 지문처럼 독특한 나는 감정 이입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두 사람도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살아 있는 관계의 과정을 통해서만 타인과 나는 고립의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무도회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동일시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
심지어 단순한 하나의 행동조차도 완전히 표현될 수는 없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표현하기 위해 여러 페이지를 쓸 수는 있지만, 그림 속에 나타난 미소는 여전히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모나리자의 미소가 신비스럽기 때문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미소는, 그것이 시장에 팔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인조 미소가 아닌 한 신비하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흥미, 열정, 생명에의 애착, 혹은 증오, 자기 도취 등의 표정이나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다양한 얼굴 표정, 걸음걸이, 자세, 억양 등을 충분히 표현할 수는 없다.
존재 양식은 그 필수 요건으로 독립심, 자유, 비판적 이성을 갖는다. 존재 양식의 기본 특징은 외적 활동이나 바쁘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활동, 인간 힘의 생산적 이용이라는 의미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인간이 부여받은 능력, 재능, 풍부한 인간적 재질을 표출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하고, 흘러넘치며, 사랑하고, 고립된 에고의 감옥을 뛰어넘으며, 흥미를 갖고 경청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청은 어떤 것이나 말로 충분히 표현될 수는 없다. 언어는 흘러넘치는 경험으로 가득 채워진 그릇이다. 언어는 경험을 가리키지만, 경험 그 자체는 아니다. 내가 독특하게 경험한 바를 사고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경험은 사라져 버린다. 그것은 말라 버려 죽고 단순한 사상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존재는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없고, 경험을 공유함으로써만 전달될 수 있다. 소유 구조에서는 죽은 언어가 지배하지만 존재 구조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살아 있는 경험이 지배한다.
존재 양식은 아마 막스 훈지거가 나에게 제시한 상징에 의해 가장 잘 묘사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푸른 유리는 빛이 그것을 통과할 때, 다른 색깔은 전부 흡수해 버려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푸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유리를 푸르다고 말하는 것은 그 유리가 푸른 파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리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주어 버리는 것에 의해 명명된다.
우리가 소유 양식, 즉 비존재 양식을 감소시키는 정도만큼, 즉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그 상태를 계속함으로써, 에고나 소유물에 매달림으로써 안정감과 주체성을 찾는 것을 멈추는 정도에 따라 존재 양식은 나타난다. 존재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자기를 비우고 가난하게 함으로써 자기 중심성과 이기주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지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시도는 심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안전이 사라져 버리고 헤엄칠 줄도 모르는 상태에서 대양에 던져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재산이라는 목발을 포기했을 때 자신의 힘을 이용해 혼자 걸을 수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이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혼자서는 걸을 수 없으리라는 환상, 만일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리리라는 환상이다. 이들은 처음 한 번 쓰러져 버리면 다시 걸을 수 없으리라 두려워하는 어린애와 같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도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절름발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소유라는 목발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쓰러져 버릴 거라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 쟁점 이것
‘나는 나를 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싶다. ……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나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유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결코 더 행복하지 않다.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 그리고 피로는 가중된다. 그들은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고 과도한 경쟁에 휩싸이며 과다 소비에 빠진다. 이러한 과다 소비는 현대 사회의 다른 문제인 환경오염을 악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소유를 과시하기 위해 명품에 집착하는, 소위 명품족도 이러한 현상의 하나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이러한 현대 산업 사회 문제의 근본에는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산업 사회는 사람들을 ‘그가 갖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한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나 집은 물론이고 그이 직업, 위치, 경력이 그를 규정짓는다. 이런 소유 모드의 세계에서는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평가받는 기준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유 모드에 집착하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프롬은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오히려 ‘소유(Haben)’가 아닌 자신의 ‘존재(Sein)’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생각 할 거리
[01]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핵심 주장을 요약하여 서술하시오.
[예시답안]
에리히 프롬은 현재의 인간은 소유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존재 기반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사유 재산이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프롬은 소유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에 그는 소유 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인간의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 양식은 소유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와 비판적 이성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02] 인간이 사유 재산에 집착했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삶의 태도상의 문제점에 대해 서술하시오.
[예시답안]
모든 대상을 내 것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게 된다면,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인간은 새로운 자동차를 사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데 새로운 자동차를 사도 그것에 대해 금방 싫증을 내게 되고 또다시 새로운 모델의 자동차를 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정작 자동차는 인간의 운송 수단이라는 본질은 잊고 허상을 좇아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말이다. 또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 걱정으로 만성 우울증에 걸려 자신의 삶의 자유를 스스로 제약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03] 소유 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한 삶의 태도임을 밝혀 보시오.
[예시답안]
사람들은 존재 양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의 사회가 소유 양식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 지향성을 포기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유를 포기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독립심, 자유와 비판적 이성으로 표현되는 존재 양식으로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훨씬 윤택해지고, 넓어지며, 인간다워질 것이다. 존재에 집착하는 한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이어지고 결국 그 자신이 넘어지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점에서, 존재 양식에 초점을 두는 삶이 바람직한 태도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